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was love
<지난 이야기>
나는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선배를 처음 만난 기억, 함께 웃으며 산책한 기억, 선배과제를 도와주며 밤 샌 기억, 혼자 있을 때마다 선배가 떠올랐던 모든 기억을 그 속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돌에 묶어 호수로 던져 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그녀가 내마음속에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나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 안에 사랑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선배를 더 밀어냈는지도 모르겠다.
<4부>
가을비 치고는 비교적 쌀쌀한 날씨에 나는 상우선배에게 받은 메이크업 책자를 더욱 안고 길을 걸었다. 비는 생각보다 오지 않았지만 목요일 오후라 캠퍼스는 많이 한산해 보였다. 그나마 비오는 교정을 다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고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기계속의 부품같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바삐 움직이는 듯 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도 저들처럼 그저 살아가기 바빴다. 생각하는 것은 사치로 여기며 일체 여유는 용납되지 않는 채 엄격한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줄 같이, 나를 양쪽으로 잡아당기며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선배를 본 이후로 3년 전, 호수로 던져버린 손수건이 다시 나에게 날아와 기계처럼 움직이던 내 머릿속을 고장 내 버렸다. 다시는 이런 미련하고 머저리 같은 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강의실 앞에서 선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를 보며 알았다. 이건 내 의지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고...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처럼 그녀라는 세포가 암처럼 퍼져 그냥 그렇게 반응하는 거라고. 그 순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다 잊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고 나는 아직 이 불치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된 채 그녀라는 병을 견디고 있었다. 삼키면 삼킬수록 달콤하지만 끝 맛은 쓰디 쓴 이름 모를 열대과일 같은 느낌의 불치병.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그녀에게 향하는 순간은 세상이 던지는 고통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것 뿐, 나의 이성은 사실 그녀를 온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칠 줄 모르던 비는 점차 잠잠해지다 이내 그쳤다. 하늘은 회색빛을 머금은 구름 사이가 갈라지며 숨어있던 햇빛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지상에는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늘한 날씨에 뒤섞여 주변의 시야를 가리던 안개는 귀신처럼 사라졌고 하루 내내 내린 빗물은 사방에 고여 땅위에 있는 대부분을 떠받들 듯 그 모습을 거꾸로 비춰 거울놀이를 하고 있었다. 가을비가 주던 침침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춰 버렸다. 심지어 미약했지만 캠퍼스에 따뜻한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날씨가 이렇게 한꺼번에 바뀔 수 있나하고 놀랄 때쯤, 선배의 손수건을 던진 이감호수가 보였다. 전과 변함없는 잔잔한 물결, 반 쯤 낙엽으로 덮인 주변 언덕 길, 드문드문 지나는 하얀 백로와 오리들이 호수의 아늑함을 대신 전해 주었다. 나는 잠시 벤치에 짐을 올려두고는 눈앞의 호수를 감상하기로 했다. 오후의 붉은 햇살이 하늘과 호수에 본격적인 덧칠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랫배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오늘 선배를 찾아다닌다고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사람이 어딘가 빠져 있음 기본적인 몸의 반응도 못 느낀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인지 선배에 빠져있다 한숨 돌리고 찾아온 허기는 다른 때보다 강렬했다.
배고픈 짐승은 예민해지기 마련인지 어디선가 고소한 풍미의 냄새가 났다. 주변을 살피니 몇 걸음 가면 도착할 거리에 조립식 컨테이너를 개조한 핫도그 가판대가 보였다. 평소 이러한 종류의 음식을 즐겨하지 않았지만 이미 강한 식욕이 취향을 쉽게 이기고 난 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핫도그 가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녹색과 빨간색으로 정갈하게 칠이 되어있는 부스위에 비교적 다양한 종류의 핫도그 메뉴가 적혀있었다. ‘하와이안도그’부터 ‘엘로테도그’까지 생전 처음 들어본 메뉴들을 보며 핫도그로 이렇게 다양한 조리가 가능한 것에 새삼 놀랬다. 그렇게 한참을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함에 둘러보았지만 나중에는 고질적인 결정 장애 때문에 종류만 계속 반복해서 볼 뿐, 선택을 못하고 멍하니 메뉴판만 봐라봤다. 그러는 와중에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버팔로도그 2개 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어제 술자리에서 본 빨강머리 소녀였다. 그녀는 어제보다 더 눈에 띄는 노란색 프린팅 티셔츠에 청색 숏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표정도 오늘 더 부드러워 보였다.
“선배 버팔로도그 괜찮죠? 못 고르고 있는 거 같아서.”
“응, 머 괜찮아.”
“여기선 이게 제일 나아요.”
그녀가 말하자 맞은편의 점원도 동의하는 듯한 얼굴로 핫도그를 만들었다. 몇 분이 되지 않아 점원은 핫도그 2개를 우리에게 건넸다.
“여기요.”
핫도그를 받으며 그녀는 체크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아니, 이건 내가 살게.”
“됐어요. 저번에 신세진 것도 있고.”
“아니...내가 사려고 했는데...”
점원은 우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소녀의 카드를 받아 계산하며 계산을 두고 벌어진 우리의 실랑이를 끝내주었다.
“잘 먹을게.”
“네”
그녀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말괄량이 같은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과 대답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게 또 그녀의 매력이었다. 우리는 한손에 핫도그를 들고 이미 황혼으로 물든 구름과 호수를 등지며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안 물어봤네. 난 민철우. 너는?”
“선우요. 민선우. 남자 이름 같죠?”
그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소녀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머, 약간?”
