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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자유/종
제목 :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성경 : 벧전 2:11~17
찬송 : 26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312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베드로 사도는 이미 1:1의 인사말부터 시작해서 2:10절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런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지나가야 하는지를 알려 줄 것입니다. 지도를 보여 준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하는지를 속속들이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장래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받을 ‘살아 있는 소망’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1:1~12).
교회는 이 세상 한 가운데를 걸어가되, 세상 모든 족속들에게 나와 ‘택하심을 입은 족속’으로 태어났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민족’으로 형성되었으며, 잃어버린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소유로 회복된 백성’이 되어, 이제 그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끌 ‘제사장 나라’로 세상 속에 보내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이 세상은 결단코 최종 목적지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어깨 위에는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짊어지게 하신 중대한 사명이 놓여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지나가는 여행자(흩어진 나그네)이면서도, 그가 세상에서 만나는 뭇 백성들을 이끌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내야 하는 제사장인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한 자들이라도, 그 세상을 ‘선한 양심’으로 지나간 교회를 따라, 그들도 그 하늘 하나님 보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여행하는 교회를 위하여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그래서 2:11~3장 마지막절인 22절까지, 전체 단락을 꿰뚫는 주제는 ‘선한 양심의 순례(巡禮)’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그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순례 길을 갑니다. 최종 목적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입니다. 거기서 그분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 길을 다 가는 동안 교회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의 표현은 ‘선한 양심’과 거기에서 나오는 ‘선한 행실’입니다.
교회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택하신 족속’이란 말도 그렇고, 다민족적인 교회를 주고 ‘거룩한 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세상 너머에 있는 썩지 않고 거룩하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면서도, 지금은 그 세상 속을 지나가야 하는 교회입니다. 영광을 받았으나 지금은 잠시 풀무 불같은 불 속을 통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설명할 것처럼, 교회란 자유를 얻은 ‘자유자’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정말로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그리스도인처럼 놀라운 자유를 얻은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는 이 세상이 가는 썩어짐과 더러움과 허무함의 여정에서 자유를 얻은 존재입니다. 난파하여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와 같은 이 세상과 함께 영원히 어둡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빠지지 않아도 되는 존재, 하나님께서 직접 건지시고 구원해 내신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자유를 오직 그분의 뜻과 주신 목적을 위해 사용함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 점을 집중적으로 설명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행실을 선하게 가져라!
흔히들 기독교가 오래 지배했던 서양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암흑시대가 아닌 적은 없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죄와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 속에 구조화 되어 있는 죄와 악의 올무는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견고합니다.
오늘날 종교개혁의 후예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신득의’ 또는 ‘이신득구’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삶에서 ‘행위’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까요? 사람이 어떤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면, 도대체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기서 그 답들을 검토해 보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한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교회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12절).
‘내가 구원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문제가 일단 아닙니다. 그 구원을 받기 위해 ‘선한 행실이 필요 하냐, 필요하지 않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요구하는 것은 이런 차원을 떠나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자가 해야 하는 선한 행실에 관하여,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권면합니다.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단어입니다. 이후에 베드로가 제시할 윤리적 규범이 바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도는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 가운데서 믿는 자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 성도는 먼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미 1:14절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제어하라’(아페케스싸이)는 말씀은 현재 시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싸우다’(스트라튜오)라는 동사는 ‘전쟁을 일으키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는 영혼과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하게 된 영혼(1:22) 사이에 서로 거스르는 정도가 아닌 큰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본문을 잘 보십시오. 12절에 보면 수신자 교회들이 로마 사회 주변에서 살아가면서 겪고 있는 정황이 비쳐져 있습니다. 곧 그들을 둘러싼 도시의 로마 사람들이 이 낯선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여 그들을 ‘악행하는 자들’(카코포이온, 개역개정-너희를 악행한다고)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었던 시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네로 황제 때에 일어났던 로마의 대화재 당시(64년), 그리스도인들이 방화한 것으로 덮어씌워 ‘범죄자들’로 소문내고 핍박한 사건은 그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핍박은 2세기 경 트라얀 황제 통치 이후 심해졌습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는 로마 정부와 큰 충돌이 없었고, 대체적으로 일상적이고 지역적인 차원에서 부딪히는 오해나 비방 혹은 간헐적인 핍박 정도의 차원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은 아직은 충분히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비쳐집니다(벧전 3:13).
