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는 없고 고려사절요에는 기록된 내용이라 인용합니다.
고려 충숙왕 을해4년 (1335)
전의부령(典儀副令) 이곡(李穀)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어사대(御史臺)에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처녀(童女)를 구하는 것을 중지하여 줄 것을 청하고는, 그를 위해 대신 글월을 올리기를, “옛날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천하를 다스릴 적에 인심을 얻기에 노력하셨으며, 특히 풍속이 다른 외국에 대해서는 지방의 풍습에 따라서 다스리도록 하였읍니다.
그런 까닭에 천하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여 북치고 춤추며, 여러 차례의 통역을 거쳐 들어와 조회하여 오히려 혹은 남보다 늦을까 걱정하였으니, 요(堯)∙순(舜)의 정치도 이에 더할 수 없었읍니다.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따로 한 국가를 형성하였으므로 만일 중국에 성인이 없을 때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교통하지도 아니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당태종(唐太宗)의 위엄과 덕망으로도 두 번이나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갔읍니다.
국가 (원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신복(臣服)하여, 왕실에 현저한 공훈을 세웠고, 세조 황제께서는 공주를 내겨 시집을 보내셨으며, 인하여 조서(詔書)를 보내어 장려하여 이르기를, ‘ 의복이나 예법은 선대의 풍습대로 지키라’ 하였읍니다. 그런고로 그 풍속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사오니, 지금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으며, 백성과 사직(社稷)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오직 우리 나라뿐입니다.
고려의 입장으로서는 마땅히 현명하신 조서(詔書)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선조 때부터 행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 정치와 교화를 닦고 밝히며, 조회(朝會)와 문안을 제 때에 행하여, 국가와 함께 아름다운을 누려야 했을 터인데, 마침내 궁중의 나인과 환관의 무리들을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게 하여 그 무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은혜와 사랑 받음을 믿고 도리어 본국(本國)을 잡아 흔들더니, 황제의 지시라고 허위로 칭탁하고 다투어 사자를 달려 보내더 해마다 처녀(童女)를 데려가기를 대궐 안에 연락 부절로 들어오도록 하는데 이르렀읍니다. 대개 남의 딸을 데려다가 바쳐 황제께 잘 보여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는 것은 비록 고려가 스스로 취한 일이라 하지만, 이미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 하면 어찌 나라에 결점이 되지 않겠읍니까. 예로부터 제왕이 호령을 한 번 받하거나 명령을 한 번 시행하면, 온 천하가 모두 머리를 들고 그 덕망과 은택을 대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서나 지시를 가리켜 덕음(德音)이라 합니다.
이제 자주 특별한 내지를 내려 남의 처녀를 빼앗는다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사랑하며 기르는 것은 그 자식에게 봉양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귀한 사람이거나, 비천한 사람이거나, 중국이거나 이적(夷狄)이거나 차이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천성이 다 같기 때문입니가. 그런데 저희들<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사내 자식은 따로 보내더라도 딸은 집에 두고 내보내지 아니하니, 진(秦)나라 때의 데릴사위 제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무릇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딸을 낳으면 은혜와 애정으로 수고를 다하면서 밤낮으로 그 딸이 자라서 능히 부모를 봉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조에 그 딸자식을 품 안에서 빼앗겨 4천리 밖에 보내게 되고, 한 번 문 밖을 벗어나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그 심정이 어떻겠읍니까. 지금 고려의 부녀가운데 후비(后妃)의 대열에 끼어있는 이도 있고, 왕후(王侯)의 귀인의 짝이 된이도 있어, 공경대신(公卿大臣) 중에는 고려의 외생(外甥) 출신이 많이 있사오나, 이것은 그 본국의 왕족이나 문벌 있는 부호의 집에서 특히 조지(詔旨)를 받았거나 혹은 자원하여 온 경우이며, 또한 매개의 예절을 갖춘 것이니, 진실로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이 그것을 원용하여 예(例)로 삼고 있읍니다.
