평생 처음 같은 눈사태가 또 새벽을 일찍 깨웁니다.
어제 저녁 서재준 아우 장인의 부음을 받고 천지장례식장 시내 한복판의 하얀 길과
화순 도암의 흰 길 사이에 걸친 길고도 먼 눈터널을 생각하였습니다.
한길이 한 되면 도담길은 말가웃이라
모두들 봄이 올 조짐이라 외쳐도 도담 귀엔 턱없는 이글루 한겨울이라
정말이지 세상 바깥을 하얗게 지워 알 수 없게 만듭니다.
전에 압촌동 시골에서 살 때도 종종 그랬어요.
눈이 내려 출근을 망설이는데, 서해 영광쪽 같으면 몰라도 남해 보성쪽만 같아도
차를 끌고 가다가 중도에 웃습니다. 큰 맘 먹고 나선 길이지만
막상 나와보니 길마다 다 녹고 녹이고 툭 터져 말짱하니 겁쟁이 엄살쟁이가 되곤 했죠.
매에는 장사가 없다 하였지만 참말 눈길에는 천하에 장사가 없습니다.
언젠가 강원도 설악 근처에서 동해안 등을 타고 무려 열일곱 시간을 벌벌 기었던 때가 딱 생각났습니다.
'갈대가족'이라는 모임은 1989년 전교조 태동과 함께 해직을 함께 감수했던
순천승주지회 평생동지들의 가족모입입지요.
해마다 내국을 중심으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가 복직 되고 한 오년 흐른 2001년이었던가, 누구한테 물어봐야겠습니다.
그 어느 겨울의 여행은 너무도 혹독하고 머나먼 길이었죠...
새벽같이 숙소를 빠져나오는 '군사작전'과 작전차량처럼 줄을 지어 내려오는데 장면은
전선을 향하는 그것을 방불케하여
긴장과 싸움과 희생과 나눔을 함께 실천한 역전의 용사들다운 후일담이 되었답니다.
피끓는 전우애가 쏟아지는 진눈깨비처럼 신발과 체인과 차창과 간식과 야전점퍼와 삽과 마스크 속
서로의 시선과 입김과 손과 말빛 속에 부딪고 녹고 다시 피어나기를 거듭했었답니다...
돌아와 고것을 제가 '시'처럼 적어서 무사 귀환한 갈대가족들에게 돌렸지요.
항~! 끄집어 내어 함 읽어볼게요.
쫌 길어서 지루하실라나?? 장인어른의 부음을 빌려
봉사를 잘하고 모든 총무를 잘하며 착하고 건실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인간교사
서재준 아우의 '활약'도 문득 추억하게 되는 눈부신 설원의 아침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이따금 산비둘기나 한 두 번 다녀가고
내리는 건 눈 뿐이라
하늘과 세상과 그 사이가 아득히 아무런
구별 없어지고 아무런 슬픔과 미움도
소리 없이 탈색되고 소리 없이 빠져나가
탈속하여
한 댓새라도 희부옇게
산 속에 짐승처럼 걍 숨어버릴까
내 몸 바수어 세상의 끝 벼랑날에 서서
하얗게 흩어나 버릴까
나도 너도 언젠가 저리 부신 눈보라 될 수 있을까
저토록 부대끼며 한 세상 흩날릴 수 있을까
서리마다 소복이 뭇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에 쌓일 수 있을까
이따금 너는 저 창문을 열고 홀연 사라지리라
나는 오래 삭은 심장 하나 꺼내어
너의 창에 걸어두리니 먼 데 흔들리는 불빛처럼
너 눈 내리는 날에 별이 되고 모닥불이 되고
새벽 구들장이 되고 그렇게
우리의 겨울이 우리들의 겨울 백사장의 추억들이
다시 파도에 실려오고 실려가고
오오 그러자고, 우리의 지난날이 몸부림치며
굽이치고 부서지고 오오 그러자고
경포대 모래사장 바람 차던가
세상을 깨치고 더덩실 솟구치는 일출아
주문진 바다의 파도야
거진의 갯내음 절은 갈매기들아
여기 세우(細雨)에 눈 뜬 지주망 한 올로도 우린
흰 장구채꽃 한아름 피울 수 있나니
귀로 술잔 삼아 아득히 비우고 파도소리 쌈싸서
한 볼따구 우적우적 삼키며 우우둥둥 가슴 채우던
속초 앞바다 초름한 우리들 사랑이여
