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제18장과 제19장에서 이어서 다룬 데 이어, 제20장부터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보도한다. 부활 기사는 빈무덤 기사와 발현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빈무덤 기사는 돌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 무덤이 비어있어서 여인들과 제자들이 그분의 시신이 도난당한 줄 알고 심히 놀라고 좌절에 빠진 일을 보도한 것이고, 발현 기사는 그렇게 놀라고 좌절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음은 물론 공생활 전체에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바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해 주신 일을 보도한 것이다. 이 발현 기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사기지은, 즉 네 가지 놀라운 은총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를 주제로 기록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세상에 오신 메시아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배척당하신 역사로 기록하면서, 부활하신 그분이 바야흐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원으로 그분의 빈무덤과 발현기사를 보도한다. 사람들의 빛으로서 오신 말씀을 어둠에 싸인 유다인들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당신의 존재를 깨닫고 알아본 소수의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시고 세상을 말씀의 빛으로 비출 소명을 주신 그 기록을 제20장과 제21장에서 전해준다.
이리하여 말씀이 지니신 창조적 권능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시는 역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를 두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ㄴㄷ)고 증언하였다. 이는 공생활 동안에 만나 뵈온 예수님만을 두고 하는 증언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도가 될 만한 믿음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 사도들을 통해서 또 이 사도들과 함께 이룩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두고 하는 증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요한복음서를 쓰기 전에 요한묵시록을 쓰면서,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새 하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요, ‘새 땅’은 부활하신 그분이 사도들과 신자들 안에 현존하시어 함께 이룩하신 공동 생활과 이를 통해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시킨 새로운 역사이다. 이 새 역사에서 그리스도교는 3백여 년에 걸쳐 지속된 유다교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아나빔으로서 그분을 알아본 소수의 백성들을 핵으로 하여 무수한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작은 공동체들로 퍼졌고, 급기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이 공인하고 국교로 삼을 정도로 교세가 폭발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역사가들은 마치 우주가 창조되던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대폭발과 비슷하다 하여 정신계와 역사계의 빅뱅(Bing Bang)이라고 부른다. - 과학계에서 '빅뱅설'은 달리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수준이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초대교회 현상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현상이다. - 그 만큼 우리가 초대교회와 고대교회라고 구분하는 그 3백여 년 간 일어난 놀라운 역사적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현상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교회의 과제는 가톨릭교회의 로마제국화로 말미암아 정체되어 버린, 이 예수 부활의 역사적 위력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요한복음 제20장의 빈 무덤 기사와 발현 기사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현존의 징표들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옵고 말씀이신 그분과 함께 새 역사의 창조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메시지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남기신 바로 그 선교 명령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지금은 역사적 발현을 앞둔, 역사의 빈 무덤 시기이다. 그리고 다시,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는 한처음이다.
20.1. 빈 무덤(20,1-9)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주일이라고 하는 주간 첫날 아침 일찍 무덤의 태에서 풀려나셨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일은 죽음을 이긴 승리의 날이다(헤시키우스). 부활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디오니시우스). 언제를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지는 다르지만, ‘이른 아침’과 ‘밤늦게’는 비슷한 시각을 가리킨다(테오도루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성경은 ‘아직도 어두울 때’라고 하는데,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무덤에 처음 왔을 때의 그녀의 믿음을 묘사하는 적절한 말이기도 하다(大 그레고리우스). 제자들보다 더 큰 믿음을 보여 주는 여자들이 대표로 마리아를 무덤으로 보냈을 것이다(로마누스). 마리아는 위로를 얻고자 무덤으로 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의 기록에 다른 여자들에 관한 말은 없지만, 다른 여자들도 나중에 무덤으로 왔을지 모른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이 마리아가 첫 번째 목격자임을 기록한 것은 그가 마리아와 여성들을 높게 보았으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의 열렬한 믿음을 높게 샀음을 알려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은 마리아가 자신이 본 것을 사도들의 대표자격인 이들에게만 말했고 그러자 그들이 믿었다고 알려 주는 반면, 루카는 다른 제자들이 처음에 의심했다고 기록한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요한 복음서는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온 일을 기록한다. 수석 사제들의 말처럼 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그들은 날이 환할 때 무덤으로 갔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우리도 그들처럼 서둘러 무덤으로 가야 한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무덤으로 들어간 제자들은 예수님을 쌌던 아마포가 깔끔하게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무덤으로 들어간 요한은 보고 믿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보면, 요한이 믿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요한은 단지 마리아의 말, 곧 누가 주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는 사실을 믿었다는(아우구스티누스) 것인가? 아니면, 깔끔하게 개켜져 있는 아마포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언들로 추정하여, 예수님께서 진실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음을 믿었다는(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말인가?”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부활하셨다면 당연히 무덤은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1차적인 증거는 될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그분의 부활을 확신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기에 혹시 그분의 시신인 도난당한 것이 아닌가 해서 제자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가서 확인해 보니, 무덤 속에 시신은 없어졌지만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가 그대로 놓여 있는데다가 얼굴을 쌌던 수건도 따로 한곳에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 시신이 도난당한 것은 아니라는 심증을 굳혔다. 그래서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의 전조(前兆)라는 뜻에서, 처음에 여인들과 제자들을 충격과 좌절에 빠뜨린 체험은, – 이를 ‘빈 무덤 체험’이라 부르기로 하자 –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예수님을 만나뵈옵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즉, 빈 무덤 체험은 발현 체험의 발판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묵상해 보자면, 이 빈 무덤 기사는 역사상 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역사적 징표들을 식별하는 과정의 역동적 역학관계를 드러내고 또한 그로 인한 긴장과 조화의 지혜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여기서 주요 행위자는 셋이다, 복음선포의 현장을 지키는 사도직 활동가들, 제도교회 그리고 카리스마적 공동체들.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사도직을 실천하는 활동가들을 대변한다. 복음은 늘 삶의 위기에 처한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서 선포되기에 종종 빈 무덤과 같은 충격과 좌절을 안겨 준다.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귀가 사람들을 조종하여 죄악을 만연시켜 약한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한계상황을 만난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위기를 알리는 파수꾼이다.
현장의 위기를 식별함에 있어 교회의 반응은 일사불란하지 못하다. 제도적 반응과 카리스마적 반응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교회를 대변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의 역할이 각기 다르다. 베드로는 제도교회를, 요한은 카리스마적 공동체를 대변한다. 현장의 위기를 알리는 막달레나들의 외침에 먼저 반응하는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들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다다랐다”(요한 20,4).
그런데 제도와 카리스마 사이에 늘 긴장이 끼여 들기 마련이지만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카리스마적 공동체들이 이런 지혜를 발휘하기 위한 요한의 처신이 그래서 돋보인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한 20,5). 카리스마적 공동체들은 위기에 처하여 발빠르게 현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몸을 굽혀’ 현장의 상황과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처신이 필요하다. 베드로를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뒤따라온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서 상황을 파악해 보니, 아마포와 얼굴 수건의 상태로 보아 시신 도난 사태는 아님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아마포가 남아 있다는 사실과 얼굴 수건도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결정적인 사태 식별을 해 내는 역할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비록 뒤늦어도 전체적인 상황 파악의 역할은 베드로로 대변되는 제도교회에 주어져 있다. 제도교회가 비록 다소 늦어도 전체적으로 파악한 판단이라야 전체교회가 책임있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뒤를 따라 무덤에 들어간 요한도 따라 들어가 ‘보고 믿었다.’ 이로써 카리스마적 공동체들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현장 카리스마를 유지한 채로 제도교회와 일치하게 되는 조화가 가능해진다. 카리스마에 봉사하려는 제도와, 제도와 통공을 이루려는 카리스마가 예수 부활을 준비하는 ‘빈 무덤의 영성’이다.
20.2.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20,10-18)
“마리아는 제자들이 무덤 안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아 있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제자들은 그곳을 떠남으로써 불필요한 위험을 피했지만(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리아의 사랑은 그녀가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大 그레고리우스) 다시 한 번 무덤 안을 돌아보게 했다(아우구스티누스). 무덤 안에는 두 천사가 있었는데,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이는 복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포된다는(아우구스티누스) 것과 두 계약을 상징한다(大 그레고리우스). 천사들은 처음에는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마리아의 눈물은 곧바로 보상을 받는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주님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약속은 우리의 눈물도 닦아 준다(大 그레고리우스). 마리아의 사랑은 아가에 예고되어 있다(루피누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뿐이었지만, 마리아는 이 시신을 주님으로 부르며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고 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에 마리아가 놀라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리아에게도 아직 부활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다(히에로니무스). 말하자면, 마리아의 의심하는 마음이 그녀를 뒤돌아서게 한 것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당신을 드러내신다(테오도루스). 그래서 지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한다. 그분은 마리아의 마음을 보살피셨으니 영적 의미에서 정원지기이셨고(大 그레고리우스), 실로 그분은 낙원의 ‘정원지기’이셨다.”
