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만년의 한민족사-유네스코,'현인류 기원은 한국'인정
운영자 한반도.서해지역의 마고문명에서 단군조선낳은 요하지역의 한국.배달문명
전제:현인류문명의 시원지역이 한국이라고 유네스코가 인정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왕실의 뿌리는 백제인들임을 주장하는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라는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존 카터 코벨과 앨런 코벨이 함께 저술하였으며 여러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현인류문명의 기원을 한국이라 말하고 있다. 책의 내용에는 현인류문명의 시원지로써 서해지역까지 추적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지만, 만주지역을 현인류의 시원지역으로 유네스코가 인정했다며 다음과 같은 것이 보인다.
"유네스코(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기구)에서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이라 할 수 있는 증거는 요동성 근방 만주지역에서 대량의 탄미가 발견함으로 시작됩니다. DNA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닌 교배종이란것이 판명됨으로서 농사기술이 첨단과학을 이룩했던 것으로 판명됩니다. 군량미로 생각되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전쟁이 있었던 듯 하며,1만 7천년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람의 DNA검사결과 평균 수명이 1000세입니다.고조선 이전의 왕국을 인정합니다. 노예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환국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라 믿는 신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수가 없는 사상입니다."
태양으로 상징되는 광명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지향한 한국의 강강술래를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유네스코가 "현인류의 기원을 한국으로 인정한다."면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역시 동방(동북아시아 지역)은 현인류문명의 빛이였다는 인류사적 사실로 세계가 인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네스코가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기위해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로 한다. 1만년 이전을 기준으로 세계 최초에 해당하는 '대한민국(한국)' 문화유산은 다음과 같다.
언어(한국어:세계언어의 조상어는 한반도사투리, 인도유럽어의 기원이 되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는 인도로 들어 온 고대 한국인들의 언어)와 문자(중국의 한자,몽골문자.슈메르 설형문자.인도문자.유대인들의 히브리문자.페니키아인들의 알파벳 문자의 기원이 되는 신시배달국의 녹도문자)의 시원민족이다.
1.선박 만들기 세계 최초 8천년 전(경남 창녕군 부곡면 출토) - 고대 한반도인들은 해양족 2. 고래잡이 세계 최초 8천년 전(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3.쌀농사 세계 최초 1만 5천년 전(충북 청원군 출토) - 중국과 인도의 쌀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도 한반도 쌀 4.신석기 세계 최초 2만년 전(전남 장흥군 출토) 5.토기 세계 최초 만 수천년전(제주도 고산리 출토) 6.고인돌 및 천문 세계 최초 8천년 전(전남 화순군) 7.빗살무늬토기 세계 최초 8천년전(강원도 양양군 출토) 8.인류의 인문학의 발전을 가져다 준 세계최초 금속활자 직지심경 개발 9.세계최초 자연화약 및 화포개발(고려 최무선) 10.세계최초 로켓 신기전 개발(조선) 11.세계최초 철갑선 개발(이순신과 호남인들) 12.세계 최초 체세포 줄기세포개발(황우석연구팀) 13.세계최대 규모의 서울 한강지역의 전방후원분 등등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두뇌가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유전학적으로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뇌속의 한민족 유전자를 부활시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인류사와 접맥시켜 한민족사를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함으로 바로 세움으로써 현인류문명에 크게 공헌해 온 자랑스러운 1만년의 민족임을 선언하고 민족기강과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고 하루에도 수 없이 터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서로가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념이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을 만들 때이다.
1.현인류의 시원 마고문명의 중심지는 서해
세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동북아시아 개들이다(미국 생물교과서). 그러면 동북아시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누구인가? 그건 마고문명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서해지역 진도의 진돗개로, 영리하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대한민국 명견인 진돗개는 동북아시아 개들의 DNA를 모두 가지고 있다. 고대 한국인들의 서쪽으로 이동하여 건설한 이집트(아이집터) 피라미드 벽화에도 개가면 그림이나 개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대에 한국인들이 이동하면서 개들을 사육하여 사냥에 이용하고 육식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문명의 특성과 동일한 중국의 요하문명 또한 1만년 전 중국과 한반도 연결되어 육지였던(호주 시드니 대학 지질학과 연구결과 보고서 내용) 서해지역의 마고문명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고는 여성통치자다.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요하문명의 특징도 마고를 상징하는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문화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고인돌과 지리산에서도 마고전설이 서려 있다.
