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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위력을 맛보라!
골로새서3:15~17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저는 요즘 저녁 8시에 Internet을 통하여 생중계되는 다니엘 기도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다니엘 기도회는 국내외 13,000여 교회와 40만 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같은 시간에 한 마음 되어 찬양을 드리고 말씀과 기도가 있는 축제의 현장입니다. 매일 여러 강사 분들이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 분들이 신앙의 성공자로 우뚝 서게 된 이유에 대한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대부분은 말로 형언치 못하는 수많은 고난을 겪고 절망의 과정을 지났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는 험악한 지경에서 그것을 딛고 일어 설 수 있었던 것은 끝임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긍정적인 신앙의 배후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하여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고 불평과 원망을 이겨나갈 수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중에 교회오빠 이관희 집사의 부인인 오은주 집사의 간증에서 나타난 이관희 집사의 신앙이 제게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전역하여 대기업에 취직한 이 집사는 성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인생의 먹장구름이 덮쳤습니다. 대장암 4기로 얼마 남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야 된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서 자살한 사건,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마저 혈액암 4기의 진단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한창 신혼의 단꿈을 이어갈 결혼한 지 3년이 되면서 이런 불행이 연달아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3살 된 딸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를 세상에 두고 떠나야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무엇 보다 주님을 사랑했고, 그 분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세상의 죄와 거리를 두고 신실한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저들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처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켜 보니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고 내 육신은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만 자기의 영혼은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 점차 마음이 새로워지기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일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근거라며 자신만의 손익계산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왼편엔 하나님께 받아온 은혜가 쌓여 있고 또 다른 편엔 인생에서 마주한 아픔과 고난이 쌓여 있는데 항상 계산해 보면 은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감격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뼈를 녹이는 듯한 통증이 온 몸에 몰려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들어갔지만 그들의 신앙여정은 KBS TV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고, 영화와 책으로 고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과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사를 하게 되는 이유가 세 종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만일(If)’의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조건부 감사입니다. 통계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 70%정도의 교인들이 이러한 조건부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무엇을 해주신다면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일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일 선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는 일차원적인 감사이며 초보적인 감사이며, 어린아이의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때문에(Because of)‘의 감사가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 20%정도의 교인들이 때문에의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자녀를 대학에 합격시켜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남편 사업이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입니다.” 이것은 If의 감사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아직도 온전한 신앙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감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감사가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 10%정도의 교인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교통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부도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줄 믿고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이것은 조건에 관계없는 감사입니다.
오늘 골로새서를 기록한 사도바울은 지금 차디찬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매인 채 갇혀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나이가 상당히 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온 것을 알았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외로웠습니다. 차가운 옥중, 늙은 몸,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사실은 그런 외롭고 쓸쓸한 상황에서 그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항상 감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매 장마다 감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감사를 가르칩니다. 감사를 권면합니다. 그는 상황을 초월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는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인하여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강은 구약에서 ‘샬롬’을 말하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 한 막간을 말하는 것으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수많은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잠깐의 공포가 떠나고 잔잔한 평화가 찾아드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인사말인 ‘샬롬’에서 이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소국가입니다. 그들에게 둘러쳐 있는 나라들은 한결같이 군사력이 강대한 나라들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언제 어떻게 그들이 자기들의 영토를 향하여 진격해 들어 올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잔잔한 평화를 누리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샬롬!’