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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지하므로 궁서체
..는 장난이고 쓰느라 힘들었어요. 그럼 스타또.
한일 청소년 평화 교류단 ‘맞선’, 그 짧지만 긴 이야기.
광주 진흥고등학교 김상지
시작은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 내 모교인 진흥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 김지현 선생님의 ‘너 해볼래?’ 그때 난 단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네’ 이 짧은 대화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애초에 꿈이 사학자였던 내겐 한일 양국 간의 평화 이룩 및 근로 정신대 문제 등 과거의 역사 문제 청산을 기치로 내건 이 프로그램이 큰 흥미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정식 정부 기관이 아닌 ‘근로 정신대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주관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먼저 내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꿈은 아까 언급했다시피 사학자다. 물론 사학자로서 우리나라 및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꿈꾸는 사학자의 모습은 다르다. 난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가 얽혀있는 다른 나라와의 역사적 분쟁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그런 사학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중에 독도, 그리고 위안부 및 근로 정신대 문제는 내게 있어 꼭 해결하고 싶은 과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역지사지. 난 상대방과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동안 외국에 나갈 기회가 없었던 내게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인터넷이나 TV와 같은 매체가 있었지만, 교류의 양이 제한되어있는 데다가 왜곡의 위험성까지 있어 그리 유용하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일본 학생들을 직접만나 교류와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로 하여금 참가를 결심케 한 결정적인 것이었다. 평소에 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같은 문제들을 보며 일본 학생들이 한국과의 역사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 하던 차였다. 또한 일본 아이들은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이런 내게 이 프로그램은 내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나아가 한국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일본 아이들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는 고맙고, 또 놓치기 싫은 프로그램이었다.
12월 4일, 광천동에 위치한 시민모임 사무실에서의 면접 날이었다. 면접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근로 정신대 문제는 몇 십 년 전의 일인데, 왜 아직까지 우리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최근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예전 외고 진학을 준비할 당시 선생님과 많은 연습을 했던 탓에 면접에 관해선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그 날은 정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버렸다. 기억력은 정말 좋은 편이라 자부하는데, 솔직히 그때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 관심이 많았던 부분들이라 어느 정도의 지식을 숙지하고 있던 덕분이었는지, 조리 있게 잘 대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내 면접에 합격했다는 문자가 내 핸드폰에 비쳤다. 그 동안 쌓아온 지식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솔직히 기분 좋았다.
12월 10일엔 같은 장소에서 교류단의 첫 만남 및 회의가 있었다. 그 곳에서 당시 근로 정신대에 끌려가셨던 양금덕 할머님을 만나 뵙고, 한 영상을 보았다. 그 영상엔 근로 정신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 당시 실제로 근로 정신대에서 혹사당하셨던 할머님들이 직접 말씀해주시는 장면이 나왔다. 난 모두가 분노를 넘어선, 뭔가 형용하지 못할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우는 아이까지 있었다. 우린 이 영상을 통해 우리가 프로그램에 왜 참가했는지, 참가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를 얻기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또, 우리 교류단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바로 ‘마주보고 서다’라는 의미의 맞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맞선들 역시 처음엔 서로 어색했지만, 이내 통성명도 하고 번호도 교환하고 점점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12월 11일엔 2차 회의가 있었다. 사실 기말고사 하루 전이라 부담도 아주 컸다, 하지만 난 장기적으로 보면 당장의 내신보다 이번 프로그램이 내 미래에 있어 더 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의에 참가했다. 2차 회의는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전대 후문에 위치한 한 라이브 카페에서 있었는데, 우리를 이끌어줄 배주영 선생님은 광주에 오는 일본 학생들이 ‘5.18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다. 이에 따라 우리 맞선이 일본 아이들에게 5.18에 대해서 소개 및 발표를 맡게 되었다. 발표할 부분을 나누는 과정에서 난 일전에 직접 답사해본 경험이 있는 5,18 구 묘역, 망월 묘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12월 17일, 18일엔 문화전당역 근처에 위치한 ‘희망’이라는 곳에서 회의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안건으론 바로 맞선 2기의 단장, 부단장 선거가 있었다. 난 단장에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맞선에 열심히 참여하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이틀의 회의시간 동안 자신이 맡은 발표 부분을 서로 읽으며 서로 점검해주고 정정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12월 20일 역시 ‘희망’에서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애초에 12명이던 맞선의 인원에 맞춰 일본 아이들 역시 12명이 오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7명으로 인원이 줄게 되어 맞선 2명에 일본 아이 1명이 한 그룹을 이루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아이들끼리 파트너를 선정했는데, 제비뽑기 결과 난 박솔 이란 누나와 파트너를 맺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를 떨어뜨리고 단장이 된 누나와 파트너가 되었는데, 든든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주요 안건으론 일본 아이들이 광주에 도착했을 때 들고 있을 환영 인사용 피켓의 디자인, 송별회 때 무슨 노래를 부를지에 관한 것이었다.