한반도와 연결되는 발연안문명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홍산배달문명이 존재하는 요하지역은 한인 한국과 한웅 배달국의 문명중심지로 중심산은 천산과 태백산이였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성을 중앙 아시아 지역 파미르 고원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건 잘못된 논리다. 마고성은 서해지역에 존재했으며 마고성에서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간 사람이 한인씨의 조상인 황궁씨임으로 서해지역의 마고성 북쪽이면 정확히 요하지역의 천산이며, 요하문명은 고고학적으로도 이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문명의 생명수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삼족오 설화와 관련한 천제 준이 살았다는 대황지역에 속하는 압록강지역에는 환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2.고산숭배신앙을 가진 고대 한국인들의 나라 한국과 배달국의 역사활동의 중심지역
한국과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발상지 요하지역,그리고 단군조선이후의 한민족 성산 백두산
고대로부터 한국인들에게 있어 높은 산은 광명의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태양과 비를 내리는 하늘과 통하는 장소로 생각되어 제사를 지내는 지성소였다. 동북아시아인들의 고산숭배가 여기서 나왔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아즈텍 등 사막이나 평지로 이동하여 살게 된 한국인들은 산이 없기 때문에 피라미드나 지구라트를 만들어 제천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단군조선이전에 배달문명이 자리한 요하지역를 역사의 중심무대로 삼고 있었던 배달국과 한국의 중심산은 요하지역의 천산.태백산이었지 백두산은 아니였다.
한인의 하늘산은 지금의 요하지역의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선비족의 동족인 오한족의 근거지가 되는 오한산(烏桓山)이라고도 했다. 서한산의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泓池水)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홍지수가 홍익인간의 뿌리런가?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기원전 200년의 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래로 동북방 지역을 역사활동무대로 삼았던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신라왕족의 후손인 김함보 후예의 나라인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정계비).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지금의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요하지역(흑수.백산)으로 이주해 온 한인씨.한웅씨
[한단고기]에 보면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지금의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의 요지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한인씨가 흑수 백산의 땅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단고기]는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 한국이 있는데, 모두 12나라며, 동서 2만리 남북5만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바이칼 호수 동쪽에 위치한 한국의 중심지는 파나루산(하늘산=한산)아래 요하지역에 위치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씨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기후변화로 인하여 남하하여 요하지역에 중심지을 정하여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문명을 일으켰으며 유라시아-아메리카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계속해서 한웅씨의 이주와 배달국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자."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한인=광명신을 받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내용을 보면 한웅씨족은 한인씨족임을 알 수 있고 교통의 중심지를 천평으로 정하니 천평이 바로 청구라는 것이며, 신시를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달민족이라고 할 때는 한웅의 배달국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며 단군민족이라고 할 때는 단군한국조선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니 한인의 한국민족이나 한웅의 배달민족이나 단군의 단군민족이나 조선민족이나 모두 동일한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한겨레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인씨의 터전은 바이칼 호수와 몽골초원을 통하여 완만한 홍안령 산맥을 넘어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오기 전까지는 기후가 온화해서 유목생활하기가 좋았던 시베리아 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고, 기후가 추워지자 따뜻한 남쪽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종족이 바로 한인씨의 후예 한웅족임을 알 수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중국 황하문명의 근원이며, 이집트.아즈텍 피라미드 연대보다 1천년이 훨씬 넘는 초기 석석총들이 널려 있고,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문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하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요하지역이 한웅족이 정착한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닌 요하지역의 태백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산지역은 서해지역에 위치한 마고성이 점점 바다가 되면서 마고족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질 때에서 마고의 율려를 반드시 회복하겠다며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이주하여 도를 닦았다는 황궁씨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양심의 자유율법(율려)이 통했던 마고시대의 도맥을 계승한 황궁씨는 유인씨의 조상이고 유인씨는 한인씨의 조상이다. 율려국가란 예컨대 주인없는 가게라도 양심적으로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 가는 사람들의 나라를 의미한다.
3.고고학적 사료(위서로 취급받는 '한단고기'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한인씨의 한국의 중심지역과 관련한 파나루산이 있던 부하진은 인류 최초의 복골(卜骨)이 출현한 유적지가 있다. bc3300년의 유적이라고 밝혀졌으니 은나라의 복골은 이보다 1000년 뒤의 것이다. 또한 주변 고성터의 흔적을 보면 bc3300년 이전의 유물과 유적 발견도 기대된다. 뒤에 흉노에 패망한 동호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환산, 혹은 선비산이라고도 하였다. 선비족이 터전으로 삼은 오환산주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한인씨의 한국의 실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요하지역으로 들어와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다. 이 대광정자산이 태백산 혹은 불함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한검이 나라를 개국한 곳도 바로 불함산이였다. [한단고기]는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단군한검이 첫 도읍지로 삼았다는 아사달 또한 한국과 배달국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요하지역의 조양이였다. 조양지역은 고고학적으로 단군조선의 상징인 비파청동검이 최대로 발굴되는 지역이다. 따라서 조양은 옛 조선의 도읍지라는 중국문헌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지역이다.
