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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황충재앙과 그 대상 (계 9:1-4)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앞 장에서 공중을 나는 독수리가 3화를 선언했는데 그 화 중의 첫째가 본문의 황충재앙입니다. 참고로 1화가 황충재앙이고(9:1-11), 2화는 유브라데 네 천사(9:13-21), 힘센 천사(10:1-11), 두 증인이고(11:1-13), 3화는 해를 옷 입은 여자(12:1-17), 두 짐승(13:1-18), 십사만 사천입니다(14:-5). 이 삽경들은 독수리의 공중복음과 관계된 것으로 땅에 속한 자를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드시기 위한 강력한 성화의 은혜들입니다. 그 중의 첫째가 황충재앙입니다.
구체적으로 황충재앙이란 무엇일까요?
황충재앙의 정체를 보여주는 힌트가 4절입니다.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이마에 인침을 받지 못한 사람만 당하는 재앙이 황충재앙입니다. 그러니까 인 맞은 사람은 당하지 않는 재아입니다. 하나님의 인이란 “너는 내 것이라”(사43:1) 하시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황충재앙은 마치 666과 같이 세상과 육신 따라 사는 육신에 속한 자가 받는 재앙입니다.
황충재앙의 두 번째 힌트는 본 사건이 다섯째 나팔재앙에서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문외한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아직 육신에 속해서 살지만 교회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양육을 받으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영적 고통이 큽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고통을 주고, 양심은 양심대로 고통을 주고, 하나님께서도 징계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종합해 보면 황충재앙의 대상이란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의의 말씀의 양육을 받고 감동도 받지만 이를 억제하고 아직도 땅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양심이 받는 고통이 바로 황충재앙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 대해서 뒤에도 나오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고 심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의 감화의 차이입니다. 말씀의 감화가 크면 클수록 순종하지 못하는 그 마음에 고통이 심해집니다.
그 고통을 5절에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이 쏜다는 표현은 고전15:55-56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한 것처럼 성경에서 사망이나 죄나 율법을 묘사할 때 쓴 용어입니다. 사망 죄 율법이 3형제가 되어 우리의 양심을 쏩니다.
이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계9:5-6에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했습니다. 이 고통은 성도의 고통이기에 죽고 싶어도 지옥 때문에 죽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붙드시기 때문입니다(시37:24).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이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계14:11에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한 것과 흡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심판 날에 가서야 이 고통을 당하지만 영적인 갈등 속에 있는 성도는 체험 속에서 이 고통을 당합니다. 고통을 주시는 것은 더 이상 세상 것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것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혹은 율법적 신앙이 아니라 복음적인 신앙이 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섯째 천사의 나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땅에 속한 삶이 고통임을 알려줍니다.
1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인 나팔 대접 등 3재앙 모두 나팔의 순서가 지닌 숫자에도 의미가 있는 걸 봅니다. 본문의 다섯째 천사에서 쏘는 고통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수입니다. 아담이 갈빗대를 하와에게 준 날도,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날도 금요일, 예수님의 상처도 크게 다섯 곳(창자국은 운명 후), 연단의 수 10의 중심부요, 혹은 손가락이 다섯이듯이 책임의 수, 모세 오경이 율법이듯 율법의 수라고도 합니다.
황충재앙의 고통의 원인은 땅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고, 계18:4에도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렘2:19에도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습니다. 계7:14에 보면 능히 셀 수 없이 많은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환난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깨달아야 합니다.
2. 땅에 속한 자의 비참함을 알려줍니다.
1절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계8:10과는 달리 사탄입니다(사14:12-15). 사탄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된 것은 본래는 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받았지만 교만해져서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황충재앙을 말씀하면서 사탄을 땅에 떨어진 별로 소개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처럼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이지만(엡2:6) 주를 높이고 순복하고 경외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현실은 땅에 떨어진 별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유1:6-7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듯 사탄을 따른 삶은 유리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제왕 독수리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부족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째 천사의 나팔이 이걸 깨닫게 해줍니다.
3. 땅에 속한 자의 탐욕의 원인을 알려줍니다.