“마리아가 그분께 대답할 때 첫 마디에 선생님이라고 한 것은 예의상 그렇게 부른 것이며, 전에 주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을 때와는 말과 의미가 다르다(아우구스티누스). 마리아가 마침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당신께 와서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의 무리에 들라고 그를 보르는 ‘목자’의 목소리 덕분이었다(로마누스). 그러자 마리아는 그분을 ‘라뿌니’라고 부른다. 이는 그녀가 스승에게서 아직도 더 배우고자 하기 때문이며, 전에도 마리아는 다른 일로 바빴던 마르타와 달리 스승의 발아래 앉아 있었다(세베루스).”
이상은 요한 20,10-16의 본문에 관한 교부들의 주해이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신 사람은 중요하다. 그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으며, 제자들도 아니고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 마귀들로부터 해방된 마리아 막달레나였다(마르 16,9). 마귀로부터 풀려난 후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으며(마태 27,55),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숨지시는 순간까지 지켜보았다(요한 19,25). 그녀는 용서를 받은 만큼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비를 되돌려드렸으며(마태 5,7 참조), 십자가에서 가장 가깝게 그분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답게 부활하신 그분의 발현도 맨 처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부 세베루스는 이 마리아를 막달라의 마리아가 아니라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로 간주하고 있다. 아마 착오일 것이다. 세베루스가 착오를 일으킬 만큼 복음서에는 다섯 명의 마리아가 나온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외에도, 이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으며(마르 16,1), 세베루스가 착각한 마리아는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였다(루카 10,39).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던 여인들 중에는 클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도 있었다(요한 19,25).
그런데 첫 발현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정원지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막달레나조차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는 거룩한 변모와는 또 다른 변모였다. 어느 변모나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하신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타볼산에서는 부활의 빛나는 영광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이 무덤가에서는 무엇을 위해 동산지기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일까? 이어지는 발현기사에서도 예수님은 필요할 때마다 여러 모습으로 변모하신다. 나그네(루카 24,15)로도, 어부(요한 21,4-5)로도 나타나신다. 이는 발현시의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발현 당시에는 제자들이든 여인이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변모하셨다고 볼 수 있으나, 더 나아가서는 이 부활 확신도 결국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심에 궁극 목적이 있고, 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그분의 현존을 늘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시려는 듯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에 즉위한 역대 교황들은 이 메시지에 민감하게 응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표지를 다섯 가지로 제시하면서, 이 표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신자들이 없도록 일깨워주었다. 그 표지는 첫째 말씀이요, 둘째는 성찬이며, 셋째는 사랑의 섬김이고, 넷째는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함이요, 다섯째는 공동합의성의 구조로 이룩되는 교회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14.5. 주님의 현존 양식과 신앙 감각, 14.6. 신앙 감각으로 생기 넘치는 교회, 15.5. 공동합의성을 이루는 교회)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정원지기로 나타나신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줄로 알아볼 수 있었던 원인은 그분의 부르심, 즉 목소리 덕분이었다(참조: 요한 20,16). 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이 먼저 부르시거나 이끌어주셔야 다섯 표지들을 통해서도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성찬에 참여해도, 심지어 사랑의 섬김을 하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신앙 감각을 존중하거나, 공동합의성을 이룩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당신을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의 전투를 끝낸 뒤 정화가 필요했으며 그 정화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하게 해 주셔야만 이루어진다는 해석도 있다(오리게네스). 이 말씀은 당신의 인성에 관한 말일 뿐이라는 해석(테오도레투스)도 있다. 마리아가 기쁜 나머지 관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까닭에, 임금님께 다가가듯(시리아인 에프렘) 전보다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도록(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과 마리아가 전과 다른 관계에 놓였음을 알려 주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 뒤에 토마스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에게 당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에 관한 것이다(大 레오).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아우구스티누스),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며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꾸짖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신께서 아버지와 함께 나누시는, 인간을 넘어선 신성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로마누스).”
“당신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야 한다는 말씀은, 전에 우리가 멀어졌던 분이 우리 아버지요 하느님이 되셨다는 기쁜 소식을 마리아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붙들지 못하게 하신 것은 교회가 성령을 지니지 못한 부정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신비를 만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 하셨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드신다(암브로시우스). 그분께서는 사실상 마리아에게 당신께서 부활의 맏물이시며 인간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려 주고 계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이 구절은 신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이 다름을 알려 주기도 한다(테르툴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라고 나누어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을 명확하게 구별하신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창조주시며(암브로시우스), 본성에 따라 그분의 아버지이신 분은 자녀 되는 권한에 따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은 지위가 되신다(다마스쿠스의 요한). 그러나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두 본성을 구별해야 한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마리아가 주님을 뵈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그의 곁에는 무덤에 같이 왔던 다른 여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아우구스티누스). 예전에 죽음을 불러온 뱀의 말을 여자가 전했듯이, 지금 생명을 가져오는 말씀도 여자가 전한다(大 그레고리우스).”
이상은 요한 20,1-18에 나오는 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과 그분을 만나뵈온 체험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대목이다. 발현 체험도 처음이려니와 승천 메시지도 처음이며, 이를 전하는 일도 처음이다. 그만큼 마리아 막달레나의 위치가 우리 교회 역사 안에서 막중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 2016.6.3.)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막달라의 마리아를 ‘사도를 위한 사도’로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승천의 메시지는 루카가 전한 사도행전에서 이어진다. 승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신적 권능을 온전히 우리와 함께 행사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사도 1,11). 승천이야말로 현존의 보증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고백은 하늘로 올라 아주 가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시고 우리와 함께 세상 끝 날까지 현존하시기 위해 준비를 마치셨다는 뜻이다(마태 28,20 참조).
따라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전한 첫 전언(傳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하는 소식은 위에 언급한 다섯 표지를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모든 신자들도 그녀를 따라서 전해야 하는 귀한 소식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미사를 마치면서, 사제로부터 이런 말씀으로 파견 강복을 받는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이때 전해야 할 복음이 바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는 막달레나의 메시지이다. 미사 중 말씀에서 들은 바와 느낀 바 그리고 성찬에서 느낀 바와 다짐한 바를 이웃에게 전하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현존 표지에서 얻어낸 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향으로 신자들은 파견강복을 듣고 이렇게 응답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내걸었던 교회 쇄신의 목표들 가운데 첫 번째가 전례 개혁이었으므로 전례 헌장이 가장 먼저 반포되었다. 여기서는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라고 선언하였다.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미사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라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두 요소가 모두 부활하신 주님 현존의 중요하고 우선적인 표지이다.
복음과 독서로 이루어지는 전례의 말씀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가 강론과 신자들의 기도(보편지향기도)이다. 이 두 가지 요소로써 복음과 독서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특히 강론은 말씀을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본래의 취지 즉 말씀이 생겨난 ‘삶의 자리’에 충실한 해설을 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말씀을 들은 신자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실천적 응답을 이끌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준성사적 특성을 지닌’(복음의 기쁨, 142항) ‘또 하나의 선포’(복음의 기쁨, 138항)이다. 또한 신자들의 기도 역시 ‘매일미사’ 책에 인쇄된 대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그에 담긴 우선순위를 참조하여 그 전례를 봉헌하는 신자 공동체가 자신들의 언어로 작성하여 전례에 참석한 회중들 앞에서 기도함으로써 회중 각자의 기도를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찬 전례에서 성체와 성혈은 생명의 빵과 물로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존의 징표요 각자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살아갈 기운을 주는 성사적 질료이며 성령의 실질적 상징이다. 예수님께서는 “받아먹어라.” 하시며 빵을 나누어주신 것과 같이 “받아마셔라.” 하고 포도주를 나누어주셨으며,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제들은 미사 때마다 이 말씀을 똑같이 신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받아먹을 성체는 영해 주면서도 받아마실 성혈은 영해 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된 성찬례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요한 6장)과 생명의 물에 관한 말씀(요한 7장)을 배경으로 한다. 생명의 빵이 축성된 빵인 성체이듯이, 생명의 물은 축성된 포도주인 성혈이다. 이것이 온전한 성사적 변화이다. 그리하여 원래 초대교회 시절부터 미사에서는 최후 만찬의 의미를 되새기며 양형 영성체를 해 왔다. 그러다가 12세기부터 성혈을 흘릴 위험이 있다는 사목상의 문제로 성혈 배령을 제한해 왔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양형 영성체의 규정을 개방하여 주교의 판단에 따라서 서품이나 허원, 세례 등의 특별한 경우에 당사자들에 한해서 허용되었다(전례헌장, 55항). 이러한 제한적 개방성의 배경에는 트렌트 공의회 이후 서방 로마 교회가 주님의 현존 양식을 성찬에만, 그것도 성체 배령에 국한하여 좁게 시행해 온 데 대한 반성이 있다. 그런데도 공의회가 이처럼 교회가 양형 영성체를 제한하는 까닭은 성혈을 흘릴 위험성과 성체만 영할 경우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사목상의 이유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타당하다고 수긍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궁색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현재 같은 사목적 조건 하에 있는 서구권은 물론 일본교회에서도 양형 영성체가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충분한 사전 교육과 봉사자 배치 등으로 남용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양형 영성체는 권장되어야 마땅하다. 평신도들이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이 보장해 주어야 할 권리를 특별한 경우에 베푸는 시혜인 것처럼 호도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지엄한 명령 앞에서 교회의 사목적 판단은 뒤로 물러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절차에 있어서도 전례의 성사는 삶의 현장에서 실천할 사도직을 미리 보여주어야 하므로, 전례를 주례하는 사제에게 모든 역할이 집중되게 하지 말고 가능한 한 평신도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고려되고 배려되어야 한다. 이런 고려사항들이 전례가 그리스도교 활동의 정점이어야 한다는 공의회의 전례 개혁 취지를 반영하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례는 참석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고 따라서 주님 현존의 체험을 주기도 어렵다.
