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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 후 제1주입니다. ‘주현절’에서 ‘현’은 ‘나타날’ 현(顯)자를 씁니다. 주님이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Epiphany라고 하는데, Epiphany는 희랍어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에피파네이아는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고대 희랍어에서 이 말은 신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 혹은 왕이 어떤 지역을 방문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이 땅에 나타난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사실을 나타내는 신비한 별을 보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찾아와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의 목수로 사시다가 때가 되어,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로 만드신 첫 번째 기적을 통하여, 또한 그의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일어났던 이런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주현절입니다. 이 주현절은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절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주현 후 제1주인데,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여 세례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거의 모든 교우들이 세례를 받은 세례교인들입니다. 여러분, 세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의미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그 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 준비가 바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푼다’고 세례 요한은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의 의미는 회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신약의 희랍어로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아를 영어 성경에서 repentanc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후회’, ‘회개’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죄에 대해서 뉘우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죄에 대한 후회나 뉘우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던 삶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좀더 분명하게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세례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세례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만 알고 더 많이 소유하며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추구했던 삶의 방향을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벌의 옷이 있다면 이제는 옷 없는 자에게 한 벌은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좀 있다면 역시 굶주린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나왔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세리들이 묻자, 요한은 말했습니다. “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입니다. 로마 총독의 하청을 받고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직업입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부과된 것보다 더 많이 거두어 할당된 금액만 총독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하곤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리라는 직업이 이방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얼른 사표를 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당하게, 정직하게, 너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더 많이 거두어 더 많이 착복하고자 하는 소유 중심의 삶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나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자 세례 요한은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힘과 권력이 있다고, 남의 권리를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고발하여 인격 살인을 저지르지 말고, 권력을 이용하여 더 많이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유와 권력, 자기 만족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존재와 사랑, 정의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위치에서 정직하고 공정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함께 삶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례 받은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나의 옛 자아, 정욕을 좇아 살아가던 나, 이기적이고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던 나는 세례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에 매여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사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세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장면입니다. 세례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당연히 죄가 없으신 분인데 어찌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례에 대하여, 그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셔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로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나오자, 요한이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죄 가운데 살아가는 연약한 인생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연약함에 함께 동참하셨고, 우리 인생들과 똑같이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치도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서 당신 위에 임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전도를 했다는 이유로 스데반은 공회에 끌려갔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였지만, 스데반은 담대하게 공회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서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갈고 있을 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는데, 바로 그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유대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 때 스데반은 부르짖어 이르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스데반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이 잠들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숨져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고통 속에서도 그의 영혼은 오히려 편안하였습니다. 무릎을 꿇어 하늘을 우러러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열린 하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희망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소망은 하늘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하늘이 무너졌다는 말은, 모든 구원의 가능성도 무너지고, 소망도 사라지고, 평안도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우리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위로를 얻게 됩니다. 넉넉히 고난을 이길 힘을 얻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나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며 나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얻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언제, 누구에게 열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특별한 존재이니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말없이 겸손하게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보다는 내 가치관, 내 의지, 내 욕망을 더 앞세웁니다 내 욕망이라는 말이 거슬리신다면 비전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라, 내 뜻, 내 비전, 내 욕심을 앞세웁니다. 내가 인정받고, 내가 드러나기를 더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셨고 스스로 죄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며 세례를 받았으셨을 때, 하늘은 열리고 주님의 성령이 임하셨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자신의 소명을 다하였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그에게 주어지고, 스데반은 끝까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오르실 때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주의 성령이 당신의 위에 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부모로부터, 상사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칭찬하고 인정하는데 인색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 1절을 반영하고 있는 말슴으로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2장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예수님이 먼저 백성들과 함께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시는 이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묵묵히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출발하는 예수님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이며 유명한 작가로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를 쓴 켄 블레차드가 제시 스토너와 함께 지은,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 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첫 머리에 제법 규모있는 보험회사의 사장이었던 짐 카펜터의 장례식에서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추도사를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짐 카펜터는 애정이 넘치는 스승이자, 꾸밈없는 진솔한 인간의 본보기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속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는 성공과 삶의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자 애썼습니다. 그는 스스로 영적인 평화를 누렸기에, 자신의 인생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사람이나 혹은 일에 대해서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었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 속에서 교훈이나 메시지를 발견할 줄도 알았습니다. 짐 카펜터는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는 성실함을 소중히 여겼고, 언행이 일치했으며, 골프도 즐길 줄 알았습니다. 고인은 어디에 가든지 자신의 존재로써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딸이 읽은 추도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추도사를 쓴 사람은 바로 짐 카펜터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장례식을 위하여 짐이 미리 써둔 추도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추도사를 들으며 모두가 공감하였습니다. 누가 써도 이보다 더 짐에 대해 더 잘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짐이 이 글을 쓴 것은 단순히 자신의 추도식에서 읽어달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짐 자신이 꿈꾸었던 인생의 비전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며 짐은 이렇게 잣니의 추도사를 미리 써 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2020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이 절기에 나 자신의 추도사를 한 번 적어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바라시는 바, 그 뜻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연합하여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완전히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의를 위하여 살아가기를 결단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려주실 것이고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새로운 소망과 위로를 경험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