12월 23일 ‘희망‘에서 마지막 사전 회의가 있었다. 28일 있을 한일 청소년 토론회에서 이야기할 주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또한 28일에 주어질 자유 시간동안 일본 아이들과 같이 각 그룹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회의하였고, 각자의 발표 점검을 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송별회 때 부를 노래, Dream High와 Must Have Love를 연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난 노래엔 영 재능이 없는지라 처음엔 자신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다른 얘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안심했다(?). 소위 초등학생 창법으로 부르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듣기 좋은 합창이었다.
대망의 12월 26일. 프로그램의 막이 올랐다. 1시 까지 상무지구의 무각사로 이동해야했는데, 다른 아이들과 먹을 과자와 음료수를 사가다 보니 살짝 늦었다. 그래도 과자와 음료수 앞에선 모든 게 용서되는 법. 무각사에서 마지막 발표 점검을 마친 후 환영식 때 사용할 피켓을 제작하고, 노래를 연습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 어느새 일본 아이들이 오기로 한 시간인 6시가 다 되었다. 한 시민 모임 회원 분의 차로 송정리에 위치한 광주역까지 이동했다.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일본 아이들이 도착했다. 일본 아이들의 첫 인상은 전혀 일본인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은연중에 머릿속으로 ‘일본인은 이런 형태의 모습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여지없이 깨버리는 첫 만남이었다.
일본 아이들과의 첫 만남 후 숙소인 무각사로 돌아가 저녁 식사를 한 후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 밑 관련된 분들의 말씀을 듣고, 양국의 청소년이 짧게 인사를 하였다. 내 일본 파트너는 도카이 중학교 3학년의 센다 다케히로. 나이로 따지면 분명히 내가 형인데 별로 동생 같지 않았다. 일본인에 대한 내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내가 알던 ‘일본인’과는 분명히 다른 일본인이었다. 배려심 깊고, 착하고, 순진한. 그런 아이였다. 소개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했지만, 그냥 잘 수가 있나, 양국 아이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과자 파티를 했다. 비록 언어적 장벽이 있었지만, 그런 대로 서로 이야기도 나눠가면서 그렇게 첫 날의 밤이 깊어갔다.
다음 날엔 새벽 예불을 드리러갔다. 숙소가 무각사, 절이다보니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는데, 새벽 4시부터 일어나자니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비몽사몽한 채로 예불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먹었다. 많이 피곤했지만 기진맥진한 몸을 쉬게 할 여유도 없이 바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우린 운정동에 위치한 5.18 묘지를 답사하러 갔다. 망월 묘지가 첫 코스였는데, 하필 처음 순서인 망월 묘지가 내 발표 부분인 데다가 해야 할 부분도 굉장히 많아 부담감이 컸다. 망월 묘지에 대한 설명,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석에 대한 일화, 행불자들의 사진, 내 고등학교 선배이신 고 이한열 열사님의 묘역.. 그럭저럭 발표를 마치고 나니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하고,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며 아쉽기도 했다. 흡사 중요한 시험이 막 끝난 그런 기분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우린 신 묘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계신 5.18 항쟁 당시 돌아가신 영령들께 참배하고 난 후 고 김혜옥 할머님의 묘역 앞에서 일본 아이들의 사물놀이를 관람했다. 고요한 신 묘역에서의 일본 아이들이 연주하는 꽹과리 소리, 장구 소리.. 감동적이라기 보단, 인상 깊었다. 모든 참배가 끝난 후 전남대학교를 답사하고, 점심을 먹은 후 도청, 금남로, 자유공원 등을 순서대로 둘러보고 나서 다시 무각사로 이동했다.
우린 숙소 건물 3층에서 일제의 강제 동원에 관한 영상과, 그에 대한 양금덕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난생 처음 보는 많은 수의 카메라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영상을 보는 동안 치밀어 오른 여러 복잡한 감정, 그리고 양금덕 할머니의 말씀에서 묻어나오는 원통함에 당황스러움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양금덕 할머니께 질문을 여쭤보기도 했다. 당시 내 마음 속엔 할머니께서 그 때 과연 얼마나 아파하셨을지, 얼마나 억울하셨을지 잘 가늠이 가지 않지만, 더 이상 원통해하시지 않게 우리가 바꿔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바꾸겠다는 의지를 할머니께 보이고 싶다, 그런 일념뿐이었다.
