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기의 환자 / 찰스 램
지난 몇 주일 동안 나는 신경열이라는 고역한 병마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제야 조금씩 풀려나고 있다. 이 병고를 치르고 나니 이와 관계없는 어떤 화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능력이 없게 되어버렸다. 독자들은 이달에는 내게서 좋은 글이 나올 것이란 기대는 아예 갖지 마시라.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는 환자의 백일몽일 수밖에 없다.
또 사실, 병고에 대한 이야기를 몽땅 털어놓는다 해도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 대낮에 커튼을 치고 침대에 드러누워서 햇빛을 가리고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깡그리 잊는다는 것이 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여린 맥박의 고동소리 외에는 삶의 모든 활동에 대해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이 환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제왕의 고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일 것이다. 누워서 침대를 다스리는 폼이 얼마나 제왕다운가!
환자는 얼마나 마음대로 변덕을 부릴 수 있는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는 관자놀이의 끝없는 요구에 응하여 베개를 엎었다가, 엎었다가, 밀었다가, 낮췄다, 높였다, 두들겼다, 폈다 하는 폼이 얼마나 제왕다운가!
정치인들이 자주 등을 돌린다고 하나 어찌 환자에 비기겠는가. 몸을 펴고 길게 누웠다가도 금세 반으로 웅크린다. 비스듬히 옆으로 등을 등을 돌리는가 하면 머리와 발은 침대를 가로지른다. 그래도 그 변덕을 탓하려는 사람이 없다. 사방을 가린 커튼 안에서 그는 절대 군주요, 그안은 그의 영해일 따름이다.
병이 들었을 때 인간은 그 스스로에게 자아의 폭을 얼마나 크게 확장시키는가! 환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된다. 그는 이기심을 최대로 갖는 것만이 그가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며, 이를 지키는 것만이 그가 받은 신의 율법인 것이다.¹⁾ 그는 어떻게 병을 이겨낼 것인가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집의 안팎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소란한 소리만 없으면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얼마 전만 해도 그는 한 소송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흥망이 걸려 있는 송사였다. 그는 그 친구의 부탁을 받고 단숨에 시내를 이곳저곳 뛰어 다니며 증인들을 붙잡고 사정하고 변호사에게 추가 사례금을 주어 가면서 일을 부탁해야 했다. 바로 그 공판이 어제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마치 북경에서 열린 재판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판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그가 듣지 않도록 귓속말을 했겠지만 집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로 인해 어제 재판이 잘못되어 친구가 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판결 내용을 주워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친구'라는 말, '망했다'는 말도 그에게는 의미없이 지껄이는 군소리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면 병이 쉬 나을까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그는 생각하지 않게 되어 있다.
이렇게 오로지 한군데로 향한 생각이 어쩌면 그렇게도 그 밖의 근심의 세계를 몽땅 환수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병이라는 든든한 갑옷을 입고, 고통이라는 굳은 껍질에 싸여 있다. 그는 동정심을 오직 자기만의 용도를 위해 단단히 자물쇠를 채운 귀한 포도주처럼 간직해둔다.
그는 자기를 측은하게 여기며, 자기를 서러워하고 신음하며 누워 있다. 그는 자기를 몹시 그리워한다.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면 안에서 창자가 녹을 지경이다. 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처지가 서러워 운다.
그는 억지로 고통을 덜어낼 사소한 책략을 꾸미면서 자기를 편하게 할 방도만을 끊임없이 획책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최대로 활용하다. 자기 자신을 쪼개어 아프고 괴로운 곳의 수와 동수의 독립된 개체들로 분할시켜보는 그럴 듯한 허구를 꾸민다. 그래서 때로는 그 골이 쑤시는 가엾은 머리를 향해, 자기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을 대하듯 명상에 잠기고서 자나깨나 지난밤 줄곧 그 속에 도사리고 있던 그 둔탁한 통증을 통나무 아니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인 양 잡아 빼내려면 머리통을 쪼개지 않고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때는 자신의 차깁고 가냘픈 여읜 손가락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는 자기 봄의 모든 부분을 모두 동정하게 되고, 그의 침상은 자비와 온정의 수련장으로 변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동정자며, 그를 대신해서 아무도 그 일을 그처럼 잘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자기의 비극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수프 국물이나 약을 들고 시간 맞추어 나타나는 노 간호원의 얼굴만이 반가울 따름이다. 그 얼굴은 무표정하기 때문에 좋고, 그 얼굴 앞에서는 침대 기둥을 대하듯 거리낌없이 열띤 비명을 쏟아놓을 수 있기 때문에 좋다.
