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은 장마, 8월은 작렬하는 태양볕과 휴가가 지금까지 키워드였건만, 올해 코로나19로 해외여행길로 막히더니 장마 시즌도 바뀌나 보다.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에 내려 억수로 쏟아지는 빗물을 헤쳐 청담동 '갤러리508'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날씨 패턴이 바뀌나 보다.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것은 없다. 예술도 고정불변이 아니다. 어떤 '일상 오브제'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름에 의해서 '예술 오브제'가 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샘'이라는 작품으로 올린 예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출신 개념 미술가인 장 피에르 레이노(Jean Pierre Ranaud, 1939~)의 '에스파스 레이노' 전시이다. '에스파스(Espace)'는 프랑스어로 '공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예술가를 생각할 때, 같이 붙어 다니는 키워드가 있다. 예를 들어 백남준-TV, 김창렬-물방울, 뒤샹-변기, 워홀-마릴린 먼로 등등 많다. 그러한 맥락에서 '레이노'는 '화분(Pot)'이다.
레이노는 예술대학이 아닌 원예학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읽은 슬픔과 알제리 전쟁에 대한 분노를 식물을 담는 화분에 시멘트로 가득 담아 표현한 것이 그의 첫 예술 작품이었다.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에 있으면 그냥 변기이고 전시장에 있으면 예술작품이듯이, 그의 화분은 정원에 있으면 일상 오브제이지만 미술관에 전시되면 예술 오브제가 된다.
<Pot, Fluo jaune 화분, 형광노랑>(2007) 합성수지, 페인트
'화분'으로 대표되는 그가 이번에 다른 오브제를 들고 왔다. 둥그런 과녁판이다. 그 안에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담았다. 작가의 숨은 뜻은 없다. 관람객 각자의 생각이 답이다.
위 <과녁 VI CIBLE VI>(2018) / 아래 <과녁 VII CBLE VII>(2018) 에나멜 칠 금속, 접착 테이프
왼쪽 <과녁 XXIX CIBLE XXIX>(2018) / 오른쪽 <과녁 XXXXV, CIBLE XXXXV>(2018) 에나멜 칠 금속, 접착 테이프
위의 작품 타이틀에서 한 가지 의아한 것을 발견했다. 로마숫자표기법에 의거하여 X(10) V(5) I(1) 등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숫자를 세어봤는데, 로마숫자에서 XXXX, 즉 X는 10을 의미하고 XXX은 30이지만, 위와 같이 XXXX는 존재하지 않는다. 40은 L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로마숫자라면 XXXX가 아니라 XL이어야 한다.
총으로 쏜 총탄의 흔적을 남긴 과녁판은 그의 신작으로 한국에는 처음 선 보이는 작품이다. 작품 타이틀이 <발사 0001, TIR 0001>(2019)부터 시작하여 '발사 0002', '발사 0003'... 이렇게 나가는 것을 보면, '0'의 갯수 감안 시 최소 1,000(천개)이상의 작품을 만들려나^^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들이 와 닿았다. 우리는 각자 총알 구멍들을 몸에 몇개 씩은 가지고 살아가지 않겠나 하면서.
레이노의 또 다른 오브제 페인트통이다. 이것은 내가 직접 만들어 집 인테리어를 해도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화, PEINTURE>(2009) 금속, 페인트
하얀색 통 3개와 빨강1 파란1, 노랑1하여 총 6개의 페인트통을 세워 붙인 다음 아크릴 판으로 감쌌다. 몬드리안이 생각났다.
<회화, PEINTURE>(2008) 아크릴, 금속, 나무, 페인트
<회화, PEINTURE>(2007) 아크릴, 금속, 페인트
그의 작품명과 작품재료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작품을 받치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받침대가 작품의 일부라는 것을. 자세히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그래서 혼자 웃을 때가 가끔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회화, PEINTURE>(2008) 아크릴, 금속, 나무, 페인트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뭐니뭐니 해도 화분(Pot)이다. 죽음 혹은 피를 상기시키는 빨강 화분, 그리고 황금 혹은 돈을 상징하는 금색 화분이다.
아래의 타일 작품 시기는 1990년이다. 지금 보다 30년 어렸을 때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옛날 타일로 되어 있던 집을 부수고 새로 집을 지은 이벤트가 있었다.