이를 전제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일이 중대한 의무로 지워지는 이유는 거기서 주님을 뵈옵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에서나 성찬에서 나타나는 주님 부활의 현존 표지를 알아보지 못하면 주일미사를 참례해야 하는 의미와 목적을 모른 채로 막연한 의무감에서만 강요당하는 셈인데, 그 결과가 주일미사 참석율 10% 남짓이라는 충격적인 통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님 현존의 표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부활 신앙으로 말미암아 냉담자 증가 현상만이 아니라 예비자 감소, 성소자 감소 등의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제들이 사목적 위험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앞세워 평신도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보장하는 데에 소홀히 하는 동안에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다. 이 추세는 필연적으로 교회 생활 전반에서 활력이 감퇴하고 종국에 가서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묻는 사태로 번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상황은 이미 2천 년 전에 벌어졌던 바로 그 상황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또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시며 기적을 행해도 알아보지 못하는 당시 유다교 지도층과 군중의 행태에 직면하셨을 때, 심지어 온갖 비유를 동원하여 풀이해 주거나, 몸소 당신의 신원을 밝혀주어도 귀머거리처럼 알아듣지 못하고 소경처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한탄하신 바 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1-12).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심각한 사태는 공생활 내내 지속되었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부활하시는 마지막 표지밖에는 남은 일이 없음을 아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데 이 때 그분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두고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또 다시 한탄하셨다(루카 19,41-44).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했던 자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신원을 알아보고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는 이들에게만 나타내 보이셨으니, 이것이 발현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먼저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 제자들은 막달레나로부터 스승께서 부활하셨고 자신이 만나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다. 그들은 스승의 부활 소식을 믿을 수 없었고 그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갈까봐 두려웠을 뿐이었다.
20.3.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20,19-23)
- 20,19-20의 주해
“요한은 그때가 저녁이었다고 기록한다. 과연 그때는 슬픔으로 어두워진 마음도 저녁이었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기를 미루지 않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께서는 문이 모두 잠겨 있는데도 방 안에 나타나셨다. 문이 잠겨 있었던 것은 제자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려 준다. 그들은 두려움에 집의 문만 아니라 마음의 문도 닫아걸었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문이 잠겨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부활한 우리의 육체가 어떠할지 얼핏 보여 주신다(아우구스티누스). 잠긴 문을 뚫고 들어오신 그분의 육체는 동정녀 태의 잠긴 문을 뚫고 들어간 바로 그 육체다(大 그레고리우스).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의 육체가 보여 준 일은 그분께서 부활 이전에 행하신 기적들, 예를 들어 물 위를 걸으신 것 같은 기적들보다 더 놀라운 일은 아니다(카이사리우스).”
“예수님께서 당신 육체에서 죽음의 권능을 완전히 몰아낸(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참된 하느님으로서 그들 가운데 서신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에게 평온과 성령 안에서의 나눔을 불어넣어 주신다(막시무스).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는 그분 자신이다. 그분께서 함께 계시면 영혼은 언제나 평온을 누리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써, 당신께 일어난 일이 참된 육체의 부활임을 드러내신다(이레네우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심으로써, 부활한 육체가 이제는 영광스럽게 된 육체이지만(히에로니무스), 십자가에서 죽은 육체와 같은 육체임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하셨다(테오도레투스). 우리를 치유한 그분의 상처는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도 치유한다(大 레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활 후에도 인간이며 신이심을 증명하셨다(大 레오). 아무도 그들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참조 요한 16,22)이 그분께서 제자들 가운데 계신 지금 이루어졌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스승을 외면하고 제 목숨 살리겠다고 달아나서 그 죽음의 현장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에게 그 스승께서 부활하시어 찾아오시는 상황은 심판이었다. 그러나 비단 그 제자들에게만 심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나마 그들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는 것 자체가 당대 유다인들에게도 심판적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에 이어 당신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은 그분이 선택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되었던 역사적 사명이 일단락되었다는 것과 그분이 공생활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시공(時空)에서 행하시던 바를 토대로 이제는 시공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의 백성을 보편적으로 하지만 새로이 모으시겠다는 구원의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새로운 복음선포로 세워진 교회 안에서 당신 현존을 드러내시는 표지에 그리스도인들은 민감하게 집중해야 마땅하리라.
또한 다른 복음사가들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루카는 주간 첫날 그러니까 부활하신 당일 새벽에 막달레나와 다른 여러 여인들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루카 24,1-7).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두 천사는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이 비어있는 것임을 알려주었고, 여인들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알렸다는 것이다(루카 24,8). 그리고 ‘바로 그날’,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가 나그네 차림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길을 함께 걸어가며 예언자들이 전해준 메시아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저물어 그들이 엠마오 마을에 이르렀을 때, 두 제자는 말씀의 감동을 느끼게 해 주신 예수님을 붙들며 하룻밤 묵어가시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 두 제자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분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13-33). 엠마오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시각이 바로 루카도 요한도 발현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 ‘주간 첫날 저녁’이었다(루카 24,13.29.33; 요한 20,19). 그러니까 위의 요한 20,19-23의 본문 상황은 이미 여인들로부터는 물론 클레오파스와 그 동료로부터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분을 이미 만나 뵈었다는 전갈을 듣고 난 후의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 열한 제자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잘 말해 주는 한편, 그들의 불신이 또 얼마나 컸는지도 말해 준다.
하지만 제자들의 두려움과는 대조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챙기시느라고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새벽에는 골고타 언덕의 무덤에서, 한낮에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예루살렘의 다락방 등 시공을 넘나드시며 움직이신 이 현상을 두고 ‘사기지은’(四奇之恩)이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바오로가 받은 계시 진술(1코린 15,42-44)에 근거하여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개념으로서,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impassibilitas, 손상되지 않음),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claritas, 빛남), 또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나며(agilitas, 빠름),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subtilitas, 예민함) 것으로서, 다분히 분석적이고 이원론적인 그리스적 사유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활약을 설명하려는 취지를 엿볼 수 있다.
사기지은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해 주는 성서적 근거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루카가 사도행전에서 보도하는 사울의 회심사건이다(사도 9,1-20). 이 사건 이후 사울은 14년 동안(갈라 2,1) 사도가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기도를 하며 그제까지 열성적 바리사이로서 자신이 알고 있던 구약성경을 처음부터 검토하고, 고향 타르수스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나자렛 예수가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나서는 자신의 소명을 철저하게 숙고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니아스를 보내어 다마스쿠스의 회심사건 직후 눈이 먼 채로 쉬고 있던 사울을 찾아가서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이게 하셨다(사도 9,10-18). 그리고 다시 타르수스에서 자신의 소명을 기다리고 있던 사울에게 바르나바를 보내어 안티오키아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셨다(사도 11,25-26). 그 뒤 안티오키아 공동체로 하여금 바르나바와 함께 사울 – 그 무렵부터 로마식 이름인 바오로로 바꾸어 불렀다 – 이 세 차례에 걸쳐 소아시아 일대와 그리스의 북부 마케도니아와 남부 아카이아 지방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복음화 방향이 서방으로 향하게 하신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이셨다. 교회의 진로에 있어서 필요한 인물의 과거 행적과 미래 전망을 다 꿰뚫어보고 계신다는 뜻이다. 사기지은은 이러한 예수님의 역사적 개입으로 이해해야 한다.