“외모도 이름 따라 간다고 어릴 땐 머리도 남자처럼 하고 다녀서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한 번씩 길 가다가 여자들한테 번호도 받고.”
“에이 그건 좀.”
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선배가 안 봐서 그렇지 저 숏 컷으로 머리 자르면 봐줄만 해요. 뭐 그러고 다니고 싶어서 그렇게 다닌 건 아니지만.”
선우는 핫도그를 한 입 먹으며 말했다.
“음, 다시 보니 어울릴 것도 같네.”
“사실은 그게 너무 싫었어요. 사람들이 남자로 보는 거. 그래서 대학 와서는 염색도 하고 치마도 입고 화장도 했죠. 여자로 보이고 싶기도 했고 옛날모습도 지우고 싶어서...”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약간은 서로 어색한 기운을 느끼며 걷고 있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니 다시 비가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었다.
“비가 다시 오는 거 같은데요.”
“그러네.”
나는 대답을 하고 짐을 살피다 순간 멈칫했다.
‘우산이 어디 있지? 아!’
우산을 찾다 호수 근처 벤치에서 우산을 깜박하고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뭐 찾아요? 우산?”
선우는 나를 한 번 흘깃 보며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민트 색 에코백에서 느릿느릿하게 자줏빛 우산을 꺼냈다.
“자.”
그녀는 우산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어?”
“자요. 이런 거 원래 남자가 드는 거 아닌가?”
그녀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어.”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우산을 펼쳤다.
3단 우산이라 그런지 우산은 생각보다 작았다. 그 크기만큼 우리는 비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아까보다는 더 가까운 상태로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그녀에게 우산을 덮어주려 우산의 머리를 오른쪽으로 향하게 했다.
“선배, 그 책들은 뭐에요? 선배 메이크업 배워요?”
그녀는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이거? 누가 줬어. 공부하라고.”
나는 약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 책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의외네요. 그런 것도 배우고. 근데 그 책 아까부터 비에 젖는 거 같은데 이리 줘요.”
선우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줘요. 주신 분이 책이 이렇게 된 거 알면 속상해 할 거예요.”
선우는 책을 반 강제로 뺏고는 가방에 넣었다.
그 순간,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묘하게 비슷한 상황에 느낌이 이상했다. 바보같이 집으로 내려간 선배가 걱정이 되면서...
“선배.”
“어?”
“전에 보니깐 술 어느 정도 먹는 거 같은데 나 술 한 잔 사줘요.”
그녀가 약간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사실 술을 잘 못하는 나였지만 그 제안이 싫지는 않았다.
“나 술 못해.”
“뻥치지 마요. 어제 그 맥주 원 샷은 뭐야?”
“그건 게임이니깐 어쩔 수...”
“그냥 먹으러 가요. 나 술 먹고 싶어요. 내가 핫도그 사줬으니깐 이번엔 선배가 술 사줘요.”
그녀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래, 먹자. 그 대신 메뉴는 내가 정할게. 비도 오니깐 파전에 막걸리 어때?”
나는 최대한 마지못해 승낙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네요. 나 나중에 기숙사 들어가야 되니깐 얼른 가요.”
그녀는 나의 손목을 살짝 끌며 한 걸음 앞서 걸어 나갔다. 나는 손목에서 날씨보다 차가운 그녀 손의 체온을 느끼며 따라갔다.
우리는 그녀가 한 번 가봤다는 ‘나누리’라는 이름의 주막으로 갔다. 교외의 시골길에서 한 번쯤 봤을법한 집의 구조를 하고 있었다. 유광의 파란색 대문이 인상적인 외형이었다.
“여기에요.”
그녀가 나에게 접은 우산을 받으며 말했다.
“일반 가정집 같은데.”
“이래 보여도 안은 넓어요. 들어가요.”
그녀가 먼저 대문을 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비닐로 임시지붕을 만든 마당은 서너 개의 테이블이 있었고 문 없이 실내가 훤히 보이는 내부도 사람들로 북적했다. 아무래도 빗소리를 안주로 한 잔 걸칠 생각을 우리만 한 게 아닌 듯 보였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다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미..진 선배?’
분명 상우선배의 말로는 집에 내려갔을 미진선배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실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는 걸 봐선 어딘가에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우야, 여기 너무 정신없는데. 다른데 가자.”
나는 황급히 뒤로 돌며 선우에게 말했다.
“네? 괜찮은 거 같은데. 여기 별로에요?”
선우는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번 더 그녀를 설득하려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화장실이라는 팻말아래에서 또 한 번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어? 철우야. 여긴 어쩐 일이야? 미진이 연락받고 왔어?”
상우선배였다. 선배는 약간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는 하나도 안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또 뵙네요. 미진선배랑 같이 오셨어요?”
상우선배는 내 인사를 눈으로 받으며 옆에 있는 선우를 보았다.
“어, 미진이가 불러서 온 거 아니었나 보네. 옆에는 누구?”
“우리 과 후배에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0학번, 이름은 민선우고요.”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상우선배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어, 안녕. 반갑다. 난 이상우야.”
기생오라비 같은 표정으로 상우선배는 인사했다. 선우는 고개만 까딱하고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잘됐다. 맨날 똑같은 멤버로 술 먹는 것도 지겨웠는데. 이렇게 본 김에 같이 합석하자. 괜찮지, 선우후배?”
상우선배는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우리에게 물었다. 마음 같아선 이곳을 벗어나 도망가고 싶었지만 내 발은 그들과 함께 미진선배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 4명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함께 술을 먹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