환웅천황의 신시 아사달(백악산 아사달) 위치와 성터, 색불루가 쿠테타를 일으켜 22대 단군천황에 올랐던 백악산아사달이라고도 한다.옆에는 해모수가 북부여를 일으킨 웅심산이 있다. 고열가 단군57년,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는데,그 조상은 고리국(藁離國 : 句麗國) 사람이다. 해모수는 은밀히 수유(須臾)와 내통하여 옛 도읍지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임검이라 칭했다. 웅심산(熊心山)은 지금의 서란(舒蘭)으로 길림성 영길현의 서북방향이며, 나목하의 지류인 잡분하의 동쪽지역이다. 커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 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 천평으로 옮겨갔다.
한웅족과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태백산(불함산)이 한웅천황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마고문화를 유지하는 웅녀족과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족도 환웅족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 곳에 살던 기존의 호족(예穢:호랑이를 숭배)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환웅-웅녀,곰 조각상
진흙 여신상과 곰 턱뼈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고구려까지 모시던 부여신扶餘神일 수도 있다.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맥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신석기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개세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과 웅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玉[]), 옥고형기(玉[]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陳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배달국의 녹도문자에서 유래한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한국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홍산배달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소위 빗살무늬 도자기 시대였던 선홍산문화인 예맥시대의 단순 기하문의 질박한 회색, 혹은 황색 토기에서, 홍색 토기에 검은 무늬의 새로운 문화 세력이 이입된 것이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용,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이곳의 암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사슴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내려오기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한웅족의 먹이의 상징이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狼이다.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 암각화 모음 그런데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이 도래한 홍산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홍산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
단군조선에서 고추모의 고구려까지를 [한단고기]는 이렇게 전한다.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요하지역 태백산=한웅천황이 강림한 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시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로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8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 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 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혜제때 연나라 추장이였던 위만이 기자조선을 강탈하자 기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 갔으나 한떼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하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년(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위만조선의 왕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흉노.선비.부여.진조선유민의 나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대한민국 정통맥
1만년 이전의 마고문명(중심지:1만년이전에 중국과 한반도가 연결되어 육지였던 서해지역)=>황궁.유인씨(중심지:만주 천산지역)=>한인씨 한국(중심지:바이칼호수.시베리아)/시베리아 기후변화로 인하여 많은 한국인들 유라시아.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배달.요하.황하.슈메르.인더스.이집트.그리스.마야.잉카.아즈텍 등 현인류문명 건설 =>한웅씨 신시배달국(중심지:요하.만주)=>한검씨 한국=고씨 조선(중심지:요하.만주)=>해모수 부여(중심지:만주) =>고추모 고고리(중심지:만주)=>대진국(중심지:만주)/거란에게 멸망 후 황족들 고려로 망명 =>왕건의 고려(중심지:한반도) *일제에 국권을 상실하고 지금의 대한민국 정신상태를 썩게 만든 500년의 얼빠진 소중화 사대주의 조선(중심지:한반도)=>순환론에 따라 민족사와 민족정신회복을 통하여 원시반본으로 부활하는 대한민국 이 게시물을... 조회 수 : 5579 등록일 : 2012.06.11 17:29:02 엮인글 : http://www.siddham.kr/index.php?document_srl=3056&act=trackback&key=17f 게시글 주소 : http://www.siddham.kr/3056
[출처] 220. 1만년의 한민족사-유네스코,'현인류 기원은 한국'인정 |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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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진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본 카페에 귀중한 사료가 많습니다. 열심히 읽겠습니다.
역사에 관심 없던 분들은 역사용어를 모르기에 검색 자체를 못합니다.
역사활동단체나 단톡방 등에 사료를 올리려고 검색하려 많은 사료를 수집합니다.
인류문명은 인간의 생존조건에 가장 적합한 곳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고 인류문명은 농경을 시작한 지역에서 발생한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농경은 개와 함께 동거하면서 동굴생활을 탈피하게 되면서 가능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환인께서 천산 파미르고원에서 살았던 고산족이라고 했습니다만 요즘은 환인 천산족은 지구의 잦은 화산활동으로 인한 지열로 인하여 천산과 파미르고원을 기온에 따라서 이동하면서 생존이 가능했다 합니다.
