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세계사-12】
동인도회사를 통해 처음 유럽으로 들어간 인삼은 조선산 고려인삼이었다.
17세기 중.후반까지는 일본을 거쳐 유럽에 들어갔고,17세기 후반부터는 중국에서도 인삼이 유럽의 선박에 실리게 된다.
중국이 개항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1684년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明나라 회복운동을 벌이는 정성공 세력을 진압한 뒤 청은 그동안 막았던 바닷길을 열었다.
민간 선박이 해외무역을 위해 출항하는 것을 허용함과 동시에 외국 상선의 내항을 위해 다섯 개 항구를 개방했다.
영국은 청으로부터 비단,차,도자기를 교역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다.
18세기가 되면 더 많은 유럽 선박이 중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차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17세기 전반 후추와 향료가 유럽의 주요한 수입품이었는데 점차 목면과 견직류의 비중이 늘었고, 18세기에 이르러 차와 커피의 수입이 크게 증가했다.
반면, 중국에 팔 수 있는 상품이 별로 없었던 상황에서 서양인들에 의해 북미삼이 중국에 상륙하게 된다.
18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인삼이 발견되자마자 영국, 프랑스, 심지어 스웨덴 선박들까지 그것을 중국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18세기 중엽 캐나다의 인삼무역은 최고 3,000%의 이익을 낸 적도 있었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인삼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1751년 인삼을 공식 무역품으로 전환하게 된다.
서양인의 출몰이 잦아지고 기독교 선교 활동이 확대되면서 중국에서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사회질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1757년 청은 쇄국으로 방향을 틀어 해금정책을 선포한다.
1759년 외국인을 관리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때부터 아편전쟁이 끝나는 1840년대까지 80여 년 동안 청의 해안에는 ‘광동시스템’이라로 불리는 관리무역체제가 취해졌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對중국 무역량이 가장 많은 국가로 부상했는데, 북미삼 무역에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인삼 무역에서 가장 큰 이익을 내는 방법은 차와 교환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원칙적으로 동인도회사가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흔히 인삼은 차와 교환되었다.
인삼은 미국의 독립 전까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수요에 비해 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중국 의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약재들은 큰 변화 없이 오랜 세월 지속됐다.
중국과의 대외교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약재는 오랫동안 인삼과 아편이었다.
설혜심의 저서 '인삼의 세계사'에서 인용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