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일대 역사 탐방기(3)
세운상가.....
슬픈 서울의 자화상, 나의 자화상, 젊은이들의 자화상
집이라는 이름의 장소와, 상가라는 이름의 도시화가 함께 어울어진 곳
사람들의 수단과 삶의 다른 새 방법의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아닌 고향이 되어버린 서울이라는 공간도시과
다소 철학적이고 현실적인 도시 원리가 숨쉬고 있었던 곳,
근대화의 슬픈 과거가 녹아내린 시대적 아픈 역사와 많은 희망과 욕망이 숨쉬는 애증과 역사와 태풍같은 인생의 회오리 인생역정 원리가 잠재해있던 곳.....
세운상가 진양상가는 한 시대를 살아온 생생한 우리들 이농현상으로 터질듯한 삶의 터전으로서의 서울이다
산업화의 물결이 낳은 이단아 서울의 얼굴이다,
나는 기억한다
그 시대의 스무살 청년의 절망과 희망의 세운상가는 일탈의 공간이자 욕망의 공간이었고
당대 삼일빌딩이 보이고 남북으로 가로질러져서 종묘,북악산이 보였고, 남쪽으로 남산타워, 동쪽으로는 낙산이 조금 보인곳....
뭔지 모를 곳 세운상가, 청계상가,대림상가)와 청계천을 복개한 청계 고가도로는 서울의 명물이고 역동하는 서울이었고 전국의 사람들을 모이게하는 모브만트였다 .당시 369만 서울인구에서 단번에 500만 수도서울이라고 자랑하던 기억이 난다, 미지의 세계였다.
세운상가 역사탐장하는 나에게서 또 하나의 새로움을 발견한다
조선 개국 후 한양 천도하고 동서로 뚫린 종로는 정도전의 작품이었을까?
종로 길을 따라 시전행랑(市廛行廊)이 있고 뒤골목에는 어떻게 형성됐는지 역사가 궁금하다.
작은 상가와 가옥이 빽빽하게 들어찬 시끌벅적한 곳이었는데 태평양전쟁 말 일본은 연합군의 소이탄(燒夷彈) 공격 화재를 우려하여 그곳을 50m 공간으로 남겨 우범지대가 되고 이농현상으로 서울로 서울로 오는 이농현상의 보금자리로 청계천변을 따라 판자촌의 동서와 남북으로 더러운 우범지대가 됐단한다.
이른바, 욕망의 듣기만 했던 종로3가 종삼(鐘三)이되고 서울의 골칫거리가 되어 당시 군사정부의 밀어붙이는 행정의 덕분으로 서울시장으로 ‘불도저’ 김현옥 시장과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 건축가 김수근은 종로3가에서 퇴계로3가까지 1킬km 세상의 기운을 모으다 뜻으로 세운(世運)상가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정치와 건축의 두 야망 욕망이 역사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건축가 김수근의 프랑스 건축을 접합하려던 꿈을 사라지고 철저한 정치와 경제원리와 전시행정으로 변질되었다고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게 권불십년이고 풀은 마르고 꽃은 지듯이 당초 인기최고에 세운상가 아파트는 연예인과 대학 교수, 고위층 인사들이 살고 싶어하는 최신식 대상이었지만 1970년대 말 시작된 강남 개발로 인해 인기는 사그라지고, 특히 1987년에 조성된 용산전자상가에 세운상가는 전자상가라는 대명사를 넘겨주고 쇠락의 길을 걷는다.새삼 세운상가에 있던 꽃 도매시장이 생각난다.
다양한 세월의 흔적은 지금 사라지고 다시 새롭게 세운상가는 재 탄생을 꿈틀거리고 있다한다.
새삼 세운상가,종묘 쪽 현대상가,청계상가, 대림상가,삼풍, 풍진, 신성, 진양상가를 철거해서 폭 90미터에 길이 1킬로미터가 넘는 녹지축을 조성하겠다는 게획이 들리더니 아직 캄캄한 어둠속이다.
세운상가...어떻게 될까?
나는 역사가 궁금해 몇 번 세운상가를 찾아봤다. 서울 해설가 선생과 함께 역사탐방자로서....나는 서울을 근 60년 가까이 사는 시민으로서, 아웃사이드 문학가로서,사회과학자적 관심 측면에서,지역 자칭 향토사학자로서 그리고 인생 이모작, 삼모작 삶을 더듬기 위해서 몇자 사진과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