그렇다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왜 ‘악행하는 자들’이라는 비방을 듣게 되었을까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별한 악행을 해서 이런 비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악행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은 어떤 법적인 용어라기보다는, 당시 패역하고 타락한 세속 문화에 동조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붙여진 별명에 가까운 것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선이라고 믿는 관행을 교회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교회가 로마 사회로부터 받았던 뿌리 깊은 적대감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로마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섬기고 있었던 ‘여러 신들’을 우상이라 하여, 그런 신들에게 예배하는 공식 행사들에는 참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정치 와 사회는 체제 자체가 많은 신들을 모시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던, 실상은 매우 종교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신들에 대해 갖는 배타적인 태도는 독선적이고 무모한 것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 행사라는 것이 결국 술잔치나 그에 따른 음란한 행실 등의 부도덕한 관행들로 이어지기 일쑤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이런 문화행사들에도 참여하기를 꺼려했음이 분명합니다(참조, 벧전 4:3-4). 평상시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런대로 섞여 살 수 있었지만, 로마가 그 종교적, 도덕적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 교회는 그들에게 결코 서로 섞일 수 없는 낯설기만 한 단체로 비쳐진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주변 사회로부터 낯설게 여겨지고 오해를 사거나 비방을 듣는 상황에서 베드로가 내린 처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로든지 교회를 ‘악행하는 자들’이라고 딱지를 붙여 비방할 때,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명령이라면, 둘째 명령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이 두 가지 명령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성도가 지녀야 할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은 성도를 대적하고 비방하지만, 성도는 그 비방을 선행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자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 권면에서 다시 한 번 사도는 재림과 종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행실을 선하게 가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바로 이방인들, 세상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단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행실을 선하게 가질 뿐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보고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그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교회가 세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서 예배당 안에 갇혀 자기들끼리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12절의 명령은, 교회가 당당히 세상 사람들 속에서 선한 행실을 증거 함으로, 그 세상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 나라’된 교회의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할까요? 선한 행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구제나 봉사를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성금을 주고 장애우를 지원하고 노인들을 불러다가 경로잔치를 하는 등 봉사에 관련된 선행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것들을 우선적으로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무엇을 거론합니까? 베드로는 교회가 먼저 세상 사람들이 다 지키는 정당한 법부터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회 속에서 사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지키면서 살아가는 기본적인 법, 양심의 법, 공정한 법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칭찬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체류하는 외국인이요 여행자로 지나가는 교회가 행해야 할 우선되는 선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벧전 2: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인간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왕과 관원들은 악한 자들을 처벌하고 의로운 자를 포상하고 격려하기 위해 세워진 자들이기에 이들에게 순종함으로써 성도들도 악한 자를 싫어하고 의로운 자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새롭게 회심한 이방인 출신 성도들은 당시 이방인 사회에서 빈번하게 거행되던 종교행사(도시를 보호하는 신들이나 로마 황제에 대한 경배를 포함하는)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의 태도로 많은 이방인들을 성도들을 사회의 제도와 안정에 위협적 존재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심 때문에 성도들은 사회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교회가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불순한 집단이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세상을 향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를 권면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주를 위하여”입니다. 궁극적 권위는 주 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비록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역은 다르지만 모두 최고 권력자이신 ‘주를 위하여’라는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당 건물 밖의 세상 권력도 주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예배당만큼이나 국회의사당이나 재판정이나 증권거래소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부와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다른 영역을 담당한 구성원으로 합당한 선지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 정의로운 치유와 회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가 일반인들이 지키는 법을 지키지 않을 때 무엇이 문제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평판에 관심이 있다면, 그렇게 쉽게 위법적인 일들, 세상의 부패한 양심에 비추어도 함량이 미달되는 일들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15절 말씀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하실 때에, 과연 교회와 세상을 그 앞에 데려다 놓고 서로 무게를 달아 보았을 때, 과연 무엇이 세상의 그 교만하고 무지한 입을 틀어막을 근거가 될까요?
그것이 바로 선한 행실들인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 보여준 선한 행실입니다. 그들 속에 세운 놀랍도록 크고 높은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수많은 성도들을 모았던 집회들도 아닙니다. 그날 주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고 계십니까?
“보아라. 너희가 내 자녀들, 나의 택한 족속이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민족이요, 내 소유된 백성에게 흠 잡을 것이 무엇이 있더냐! 너희들이 유일하게 잣대로 삼은 그 양심과 도덕의 기준에도 내 자녀들이 훨씬 탁월하지 않더냐! 이제 너희 무지와 부패함에 대한 내 심판이 얼마나 합당하지를 알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그날 주께서 세상의 무지몽매한 말들, 하나님을 모독하며 그분의 나라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꾸짖을 수 있도록, 지금 세상 속에서 마땅한 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질 것이 무엇입니까?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교회가 세상 속에서 길을 잃는다면? 마치 선수들이 운동장에 들어가서 마음껏 뛸 자유를 얻었지만, 감독의 지시는 까맣게 잊고 작전도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데로 운동장을 뛰어다닌다면 게임의 승패는 불 보듯 뻔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6절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리한 칼날과 같이 교회의 뼈마디와 골수를 쪼개고 들어옵니다.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자유하나’ 베드로는 먼저 자유를 전제합니다. 본문에 ‘자유하다’(엘류쎄로이)는 것은 당시 교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양했고, 또 전체적으로는 자유한 시민보다는 아래에 놓인, 그리고 노예들보다는 위에 위치한 체류하는 외국인이요 여행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하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종들’로 표현하듯이 신자 된 신분으로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자유로 악을 가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문자 그대로 하면, 그 놀라운 자유를 사용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자유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잃은 자유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을 위한 자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종 된 땅 애굽으로부터 나와서 얻는 자유가 있지만, 동시에 그 자유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자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자유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마음대로 죄를 짓고 다시 용서 받으며, 그 죄를 반복하고 즐기다가 다시 더러운 데에 얽매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시 망하게 만들기 위해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는, 그가 이제 죄와 사망의 사슬, 걱정과 두려움, 죄책감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 버림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데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성장이기 위한 자유입니다.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방종한 삶을 살라고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체류하는 외국인과 여행자 같은 교회는 그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
하나님의 종들과 같이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18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교를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비장하고 장렬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우선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한 질서에 순복할 줄 아는 법부터 배우라고 말합니다.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순복하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은 존중함, 공경함으로 대하여야 하고,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며, 세상 정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순복하고 동시에 선지자적 비판으로 협력할 수 있는 조력자로 남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유자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종들같이 항상 낮은 자세로 선한 양심을 따라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