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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창향교 명륜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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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공립 교육기관으로 유교문화 위에 설립된 것이다. 국가가 유교문화 이념을 가지고 운영하기 위해 중앙에 성균관과 지방에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 사회문화와 질서를 담담하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군현제의 정비에 따라 지방 수령들이 향교에 대한 보호 및 육성, 재정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향교는 나라에서 유학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교관이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교관은 유학에 관해 지식이 있는 자를 선임하여 파견하였다. 조선 후기가 되면 관학 교육기관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일게 되어 사학 교육기관인 서원 및 서당이 교육의 기관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향교는 지방 지식인들이 모인 자리였으므로 지방의 문화행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춘추의 석전례(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 10철(十哲) 18현(十八賢)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와 삭망(朔望 :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의 향을 피우는 의식이 향교의 문묘에서 이루어졌고 사직제(社稷祭 :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여 올리는 제사), 성황제(城隍祭 : 마을을 지켜 주는 서낭신에게 지내는 제사), 기우제(祈雨祭 : 가뭄이 들었을 때 비 오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 여제(?祭 : 나라에 역질이 돌 때,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들을 위로하여 지내는 제사) 등도 향교를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더욱이 중기 이후에 향교가 향약의 운영체가 되었고 향사례([鄕射禮 : 시골 한량들이 모여 편을 갈라 활 쏘는 솜씨를 겨루던 일), 향음례(鄕飮禮 : 고을 안의 선비들이 모두 모여서 잔치를 벌여 예의와 절차를 지키며 술을 마시던 행사), 양로례((鄕老禮 ; 노인을 공경하는 예의) 등이 집행되었다. 더욱이 향교는 왕의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과 중대한 정치적인 내용을 지방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 중 후기에 교육의 기능을 활성화 시키려고 양사재, 흥학재, 육영재 등 향교의 부속건물을 설치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향교의 주 기능은 지식인들이 모이는 거점으로의 역할이 더 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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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안향교 대성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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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방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자 이곳이 생원 진사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시험을 통과하여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사학의 교육기관인 서원이 이러한 기능을 더욱 활발하게 할 수 있었지만 향교 역시 그 역할을 하였다. 즉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은 호구 조사, 조세의 부과, 군적의 편성 등 지방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데는 지식인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고 지방 지식인들인 양반과 중앙 파견의 수령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지방 지식인은 나라에 대한 불만 또는 불평을 할 수 있는 여론의 장도 되었다. 수령들이 때때로 돈과 곡식을 내어 향교의 중수·중건·비용 등을 마련하거나, 향교전의 설치를 위해 토지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지방 지식인들도 향교 운영과 보수를 위해 스스로 돈을 내거나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 원하여 내는 돈을 받아 기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지방 세력의 재정투자는 조세 분담, 또는 군역 분담 등에서 일정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재)문화재아웃리치연구소 문화재돌봄사업단은 그동안 관리 제외 대상이었던 지방지정문화재에 대해 다함없는 애정을 쏟기로 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향교서원은 문화재청이 「생생문화재사업」에 「향교서원 활용 사업」을 더하여 진행하기로 하였기에 각 지자체가 향교서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일상관리와 경미보수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3,4월에는 우선 순창향교와 부안향교를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순창향교는 순창군 순창읍 교성리에 있고 1413년(태종 13)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그 뒤 군수 김수광(金秀光)이 군 북쪽의 옥천동으로 이건하였으며, 1560년 군수 신련(申璉)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또 1661년에 군수 윤완지(尹完之)가 이건하였고, 1694년 낙뢰로 파괴된 것을 1713년에 군수 조태기(趙泰期)가 오산 아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6·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가 1959년 군수 김인덕(金仁德)이 중수하였으며, 1974년과 1975년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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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창향교 대성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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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대성전(사진 1),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명륜당(사진 2)·동무(東?)·서무(西?)·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사진 3)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5성(五聖)과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설총,최치원,안양,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순창향교 대성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 익공계 건물이며 주초석은 화강암을 1단 굄을 모각하였고, 기둥은 민흘림이다. 정면은 각각의 칸에 정자살청판 2분합문을 달았고, 양쪽 협칸의 2분합문 위에는 광창을 두었다. 정면과 측면이 3칸이지만 건물의 높이가 높아 측면의 비례가 아름답지 않아 보인다. 앞에서 말하였던 것처럼 향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그 지방의 호구 수, 조세 등의 사안 들을 파악하기도 하고 향교를 개보수하는데 재정을 지원하는 등의 일을 하였기 때문에 청백비(군수와 관찰사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1637년부터 1959년까지의 12기가 세워져 있다.
부안향교는 1414년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07년에 만화루를 신축하고 1848년에 양사재 신축 등 대대적인 확장을 하였다. 1894년에 현감 조연명(趙然明)이 동재와 서재를 신축하였다. 대성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93호로 지정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며(사진 4)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고(사진 5) 만화루, 양사재, 동재, 서재 등과 홍살문·하마비가 있다. 문화재돌봄사업단은 순창과 부안 향교를 대상으로 건물 주변의 기단부와 초석에 흔히 발생하는 조류 분비물을 세척하는 등(사진 6) 향교 활용을 위한 도움을 시작했다./예원예술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돌봄사업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