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오천항)에 위치한 오천성은 충남 기념물 제9호 및 87,678평방㎡
지정하여 지방사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오천은 고대로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포구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396년(태조 5)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로 수군첨절제사를 두어 서해를 방어했다고 한다. 이 성은 1510년(중종 5)
이장생(李長生)이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쌓았다고 하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거북과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1,650m에
이르는 석성을 쌓았다. 현재 성벽의 대부분은 붕괴된 상태이지만 윤곽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성벽의 축조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성벽처럼 하단에는 큰 성돌을 쌓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역학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성 안에는 영보정·관덕정·능허각·고소대 등의
건물과 옹성 5개, 성문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진남문·만경문·망화문·한사문 등
성문은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의 아치형 석문만이 남아 있다.
오천초등학교 뒤편으로 오천성에 올라서면 천수만과 정겨운 오천항 전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천은 백제때부터 회이포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로 이용됐던 곳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서 이름이 높았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수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 선조 때이다. 조선 중종 15년(1510)에
성이 만들어지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성에는 건립 당시 4개의 문이 있었고
많은 건물이 들어 앉았다. 임진왜란 당시 오천수영 수군은 이순신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진주대첩은 충청수군에게 비극적인 전투가 되고 말았다. 당시 고립된 진주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충청수사 황진과 휘하의 수군 대부분은 옥쇄했던 것이다. 이후 오천성은 텅 빈 채로
방치되다시피 했고 1895년에 수영이 폐지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천성은 당초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종 5년에 이장생이 16년간에 걸쳐 돌로 축성하였다.
오천성과 인접한 오천항은 충남 보령시의 어항 중, 대천항에 이어 두번째로 규모가 큰 곳이다. 오천항
우측으로는 홍보지구 간척사업 제방이 들어섰다. 오천항은 전복, 바지락, 해삼을 비롯한 조개의 집합처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하는 키조개의 산지로 유명하다. 한때 우리나라 홍합의
90%를 이곳에서 생산하기도 했지만 홍보지구 방조제 공사가 끝난 이 후에는 거의 구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키조개잡이 배들은 멀리 경기도나 전라북도 앞바다까지 나간다. 이 배들이 오천항으로 들어
오는 시각은 오후 5시 전후 무렵이다. 키조개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오천항은 일순 술렁거린다. 오천항에
기항하는 조개잡이 배들은 모두 30여척. 이 배들이 한꺼번에 조개를 풀어놓으면 오천항에는 파시가
열린다. 오천항에서 다루는 키조개 물량이 1년에 70억원어치나 된다고 한다.
오천항과 맞붙은 보령호는 2000년 12월 보령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조성된 인공호수. 옛날에는 이 곳을
통해 광천 옹암포까지 새우젓배가 드나들었다. 방조제가 시작되는 천북면 땅에는 주차장과 방조제 공사
내역을 밝혀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보령방조제는 길이가 1.1km 이며 덤프트럭 25만대분의 토사가
투입 되었다. 방조제에서는 오천항과 오천성곽, 오서산 등의 풍광이 잘 보인다.
오천성은 하루 나들이 코스로 성 한바퀴를 돌면 30여분이 소요 되며, 요즈음 오천항에는 쭉구미 및
키조개 철이라서 봄철 입맛을 되 찾을 수 있는 식도락 여행이 제격이다. 오천항에는 이러한 해물을
수족관에 싱싱하게 관리하고 있고 또한 맛도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