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앉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마종기
바람의 말,
내 영혼이 당신 곁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바람의 형태를 그리려고 한껏 쥐어보지만 한 올의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형태도 없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는 바람에 가끔씩 비릿한 빗기가 실려 날아오면,
영락없이 바람난 계집아이처럼 심장이 쿵쾅거려 어쩔 줄 모르기도 했을 꺼야.
땅바닥 두드려 먼지 보얗게 피워 올리며 하늘 저 끝에서부터 날아오는 빗줄기,
그 끝에 아련하게 매달려 오는 바람의 당신,
당신은 잠시 머물 듯 발걸음을 멈추어보지만 그것도 찰나,
금방 자리를 털고 또 다시 먼 길을 달려가겠지.
눈앞에서 사라져도 언제나 흔적은 속 깊은 곳에서 머물러 있을꺼야.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귓가를 맴돌아 줄 것인지.
멀리 남쪽에서부터 밀고 올라온 바람이 뿌려주는 비가 짙은 초록인 날이다.
베란다 창가에 매달린 푸른 포도송이들이 쑥쑥 잘도 자란다.
작년 그 종달새들인지, 한 쌍의 목소리가 분주하게 창가를 맴돈다.
목소리가 짐작한 것처럼 곱지는 않은 한 종달새의 지저귐에도 포도가 익어가겠지.
그들은 포도송이가 색깔 짙게 익어 가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아파트 높은 창에 매달려 자라는 신기한 포도나무가 있어
더불어 나도 한 그루 나무로 새들의 방문을 환영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풀씨 하나가 되어 꽃을 피우고 새로운 우주를 생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아무라도 닮은 듯 다른, 세상에 오롯한 풀꽃 하나 피워 올리겠지,
꿈꾸는 속을 열고 또 열어 지금 여기에다 풀어 놓기도 했었나보다.
하찮은 것들일지 모르지만 오래 자리를 지키게 한 기운을 배후로 삼아봐야지.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에 실려 온 세상 모든 것들의 향기를 오래 기록해야지.
창문턱을 슬금슬금 기어 넘어오는 바람,
아파트 배기통로를 무섭게 흔들며 울어대는 바람,
나뭇잎을 팔랑팔랑 흔들어 반짝이게 하는 바람,
잠이든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바람,
커다란 숲이 미치도록 춤을 추게도 하는 바람,
검은 바다를 뒤 섞어 끓게 하는 바람,
계곡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바람,
아무리해도 아직 품어보지 못한 바람이 너무 많았다.
길은 멀고,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달려가지만, 따뜻한 마음들이 있어,
손잡고 동무하며 지루하고 팍팍한 세상 속을 걷는다. 천천히, 느리게.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변변치 않은 것을 품어주셔서 즐거웠습니다.
칠월부터는 수요일 아침을 최용탁님이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칠월의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겠지요. 창문을 활짝 열고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2010. 6. 30. 10:52 수 이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