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 샬롬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요란하고 힘겹게 보이더라도 주님은 나의 요새요, 산성이며 피난처가 되시기에 그 분의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는 것을 믿기에 나는 평화를 누리고 있음으로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15절) “주장하게 하라”는 말은 “지배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평강을 해치는 것이 걱정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인 요인 감사하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걱정이라는 말은 영어로 ‘Worry’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사냥개가 짐승을 물고 흔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냥개가 짐승을 사냥해서 목덜미를 물고 흔들면 죽게 됩니다. 걱정이 목을 물고 흔들어 사람을 죽게 합니다. 내 마음을 걱정에게 맡기는 것을 사냥개에게 목덜미를 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을 아무나 와서 주장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평강이 깨지고 불안감이 생기면 감사할 마음이 싹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이런 두려움, 근심, 염려, 걱정들이란 어두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고 이것을 방치하게 되면 점차 마음에서 평강이 떠나게 되고 감사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을 유지하는 길이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 보혈 앞에 내어놓을 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감정들을 숨기지 마십시오! 그 감정을 그대로 주님께 내어놓고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감정의 문제를 털고 일어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로 감사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특징은 살았고 운동력 있다는 것입니다. 수 천 년 전에 선지자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오늘에도 변함없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제 큰딸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제가 심방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더니 제 아내가 다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앉아 펑펑 우는 것입니다. 제가 당황하여 어찌 된 일인가 물었더니 딸아이의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면담을 하자고 하여 갔답니다. 그랬더니 담임께서 아이가 너무 모범적으로 수업에 임하고 얌전하며 용모가 단정하여 참 영특한 아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예상 밖에 학기말 시험을 치렀는데 여자 아이들 중에 꼴찌를 하였다고 자신도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아내가 서럽게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동생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TV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고 있는 겁니다. 저는 어이가 없어 아이에게 “얘 너 학교에서 꼴찌를 했다는데 웃음이 나오니?”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저에게 무어라 말하는지 압니까? “남자 아이 중에 나 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한 명 있는데 뭘~”그러는 겁니다. 그 때 제가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공부를 못하는 것 보다는 저렇게 밝고 천진난만한 것이 좋지 않겠나 싶어 아내에게 우리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자고 권면하였습니다. 아내도 돌이켜 보니 공부 못하는 것이 크게 원망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던지 돌아오는 주일에 딸 아이 이름으로 감사예물을 드리며 불평한 죄를 회개하고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도 아이들 이름으로 늘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기도해 왔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감사입니다.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은혜와 내게 남겨진 축복으로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해서 따돌림 받거나 열등감을 갖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늘까지 밝고 환하게 성장한 것을 보고 감사의 위력을 저희 부부는 확실히 경험하였습니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환난을 당할 때 쉽게 원망과 불평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끌림을 따라 그렇게 행하면 어둠의 늪으로 더 심하게 들어갈 뿐입니다. 그럴 때 무조건 감사를 외치십시오! 만약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그 상태를 하나님께 그대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치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죄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보십시오! 내가 겪는 상황이 감사로 이러질 때까지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감사할 수 있고 감사로 주님께 나올 때 하나님의 돕는 손이 나를 위경에서 환난에 건져 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농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몇 명되지 않는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는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드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어느 날 밖에서 외출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큰 아이와 둘째 아이가 당시 6살과 3살 이었는데 입에 벌건 것이 묻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아빠 엄마가 없는 사이에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 없으니 토마토 케챱을 서로 나눠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냉장고에 아무런 것이 없고, 부엌에는 쌀도 기름도 소금마저도 떨어졌습니다.
목회자이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저 자신이 참 초라하다고 여겼습니다.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저야 사명자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자식들에게 까지 무능한 아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기도에 주님께 따지듯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의 머슴들도 주인은 배를 곯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어찌 만군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이렇게 대우하십니까?”그랬습니다. 한동안 씩씩거리며 기도를 하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숨을 몰아쉬고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제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종아! 내 이름으로 네가 부요함을 선언해라!”이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1편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그러면서 또 외쳤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 이름으로 선언하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부엌 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리로 갔더니 부엌문 앞에 누런 종이봉지에 쌀이 한가득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전율이 생겼습니다. 저는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부자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난 줄 아십니까?