찬 소주로 기화할 흔들리는 꿈들의 포말이여
그대 물보라여
저 까만 동해바다 성난 파도 앞에 서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눈물 뿌릴 수 있다면 나도 정말 흐르는 강물 한 줄기 될 수
있을까 유장한 생의 파도로 가슴께까지 차 오를 수 있을까
세월의 상처 안은 우리들 가슴이 저 밤 깊은
칼바람에 맞서 당당히
언제고 동백처럼 붉게 꽃필 수 있을까
정말 너의 희고 순정한 심지 끝에 파란 촛불 하나 사를 수 있을까
그날 이천 일년 전 햇살이 찬바람 뚫고 돌아와
이천 일년 후 오늘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에게 자분자분 속삭이는
그 소리 들었는가
사랑이라고 사랑하자고 지하 수백 길 솟아
따끔히 솟구치는 탄산수가 우리들의
연약한 살갗을 쿡쿡 찌르며 나직이 이르던
온천수 가슴께에 그득히 잠겨 오르던 오색 그리움 보았는가
발가벗은 애틋한 중년의 너의 모습도 보이던가
뽀얀 수증기와 희부연 눈보라의 빛깔이 그 차가움과
따스함이 그 오르는 것과 그 내리는 것들이 모두
하나라고 말하지 않던가
사랑
그것은 커피 맛처럼 달콤하고 휴게소처럼 반갑고
온천수처럼 포근하다고 그리 말하지 않던가
오오 약한 우리들 가엾은 우리들 사랑
빨갛게 피어오른 뺨과 창백한 눈빛 사이로 흐르는
가만 생의 후미에 희디희게 설 너희 자작나무들
소망처럼 눈이 쌓이고 이제 눈가에 주름 조이며 우리는
난바다 저 곰솔의 푸르름을 바라보는가
그래도 든직히 그래도 너그럽게 그 믿음스러움에
그 한스러움 말고 그리움에 분노 말고 열정에 기대어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촉촉이 한계령에서 묻는다. 진부령 화장실에서 묻는다
낙산사 못 들어간 매표소 앞에서 묻는다
발 못 뻗어 옹그린 봉고차 굽이굽이 미시령 비탈진 산길에서 묻는다
세간을 떠나 부처를 구하지 말라는 한용운의 토끼의 뿔에게 묻는다
백담사 이십리 얼음길 부르튼 발바닥에게 묻는다
동해 등줄기 바다 따라 양양 강릉 정동진 망상바다 삼척 울진 영덕
포항을 지나 김해 진주 섬진강 휴게소 열일곱 시간 지친 엔진과
바퀴와 핸들에게 묻는다
동해 쪽으로 못 빠져나가 애태우던 바퀴의 체인에게 묻는다
체인 감는 재준이의 체인 같은 가슴과 그 가슴팍 어드메에서 내뿜는
알싸한 인동초 꽃향기에게 묻는다
고향서 살고 싶은 그의 아내 망향의 가는 허리에게 묻는다.
후루루 마셔버린 꿩만두국 국물에게 묻는다.
하린이 엄마 범띠 무늬 털옷 속 따스한 품속에 묻는다
그의 남편 양주, 맑디맑은 시와 그 시적 삶의 가을하늘빛
푸르름에 묻는다
강 같은 평화가 까르르 넘쳐나 보고봐도 보고싶은 아내와
그의 남편 남균이 형 곰취나물 한 보따리 싸서 볼때기 찜질하는
복 받은 황금 이빨에게 묻는다
묻는다
산머루주 한 순배 적셔보내고 싶어하는 살가운 광진이 형
서울 땅 순천 땅 넘나드는 자주보랏빛 구름 같은 사랑에 묻는다
머루넝쿨 같은 그의 아내 갸륵한 내조와 먹머루빛 예쁜 눈
승효 밥 멕이는 힘겨운 숟가락에 묻는다
소주 한 잔에 노을진 연택이 형, 수많은 말 틈바구니 사이로
슬몃 아내 챙기는 은근한 눈길에 묻는다
형수님 다독이는 말씨와 깃털만큼도 무겁지 않은 꾸밈없이
아름다운 미소에 묻는다
월출산자락 휘감은 운해 위로 이마 번뜩이며 올 해
참교육의 빛살 뿌릴 육덕 좋은 종운이
그에게 보내는 사랑의 꽃다발과
그의 아내 즐기던 우아한 스페인풍 원두커피 향에 묻는다
참세상을 위해 참매미처럼 우리들의 마을과 나무와 풀밭을 쟁쟁거리며
귓전에 바가지 긁는 소리를
귀뚜라미의 노래처럼 즐겨 듣는 근홍이와 그의 아내
그러나 물결 같은 메조소프라노 노랫소리에 묻는다.