예전엔 볼 수 없던 내용인 마고문명[마고지나] 천부부도인 마고성이 파미르고원에 있었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파미르고원의 마고 마고성문명은 UFO까지 인용하면서
파미르고원의 마고문명은 외계인의 지구정착설까지 등장합니다.
물론 파미르고원의 유적과 지유가 흐르는 강물을 촬영한 영상도 제시합니다.
절충설은 외계문명인 마고문명이 파미르고원에 이식되고 빙하기 기후변화로 연륙된 황해대평원으
황해대평원으로 파미르고원의 마고문명이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의 정신문명의
근원 뿌리인 천부경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생성도었다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파미르고원의 마고문명설만 답습하여 답답합니다.
모두 가능성이 있는 문명설이라서 그러한 것같습니다.
저의 소견은 인류학자들의 "개의
조상은 10만년전에 동아시아에서 출발했다는 견해에 공감하며
요나구니 해저유적에서 태극문양이 발견되고 81자 마고 천부경이
발굴된 것은 마고문명[마고지나] 이 황해대평원에 존재했다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빙하기로 황해대평원이 수몰된 당시에 마고족은 전라도로 상륙하여 고인돌 축조기술과
마고족 마한인이 인구증가와 기온상승으로 북방으로 이동하여
집안시 피라미드와 서안 애굽 잉카의 피라미드, 수메르 지구라트를 마고족 마한인들이 문명전파하며 문명개척 이동루트가 분명히 나타냅니다.
카자흐스탄에 영산강 고분의 축조기술과 동일한 양식의 고분이 있습니다.
언어도 전라도 마한인의 언어와
일치하는 수메르어, 인도 드라비드어가 존재합니다.
현대의 지구 지질학자들은 태평양에 뮤대륙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파미르고원에 마고문명
마고문명이 존재한 사실의 유무와 상관없이 빙하기 황해대평원에 마고문명 마고지나가 존재한
사실은 어떠한 사료의 근거로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 인정됩니다. 감사합니다.
정정: 빙하기 > "해빙기"로
한반도 서해의 마고문명설을 몇 차례 들여다보았지만 그림작업으로의 연결은 아득하고,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한 히말라야 곤륜 천산 돈황 흐름의 어원적 바탕은 믿음직스러우면서 낯선 듯 하답니다. 뭐 바이칼호는 흔한 부르칸바위를 앞세워 한나 새겼죠만.
"달이 뜨네 / 달이 지네 / 바이칼호에 / 별이 우네 / 휘몰아치는 / 눈보라에 / 들리는가 / 님의 소리 / 어둠을 깨밀며 / 지새는 밤 / 아아 고향은 / 꿈이런가 / 꿈이런가"
열 서넛이나 되었을까... 밤마다 라디오를 보듬고 '전설따라 삼천리'에 이어 연속극 속으로 빠져들던 시절 어떤 주제곡의 일부를 못 잊어 입 가에서 저리더듬거렸답니다.
"천해
바이칼호
인류의 조상
아버지 나반과
어머니 아만의 고향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쯤 하나 더 나가 볼 생각입니다만
지금 설레고 망설이는 것은 다만 '판찰라스'
" 내 어미와 아비의 고향을 찾는데
일만 년이 걸렸다"
같은 새 작품의 조각칼을 고르는 고민이 있답니다.
허조 김영모 선생님... 이제 뵈니
'바른역사시민연대'를 시작하신 광주 분이군요.
저도 양림동 150번지가 고향입니다.
다시 반갑습니다...^^
존경하는 고 강상원 박사님의 마지막 책 <조선 동이문명 기원사략 3권>을 못 구해
아쉽던 사이 제 민중주의는 차차 이덕일 이찬구 최민자 심백강 님들의 책으로 채워지고 있죠.
어린 시절의 과정은 비슷비슷할 겁니다. 우리말도 채 배우기 전에 예배당에서
예수를 만나고 단군 후예 석가부다는 절집 소풍 가서도 숨는!
대학에서 만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등으로부터 제 의문과 학습은 새벽교회를 끊고
새벽산문의 참선좌복으로 나앉기도 하고,
그것은 오늘 상고의 역사공부로도 이어졌으니 다만 억울하고 분하고 아깝고 다행이라기도 합지요.
현실 정치는 다 알겠어서 새벽 아내와의 산책길에서 풀어도 싱겁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애탈수록 근원의 탐색은 유장한 빛으로 다가옵니다.
동이문명의 시원을 실담어로 밝히는 강상원박사님의 화두는 당분간 지속될 가치로 여겨
여기서부터 혹 김영모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더 배우고 싶습니다.
이래저래 지척이니 편안하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