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그마의 수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올리는 이 글들은 작년에 썼던 글을 한번 더 올리는 글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이 글에 어렵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사실 어려울 거 하나도 없습니다.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수행은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깨닫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초월해야 깨달음이 오는 것인데 몸과 마음을 이러쿵 저러쿵 조작하면서 그런 것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백만년을 수행한다고 해도 결코 깨달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월되어야 할 몸과 마음이 반대로 무언가를 하면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게 앞과 뒤가 맞는 것이겠습니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몸과 마음은 스스로를 초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도란 "선택 없음"이라고 아래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살면서 다가오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선택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몸과 마음은 할 일이 없어져서 그냥 쉬게(정지)되고 그럴 때 몸과 마음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수행자가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때 수행자에게 "초월"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니그마의 수행 이야기 11. 중도란 무엇인가? ..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
이니그마 (persona6219@hanmail.net)
중도란 무엇인가? 구글에 보면 중도란 이런 것이라고 나열되어 있습니다.
중도(中道)는 불교에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고타마 붓다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불타로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중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대부분의 스님들이 이야기합니다. 구글에 보면 팔정도를 아래와 같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팔정도 ( 八 正 道 )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견 · 정사유 · 정어 · 정업 · 정명 · 정념 · 정정진 · 정정의 8가지 수행을 가리키는 불교교리.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견 · 정사유 · 정어 · 정업 · 정명 · 정념 · 정정진 · 정정의 8가지 수행을 가리키는 불교교리.
아래 영상을 보니 불교신자들을 위한 강의인 것 같은데 진리에 도달하겠다는 이들도 이런 영상들을 참고할 것만 같습니다. 아래 영상 같은 내용을 주제로 하는 스님들의 영상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맞는 말일까요? 당신이 부처를 믿고 절에 다니면서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고 그럴 목적으로 중도를 알려고 한다면 아래 영상에서 하는 말들은 맞습니다.
|#불교대백과|29.고행과 쾌락을 벗어난 길 "중도" #원영스님 #소나존자와거문고
하지만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라면 위의 말들은 틀립니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저 황당한 말들입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등등 바른 견해를 갖추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할 것.. 등등 이런 것을 지키는 것은 중도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겁니다.
아무리 바른 견해를 갖춘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아무리 바른 생각을 한다고 해도 역시 상대적인 것이고 아무리 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역시 상대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건 중도가 아닌 것이고 수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겁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중도를 지키려 하고 그것으로 진리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수백만년이 지난다고 해도 요원한 겁니다. 역시 이런 것은 수행이 아닌 수양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양은 그 사람을 위선되게 만듭니다. 이건 필연입니다.
진정으로 중도란 선택하지 않음입니다. 살면서 다가오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좋다, 싫다하면서 취사선택하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중도입니다. 살면서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취사 선택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마음이 쉬게 됩니다. 마음은 할 일이 없어지고 쉬게 됨으로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럴 때 마음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중도를 지킨다, 팔정도를 지킨다,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번잡스럽게 굴 때 그 마음은 영원히 쉬지 못하고 사라져야만 할 마음이 지가 잘난 줄 알고 끝내 사라지지 않고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겁니다.
스님들이 본질을 모르니 이런 헛소리들을 설법이라고 하면서 평생 하는 것이고 일생을 선방을 들락날락 거려도 수행에 있어서 아무 진전도 없는 것입니다. 승찬대사의 신심명이라고 있잖아요? 신심명 그 전체적인 내용이 바로 선택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선택하지 않음"인 것입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어긋남과 다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신심명.. 중략
현대의 깨달은 이들이 하는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치가 그럴 수 밖에 없잖아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수행은 몸과 마음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인데 초월되어야 할 몸과 마음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이상 초월이 일어나겠어요? 몸과 마음을 통해서 초월하려고 한다면 거북이 등에서 나무가 자라날 때까지 한다고 해도 그리고 토끼 대구빡에 뿔이 날 때까지 수행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겁니다.
중도란 무엇인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중도란 곧 선택하지 않고 살면서 다가오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중도인 것입니다.
중도에 대한 일화 하나 이야기하죠.
옛날 어느 마을에서 처녀가 애를 낳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들 "애 아버지가 누구야?" 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처녀는 인근 산에 있는 절의 스님을 애 아버지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낳은 아이를 스님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스님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들으면서 아이를 받았습니다.
처녀가 말했습니다. "스님의 아이입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아.. 그런가?!"
스님은 아이를 키우면서 수행에 매진했는데 아이가 열살 무렵이 되자 처녀가 나타나서 아이를 찾아가겠다고 말하면서 거짓말해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아.. 그런 것인가?!"
깨달은 이들도 말을 하고 마치 선택을 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중생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깨달은 이들의 생각이 나오는 출처 그리고 중생들의 생각이 나오는 출처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깨달은 이들의 생각의 출처는 진리, 즉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고 중생의 생각의 출처는 마음 즉 에고..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말을 어떻게 하든 그 자체로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고 중생은 중도를 지키려하면 할수록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도란? 아무것도 취사선택하지 않고 살면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중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에 인샬라Inshallah 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말은 "신의 뜻대로~" 라는 말인데 이 말이 중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이슬람교도들은 엉뚱하게 해석하면서 이 말을 써 먹고 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