같은 이치로 이냐시오 로욜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테오 리치, 판토하 등의 유럽 출신 선교사들로 하여금 복음화의 방향을 동방으로 향하게 하시고, 이벽과 정씨 삼형제(약전, 약종, 약용) 등 조선의 선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한국교회를 세우시게 한 일도 사기지은에 의한 예수님의 역사적 개입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자생적 창립에 역사적으로 개입하신 예수님의 사기지은을 모르는 이들이 여러 가지 견해로 그 배경과 원인을 설명하고자 애를 썼었다. 혹자는 남인 학자들이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에 눈을 떴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서학 서적을 남보다 일찍 그리고 많이 읽어서 자연발생적으로 신앙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사관보다 신관이 앞서고, 학문적 이성보다 신앙적 직관이 앞서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신관과 신앙적 직관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기지은을 발휘하시어 자유롭게 역사적으로 개입하심을 깨닫게 한다.
사실 사기지은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예수님의 말씀과 처신은 인습적이고 현세적인 종교질서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즉 부활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는데 이는 믿는 이들이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현실과 동일한 내용과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 이후 수 차례의 발현에서도 복습을 시켜 주셨지만 사실은 공생활 동안에도 이미 보여주신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듯 사기지은을 예수님의 역사적 개입으로 알아듣는 직관-종합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논리-분석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사기지은의 설명을 넘어설 수 있다. 만일 사기지은을 육신이 죽은 다음에 일어날 현실, 더구나 부활한 육체에게 나타날 신기한 현상으로만 이해하자면 전혀 입증될 수 없고 체험될 수도 없는 공허한 교리로만 남을 뿐이다.
사실 교회의 선교 역사에서 이 사기지은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이 선교하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마귀나 세속의 영향으로부터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뜻과 기운을 보전할 수 있으며, 그런 지향으로 사람들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의 영혼과 인격과 마음은 얼마든지 빛날 수 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간격과 거리를 넘어 연대하고자 하는 믿는 이들의 뜻과 기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빠르게 합해지고 전해진다. 수평적으로 동시대인들과만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서 의롭게 살아가신 분들과도 수직적으로 통공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이즈음의 용어로 비유하자면, 5G 이상 빛의 속도로 빠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상 사람들이 목을 매는 물질적인 힘들 즉 돈이나 권력 그리고 명예를 숭배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거룩한 가치들 즉 연민과 공감 그리고 섬김과 나눔을 소중히 아끼는 믿는 이들의 뜻도 언제나 예민함을 넘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요컨대,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이는 실존적 현실이며, 손상되지 않는 뜻과 빛나는 의지와 빠르게 통공하고 연대하는 관계의 네트워크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예민함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보증이 주어져 있으니, 아래의 말씀이 그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즉,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모인 공동체에서 믿는 마음으로 청하면 그분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휘하시어 본받게 하신 사기지은이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예수의 이름-공동체가 선교적 차원에서 사기지은이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 세 가지 조건의 바탕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 함께 하심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사기지은의 상수(常數)요, 세 가지 조건은 우리의 믿음과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변수(變數)이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사기지은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 안에서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지평으로 구체화된 기록이다. 신자들의 공동생활(사도 2,42-47; 4,32-37), 베드로와 바오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베풀었거나 겪은 기적들(사도 5,12; 9,32-35.36-42; 12,6-19; 16,16-40; 19,11-20) 그리고 유다교 사제들과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용감하게 복음을 널리 로마에까지 전한 선교 활동 등이 강림하신 성령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기지은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공생활 동안에 제자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성령을 받기 전,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제자들이 지닌 태도를 보여주는 복음서 대목은 많지만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마태오는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어느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털어놓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마태 17,14-21).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고치지 못해서 다시 찾아왔다는 사연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역정을 내셨고, 마귀에게는 호통을 치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기지은의 하나로 제자들이 모두 잠가 놓은 문을 뚫고 들어오셨다. 이 심판적 상황에서 그분은 먼저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겨 놓으신 심판자 역할(요한 5,22)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못에 찔린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그분의 상처야말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이 점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주는 대목이다. 상처 입고 다시 살아난 존재야말로 부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부들의 주해대로, 우리를 치유한 그분의 상처는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도 치유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상처로 함께 하는 부활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요한 16,22 참조)을 실현하셨다.
- 20,21-23의 주해
“예수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거듭 위로하신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예수님께서는 참회와 용서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라는 임무를 내리시며 사랑 안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신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제자들은 결코 자신의 뜻을 따라서는 안 되며 그들을 파견하신 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아버지께서 사랑 안에서 아들을 보내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지금, 당신과 같은 박해를 겪게 될지 모를 길로 제자들을 보내신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더욱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순차적으로 준비시키신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한 번만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지상에 계실 때도 주셨고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셔서도 주셨는데,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드러내 보인 일이 그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것이 성령의 두 번째 숨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 숨은 고의적인 죄로 인해 막혔다(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그러나 두 번째 숨은 그들의 믿음에 기운을 북돋아 그들이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할 것이다(테오도루스). 하느님의 숨인 성령(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을 주시는 분은 아들이다(아타나시우스). 아들께서는 파견을 앞둔 사도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죄를 용서하는 영적 권능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준비시키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들이 지닌 권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들의 일치와 그들에게서 자라난 교회의 일치는 성령으로 그들을 한데 묶으시는 하나이신 주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키프리아누스).”
“용서는 죄를 용서할 권한과 그대로 둘 권한을 받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도를 통하여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테오도루스). 교회에게는 죄를 매고 푸는 것이 모두 허락되었지만, 이단에게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허락되지 않았다(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도에게 이 권한을 주셨으며(히엘로니무스) 그들이 내리는 선고를 확인해 주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을 용서할 수 있을 뿐이다(오리게네스). 성령께서 성직을 받는 사도들에게 주시는 변화시키는 권능은 그들이 사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힘을 준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성직 수임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그러한 권능을 받는 이는, 큰 권능에는 큰 책임이 따름을 알아야 한다(大 그레고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크리솔로구스 교부의 주해대로, 예수님께서는 참회와 용서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라는 임무를 내리시며 사랑 안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이 처한 이 심판적 상황은 사랑의 심판이 되었고, 이는 장차 모든 이들을 예외없이 심판하실 예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창조 이전의 혼돈은 무심판의 상황이다. 아무런 방향성이 없으며 그 어떠한 기준도 없는 무법천지가 이러하다. 하느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무신론의 세상, 이교와 우상숭배의 사회가 이러하다. 오로지 힘과 이익만이 판을 친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이스라엘 사회는 율법적 심판의 세상이었다. 그것도 모세가 애초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자비의 계약 정신을 한참 벗어난 냉혹한 율법이 잣대가 되어 약자들을 소외시키고 차 별하던 연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양성하셨다. 그 양성 과정에서 제자들은 깨달음이 굼뜨고 믿음이 모자랐다. 그래도 스승은 언젠가 제자들이 깨닫고 믿을 것을 바라며 기다리셨는데 이제 그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심판은 평화를 선사하고 이 평화를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파견하시는 상급이었다. 또한 이 심판은 스승을 배신하고 달아났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에게 대한 벌이기도 했다. 스승을 따르는 사도 직무는 스승처럼 자기를 버리는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바쳐 순교했고, 그러기까지 일생을 바쳐 선교했다.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늦은 나이까지 선교하다가 박해를 당하여 유배당한 섬에서 요한복음과 요한묵시록 그리고 요한의 사목서한들을 남겼다.
사도들이 이렇듯 치열하게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함께 하셨으므로, 선교 과정 자체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는 새 창조의 과정이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전해 주셨다. 이 영은 천지가 창조되던 때 감돌던 바로 그 하느님의 영이시며(창세 1,2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열린 하늘에서 내려오신 바로 그 하느님의 영이시다(마르 1,10). 또한 성령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을 줄곧 이끄시던 분이시기 때문에, 이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사도로서 새 사람으로 창조되었다.