할머니와의 시간이 끝난 뒤 저녁 무렵, 무려 삼겹살을 먹으러 고기 집으로 이동했다. 무각사에서 내내 절식, 채소만 먹던 차에 드디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지만.. 내가 앉은 테이블엔 손님인 일본인 두 명,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선배 한명. 결국 고기는 내가 굽게 되었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은 고기를 굽고, 그렇게 적은 고기를 먹어본 적은 처음이다. 다행히도 스태프 형 누나들께서 챙겨주셨지만.. 뭔가 씁쓸한 저녁 식사였다.
원래 다음 목적지는 홈스테이 장소인 내 집이였지만, 타케히로가 한국의 마트를 둘러보고 싶다기에 먼저 다른 조와 같이 대형 할인 마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카트를 끌며 시식코너도 돌아다녀 보고, 일본 마트와 다른 점, 일본 음식, K-pop 등 여러 이야기에 대해 담소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밤이 너무 깊어버렸다. 하지만 카트는 텅텅, 타케히로한테 뭐 사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Just window shopping'. 물론 실제로 산 건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카트 안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트에서 나와 타케히로와 같이 택시를 타 집으로 가면서 난생 처음 해보는 홈스테이에 두근거리기도 하고, 과연 어색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내심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엔 내 친형이 있었다, 문제는 직업이 문제. 아무래도 군인이다 보니, 일본과의 관계에 굉장히 민감한 면이 있는 내 형이었다. 사실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형은 어디서 연습했는지, 일본의 저녁인사인 ’곰방와‘를 외치며 반겨주었다. 심지어 웃으면서. 그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진 우린 음식, 음악과 같은 가벼운 얘기부터 정치, 경제까지 폭 넓은 이야기를 했다. 숨 가쁜 두 번째 날도 이렇게 흘러갔다.
세 번째 날인 28일, 이번 프로그램에서 가장 취지에 맞고,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 한일 청소년 토론회가 있었다. 전날 영상을 시청했던 바로 그 무각사 숙소 3층에서, ‘교류란 무엇인가,’‘교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일 교류단 사이의 대화의 장을 열었다. 굉장히 많은 얘기가 나왔지만,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교류란, 서로 ‘아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일 간의 교류를 위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서로에 대해 정확히 알려야 한다. 그것이 지금 당장 우리가 학생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적어놓고 보니 되게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K-pop등 대중 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문화 교류, E-pal등을 통한 직접적인 교류. 서로의 역사 교과서를 교환해보는 활동 등 굉장히 구체적인 방안들도 많이 나왔었다. 그동안 속으로만 해왔었던 생각들을 마음껏 내보일 수 있어 굉장히 유쾌한 시간이었다.
의미 깊었던 활동이 끝난 후 한국의 문화를 체험해보러 대인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 미션이 주어졌는데, 바로 대인 시장 안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내 그룹은 다른 그룹과 같이 중국집에 가 자장면을 먹었는데, 맛이 너무 별로여서 솔직히 일본 아이들에게 창피했다. 그런 대로 그릇을 비우고 나서 나전칠기를 만들어보는 활동을 했는데. 어째.. 일본 아이들이 역시 손재주는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활동 도중 갑자기 모 방송사의 인터뷰 프로그램이 들어와서 또 한 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일본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방송을 촬영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문화 체험을 마치고, 대망의 ‘한 일 청소년 교류 프로젝트’ 즉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내 그룹은 마음이 잘 맞는 다른 한 그룹과 함께 광주의 중심가, 충장로로 이동했다. 타케히로를 위해 아트박스에서 노트를 사다주기도 하고, 노리존에 가서 한바탕 신나게 놀면서 서로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특히 일본엔 타가디스코(디스코 팡팡)가 없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한국의 맛을 보여주자는 생각에 일본 아이들을 태워주니 좋아죽는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도 너무 즐거웠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금세 가버린다는 말은 바로 여기 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너무 늦기 전에 아쉬움을 남기고 무각사로 다시 돌아왔다.