왼쪽 <타일+고리, CARRELAGE+ANNEAU>(1990) / 오른쪽 <타일+후크, CARRELAG+ANNEAU>(1990) 타일, 금속
레이노는 자기 집을 파괴, 즉 해체를 통해 자신만의 울타리를 허물고 새로 만들었다.
(c)wikimedia
(c)wikimedia
타일 작품은 1990년대이다. 아래는 하나의 타일에 빨강 얼룩들이 뿌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당시 내 카메라 조명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빨강 얼룩이 검은 색처럼 나오게 된 것이다.
<타일+회화>(1991)
<회화 2007>아크릴, 금속, 페인트
<회화 2007>아크릴, 금속, 페인트 - 위의 3작품의 제목과 연도는 동일하다.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할 듯하다.
해골에 각기 다른 오브제로 빨강과 노랑 깃털, 그리고 파랑 머리 집게를 꽃아 놓았다.
<라인>(1993~2010) 세라믹에 인쇄
중국 자금성에 놓여 있는 황금색 화분이다. "외롭지 않으려면 고독 속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 맞는 말이다. 파리 퐁피두센터에도 있다.
"예술품은 무결점이다. 타인의 시선을 만나기 전에는." 벽에 페인트통이 붙어 있고, 바닥에 주황색 화분이 놓여 있다. 일상 오브제라고 하지만, 화분의 안이 꽉 막혀 있어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페인트통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의 화분들은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경주 선재미술관, 부산 광안리, 통영 국제조각공원, 김포국제조각공원, 양평구하우스 등지이다. 내부가 시멘트로 꽉꽉 막혀 있는 화분에 대해 "원예학교에서 꽃을 기르는 법은 배웠지만, 꽃들을 죽음으로부터 막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시멘트를 채워넣어 또 다른 희생을 막고자 한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밝혔다.
8월 9일까지 진행하는 두산아트센터 건물 1층에 자리한 두산갤러리의 '사적인 노래 I' 전시를 아울러 소개한다. 본 전시는 기획자가 작가를 직접 뽑지 않고 스웨덴 알고리즘 딥러닝을 활용해 개발한 프로그램 큐라트론(curatroneq.com)을 이용해 선정했다고 한다.
공모에 지원한 350명의 작가는 자신의 작업 내용을 소개하고, 함께 전시하고자 하는 작가를 선정하였으며, 그것을 토대로 하여 큐라트론 프로그램이 작가를 선정한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협력 기획자를 선정하는 방식도 블라인드로 하였다. 이는 2017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서 전시 기획자가 자신의 배우자, 연인을 참여시켜 문제가 되자 기획자와 작가의 '사적인 관계'가 배제된 전시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실험적인 것을 하려면 후원자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두산갤러리는 이익을 떠나서 지속적으로 신진 작가와 큐레이터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해 오고 있다.
왼쪽부터 1)알렉시아 아페르테 쿠투 <성 제임스 공원의 분수>(2020) 관, 석고 유리섬유, 2)제임스 클락슨 <드롭박스>(2020) 레이져 커팅된 강철, 3)벽에 붙어 있는 작품은 발레리안 골렉 <M.알곳 2>(2020) 이케아 알곳 선반이다.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 4)물병, 5)텐트는 다음 사진에서 소개한다.
발레리안골렉 <만약 공유될 수 없다면>(2020) 빌려온 컵과 양동이 물
정재희 <홈보이드>(2018)스마트 텐트 스마트 폰 태블릿 컴퓨터 다육식물 외
아나 월드 <테크노 출산/미래 가능한 선물의 노래>(2019) 단채널 영상
영상 앞에는 설명서가 2장에 걸쳐 있다.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가 시작이다.
아래는 영상이 펼쳐지는데 그 얼굴들을 분석하여 오른쪽 데이터캐비넷에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진승 <미스 언더스투드>(2017) 단채널 영상
장진승<데이터캐비넷>
나오는데 벽에 뭐가 붙어 있어 자세히 보니 작품인 듯 하다. 찾아보니 알렉시아 라페르테 쿠투의 <비스듬히 누운나뭇잎들>(2020) 재료는 유리 모래이다.
두산갤러리 리셉션이다. 나는 현대예술 전시를 다니면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뭔가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욕구를 누그러뜨렸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관객이나 독자에게 맡겨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진중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아무 생각없이 보면 전시 자체로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