사도들로 시작된 교회는 이 창조 과정에서 탄생한 새로운 인류였다. 그래서 교회의 과업은 인류 전체가 하느님 앞에 모일 수 있도록 용서하고 화해시키며 일치하게 만드는 성사적 책무였다. 고해성사를 비롯한 일곱 성사가 모두 이 지향으로 후대의 교회에서 제정되었던 것이고, 그래도 그 기원은 요한 20,21-23 본문에서 확인되듯이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내려주시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성사를 제정하였으며, 이 성사 안에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20.4. 토마스에게 나타나시다(20,24-29)
“이름에서만 아니라 거룩한 일들을 기록한 방식에서도 쌍둥이인 토마스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곳에 없었다(오리게네스). 그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열한 제자에게 돌아갔다는 루카 복음 기사와 모순되지 않는다(베다). 토마스가 돌아온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었다. 그가 품었던 의심이 우리의 믿음이 확고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大 그레고리우스). 모세 시대에 일흔 장로가 성령을 받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엘닷과 메닷도 성령을 받았듯이, 토마스도 그 자리에 없었지만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다른 사도들도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싶었지만, 토마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다(오리게네스). 그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자들의 말을 믿었지만 부활에 관한 말은 의심했다(암모니우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당신 손발의 못자국을 보여 주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십자가에 처형된 그들의 유일한 임금을 보여 주신 것이다(유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이 육체적 부활임을 입증해 주기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들이 여드렛날에 함께 모여 있을 때였다. 이 관습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성찬 안에서 만나기 위해 여드렛날에 모인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서 배우고 또 그의 소망과 미래의 믿음이 더욱 커지도록 여드렛날까지 기다렸다가 나타나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방 안에 나타나신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들에 있어서는 우리의 감각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진짜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로(테오도레투스) 부활하셨음을 입증하고 생명의 말씀을 다루는 이들이 그것을 목격하도록(테르툴리아누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셨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예수님의 상처는, 예수님의 부활한 육체가 비록 더 영광스럽지만(히에로니무스) 십자가에 처형된 육체와 같은 몸이라는 증거다(히폴리투스).”
“예수님께서는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셨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순교자들도 죽은 후 예전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은 부활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 토마스에게 당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진 그의 손이 어떻게 성하게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로마누스). 이 사건을 비롯하여 부활의 모든 증거는 부활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입증한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러므로 토마스처럼 그 자리에 없었던 우리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 토마스가 당신의 신성을 고백하도록 이끄셨다(아타나시우스, 암브로시우스). 그리스도의 육을 만졌을 때 토마스는 자신이 하느님을 만졌다고 믿었다(카시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소수의 견해지만, 테오도루스 같은 이는 토마스가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았다는 사실을 의심스러워한다. 그는 토마스가 그 기적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했을 뿐이라고(테오도루스) 생각한다. 그러나 교부들의 보편적 견해는 토마스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을 보았고, 자기가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그분의 신성을 고백했다는 것이다(大 그레고리우스). 이 기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부족한 토마스와 우리를 인내로 기다려 주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분께서는 부활에 이르는 많은 축복이 실로 고통이라는 외적 너울 아래 가려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암브로시우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에 달려 있음을 아는 것은 위로가 된다(大 레오, 카르파투스의 요한).”
교부들은, 요한 복음사가가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다시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한 뜻을 알고 있다. 즉, 그 뜻이란 평소에 강직한 합리주의자였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토마스의 의심마저도 나머지 제자들은 물론 “보지 않고도 믿을”(요한 20,29ㄴ) 수 있도록 후대의 믿는 이들을 위한 디딤돌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교부들의 이러한 이해를 반영하여 후대의 교회는 부활 시기의 전례를 시작하면서 팔일 축제를 지내며, 팔일 축제가 끝나는 부활 제2주일에는 가, 나, 다 해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위의 이 본문을 복음으로 봉독한다. 중세 이래 교회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 말씀에 근거하여 토마스의 이런 처신을 불신앙의 표본처럼 간주하여 멀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세에 접어든 이후부터 교회는, 그레고리우스와 키릴루스 교부의 주해대로, 토마스가 품었던 의심은 불신앙으로서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게 만들어준 합리적인 처사로 간주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내세워 『방법서설』(1637)을 펴낸 데카르트 이래로 모든 사물을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는 태도는 학문의 기본이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학의 세기라고 일컫는 19세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전까지는 당연히 그 권위를 인정받아 오던 복음과 부활 신앙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으나, 철저하게 의심해 보고 나서야 확실하게 믿겠다던 토마스의 이 처신 덕분에 교회는 온갖 무신론적 비방과 의심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 도전 덕분에 성서학과 신학 일반이 풍요로운 자양분을 얻어서 현대화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오늘날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신학에 있어서도 학문하는 기본자세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신 존재 증명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 대신에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이 의심에 찬 문제 제기를 전제로 삼는 기초 신학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결국 토마스의 의심이 후대의 믿는 이들이 부활을 확신하는 데 도움을 주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전해 준 부활 신앙은 광신(狂信)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보증하는 확실한 인물이 토마스였고, 올바로 믿기 위해서도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일임을 토마스가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의심과 확인으로 접근하는 토마스의 태도가 합리적이면서도 바람직하다는 증명은 나머지 다른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역으로 입증된다. 토마스는 단 한 번의 발현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던지 또 한 번의 발현을 겪어야 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스승을 만나 뵈옵고도 그들은 소명을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과 만나기 이전에 종사했던 생업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던 갈릴래아 호수에까지 찾아가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어부 차림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어부 출신의 제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으나(요한 21,4ㄴ),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을 끌어 올리지 못할 지경에 처해서야 알아보았다(요한 21,7).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린 상처를 보여 주시고 만져보게 하신 그 이상으로 그 제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즉, 그들과 함께 빵을 나누어 드시고 물고기도 구어 주셨던 것이다(요한 21,13). 이 풍어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될 선교 활동의 성과를 미리 보여 주심으로써 사명을 부여하셨다. 이렇게 살펴보아도 토마스의 처신은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사도로서 인도 지방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1972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을 맞아 그를 ‘인도 교회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 선포한 바 있다. 그래서 토마스 사도가 고백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ㄴ)이야말로 그를 진정으로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ㄴ)고 말씀하셨다.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보증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후대의 제자들을 위해 당신 현존의 표지들을 남겨 주셨다. 이 현존 표지들이야말로 주님 발현의 양식으로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전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그 첫 번째 현존 표지요, 전례 중 특별히 미사에서 거행되는 성찬례가 그 두 번째이다. 그리고 이 말씀과 성찬을 대표적인 표지로 하여, 일상과 세상 안에서 믿는 이들이 서로 발을 씻겨 주듯이 서로 섬기는 공동체 생활과 이를 바탕으로 하여 특히 세상에서 보잘것없다고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가난한 이들을 주님을 모시듯이 섬기는 사도직 활동이야말로 최후의 심판에서 잣대가 되어 줄 세 번째이다.
고대교회 이후 두 번째 표지인 성찬에, 그것도 생명의 빵과 물을 온전히 전해주지 않고 성체 배령에만 집중해 온 가톨릭교회는 20세기 중반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위의 세 가지 표지를 균형있게 주님 현존의 표지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대 교황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도 16세와 프란치스코 현 교황은 명시적으로 공의회가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교회가 쇄신되기 위하여 필요한 ‘새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면서 두 가지 표지를 추가로 더 제시하였으니, 그것이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일과 ‘공동합의성 구조를 이룩’하는 일이다. 이 다섯 가지 현존 표지와 양식을 모두 합하여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대판 주님의 발현을 체험할 수 있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와서는 이 다섯 가지 표지를 통해 주님을 볼 것과, 주님을 보고서라도 믿는 행복을 발견해야 할 처지에 있다. 이러한 우리의 정체성 인식 필요성이 요한 복음사가가 제20장의 마지막에 결론지어 놓은 대목에 표현된 복음서 집필 의도였다.
20.5. 복음서를 쓴 목적
“‘예수님께서는 다른 많은 표징도 일으키셨다’는 요한의 말은 그가 다른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모든 것을 이 책에 다 담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테오도루스). 그가 기록한, 예수님께서 부활 전과 이후에 일으키신 많은 표징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제자들이 진심으로 믿도록 하기 위해 필요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쓴 것은 불경한 이단들이 생겨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이레네우스). 그는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기 바랐다(테르툴리아누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특별히 부각시키기 위해 이어지는 기사의 서론격으로 마무리 요약문을 이 부분에 배치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은 특정 기적 또는 표징들을 가려내어 전하면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한 목적은, 독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 이루어지는 자기들의 삶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이끌려는 데에 있다”(『주석 성경』, 「요한 복음서 입문」).
예수님의 선재성과 초월성을 드러내는 ‘한처음’과 ‘말씀’을 소개하며 이 복음서를 시작한 요한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신 표징들 – 첫째, 카나의 혼인 잔치; 둘째,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 셋째,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심; 넷째, 오천 명을 먹이심; 다섯째, 물 위를 걸으심; 여섯째, 태생소경을 고쳐주심; 일곱째,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을 전해 주었다. 특히 일곱째 표징을 일으키실 때에는 상황의 위중함과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죽임을 당할 각오를 하고 일으키셨음을 비중있게 보도하였는데, 여기서 ‘상황의 위중함’이란 당신이 이 표징을 일으키실 경우에 신변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 위중함이었으며 또 ‘사안의 중요성’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부활 신앙을 불러 일으키시고자 하는 중요성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당신 신성의 표지인 기적들을 일으키셨고, 또 그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사도가 되어 당신의 임무를 계승할 수 있도록 양성하셨다. 그야말로 천지창조 때에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이 때에도 사도들과 그들의 교회를 통해 새 역사의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후천개벽이며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으로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가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힌 이유였다. 이는 메시아 백성임을 자각하는 정체성과 더불어 그 정체성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명감과 의지로서 부활 신앙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을 ‘영원한 생명의 파스카’로 잡고, 부제목을 ‘역사와 전망, 정체성과 사명’으로 삼은 취지도 여기에 있다. 본시 아시아에서 태어나신 말씀이 서향하여 유럽에 십자가를 세우고 16세기에 들어서야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동방에 전해졌으나, 동방 선교 5백 년 동안에 아시아의 복음화는 지지부진하였다. 대희년을 앞두고 아시아의 주교들이 시노드에 모여 결의한 메시지인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는 이에 대한 선교적 결의를 분명히 한 바 있다. 이에 이제껏 살펴본 요한복음의 주해와 묵상의 줄거리를 간추려 상기하고자 한다.
