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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5-33
누가 인도하셨는가? / 유관지 목사
일기장이나 탁상 캘린더 한구석에 작은 활자로 ‘오늘은 올해가 시작되고서 며칠째 되는 날입니다. 올해는 앞으로 며칠 남았습니다’ 라고 인쇄된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11월 9일을 보니까 2003년이 시작되고서 313일이 흘러갔고 이제 52일이 남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올해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무엇이, 또는 누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왔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제 한 장, 아니면 두 장 남은 달력을 볼 때도 그렇지요.
시편 90편 12절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날들을 세면서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유영모(柳永模) 선생이라는 기독교 사상가가 있습니다. 삼일운동 직후에 정주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분인데 함석헌(咸錫憲) 선생의 스승입니다. 유영모 선생은 이 말씀에 따라 매일 ‘오늘은 내가 태어나서 며칠 째가 되는 날’ 이것을 계산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요즘은 전화가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시간도 알려주고 고속도로의 사정도 알려줍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당신이 태어나서 며칠 째 되는 날입니다’라고 알려주는 서비스도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번 그 서비스를 하는 번호를 눌러 보았더니 ‘오늘은 귀하가 태어난 지 21,666일째 되는 날입니다’라고 알려주더군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많은 날들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위험한 일도 있었고 사고도 겪었고 큰 병도 걸렸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무엇이, 또는 누가 나를 인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로보암 왕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집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의 자리를 이어 받고 아버지의 중과세 정책, 백성들에게 중노동 시키는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겠다고 선언합니다.
백성들은 반기를 들고, 솔로몬 때 애굽으로 망명 갔다가 돌아온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 여로보암은 왕이 되자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고 했습니다.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여로보암은 다윗 왕실을 배반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여호와를 배반하였습니다.
더 큰 배반입니다. 무서운 배반입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24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에, 너무 사치했기 때문에 백성들을 너무 심하게 부려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라가 갈라지게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미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고 열왕기상 11장 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입니다.
여로보암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가 그것을 알려주었거든요(왕상11:29~39).
지금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나를 대통령 되게 하셨다. 386 세대가, N 세대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나를 대통령 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통령이 되게 하셨다’ 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재신임 묻는 것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분이 이것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하며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여로보암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여로보암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나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겠다’
‘아, 나는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겠다’
‘아, 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힘써야하겠다’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반대로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솔로몬 때는 솔로몬이 우상숭배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처첩들이 우상숭배를 주도했습니다. 이방여인인 그들이 자기들의 나라에서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에 퍼뜨린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직접 우상숭배를 주도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솔로몬 때 애굽으로 망명을 했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솔로몬의 신임을 받았다가 나중에는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피신해서 지내다가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 소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 때 애굽에서는 소를 풍요의 신으로 여겼습니다. 나쁜 것을 배워 가지고 왔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이완용(李完用)이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친일매국노가 되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 ‘그가 젊은 시절에 일본에 유학생활을 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개화된 일본의 문물을 보고 우리나라도 일본을 따라야 열강의 침략 속에서 안전하고 잘 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로보암은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힘써야 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나가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여 주십시오’ 청원했는데 르호보암이 그것을 거부한 것이 나라가 갈라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반대가 되었습니다. .
여로보암은 왕이 되자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했습니다(25절).
백성들이 많이 동원되어서 힘들게 일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했습니다. 브느엘은 브니엘이라고도 하는데 얍복 나루를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고 군사적인 요충지입니다. 수도인 세겜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곳을 요새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지리적인 조건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더욱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대항하면서 ‘우리는 다윗과 상관 없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왕상 12:16).
그 백성들은 이제 세겜을 건축하고 부느엘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어 힘들게 일하면서 틀림없이 ‘옛날이 더 좋았다!’ ‘구관이 명관이다!’ 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남왕국으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28절에 “이에 계획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온갖 궁리를 다 했다’ 라는 뜻입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서 하나는 북쪽 끝인 단에 두고 하나는 벧엘에 두었습니다.
왜 다른 곳이 아니고 단과 벧엘에 두었을까요?
여기에서도 여로보암의 잘못된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단은 예루살렘의 반대방향입니다. 북왕국의 처음 서울인 세겜에서 예루살렘은 남쪽에 있었고 단은 북쪽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쪽은 보지도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벧엘은 북왕국의 처음 수도인 세겜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나꿔채기 위해 이곳에 금송아지 하나를 두었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갈 필요 뭐 있어? 여기에서 예배드리면 되!’ 하는 곳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거룩한 곳인데 우상 숭배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로보암이 남왕국과 경쟁을 하고 싶었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남왕국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싶었으면 ‘하나님 잘 섬기기 경쟁’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경쟁 가운데 하나님 잘 섬기기 경쟁은 아름다운 경쟁입니다.
‘여러분, 저들은 우상들을 숭배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상들을 숭배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깁시다’ 했어야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데 바로 이런 지혜입니다.
사람을 잘 되게 하는 지혜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온갖 지혜를 짜내서 자기의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지혜였습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셨다’ 하지 않고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놓고 ‘이것들이 인도했다’고 한 일은 세 가지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누가 당신을 인도하셨습니까?’ ‘누가 당신을 인도하십니까?’ ‘누가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 잘못 대답하는 사람들도 같은 불행을 겪게 됩니다.
첫째, 여로보암은 잘못을 계속해서 저질렀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면 그 다음 단추는 저절로 잘못 끼어집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근본적인잘못을 저지르면 부수적인 잘못들이 뒤따릅니다.
여로보암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레위인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는데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갈라졌을 때 레위인들은 남왕국의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남왕국의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여로보암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대하 11:13~14).
레위인이 없으니까 여로보암은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31절).