서울 천호동에 계시는 권사님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며 봉고차에 쌀과 라면, 식용유, 소고기, 떡국 떡을 넘치도록 보내오셨습니다. 그 당시 20만원은 큰돈이었는데 매달 제게 그렇게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서울에 부목사로 부임할 때까지 그렇게 보내셔서 저는 농촌 목회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지내왔고, 오늘까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이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져다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구할 때 감사가 필수적입니다.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남미와 북미 지역을 조사해 보았더니, 남미는 북미보다 훨씬 좋은 자연환경과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 최강의 풍부를 누리고 사는데 남미는 여전히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금하여 연구를 한 결과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북미는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개척한 ‘감사의 땅’이지만 남미는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개척한 ‘탐욕의 땅’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국은 1620년 9월16일 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청교도들이 자유를 누리며 신앙을 지키기 위행 102명이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영국을 떠나 대서양을 가로질러 식량부족과 폭풍, 등의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같은 해 12월 26일에 그들은 미국의 한 이름도 없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 도착하자마자,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겨울을 보내게 되었는데, 또 한 번의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서 그들 중, 반 수 이상 죽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 가지고 왔던 밀, 옥수수 등의 씨를 뿌려야 하는데, 그들 대부분 도시의 지식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사짓는 법을 몰라서 또 한 차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한 인디언이 찾아와서 이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인디언의 지도를 따라 여름 내내 열심히 농사를 지어, 가을에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이때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운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또 함께 1주일 동안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때가 1621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이 받은 축복의 땅 미국에서 드린 최초의 청교도 추수감사예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전례가 되었고,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뿌리에는 감사가 깃들여 있습니다. 감사는 영혼을 풍요롭게 하며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 감사할 때 믿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추수감사절을 맞는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목사님 말씀을 듣고 개인적으로 묵상한 내용입니다.
추수감사절 예배에 가지는 못했지만, 저도 한 해를 무사히 보낼수있었던것과 올 한해에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평강속에 살았던 날들을 고백하며 감사드렸습니다.
나를 둘러싼 물질과 환경뿐만 아니라, 내 내면에도 자리하셔서 어느 순간에도 항상 그자리에 계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과 친구에게도 말못할 고민과 힘듦을 예수님께는 거리낌없이 고백할 수 있고,
나의 약하고 여린 모습도 있는그대로, 그 자체로 사랑해주심에 더욱 더 감사합니다.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사고가 제 인생에 아직은 없었습니다. 작은 교통사고가 두어번있었으나 크게 다친적이 없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래서 더욱 더 부족함없이 키우시려는 부모님의 노력하에
큰 부족함없이 자랐습니다. 평균이상의 성적을 유지하여, 대학을 가고, 지금의 직장까지 어쩌면 순탄하게 살아온 인생입니다.
어릴때 운이 좋은 적도 많아서 신이 나를 선택한게 아닌가(?) 하는 귀여운 착각도 했었지요.(ㅎㅎ)
하나님을 믿고나서 29년 짧은 인생을 돌아보니, 감사를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그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의 끌림으로 교회를 나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했을때 무척이나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말씀에서 언급된 '교회오빠'에 대한 책을 얼마전에 읽었습니다.
어찌나 감동스럽고, 눈물이 나던지..
제가 대장암부서에 있어서 더욱 더 몰입했던것같습니다. 이관희집사님의 말기암상태와 마지막 모습이 상상이 되어서요.
우리 환자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눈물로 감사를 외치던 이관희집사님의 굳은 신앙이
제게 큰 영감이되고, 교훈이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책에서 남은 날이 많지 않은 이관희집사가 얘기합니다
"나는 남은 하루하루를 불평하고, 다른사람들을 미워하는데 쓰고 싶지 않다" 라고요..
그 말에 저도 참 많은 반성과 회개가 되었습니다.
천국가는 길목에 있는 이 인생에 우리가 너무 많은 불평과, 불만과, 걱정과 염려를 달고 살지는 않나 해서요.
하루하루를 시작하고, 이 하루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에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감사할게 무척이나 많은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설교에 이렇게 묵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것도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