1-2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무저갱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의 ‘깊음’이라는 의미의 ‘테홈’에서 나왔습니다. 무저갱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연옥과는 달리 악한 영들이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지기 이전에 잠시 있는 장소로 보는데(계19:20) 바닥이 없는 깊은 지옥입니다.
사탄이 무저갱의 열쇠를 가졌는데 이는 계1:18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같다고 볼 수 없는 것은 본문에서 무저갱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잠30:15-16)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탐욕이 사라지지만 반면 사탄이 임하면 우리 욕망의 문을 엽니다. 그래서 온갖 욕망과 죄악이 터져 나오는데 얼마나 크고 뜨겁든지 큰 화덕의 연기와 같이 분출됩니다. 엡2:2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한 것처럼 땅에 속한 삶이 사탄을 따르는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깨닫고 회개하는 데까지 연결이 되어야 다섯째 나팔을 이해한 것입니다.
4. 세상이 악한 원인도 알려줍니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구멍'은 무저갱의 구멍인데 그 연기의 분출로 해가 어두워졌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습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 구멍에서 끝없이 분출되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4:1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변하지 않고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5. 심령이 혼탁한 이유도 알려줍니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공기도 어두워졌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지상 하늘의 공기입니다. 용례를 보면 헬라어로 ‘프뉴마’로서 호흡, 바람 혹은 공기라는 뜻으로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좁게는 우리의 심령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땅에 속해 살면 죄악이 심령을 오염시킵니다. 이래서는 귀히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예언의 은사 경우 그 특징상 더욱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양심도 깨끗하고 율법적인 신앙에서도 벗어나고 염려 근심 죄도 멀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땅에 소속되어 있는 한 추하고 더러우며 귀히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6. 세상과 죄의 정체를 알려줍니다.
3절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황충의 정체는 연기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사탄에게서 나왔고 죄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전갈처럼 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충은 메뚜기 종류 중에서도 최후의 뿌리까지도 먹어 치우는 식탐을 가진 메뚜기입니다(욜1:4). 이처럼 죄가 우리 심령을 갉아먹습니다. 꿈에라도 벌레가 갉아먹거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또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왔으니 그 욕망은 끝이 없고, 연기 가운데로부터 나왔으니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하는 새카만 죄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죄도 선한 죄는 없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주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황충이 전갈의 권세를 가지고 쏘아대듯이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쏘아대고(고전15:56) 물질로 쏘아대고(딤전6:10, 약5:1-5). 사망과 율법으로 쏘아대고(고전15:56), 하나님께서도 징계의 채찍을 드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황충이 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본문의 황충은 자신의 먹이인 초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만 쏘는 이상한 황충입니다. 그러므로 인을 맞을 때까지 쏘는 황충입니다. 여기 인은 하나님의 소유적 개념이니 땅의 사람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황충이 쏘지 않는 사람은 누굴까요?
1.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먼저 “땅의 풀” 인생은 풀과 같습니다(벧전1:24, 사40:7). 그런데 땅이 풀이니 육신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신앙적이거나 율법적인 양심도 없고 세상 것으로 즐거움을 누리며 삽니다(전9:9, 전11:9).
2. 어린 신앙인들입니다.
“푸른 것이나” 푸른 열매는 대개 무화과에게 돌려진 명칭으로(아2:13) 푸른 무화과는 진액이 독해서 황충이 먹지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무화과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푸른 무화과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아직 초신자로서 자연인과 흡사하여 신앙적 양심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롬1:21-23).
3. 종교적 형식만 갖춘 사람입니다.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수목은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데(눅23:30-31, 막8:24) 위대한 사람은 백향목 잣나무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포함된 각종 수목이니 잡목으로 거룩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처럼 바리새인과 같이 양심에 화인을 맞은 형식적 외식적인 사람은 양심의 고통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 영광과 돈을 사랑했습니다.