남왕국와 북왕국이 갈라졌을 때 세력은 북왕국이 강했습니다. 북왕국은 열 지파, 남왕국은 두 지파였으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정통성을 남왕국에 둡니다. 성경 가운데 「역대기」는 북왕국 이야기는 아예 취급하지를 않았습니다.
정통성이 남왕국에 있다고 하는 이유는 다윗의 혈통을 남왕국이 이어받았고 예루살렘이 남왕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남왕국을 지지하고 남왕국에 몰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정권이 바른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로보암은 또 신앙의 절기를 자기 마음대로 바꿨고 그밖에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둘째, 여로보암은 나라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다(왕상 14:16).
지도자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나라가 평안하고 강성해집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으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혼란에 빠지고 불행해지고 결국은 패망하게 됩니다.
여로보암 이후 북왕국에서는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북왕국 왕실의 역사는 모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들의 재위 기간이 대개 짧았습니다. 사므리 왕은 7일간 왕 노릇했고, 살룸 왕은 한 달, 스가랴는 여섯 달 동안 왕 노릇을 했습니다.
북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앗수르의 이민정책 때문에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민족을 낳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는 좀 더 강력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의 하나님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이라’하면서 하늘을 가리켰어야 합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금송아지들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는 금송아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주가 있었고 패망이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가리켰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왕국은 편안한 길, 번영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셋째, 여로보암의 집안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은 가장 저주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33절과 34절을 보세요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그리고 14장에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어 죽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아주 심한 저주를 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33절에서 16장 4절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542쪽)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사 년 동안 다스리니라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이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여로보암의 길은 악한 길을 상징하는 말로, 여로보암의 집은 불행한 집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라는 말이 스무 번 가까이 나옵니다(왕상 16:3, 26, 21:22, 22:52 왕하 3:3, 9:9, 10:29, 13:2, 11, 14:24, 15:9, 18, 24, 28 17:21, 23:14).
여로보암은 악의 뿌리처럼 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여로보암은 구약의 가룟 유다라고 할 만합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는 혼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이라고 나옵니다.
여로보암의 아버지 이름이 느밧인데 우리는 느밧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들 잘못 두어서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아버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보응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즉시 보응형’입니다. ‘현장형’이리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춤 추고 놀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백성들을 쳐서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출32:18)
이것이 ‘즉시 보응형’의 본보기입니다.
하나는 ‘두고두고 보응형’입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들을 만들어 놓고“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한 일에 대해 하나님은 시간을 끌어가며 두고두고 보응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보응을 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 무섭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물은 것을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을 누가 이 자리까지 인도하셨습니까?
이 교회를 누가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누가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까?
대성전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현장을 볼 때마다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 말씀드렸는데 ‘준공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목양교회를 누가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누가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역대 대통령들입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렇게 대답하셔야합니다.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대답을 하면 그 내용이 어떻하든지 간에 여로보암 식의 대답입니다.
그것은 여로보암이 저지른 잘못들을 저지르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여로보암과 그의 집안이 받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나라는 북왕국이 걸은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나라를 인도하신 것을 알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다시 한 번 감사해야합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에 추수감사절 지났다고 감사에서 졸업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감사의 학교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감사를 배워야합니다.
감사의 부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감사를 부담으로 여기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감사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감사가 의무라면 즐거운 의무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감사를 확인하는 날이고 감사의 새로운 시작이 되는 날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한국의 성도들이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460장)가 있습니다.
이 찬송은 사사오 넷스 사브로(笹尾鐵三郞)이라는 일본의 성도가 1897년에 작사했습니다.
일본은 기독교가 아주 약한 나라인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이 담긴 찬송시가 나올 수 있는 지 부럽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할 수 있으면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434장)
할 수도 있어야합니다.
나가서,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할 수도 있어야합니다.
찬송가 429장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평신도가 목사님에게 깨우침과 도전을 주어 탄생한 찬송입니다.
영국교회의 존 핸리 뉴맨(John Henry Newman 1801~1890)라는 목사님이 1833년, 교회의 일로 이태리에 갔다가 돌아옵니다.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영국에 가서 해야 할 일은 많고 날씨는 습기가 차고, 급해서 여객선을 기다리지 못하고 화물선을 탔는데 불편하고, 뉴맨 목사님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뉴맨 목사님은 선장을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 좀 해볼 수 없느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선장은 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갑판에서 선장을 만나 같은 재촉을 하였더니 선장은 침착하게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을 가리키며 ‘오늘밤이라도 하나님이 바람을 주신다면 우리는 저 별을 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우리가 원하는 항구로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뉴맨 목사님은 별빛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말하는 선장의 믿음에 감복이 되고 자기의 조금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이 찬송을 지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뉴맨 목사님과 같이 답답하고 짜증나는 형편 속에 있습니까?
한 밤 중과 같은 처지입니까?
별빛의 은총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별빛의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햇볕의 풍성한 은총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누가 우리를 인도하셨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대답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대답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대답해야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대답하며 하나님의 인도에 따른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 기록이 창세기 후반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습니다.
그 기록이 출애굽기이며 레위기이고 민수기이고 신명기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가나안 정복을 완수했습니다.
그 기록이 여호수아서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인도하시며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가장 충실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저 유명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발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라는 노래는 바로 다윗의 이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다윗은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들도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솔로몬을 호되게 벌을 주려고 했습니다. 당장 나라를 다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때문에 솔로몬 당대에는 나를 빼앗지 않았고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이 일을 실행하는데 조금 남겨두었다고 열왕기상 1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믿으며 감사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받은 복을 여러분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받은 복을 여러분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받은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셨으며 지금도 인도하시며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그로 인해 복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고 이 교회가 되고 이 나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