세상사에 대해서는 전혀 감각이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이나 직업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의사가 회진할 때 그런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분주한 의사의 얼굴에 생긴 주름살을 보고서도 보살피는 환자가 많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오직 자기만을 환자로 생각한다. 얄팍한 사례금 봉투를 접어 넣고서 소리가 날세라 조심스럽게 병실을 빠져 나갈 때에도 마음에 걸린 환자의 병상이 어디에 또 있어 이 선량한 분이 서둘러 가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도 현재 그로서는 도저히 가져볼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다만 내일 또 같은 일이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집안에서 수군대는 말들이 그에게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들릴 듯 말 듯한 말소리는 집안에 생명이 지속되고 있다는 표시이기에 그에게 위안이 되지만,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를 못한다. 그는 아무것도 몰라야 하고, 아무것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벨벳 비단을 밟듯 살금살금 층계를 오르내리는 하인들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까지도 그의 청각을 깨워놓을 때가 있지만 어슴푸레 그들이 하는 일을 짐작해볼 뿐, 그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알려고 한다는 것은 부담이 된다. 그는 짐작해보는 것 이상의 심적 부담을 감내할 수라 없는 것이다. 조심해서 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에 그는 살며시 눈을 감아버린다. 문병을 온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나 결코 그 문병자의 이름을 알려 하지 않는다. 집안 구석구석 내려앉은 정적과 무서운 침묵 속에서 그는 당당하게 누워서 자기의 주권을 즐기고 있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군주의 대권의 향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교해보라, 조심스런 그 발걸음, 눈짓 하나로도 대령하던 공손한 그 시중과, 병세가 호전되었을 때 동일한 간호원이 취하는 부주의한 그 행동(문을 쳐닫거나 열어놓는 등), 함부로 병실을 출입하는 그 불손을, 그러면 병실의 침대(차라리 왕좌라 해두자)에서 회복기의 안락의자로 옮겨 앉는다는 것은 권위로부터의 몰락이요 왕좌로부터의 축출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회복의 차도에 따라서 사람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위축되어버리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혼자서 그처럼 독차지하던 그 영토는 이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가 누워서 전제군주의 몽상을 실천하던 알현실이요 왕권의 현장이던 그 병실이 이제 얼마나 평범한 침실로 격하되고 말았는가! 침대가 말끔히 손질되어 있는 것조차 어쩐지 하찮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침대가 매일 정돈될 수도 있다니, 거친 파도처럼 구겨진 좀 전의 모습에 비하면 사정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때는 침대 손질이란 3, 4일만에 한 번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환자는 슬프고 괴로웠지만 잠시 동안 들려나와 그 달갑지 않은 청소니 정돈이니 하는 침범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아귀가 어긋난 몸뚱이는 그 화를 면해주기를 애원 했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침대로 옮겨져 3, 4일의 유예기간 동안 몸부림 치면 침대는 다시 흐트러지곤 했다. 침대 덮개에 새로 생긴 주름살 하나하나는 자세를 고쳐 누었다든지, 억지로 돌아눕기 아니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부림쳤던 역사의 기록이요, 쭈글쭈글해진 살갗인들 그 구겨진 침대 덮개만큼 환자의 고통을 진실하게 전하진 못했다.
그 영문 모를 한숨, 그 신음 소리, 얼마나 큰 고통이 들어 있는 동굴에게 터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끔찍하기만 했던 그 소리들도 이제는 잠잠하다. 그레르나의 고통도 이제 사라지고, 병고의 수수께끼도 풀려 필록테테스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게 되었다.²⁾
자기 존대에 대한 환자의 몽상은, 어쩌면 가끔 찾아오는 의사나 간호원의 문안 속에나 그 흔적이 남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변해버렸는가!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수가? 새로운 소식이며 잡담이며 이야기며, 의학과 관계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말해주던 그 사람인가? 이 사람이 조금 전에 환자와 그의 잔인한 적인 죽음 사이에 끼여들어 조물주가 보낸 사자의 엄숙한 사명을 띤 양 높다란 중재자의 위치에 우뚝 서 있던 그 사람을 수가 있을까? 체! 이 사람은 어느 노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병고를 호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던 모든 것이 그대에게 하직을 고한다. 온 집안을 숨죽이게 했던 그 마력, 집안 구석구석 스며든 그 황량한 정적이며, 묵묵히 시중들어 주던 일, 표정만으로 문병하던 일이며, 자기만을 돌보던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기분이며, 세상 생각이란 철저히 배제되고 아프다는 것에만 고착된 병고에 대한 유일무이한 눈이며, 온 세상이 매달렸던 인물, 그가 누렸던 그 독무대가
한 점, 작은 티끌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병고의 물살이 빠져 나가기는 했지만, 건강이라는 확고한 땅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먼, 회복기의 펑퍼짐한 늪속에 들어 있을 때, 존경하는 편집자여, 당신의 원고 청탁서를 받게 되었소. '죽어가는 순간에 무슨 글이냐'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무언가 어려운 일이요, 또 핑계가 구차스럽기는 하오만 이렇게라도 강변을 늘어놓고 나니 한결 해방이 된 기분이오. 원고 청탁이 시의에 맞지 않기는 했지만 이 호출이 깡그리 잊고 있었던 사소한 인생사에 나를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 같소. 대단치 않은 것일지는 몰라도 이것은 활동에의 조용한 초대료, 자기 도취의 터무니없는 몽상과, 병고라는 허황스런 자만 상태에서의 탈출을 뜻하는 것이었소. 사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잡지라거나 혹은 군주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또 법률이라거나 문학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었소. 이제 그 병적이 팽만한 상태도 가라앉고 있소. 또 내가 공상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환자란 오직 아프다는 골똘한 생각 하나로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자신을 신화 속의 티티우스와 같은 거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니까) 그 넓은 땅도 한 뼘으로 줄어들고 있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듯 오만한 거인이었소만, 이제 다시 내 본래의 보습으로 돌아온 보잘것없는 수필가인 그 여위고 깡마른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었소. *
# 찰스 램(1775~1834)
영국 수필가, 비평가. 1807년 누이 메리와 함께 번안하여 출판한 <세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을 발표하면서부터 문필가로 인정받기 시작. 대표작으로는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기고 했다가 후에 책으로 엮은 《엘리아 수필집》과 《엘리아 수필 후집》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