4. 속죄의 복음에 선 사람도 고통이 없습니다.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인침이란 우리의 체험으로 보면 성령으로 된 큰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듯,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되 견고히 믿고, 하나님이 나의 공급자요, 삶을 주관자이심이 믿는다면 율법과 죄와 탐욕과 염려가 마음을 찌를 수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삶의 원리를 아는 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이상의 사람들을 다 제외하면 남은 사람은 누굽니까? 자연인도 초신자도 외식자도 참신자도 아니라면 누가 황충의 대상입니까? 여기에 대한 열쇠가 4절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혹은 “해하라 하시더라” 한 존칭어입니다. 5절에도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이런 존경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진 존칭어입니다.
그러니까 황충재앙은 하나님께서 특정인 혹은 특정 과정에서 하늘의 사람이 되도록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나팔이 울려 퍼지는 과정이니까 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상당한 감동 속에 있지만 한 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집착도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특정한 과정입니다. 그 심령에 의의 양심이 조성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으면 그 심령이 받는 고통은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고난 역시 더 주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제자들도 얼마나 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까? 그러한 박해가 도리어 그들로 하여금 생명 걸고 기도하여 성령 받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여섯째 나팔에서 성령의 대부흥운동을 시사하는 유브라데 네 천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히12:11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했고, 욥7:17-18에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했습니다. 계7:14의 큰 환난에서 나온 흰옷 입은 자들처럼 거룩하신 목적 가운데 연단 받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련이 나팔재앙의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후에 양심에 다가온 현상이거나 그 말씀에 세우기 위해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사55:11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한 대로 말씀을 들은 자에게는 그만한 의무가 따르고, 그 공력을 시험할 때가 옵니다(고전3:13).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시련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마13:18-23절을 보면 길가처럼 악한 자가 뿌려진 것을 빼앗거나, 돌밭처럼 환난이나 박해가 있거나, 가시밭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다가오는 것과 같습니다. 옥토 역시 인내로서 결실했다는 점에서 모든 시험을 이기며 열매 맺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부름에 믿음과 순종이 늦어져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시련으로 다가오는 연단에는 그 특성이 있습니다.
1. 완전히 죽이지는 않습니다.
5절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전갈에 쏘이면 2시간 이내에 사망에 이를 만큼 강한데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으니 욥의 생명만큼은 손대지 못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탄의 손에 맡겼으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사망이지만(롬6:23, 겔18:20) 성도의 심령은 그루터기와 같아서 완전히는 죽지 않고 회개하면 소생하기를 반복할 뿐 아니라(사1:8-9), 욥의 재산이 파산한 것처럼 마음의 평강과 삶의 보배들에게도 시련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2.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여기 5달 동안의 5는 고통의 수입니다. 그런데 기간을 달(moon)로서 표현한 것은 달이 세속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세상과 육신에 속해 살 때 불 같은 연단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세속적일 때도 그렇지만(고후3:1-5) 복음을 모르고 율법적 양심만 커져도 환난에 빠집니다. 이 고통은 의를 갈망할수록 더 예민해지는데, 그러므로 담대하게 속죄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갈3:24). 충분한 복음 이해가 필요합니다. 나아가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거룩해지시기 바랍니다(히12:11). 이처럼 양심의 고통은 의의 말씀과 율법 아래의 성도에게만 있는 특수한 고통입니다.
3. 고통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입니다.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일반적인 고통은 초기에만 극심합니다. 반면 전갈에 쏘이면 근육이 마비되면서 호흡곤란 및 여러 시간 동안 통증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처럼 심령의 고통은 경감되는 법이 없습니다. 지옥의 고통과도 같습니다. 징계로서 다가오는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십니다.
6절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욥이 당한 고통을 연상시킵니다. 욥3:21에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으니 고통입니다. 자살을 한다고 평안할까요? 본격적인 고통의 시작일 뿐입니다. 성도는 고통 속에서 죽고 싶다고 기도는 해도 죽지 못합니다. 지옥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37:24에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고통을 느낄 정도의 수준에 이른 성도라면 완전하지 않지만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 시간 하늘에서 부르시는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썩어지고 멸망할 세상에 두었던 마음을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이 살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기까지 하나님의 강하신 그 손길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를 나의 구원의 주로 믿을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하늘에 속한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