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 표현이란?
엄경희(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수)
멋진 표현, 멋진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시를 읽는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멋진 문구 하나만으로도 독자를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시의 힘이기도 하다. 어느 경우에는 한 편의 시 가운데 한두 구절만 반복적으로 독자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거듭 강조했듯이 시의 미학은 언어의 운용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시인은 늘 상투적 표현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상투적>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늘 써서 버릇이 되다시피한. 또는 그런 것.>이다. 진부한 문구, 식상한 표현,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수사 등이 모두 상투적 표현이다. 표현이 상투적일 때 그 내용의 절박함이나 진정성은 전달되지 않는다. 시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경이로운 문장만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표현은 상상력의 결핍이나 나태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간혹 학생들이 상투적 표현의 예를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마다 그 예가 잘 떠오르지 않는 경험을 하곤 한다. 시를 읽으며 굳이 진부한 표현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투적 표현은 기억하고자 해도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문장이다. 시의 생명은, 그것이 서정시든 지독하게 난해한 실험시든 독자의 기억 속에 살아남을 때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상투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시는 결코 오래 기억될 수 없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한 편의 시는 비중이 큰 문장과 부수적 역할을 하는 문장이 함게 어우러져서 그 맥락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어떤 문장이든 전체 맥락 속에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다음은 학생들이 수집한 상투적 표현 가운데 몇몇의 예이다. 시 전체 맥락을 삭제한 채 한 두 문구만을 떼어놓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대한 답이라 생각하며 여기에 소개한다.
- 빈 그림자만 남은/ 나의 모습/ 계절의 뒷배경처럼 허전하다.
- 누군가의 마음 위에 붙지만/ 도착하면 쓸모 다하고 버려지는 우표처럼
- 돌아본 길들이 상처투성이다.
-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처럼/ 밤하늘의 별들은 반짝입니다
-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사랑이 왜 바보 같냐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 때문이죠.
- 서로를 못내 그리워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
- 들판 건너 서쪽 하늘 핏빛으로 저물고
-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 지금 이 순간 창밖에서/ 행복은 철 지난 플래카드처럼/ 사소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 꽃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생의 신비여
- 잘 돌아가는 냉장고를 구형 모델이라는 이유로/ 새 것으로 바꾸듯 삶을 살수만 있다면
- 천 년 바람 사이로 고요히/ 폭설이 내릴 때
- 당신이 내 절망의 이유이던 때가 있었다/ 당신이 내 희망의 전부이던 때가 있었다
- 『현대시학』2010.9월호 '엄경희의 경험의 시학' 중에서 발췌

* 엄경희 : 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로 『빙벽의 언어』『미당과 목월의 시적 상상력』『질주와 산책』『저녁과 아침 사이 시가 있었다』『숨은 꿈』『한국시의 미학적 패러다임과 시학적 전통』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