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56, 주학목장의 밤
서울역에서 토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천안역에 내리면 백석동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0여분 아산방면으로 달려가다 보면 지방도로 양쪽으로 완만한 구릉지가 펼쳐져 있는데 도로변에 주학목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두루周자 학鶴자 주학(周鶴)목장이다. 세상을 학처럼 높이 날아 주유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세칭 동방교 사주(四柱)중에서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호라고 하는데 세칭 동방교 교주인 노광공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같은 사주(四柱)목사인 양학식 베드로목사와는 같은 연배요, 그를 세칭 동방교로 인도한 인물이지만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그는 결국 노광공교주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세칭 동방교내에서 실권을 잡은 베드로목사를 위시한 강경파의 득세로 인해 배척을 당해 세칭 동방교 밖으로 밀려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주학목장은 6만여평의 목초지와 축사가 있었고 수십마리의 젖소를 길러 우유를 채취해서 우유 가공공장에 납품하던 목장이다. 물론 세칭 동방교의 수십개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중의 하나다. 전국 각지의 지교회에서 믿음이 특출하다고 인정받으면 이런 대기처란 곳으로 불러 모으는데 천국가기 전까지의 이땅에서 임시 대기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실상은 무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기위한 얕은 꾀임수다. 월급을 줄 필요도 없으며 밥만 겨우 먹이고 일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집합시켜 점호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순회자가 매일 다니면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곧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끝날것 처럼 종말론을 강조하면서 긴장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매일 정신무장을 시키는 것이다.
이런곳에도 인정은 존재하는가 보다. 서울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때 이곳에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한번 놀러 오란다.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 연단선님들 순회자로 일하고 있을때의 그 연단선님중의 한 여신도, 순회자와 연단선님으로 만난 재치있고 똑똑했던 인연많은 아가씨다. 나이래야 20대초반의 내 또래, 집이 충청도였는데 어떤 연유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매일 밖에 나가서 껌을 팔아 지성금을 바치는 일이 얼마나 고달팠으랴, 그일을 견디지 못하고 실적이 떨어지고 정신상태가 희미해지면 도망가기전에 어쩔 수 없이 미리 이런 농장같은 곳으로 보내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내가 입대한 이후 아마 이곳으로 재배치된 모양이다. 어찌 내 주소를 수소문해서 부대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보고싶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던 참이라 주말에 부대에서 외출을 나와 주학목장으로 가니 대기처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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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안양, 오산, 평택, 천안의 농장과 목장들, 또한 소사의 성지(聖地-교주의 무덤이 있는곳) 등 수 천 평에서 수 만평에 이르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농작물이나 목축, 과수를 재배했다. 바로 그곳이 무임금 노동력 착취의 현장이다. 나는 간부가 아닌 ‘십자군 보병’ 그 이름 보무도 당당히 소똥냄새를 향수삼아 지낸, 그 곳곳에 내 족적과 얼이 베여있는 곳이다.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70)
이 선님들도 나이가 들고 하루살이 행상이 고달프고 지치게 되면 지성을 바치는 실적이 오르지 않게 되는데 그러면 일반 대기자로 물러나 앉게 된다. 물론 ‘정신이 희미해졌다(믿음이 약해졌다)’고 극심한 타박을 받은 후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잡부수준의 하급 일반 대기자로 강등되어 내려앉는 것이다. 그래도 말세는 가까이 다가와 하늘의 진노가 임박해 있고 그때 휴거해서 하늘나라로 가야 한다는 세뇌가 아편중독같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아, 누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들이 바로 나였고, 내 또래요, 친구요, 동료들이었다. 어느 날 선님들과 잠시 짬을 내어 모였던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선님 중의 그녀는 흘러간 옛 노래 한곡을 구성지게 불렀다.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나르고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지금도 들리는 듯 하는 이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그 후 그 곳을 빠져나와 부모님이 계시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민 두 딸의 어머니가 되어있다. 이제 어쩌면 사위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행복해라, 희정아…….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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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학목장의 밤은 아름다웠다. 풀벌레소리 요란하고 밤하늘의 별은 어찌 그리 초롱초롱 하던지, 대기처중의 대기처, 그 중심이라 할수있는 용산의 '수원정'을 연상하고 살벌할것만 같았던 그곳에도 역시 인정은 숨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변방이라 감시감독이 소홀했던가, 나의 방문을 환영차 저녁식사후에 모두 평상에 둘러앉아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나는 하모니카를 불고 모처럼 세칭 동방교 답지않은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멀리까지 펼쳐진 목초지를 달밤에 걸어보는 것도 꽤나 호사스러웠다.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젖소를 구경하고 목초를 베고 여러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귀대했다. 군복무기간중 근무처가 서울이라 매주 외출을 나오면 특별히 갈곳이 마땅찮았던 나는 여러번 이곳 주학목장을 방문하곤 했다.
역시 잡동사니 가방 속에서 발견한 편지, 주학목장에서 보낸 히스기야의 것이다.
형 보이소.
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우째 몸은 건강 하십니꺼.
그리고 축하합니다.
짝대기가 하나 더 붙어셨다니.
짝대기 다 띠는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곳은 주님의 은총속에 소와 여러형제 다 잘 있습니다.
형, 고요한 겨울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한없는 은하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또 앙상하게 매마른 나뭇가지에는
환한 달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깨끗한 이밤,
누구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한없이 걷고 싶습니다.
그리고 형,
저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삽을 들고 소똥을 치고 두손으로 젖꼭지를 꽉꽉 잡으며
젖을 짜고 있습니다.
며칠전에 두 마리가 분만했는데 둘 다 숫놈을 낳았습니다.
이 기야(註, 히스기야를 이렇게 말한듯...)에 인상이 꽉 울상 되었습니다.
형, 이 목장 참 재미 있습니다.
저가 머 좀 배운것이 있다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을 아주 삼삼하게 적어보고
싶은데 내 마음에 모든 것을 글로써 표현하여 적지 못하는 것이
참 대기 안타깝습니다.
형, 형이 신문사(註1)를 통해 보냈다는 책이 오지 않습니다.
형, 거 책 꼭 좀 보내 주라 하이소(새마을12, 북한11,12)
저도 지금 책을 대기 기다리고 있는데 책이 안오네예.
형, 그라고 가고 싶은데. . . 하지말고 오이소.
저는 손, 발, 온몸이 우리 소들한테 꽁꽁 묶껴가지고
움직일 수가 없는 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딴사람보다 더 외롭습니다.
형, 형이 이렇게 생각 안해주면 누가 합니꺼.
어떤때에는 불러도 대답없이
불러도 뒤돌아 보지않고
조용히 차분히 개나리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소리없이 영영히 사라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형,
희망이 없는 곳으로는 발을 딛지 않는것이 좋지예.
또 형, 용기가 없는 인간은 죽은놈이라고
이야기 합디더.
형, 이 기야(註, 히스기야를 이렇게 말한듯...)먼곳을 바라보며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상봉에 그날까지
알찬 하루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끝으로 부탁, 캬츄사 아저씨(註2)하고 꼭 오이소.
또 신문사에 가서 책 빨리 보내주라 카이소.
그럼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천안에서 동생이
(註1:신문사는 ‘주간기독교’를 말하는 것이고,
註2:카츄사 아저씨는 군복무중인 내 친구 D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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