그녀의 해장 기도와 성경책과 경건한 아침에게 묻는다
보석 같은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꿈꾸며 밤마다 숭어처럼 가슴 뛰는
경한이 삶의 그 시나리오 원고 덜 마른 잉크에 묻는다
손님 접대용 레쪼 승용차를 세차 안 했다고 꾸중듣고 따라나왔다 해도
옆에서 빙긋이 웃음이 나오는 추억처럼 아름다운 그의 아내
은옥씨의 은은한 참숭어빛 음성에 묻는다
하드에지와 드로잉적 숨결이 한 데 어우러진 형남이
그림 속 흐르는 달콤한 비틀즈 음악에 묻는다
승민이 겨울매화 눈꽃의 정갈함과 고독
구수한 자장면에 자마노빛 진한 커피 입가심
그의 아내 매화밭 싱그러운 언덕의 꿈과 그 아래 잔잔한 호숫가 평화에게 묻는다
강진 개펄 내달리는 도요새처럼 선한 천성 한 어깨씩 부리고 다니던
참교육전도사 필구의 닳고 목쉰 속내에 묻는다
아내 위해 장꾼들 틈으로 귀를 들이대는 자상한 남편 재권이와
보름달빛 화사한 미숙이의 함박웃음 너머로 묻는다
어두워지면 촛불을 밝히던 뜨거운 처녀 노동전사
날이 새어 아기 끌어안는 엄마된 의순이의 젖꼭지에 묻는다
참으로 멀리 에돌아 만난 사랑
떡붕어 같은 서방님 고향에서의 사랑이라니
새색시 부끄럼도 없는 영희의 능글맞은 신혼 자랑에 묻는다
묻는다 헌경이에게
쥔 주먹 높이 들어 세상에 알린 그대의 메시지
오직 사랑이라고 굳게 손 맞잡았던 너와 나 앓는 오장육보에게 묻는다
아아 묻는다 묻는다 묻는다
너는 나에게 묻는다 산도 없이 강도 없이 나는
나에게 묻는다
한 마리의 산새에게 묻는다 눈 내리는
산사에서 한 열흘쯤 갇혀 그 많은 생각들을 주어 모으거나
모았다 흩어버리거나 하며 아래 토막 빼어 위로 쌓아 올리는
쟁가장난감처럼 위태롭게
허망함도 절망도 보이는 그 마음의 그 헤벌어지는 정서의 끝
시간의 끝 우주의 끝을 돌아와 나에게 다그쳐 묻는다
사랑하자고 사랑만 하자고
너는 먼 산의 산벚처럼 나는 바짓부리의 진달래처럼
피고 지는 지고 다시 피는 희망이고자
가난한 이들에게 흘리는 연민의 눈물이고자
남녘하늘 우리 고향에 봄비가 내려
흐린 산이 제법 또렷해지고 우리 먼 길이 부쩍 가까워졌노라고 우리 훗날
고백하리라 우리 함께 웃으며 노래할 날 오리라
세월이 흐르는 것보다 늙어가는 것보다 더 쓸쓸한 것은
우리들 마음의 행로와 가닥과 놀림과 빛깔 같은 거.
한 15년 쯤 전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는 없겠지. 법외노조라는 굴레까지 안아
우리들 마음 또한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아내의 아버지이자 그대 청춘의 새 아버지셨던
장인의 부음으로 이 눈보라 속에서 얼마나 아프신가! 힘내시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눈이 내리면 정말 아름답긴 하지만
눈길 고생할 것 생각하면
운전 엄두가 안나지요
고생 정말 많으셨나봐요
그만큼 깊이 새겨진 추억이구요^^
오늘은 따순 아랫목에서 쉬시며 추억하시는 거지요?
고인의 명복을 저도 함께 빕니다
어릴 적 스케이트 탈 때는 겁 없고 신났지만 그냥 걸을 때는 유난히 자주 넘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나중에 차를 끌어도 더 미끄럼을 타는 것 같은데 이게 스케이트놀이는 아니란 말이죠.^^ 내가 겁이 없는 편인데 빙판에서 만은 네 바퀴가 설설설 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