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1-4> 동천 스토리- 영욕의 '조선방직'
근대 부산 제조업 기둥이자 식민지 수탈 상징, '두 얼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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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부산 동구 범일동에 있던 조선방직 전경. 문현교차로와 동천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진구청 발간 '서면이야기' 제공 |
- 값싼 공장부지와 노동력 노려
- 日 거대 재벌 막대한 자금 투입
- 13만2000㎡ 부지에 공장 조성
- 동천 젖줄로 51년간 권세 누려
- 1920년대 종업원 3200명 달해
-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 투쟁 치열
- 동구, '조방앞' 명성 되찾기 추진
- 독립운동가 후손 "용어사용 반대"
# 장면 1.
지난해 10월 부산 동구청은 '조방활성화구역 선포식'을 열었다.
한때 부산의 중심 상권이었다 쇠퇴해버린 동구 범일동 일대 '조방앞'의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2016년까지 60억 원을 투입해 자유시장 추억거리, 조방 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커뮤니티 비즈니스센터를
설치하는 등 시설현대화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16억 원을 들여 조방을 알리는 데 필요한 브랜드 및 캐릭터를 개발하고,
조방맵, 조방정보지, 조방웹 등을 구축하는 방안도 발표했다.
# 장면 2.
지난해 3월 독립운동가 고 이광우 선생의 아들 상국(53) 씨는 부산 시민회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이 씨는 "아버지께서 항일조직을 만들어 목숨을 걸고 파괴하려고 했던 조선방직은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라며
"범일동 일대 도로와 각종 음식점 이름에 '조방'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산시가 나서 '조방로' 등 지명부터 바꿔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난 한 해 '조방'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상반된 두 장면이다.
■ '동천'을 준설하라!
'조방'은 1917년에 설립돼 1968년까지 51년간 부산에 있었던 (주)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조방앞'이라고 하면 부산 사람들은 대강 어디쯤을 말하는지 알 정도로, 부산에서는 고유명사화됐다.
동천이 부산 근대화의 역사를 품고 기억하고 아파하는 하천이라면, 조방은 동천을 젖줄로 태어났다 사라지면서 부산 시민들의 고단했던 삶을 압축한 이름이다.
동구청의 조방활성화사업이나 독립운동가 후손이 조방이란 용어를 쓰지 말자며 시위까지 하는 데는
부산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동천과 조방의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36년 5월 1일 조선방직은 당시 부산토목출장소장에게
동천 준설에 관한 진정서를 냈다.
동천 바닥에 쌓인 토사 때문에 물동량 수송이 어려우니 동천을 속히 준설해 달라는 내용이다.
당시 동천이 부산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이었던 전포동 범천동 부전동 등으로
물동량을 실어나르는 운하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방직 등이 낸 진정서에는 "(동천 주변) 기업들이 '수천 원'의 막대한 돈을 들여 매년 운하의 상류 일부를
준설해 부선을 운항해 왔지만 이제는 운하 전체에 퇴적물이 쌓여 선박 운항이 곤란하다. 이대로 방치하면 항구 부산의 해운 가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동천 운하의 이용 여부에 공업지로서 부산의 앞날이 달려 있다"는
하소연도 들어 있다.
■ 조선방직의 명멸과 동천
일본의 거대 재벌이었던 미쓰이물산이 조선방직을 세우면서 투자한 자본금은 500만 원.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600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다.
조선방직은 일본인이 부산에 여섯 번째로 설립한 당시로선 부산 최대의 공장으로
부지만 13만2000㎡(4만 평)였다.
1920년대 3200명의 종업원을 고용했으며, 공장 건물이 54개 동에 이르렀다.
조선방직 안에 구내 병원이 운영됐을 정도였다.
해방을 맞기 전까지 조선방직은 우리나라 제조업계의 선두업체였다.
1987년 나온 '동구향토지' 자료를 보면 조선방직은 1968년 폐업할 당시 부지가 26만4000㎡로 증가했다.
하지만 조선방직에는 짙은 그림자도 있다.
일본 거대 자본이 노린 것은 당시 조선의 값싼 공장부지와 낮은 임금의 노동력이었다.