말씀은 아시아에 뿌리 내려야 하며(2.3.), 아시아의 동방에 특히 한민족에게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찾아서(3.3.과 4.3.), 한민족에 드리워졌던 하느님의 손길을 추적하는 과제(5.5.)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신관을 밝혀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노래와 문양, 말과 글 등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 속에는(6.4.와 7.6.) 우리 겨레의 신성이 녹아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천손의식이다(8.7.). 그리하여 진리의 빛으로 겨레의 신성을 보고자 하고(9.5.), 히브리 문명과 한겨레 문명을 비교하는 가운데 문명의 리더십을 분석해 보기도 하였다(10.6.). 그 결과 히브리 문명권에서 살아남은 아니빔들처럼 박해시대 교우촌 신자들이 천손의식을 부활시켜 백 년 간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메시아 신앙의 진리를 한겨레 문명권에 뿌리 내렸으며(11.8.), 이제 이 뿌리로부터 싹을 틔우고 줄기도 자라게 하여 바야흐로 아시아 복음화에 나서기 위한 시사점을 교도권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았다(12.8). 아시아인들 안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 성령께서는 아직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신성의 흔적으로 아시아인들의 문화와 심성 안에 남겨 놓으셨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부활하시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다섯 가지 양식에 충실해야 하고, 그 충실함으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파해야 한다(14.5.와 14.6.). 성령께서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을 이끌고 계시다(16.7.). 이 거대한 아시아 복음화라는 파스카 과업을 위해서 이미 한국교회의 초창기 역사에 드리워진 신성의 자취를 분명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17.6.; 18.5.; 18.6.; 19.3.; 20.6.). 신성이야말로 개인이든 민족이든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진정성 있게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20.6.1. 평신도 성사조직이 생겨난 경위
보편 초대교회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과 신자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과 공동 생활로 폭발적인 교세 신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극히 이례적인 역사 현상과 마찬가지로,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이룩한 현상이 있었다. 이 현상의 한가운데에 '평신도 성사조직'이 있었다. 이제 그 경위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교회의 직무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필수적이다.
1785년 7월, 문중박해를 받은 이벽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중심이 흔들렸던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봄 지도급 인물들이 모여 교회 재건 방안을 모색하였다. 교리교육과 고해 및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한 조직을 꾸린 것인데, 처음에는 이승훈을 책임자로 세워 이벽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미사 전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786년 가을에는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면서 각 지역의 신자들을 관리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성사 담당자를 이승훈이 직접 임명하였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성직제도’라 하는데 이때 가(假)는 ‘가짜’가 아니라 ‘임시’라는 뜻이다(정민). 하지만 그들은 성직자로의 ‘신분’을 가지려 한 적이 없었고, 오직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성사를 받고자 했던 것이고 그 기간도 기록에 따라서 2년 또는 4,5년 남짓으로 짧은 기간이어서 ‘제도’라 부를 수도 없음을 감안하면, 이는 오늘날의 성직자제도의 관점에서 붙인 ‘가성직제도’가 아니라 ‘임시성사조직’이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사가들이 붙인 이 이름은 거룩함에의 갈망에서 나온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선각적인 움직임에 대해 지나치게 차갑고 율법적인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 임시성사조직을 공동으로 운영한 이들은, 달레가 쓴 ‘조선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달레의 이 기록은 정약용이 쓴 ‘조선복음전래사’에서 가져온 것인데, 정치적 논란을 피하고자 정약용은 교회 초창기부터 핵심적으로 활약한 인물들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빼 놓았다. 그래서 10명으로 알려진 이들 중 나머지 5명의 이름을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으나, 교회사가들은 아마도 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 정약전, 정약종, 윤지충, 홍낙민 등은 확실하다고 추정한다(조현범). 그 근거는 조상제사금지령과 함께 이 임시성사조직의 활동이 독성죄에 해당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성사 거행을 중단한 이후에, 각 지역에서 선교 책임자로 활동한 교회 핵심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양근 지역에 권일신, 광주 지역에는 정약전과 정약종, 포천 지역에 홍낙민, 내포 지역에 이존창, 전주 지역에 유항검과 윤지충 등이 중심이 되어 주변 인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이 임시성사조직이 시행되어 조직적으로 선교 활동을 하게 되면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비신자들이 교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었을 뿐 아니라 고해와 성체와 견진 성사 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훈의 서한에 의하면, 1789년에 신자들의 수는 1천여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에 따르면, 임시성사조직의 일원이었던 최창현이 성사와 집회를 위한 장소로 쓰기 위하여 별도의 집을 마련하였다. 두 곳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한 곳은 남인 선비들이 많이 살던 회현동과 다른 한 곳은 성균관 유생들이 자주 다니던 길목인 명륜동이었다(유항검이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 이 두 곳에서 교리서를 보급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등에 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정민).
하지만 교리서들을 면밀히 검토하던 중 1789년에 유항검이 ‘성교절요’(聖敎切要)를 읽고 나서, 사제로 서품되지 않은 평신도가 성체를 축성하는 행위는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문제를 제기하자 이 임시성사조직은 즉시 성사 집전을 중단하고 북경 교구 주교에게 윤유일을 파견하였다(조현범). 그리고 북경의 구베아(Gouvea, Alexander de, 1782∼1808) 주교는 임시성사조직을 해산할 것과 조상제사를 금지할 것 등을 명시한 사목서한을 보내왔다. 그 결과,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고,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룬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 사건이 1791년에 발생하여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20.6.2. 교회직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우리는 거룩함을 향한 열망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한국교회의 임시성사조직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더욱 면밀하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교회사가들에 의해서 이에 대해 이루어진 역사적 평가가 신학적으로 매우 미흡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직무를 직무사제직과 보편사제직으로 구분하면서 보편사제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하여 이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교회직무를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한 스힐레벡스(E. Schillebeckx)의 견해를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교회직무론: Ministry: Leadership in the Community of Jesus Christ, 1981).
20.6.2.1. "지도자 없는 교회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일은 사제로 서품받은 성직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교회법, 276조 2항; 900조 1항). 그러니 평신도가 성체성사를 주례하는 일은 독성죄이며 따라서 불가하다는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래 근세와 현대 교회의 ‘교회법적 판단’이지, 고대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이다(E. Schillebeckx). 스힐레벡스가 집필한 ‘교회직무론’(Ministry: Leadership in the Community of Jesus Christ, 1981)에 따르면, 지도자 없는 교회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사제 없는 교회 없다”는 히에로니무스 교부의 말은 모든 교회공동체는 사제라는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고대교회의 통념을 반영하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만찬을 주재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그리고 함께 자리했던 제자들에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하고 명하시며 사도로 임명하셨다. 이후 그분의 교회에서 성체성사는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사도’라는 직분 또는 ‘사도직’은 예수님께서 신적인 권능으로 제정하신 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체성사 거행과 사도직 수행이 예수 추종 내지 계승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성체성사와 사도 직분을 제외하면, 나머지 교회의 직제(職制)는 신적인 기원을 지닐 수 없고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당시의 지도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정하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기 위하여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정해진 모든 제도는 또한 동시에 성령의 선물로서 인정되어 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럴 경우마다 사도들은 성령께 기도하고 결정을 햇으며 따라서 “성령과 우리의 결정”(사도 15,28)임을 내세웠다.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의 보궐선거에 마티아가 선출된 일이 그러했고(사도 1,15-26), 일곱 부제가 사도들의 보조자로 임명된 일이 그러했다(사도 6,1-6). 그 결과로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는 결과가 이를 확증해 주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직무상 수행해야 할 인즉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공동체’이며 ‘예수의 공동체’로서 존속해야 할 공동체들의 사도성을 보전하는 일이었다. 이 ‘예수 추종’이 교회 직무의 윤리인 동시에 영성이었다. 따라서 변화되어 가는 교회의 내외 상황에 따라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교회 직무는 신설될 수도 있었고 폐지될 수도 있었으며, 강화될 수도 있었고 축소될 수도 있었다. 마치 나침반의 빨간 바늘은 우리의 위치가 달라지면 바뀌지만 변함없이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 움직이는 이치와도 비슷하다. 이 ‘성령의 나침반’은 교회라는 피라미드의 상층부에서만이 아니라 하층부에서도 얼마든지 북쪽을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교도권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정당한 직무 행사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루어진 성령의 선물이라고 해서 모조리 원래부터 예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신적 기원과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삼위가 일체이시라고 해도 그것은 본성으로 일체이시라는 것이지 역할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자의 역할은 성부의 본성을 반영하시어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는 데에서 기준이 되시는 것이고, 성령의 역할은 이 성자께서 하신 구체적 기준을 보편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자와 성령의 역할은 다르다. 교회는 성자의 가르침과 처신을 기준으로 하되 이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도록 목표로 해야 한다.