무각사에서의 저녁 식사 후 송별회에서 서로 활동하며 느낀 점들을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괜히 가슴이 찡했다. 하지만 마냥 우울해하는건 우리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맞선 단원들이 준비한 대망의 무기인 합창곡을 신나게 불러준 후 과자와 치킨을 깔고 마지막 파티를 벌였다. 롤링 페이퍼를 써가며 서로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도 해보고, 타케히로에게 내가 준비했던 선물인 우정 목걸이를 걸어주니 타케히로도 내게 일본에서 가져온 선물을 주었다. 겉을 보니 일본 과자인 듯 했는데, 아까워서 아직 제대로 뜯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일 교류 단원, 스태프 형 누나들 모두 어울리며 새벽까지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마지막 날인 29일엔 감기 기운이 들었는지, 잠을 잘 못자서 그런 건지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몽사몽한 채로 아침을 먹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배웅해주러 광천 터미널로 이동했다. 기념 촬영을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가 돼서야 진짜 우리가 헤어지는 것이구나, 하면서 프로그램이 끝났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쉬워서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저 가는 버스를 멍하니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다들 한참을 그렇게 아쉬워했다.
3박 4일, 사전 회의 날짜까지 포함하면 거의 10일 동안의 교류 기간 동안, 너무나도 느낀 점이 많아 이 짧은 공간에 다 적기는 힘들 것 같다. 이 프로그램을 받기 전의 나는 일본에 대해 막연한 ,그러나 뿌리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내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난 내가 알고 있던 일본이 실제 일본의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번 프로그램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한일 과거사 청산, 즉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정당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는 것이지만, 난 그에 앞서 먼저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즉 서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그 문제라고 느꼈다. 먼저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정상적인 교류가 가능한 것일까, 교류를 통해 대화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과거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대화든지 교류든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쪽이었다면, 지금은 먼저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해야 한다, 교류를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고 싶다. 한국과 일본, 그 둘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이렇다보니 서로에 대한 작은 오해도 크게 부풀려져서 이미 가뜩이나 일그러진 서로의 감정을 더욱 망가뜨리고, 왜곡시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추구하는 한일 간의 역사 문제 청산을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 아닌, 진정한 의미로써의 대동아 공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길었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또 뜻하지 않게 매스컴을 많이 타게 되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 한순간의 머뭇거림 없이 지원할 생각이다.
또한, 비록 정식 교류일은 끝났지만 2012년 1월 9일 한국 맞선 2기 단원들끼리의 간담회가 있었다. 서구청 앞으로 새로 이전한 시민모임의 사무실에서 간담회가 열렸는데, 그곳에서 우린 교류단 활동 동안 부족했던 점과 반성할 점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앞으로 우리 맞선 2기가 어떤 방향을 가야할지에 대해 토론해보았다. 간담회에서 향후 맞선의 방향을 얘기할 때에 난 시민 모임 대표이신 김희용 선생님께서 교류 첫 날 우리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해 뿌려지는 씨앗이다‘ 씨앗이 아름드리나무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한일의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 역시 긴 시간동안 노력해야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이번 모임이 비단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정기적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낸 결론은 이것이었다. 앞으로도 페이스 북이나 이메일 등을 통해 일본 아이들과의 교류를 유지하는 동시에, 우리가 28일, 한일 청소년 토론회 때 얘기했던 것처럼, 진정한 한일 간의 교류를 위해서 우리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하자.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 한일 간의 교류를 위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지자. 이에 따라 우리는 앞으로도 맞선이란 이름으로 계속 모임을 갖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 맞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솔직히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지금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내가 사학자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았단 것이다. 정말로 이 활동을 하면서 크나큰 보람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내 파트너였던 센다 타케히로에게 부족한 나를 배려해줘서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해서 정말 소중하고 고마운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 쑥스러워 그랬는지 앞에선 하지 못했던 말이지만, 이제 해야겠다. 맞선 1기 스태프 분들, 시민 모임 단체 회원 분들, 배주영 선생님, 맞선 2기 단원들 모두 긴 시간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영원히 못 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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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 010 2421 4020
페이스북은 알아서 거시고. 근데 아마 안할거에요.
트위터 따윈 안하고, 싸이월드 www.cyworld.com/carliosophy
알아서 일촌. 네이트온은 ksz7914@hanmir.com입니다.
맞선 2기. ㅅ..ㅅ..사..사진 참 많이 찍은것 같아요! 그렇죠?
아, 그리고 다음 모임이 15일? 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소는 부드러운 직선일텐데.. 시간대를 몰라서요. 각자 댓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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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5일이아니라...14일이야~~ㅋㅋ토욜임
저도 긴가민가해서 물음표 붙였어요 ㅋ
아직솔이가연락이안옴ㅋㅋㅋ연락오는데로 카톡&문자로보내주껭!!ㅎㅎ
ㅋㅋ 상지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애~~ 차도남인 듯 하면서 은근 배려심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