일본과 가까운 데다 물류 수송의 이점까지 갖춘 동천 주변은 더 없이 적합한 투자처였다.
열악한 근무 조건에 시달리던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등을 요구하며
1922년을 시작으로 1923년, 1930년, 1933년 등 잇따라 파업투쟁을 벌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말부터 3개월 동안은 6000명이 참여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당시까지 가장 치열했던 노동자 투쟁도 조선방직에서 일어났다.
오늘날 '조방'이란 지명만 남았지만, 조선방직이 남긴 명암은 동천의 중요한 역사로 기록된다.
# 시민회관과 시장으로 변한 부지… 옛 흔적 찾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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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부산의 중심 상권이었던 조방앞 거리. 조선방직의 흔적은 찾기 어렵고 '조방로' 명칭만 남았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1968년 문을 닫은 조선방직은 공장을 해체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지금은 '조방앞'이라는 이름 외에 조선방직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 자리에는 시민회관을 비롯해 부산은행 범일전화국 자유시장 평화시장 예식장 등이 들어섰다.
1985년 시외버스터미널이 사상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조방앞에는 부산과 경남 등을 연결하는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동구 향토지 등에 따르면 조선방직의 정문은
부산은행 범일동 본점에서 서면 쪽으로 한 블록 위
(공구상가 일대)에 있었다.
정문 일대의 담을 따라서 철도(부두~우암동 물자수송용)가 지나갔다. 후문은 현 부산시민회관 쪽이었다.
정문 옆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는데
조선방직 여직공과 총각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부산 동구청 박현고 환경관리계장은
"세계 4대 문명이 강을 따라 일어났듯이 부산의 자연마을과 공장이 동천과 그 지류인
당감천 부전천 가야천 등을 끼고 번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다만 1960년대 말부터 인구가 급격히 늘고, 산업화가 본격 진행되면서 동천이 감당할 수 있는
오염의 한계를 넘어섰고, 빠른 속도로 생명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 잊혀진 동천 상류 마을들
- 부산 최초 마을 '성안', 1970년대까지 동평동… 현재는 당감 4동으로
1992년 4월 부산시립박물관이 삼국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된 동평현 성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지금의 부산진구 당감3동과 당감4동 일대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대증현'으로 불리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부터 '동평'이란 행정명으로 바뀌었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동평현은 108호에 남자 거주인구가 382명으로
인근 동래현(290호, 1151명)과 비교해 1/3 수준의 작은 동네였다.
이는 부산항 개항 이전까지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발굴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일대가 부산 최초의 성안(城安)마을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동천의 지류인 당감천을 끼고 부산 초기의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동평동이란 지명은 지금 행정구역 명칭에서 사라졌다.
동평동은 1970년대까지 쓰였으나 1979년 당감4동으로 바뀌었다.
동천을 중심으로 시작된 부산역사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 점차 잊혀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1978년 1월 24일자 국제신문은 '푸대접 받는 지역, 동평동'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 동천 주변 지역의 팍팍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백양산 기슭의 동평동은… 3만5000명이 모여사는 인구 과밀지역.
주택난에다 도로 수도사정이 산간벽지보다 못한 행정부재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게다가 각종 공해가 심하고 좀도둑 폭력배들이 많이 설쳐 주민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 마을은 부산에서는 제일 먼저 생겼고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실 물도, 걸어다닐 길조차 변변찮은 채 버려진 마을로 전락한 것이다.****(중략)****
새로 지은 동평초등학교에는 진입로조차 없다.…
비좁은 골목에는 방범 등 시설이 안돼 있어 봉급날이면 공장 주변에 털치기, 날치기 등
10대 범인이 활개를 쳐 공원들을 울리고 있다.
도로 사정이 나쁜 이곳에는 청소차가 제때 오지 않아 빈터와 하천이 온통 오물과 쓰레기로 더럽혀져 있다. 특히 C피혁 등 7개소의 피혁공장과 D고무 등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가 당감천을 오염시키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옮긴다던 시립화장장에서는 누른 연기를 쉴 새 없이 내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