더구나 교황과 주교단에서만 전유물(專有物)처럼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수신자이기 때문에, 평신도 지도자들이나 대중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보인 직무 행사 역시 성령의 선물일 수 있음을 교도권이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오히려 이를 면밀히 검증한 후 추인해 주어야 하는 역할이 그들이 맡은 ‘베드로의 직무’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교도권의 직무 행사 역시 평신도들과 심지어 세상 일반 사람들의 반응과 호응 여하에 의해서 성령의 선물 여부가 평가될 수밖에 없고, 그 선교적 효력이 그 판단 잣대가 된다. 이처럼 성령의 이끄심 앞에 온 하느님 백성이 평등하다.
신약성서의 직무발전사 전체에 걸쳐 두드러진 점은, 직무가 성찬례라는 전례에서 생겨났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복음을 선포하고 성장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났고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가 직무와 전례보다 우위에 있었다. 누구든지 공동체를 지도할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 성찬도 주례하였다. 공동체의 직무는 예수 추종의 사도성에 대한 봉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직무란 하나의 신분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기능이었다. 그래서 이 중대한 명제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셨지만 성찬을 주례하는 직무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원한다기 보다는 후대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이런 뜻에서 공동체 안에서 성찬을 주례하는 사제는 공동체의 정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신약성서 시대에 세워지고 발전한 교회들에서 공동체의 직무를 이해하고 실천한 바에 따르면, 이 교회들은 신약성서에 터하여 자신의 사도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사도성’이란 우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 위에 건설되고 있음을 의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이 공동체들이, 예수의 인격 자체에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던 예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던 신앙인들의 공동체였다는 뜻이다. 결국, 자신들의 공동체는 예수의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계승하고자 했던 ‘하느님의 공동체’라고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공동체는 지도자를 가질 사도적 권리가 있었으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근거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교회론적 은총의 권리도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제라는 공동체 지도자의 직무구조와 직무호칭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채로, 예수 추종의 사도성을 공동체가 이어받게 하는 것만이 타당한 고려의 대상이었다. 직무의 사도성은 공동체의 사도성, 즉 예수 추종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사도성을 발휘해야 할 ‘예수 추종’의 판별 기준의 우선적인 사도적 표지는 선포와 전례와 봉사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제자들에게 사도로서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라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공동체는 공직자를 가질 사도적 권리가 있으며, 예수님께서 주신 신약의 위임(“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에 의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도 있었다. 그리고 이 공동체들은 독립된 단위들이 아니라 서로 사랑을 결합되어 있어서, ‘베드로의 기능’에 의해 사랑의 유대로 일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명령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예수를 추종하기 위한 모든 사도적 직무는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봉사요 성령의 은사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행하신 대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연대하여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직무의 사도성을 나타내는 본질적 표지였다. 그러니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사도적 권리가 공식교회가 정한 사제선발요건보다 앞선다.
이러한 스힐레벡스의 치밀한 분석을 듣고 있자면, 1천년 대와 2천년 대로 이어지는 동안 가톨릭교회의 교회직무상의 변천과정에서는 예수님 면전에서도 스승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의 시행착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만큼은 아니지만 베드로의 부인에 비견할 만한 짙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시며 3천년 대의 교회에서 능히 복음적인 면모를 일신할 것을 믿고 계신다. 이것이 사도적이고자 하는 공동체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공동합의적인 교회이며, 복음에 기원을 둔 가톨릭교회이다.
20.6.2.2. 칼케돈 공의회의 증언
교회 역사의 첫 천년 동안에 이루어진 교회직무에 대해서는 5세기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제6조 규정에 잘 나와 있다. 교부들의 신학에 바탕하여 고대교회의 견해와 실천을 법적 형태로 훌륭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규정은 모든 형태의 ‘절대 서품’, 즉 특정 공동체와 무관하게 지원자를 축성하는 일을 단죄할 뿐 아니라 무효로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절대적 방식으로 사제나 부제로 ‘서품’되어서는 안 된다. …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순교자묘에서든 수도원에서든, 그에게 명백히 한 지역공동체가 지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경우에 “그의 ‘서품’은 무효이며, … 따라서 그는 어떤 기회에라도 직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룩한 공의회는 결정하는 바이다”(칼케돈 공의회, 교회법, 제6조).
고대교회에서도 공동체는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음이 이 칼케돈 교회법 제6조가 입증해 주고 있다. 지역교회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사도성에 봉사할 교역자를 지명했고, 그 교역자는 공동체의 사도성을 위해서 성찬례를 주례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직무의 상관성이다. 직무는 교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지, 교회구성적 맥락과 상관없이 교역자 자신의 존재론적 자격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도성을 위해서 공동체는 지도자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고, 공동체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교회에서는 공동체와 그 지도자들이 하도 힘차게 결합되어 있어서, 원칙적으로 다른 공동체로의 전임(轉任)이란 불가능할 정도였다.
칼케돈 공의회 교회법 제6조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어떤 이유에서든 한 교역자가 한 공동체의 주도자 구실을 그만두게 되면 그 사실 자체에 의하여 이미 글자 그대로 평신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교역자란 교회 내 신분이 아니었고 공동체에 봉사하는 기능을 맡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 초기의 평신도 성사조직에 대해 해체령을 내렸던 구베아 주교는 칼케돈 공의회의 법령을 모른 채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령만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20.6.2.3. '교회' 이념의 퇴색과 사사화
동서방 교회가 분열된 뒤 서방의 라틴 교회 중심으로 열린 두 차례의 공의회, 곧 1179년에 열린 3차 라테란 공의회와 1215년에 열린 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중세 유럽 사회의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공동체적 전통이 살아있던 ‘교회’ 이념이 퇴색하고 제국교회적 성향이 강화되어 가는 터에 사제의 교역도 제국의 공직자처럼 하나의 특수한 신분으로 규정되는 사사화(私事化)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즉, 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칼케돈 공의회의 관점을 파기해 버렸는데, 아무도 “생계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는 한” 서품될 수 없다는 봉건적 관점을 취한 것이다. 뜨내기 성직자들이 숱하게 많던 당신의 경제사회적 여건에서 그들의 생계문제는 과연 절박한 문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사회복지적으로 풀고자 했던 이 3차 라테란 공의회의 시도가 퇴색된 교회 이념을 현실화시키고 사사화된 사제 신분을 앞당겨 현실화시켜 버렸다. 봉건 제도가 마치 새로운 혁신인 것마냥 여겨지던 중세에 ‘교회’란 고대교회 시대에까지 살아있던 공동체가 아니라 흔히는 ‘사유(私有) 교회’를 가진 세속 권력자의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를 이런 봉건제도의 질곡에서 해방시키려는 ‘중세적 복음운동’의 일환으로 사제 신분의 사사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가톨릭교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열린 트렌토 공의회에서는 고대교회의 공동체적 전통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루타의 직무관을 다분히 정치적으로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라테란 공의회의 사사화된 직무관은 오히려 영성적으로 강화되어 버렸다. 사제는 공동체와 상관없이도 서품 때에 ‘인호’를 받는다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트렌트 공의회, 교회법, DS 1771-8조).
20.6.2.4. 사제인호와 '가성직제도'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직후인 1786년부터 1789년에 운영된 이른바 ‘가성직제도’, 정확히는 ‘임시성사조직’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유항검이 근거로 찾은 조항도 트렌토 공의회의 교회법에 따른 성사생활 지침서인 ‘성교절요’(聖敎切要)에 기록된, 신품성사의 ‘사제인호’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이전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초대교회로 돌아갈 것을 지향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식적으로 고대교회의 신학적 직관들을 되살렸다. 평신도들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면서 사제들의 직무 사제직이 이에 봉사해야 함을 적시하였다(교회헌장, 10항; 평신도 사도직 교령, 25항; 사제 교령, 9항). 이에 비추어 보면, 조선 천주교회 초기의 ‘가성직제도’는 복음을 전하고 입교한 신자들에게 성사를 받게 해 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사도성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독성죄’를 범한 일이었다고 단죄하기보다는 오히려 평신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성사생활을 함에 있어 자발성을 발휘하여 교회를 활성화시킨 ‘임시성사조직’으로써 높이 평가해 마땅한 일이었다.