대개 지금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가 아내나 첩을 얻으려 하고 있으며, 동녀를 데려 가는 것 만이 아닙니다. 무릇 사방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황제의 은혜를 선포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시(詩)에, `두루 물어보고 두루 자문한다‘하였는데, 지금은 외국에 사신으로 가면 곧 재물과 여자만을 탐내고 있으니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듣자오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감추고, 오직 그 비밀이 탄로날 것을 걱정하여 이웃 사람들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신이 중국에서 그 곳에 이를 때마다 곧 놀라 서로들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왔을까. 처녀(童女)를 잡으로 온 것이나 아닌가. 아내와 첩을 데리러 온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얼마 후에 군리(軍吏)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 집집마다 뒤지고 찾는데, 만일 <여자를> 감춘 것을 알면 그 이웃까지도 잡아들이고 그 친족을 구속하여 매질하고 고통을 주어 찾아내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한 번 사신이 오면 나라안이 소란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 없읍니다.
처녀를 모아놓고 선발하는데,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이 같지 아니하여 혹 사신에게 바쳐서 그 욕심을 충족시켜 주면 비록 잘 생긴 여자라도 놓아주고, 그 여자를 놓아주고는 또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이 때에 한 여자를 데려갈 적마다 수백 집을 뒤지는데 오직 사신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요, 아무도 감히 그 영을 어기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황제의 지시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1년에 한두 번이나 혹은 2년에 한번 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5,40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그 선발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여 밤낮으로 그 곡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국경(國門)에서 송별하는데 이르렇서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눈이먼 자도 있읍니다. 이러한 예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아내가 첩으로 데려가는 때는 비록 이렇게까지는 하지않을지라도 그 인정을 거스르고 원망을 사는 것은 다를 것이 없읍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필부(匹夫)∙필부(匹婦)가 편안함을 얻지 못하면, 백성의 왕도 함께 공을 이룰 수 없다.’ 했읍니다. 삼가 생각하건데, 나라의 덕화(德化)가 미치는 곳마다 만물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고려 사람만이 유독히 무슨 죄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옛날에 동해(東海)에 원한 있는 여자가 있어 3년이나 크게 가물었다 하는데, 지금 고려에는 원한 있는 여자가 얼마나 많겠읍니까. 근년에 그 나라에는 홍수와 가뭄이 서로 연달아서 백성들 가운데 굶어 죽은 시체가 매우 많으니, 이는 아마도 그 원한과 한탄이 능히 순화한 기운을 해친 것인가 합니다.
이제 당당한 대국으로서 어찌 후궁으로 둘 사람이 모자라서 반드시 외국에서 데려와야만 합니까. 비록 조석으로 은혜를 받자온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지극한 정성이데, 이에 궁권 안에 방치된 채 젊음을 그냥 보내고 헛되이 늙으며, 때로는 혹 환관에게 시집보낸다 하드라도, 마침내 잉태 한 번 못하는 자가 열에 5,6명은 되니, 그 원기(怨氣)가 화(和)를 상함이 또한 어떻겠읍니까. 일에 조그만 폐단이 있드라도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것도 폐단이 없는 것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에 이익도 없이 원방의 백성에게 원한을 사고, 그 폐단이 적지 않음에 있어서이겠읍니까. 바라건대, 덕음(德音)을 베푸시어, 감히 내지(內旨)를 칭탁하고 위로 황제의 총명을 흐리게 하며, 아래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처녀를 데려오는 자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아내와 첩을 데려오는 자가 있다면 법령으로 명확히 금지하시어 그 후일의 기대 까지도 근절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성조(聖朝)에서 다같이 사랑하시는 감화를 밝히시고 외국에서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하시와, 원망을 없애고 화기를 이루어 만물을 육성하게 하시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나이다”하니,
황제(원 순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