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체육복 16. 세 잎 클로버, <행복이> 세 장 240718
전공이 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첫 발령부터 특성화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하다가 교직 8년 차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역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여자고등학교라 수업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관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부임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따뜻한 환대를 보내주는 아이들 덕분에 무사히 적응했다고 느끼며 첫 계절을 보냈다.
조금 신이 났던 건지 긴장이 풀렸던 건지 장마철에 수업을 지루해하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말까 밀당을 하던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여고생들은 유난히도 공포스러운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특히 장마철이나 구름이 많이 껴서 어두침침한 날 쉬는 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몇몇 아이들이 빔 프로젝터로 교실 앞 스크린에 무서운 이야기 영상을 틀어놓고 있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
“오늘 날도 꾸리꾸리하니 무서운 얘기가 딱인데 말야.”
“오, 쌤! 무서운 얘기 하나만 해 주세요!”
이런 호응이 나오면 없던 마음도 생긴다.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바로 들어주면 재미가 없다.
“하아, 진도가 급한데……”
서로의 속내를 알면서도 학생들은 선생님의 체면을 적당히 세워주고, 선생님은 수업을 잘라먹을 적절한 명분을 마련하는 밀당의 시간이다. 이제 아이들이 한 번만 더 조르면 못 이긴 척 옛 경험담을 풀어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암묵적 합의의 틀을 부숴버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쌤 그냥 진도나 나가요.”
“응?”
“다른 얘기 하지 말고 진도나 나가시라고요.”
“어… 어, 그래.”
당황스러운 마음에 내가 마치 귀신에게 쫓기는 괴담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등에 땀을 줄줄줄 흘리며 겨우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무안을 당한 것 같은 마음에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복도를 걷는데 다른 반에서 내 수업을 듣는 수빈이라는 아이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쌤~ 표정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좀 전에 어떤 반에서 ‘마상(마음의 상처)’을 받았다며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절주절 사연을 이야기하다 수업 종이 울린 후에야 우리는 각자의 교실로 향했다. 여느 교사들이 그러하듯 다음 수업 준비와 짬짬이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좀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5교시가 시작되기 직전 노크 소리와 함께 수빈이가 교무실 문을 빼꼼 열었다.
“쌤~ 드릴 게 있어요.”
수빈이가 내민 작은 포스트잇에는 점심시간 내내 학교 화단을 뒤져 찾은 세잎 클로버 세 장과, ‘쌤! 제가 가진 <행복이> 3개 다 드릴게요. 마상(마음의 상처) 안녕~ 우울 안녕~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상처받아 쪼그라들어 있던 내 마음이 벌떡 일어서는 걸 느꼈다. 이 작은 위로의 말이 한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선물처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받았던 것과 같은 위로와 격려를 돌려주고자 노력했다. 아침에 학교 안에 카페를 열어 따뜻한 코코아와 간식을 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성석제의 수필을 공부하는 시간에는 라면 국물을 들고 가 교실에서 나눠 마시며 저마다의 추억과 감상을 나눠보기도 했다. 때로는 오해와 상처도 받았지만, 학교 오는 게 재미있어졌다는 말과 조금씩 밝아지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교사로 살아가는 일의 보람을 느껴왔다. 학교급마다, 학교의 형태마다 저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살아가는 게 참 힘들다. 수행평가, 내신성적, 수능 최저등급, 학생부 종합전형, 교과 세부 능력과 특기사항……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경쟁’이라는 한 단어에 아이들이 해내야 할 그 많은 것을 욱여넣는 것이 선생으로 미안할 정도다. 그럴 때일수록, 괜찮다고,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너는 네 삶을 충분히 잘 살아내고 있다도 말해주는 어른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내가, 내가 여고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면, 아파 보이는 아이에게 먼저 말 걸고 손 내밀 줄 아는 용기 있는 선생이었다면, 그 출발점은 분명히 <행복이 셋>을 만난 순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