이런 자발적이면서도 사도적인 노력을 본받아, 아시아인들의 심성과 문화 그리고 문화 속에 이미 개입하신 하느님의 신성을 발견해야 하고, 아시아의 종교인들에게 공동선 증진 노력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해야 하며, 무신론과 세속화에 물든 아시아인들에게도 최고선을 증거하는 노력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신성을 증거함으로써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도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성사생활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발휘되었던 자발적 노력이다.
조선 천주교회 초기에 이 자발적 노력으로 나타난 임시성사조직에 대하여 ‘가성직제도’라 하고 사제로 서품되지 못한 평신도가 성사를 집행했으므로 독성죄를 범했다고 간주했던 유항검과 이승훈 그리고 구베아 등의 판단은 라테란 공의회 교회법의 관점이었고, 다분히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이었다. 그 당시에 고해성사와 성찬례를 행했던 이들은 사제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성사생활을 하고자 했던 것이었고, 사제로서의 신분이 아니라 사도성을 계승하기 위한 사제직 기능이 중요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실천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즉시 그 실천을 멈추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다.
그러므로 고대교회의 칼케돈 공의회 교회법과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법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임시성사조직은 성사생활을 위해 자발적으로 발휘된 보편 사제직의 실천으로서, 오늘날에도 평신도들이 본받아야 할 역사적 모범으로 보는 것이 사도성을 위한 신학적인 관점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기 위한 사도성을 계승하기 위하여 성사생활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6.3. 평신도 성사조직의 성서적 의미
이상 그 역사적 경위와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 평신도 임시성사조직은 성령께서 한국교회를 창립한 선비들에게 민족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베푸신 놀라운 은총이었다. 성령께서 이벽을 부르시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창립하게 하신 오묘한 섭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조직한 강학회 선비들로 하여금 그의 사후에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사명감과 성사의 힘을 자각하게 하시고는 자발적으로 조직하도록 이끄셨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사기지은’, 즉 네 가지 놀라운 은총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 사건으로 교회를 시작시키신 역사 개입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가 진술한 대목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양식인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다. 바오로 자신도 로마식 교육을 받아 익숙한 논리-분석적 사유방식으로 역시 이 사고방식에 익숙한 코린토인들에게 도무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느라고 도입한 개념이다(1코린 15장). 그리고 후대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이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impassibilitas, 손상되지 않음),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claritas, 빛남), 또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나며”(agilitas, 빠름),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subtilitas, 예민함)는 것인 바, 사도 바오로가 처음 시도하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이 같은 그리스적 사유 개념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를 나누는 이원론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래서 이 사기지은의 교리는 이를 배우는 신자들이 도저히 체험할 수 없고 입증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개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교회보다 예수님께서 위에 계시고 교리보다 성서가 앞서는 법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에 대한 후대 교회의 이해를 초월하여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현존하시고 은총을 베푸셨다. 그래서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도 예수 부활과 발현 체험, 그리고 이로 인한 하느님의 개입은 어김없이 나타났으며 이 현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사기지은이 위력적으로 발휘되어 왔으며, 한국교회의 초창기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동아시아와 특히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사유방식인 직관-종합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기지은의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지평이 환히 드러난다.
- 사기지은 중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예민함(subtilitas)의 은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현상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무신론적인 성리학 일색의 조선 사회에서 이벽이 단연 한역서학서들을 통해 그리스도 신앙을 깨달아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국교회를 창립한 업적을 들 수 있다. 그의 신앙적 깨달음이 얼마나 예민했는지는 천진암 강학회에서 동료 선비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 주고자 지은 「성교요지」가 선교사요 신학자였던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능가하는 통찰이 담겨 있는 것만 보아도 입증된다. 이것이 은총인 이유는, 대표적인 한역서학서인 「천주실의」을 읽은 선비들은 이벽 이전 150년 동안 수도 없이 많았지만 신앙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남인 학자들 중 이익과 이가환 같이 실학을 받아들인 선비들조차도 신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부했는데, 오직 한 사람 이벽만이 신앙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선비들과 민중들에게까지 적극적으로 전파하고자 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또한 그가 문중박해로 세상을 떠난 후, 남은 강학회 출신의 선비들은 충격을 딛고 대책을 수립하여 이벽의 역할을 계승해 나가기로 결의하고는 즉시 임시성사조직을 10명의 선비들로 꾸려 나갔다. 그 결과 놀라운 선교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는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나는” 빠름(agilitas)의 은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민하게 빠른 조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컸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도 이벽과 같은 문중박해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문중은 물론 유림 일반으로부터의 박해마저도 감수할 각오로 이런 기민한 조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진정성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결정이 현실화될 경우 입교자가 늘어나면 유림의 반대가 충분히 예상되던 상황이었고 유림의 반대는 조정의 박해로도 나타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도 그 선비들은 신생 교회의 지도자 임무를 떠맡았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천주교의 교리대로 조직을 운영해 나갔다. 그리고 과연 조정의 박해가 실제로 가해지자 그들은 일반 양반 신자들이 쉽사리 교회를 이탈한 것과는 달리 신앙을 고백하며 치명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그리고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빛남(claritas)의 은총은 이벽과 10명의 임시성사조직 지도자들이 모두 문중에서나 조정에서 박해를 당하여 사교를 퍼뜨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했으나, 정작 당대의 민중은 후속 치명의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들이 전한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여 입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입교 현상으로 나타났다. 하도 그 속도와 규모가 빨라서 조선 왕조 역사 이래 보기 드문 하나의 민중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조광, 노길명). 박해의 위협 속에서 입교한 신자들은 천주교 교리가 가르치는 인간 존엄성의 진리와 천당 복락이 그야말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복음이었다. 이미 왕조 차원의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된 마당에, 죽기를 무릅쓰고 천주교에 입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느님 신앙과 이로 인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손상되지 않음(impassibilitas)의 은총은 위의 세 가지 은총의 종합적인 결과로, 향후 백 년 동안 전국에 189군데의 심산유곡에 교우촌들이 세워졌으며 여기서 당시 조선 사회와는 대조적인 신앙질서가 실천되어 한국의 문명을 앞당긴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이 발각되어 체포되고 고문당하다가 치명한 순교자들이 구전상으로 2만 명이 넘으며, 이들 중 기록이 확실한 순교자 103위는 성인품에 올랐고, 124위는 복자품에 올라있다.
이 네 가지 역사적 현상 모두 자연스럽거나, 논리적이거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고 하느님 신앙을 부인하는 무신론적 사조에 저항하여 신앙적 가치에 순응하며, 거룩함의 가치를 성사로써 구체화시켜 선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당시 사회의 권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실천된 데다가, 서구 사회에서나 아시아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례적인 현상인 까닭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신 사기지은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 창립과 성사조직에 나타난 사기지은은 그 결과 단기간에 천 명이 넘는 입교자들을 불러 모을 만큼 폭발적인 선교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들이 주교로부터 합법적인 서품을 받지 않고서는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후에는 자발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이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자생적인 교회 창립과 더불어 자발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선교할 정도로 성사에 대해 열망한 움직임 역시 세계 교회역사상 이례적인 현상이요, 평신도 사도직으로서 주목할 만한 역사 현상이다.
20.6.4. 평신도 성사조직의 교회론적 의미
성사조직을 조직하여 교회를 운영한 그들은 모두 평신도 유학자들이었다.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어 천주학을 공부한 연후에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선비들은 이벽의 제안으로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 오게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강학회 선비들은 이벽의 주도로 교리를 가르치는 모임과 함께 세례 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처음에 수표교 이벽의 공부방에서 시작된 이 움직임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명례방 김범우의 더 넓은 집으로 옮겼다. 그런데 우연히 포도청 포졸들에 의해 이 모임이 적발되면서 최초의 박해가 닥쳤다. 주도자 이벽이 문중박해를 받게 되어 세상을 떠났다.
강학회 선비들은 이승훈의 주도로 이벽 사후의 대책을 수립하였으니, 그것은 공동으로 지도자 조직을 꾸려 교리 교육과 성사 거행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10명으로 구성된 이 성사조직은 커다란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이 교리 교육과 성사에 대한 갈망에서 자발적으로 조직을 운영한 일은 한국교회 초창기의 지도자들이 진정성 있게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였음을 알게 해 주는 동시에, 그들이 얼마나 거룩한 가치를 열망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즉, 천주교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당시 사회 현실에서 벗어나 거룩한 진리에 맛들이게 하고, 세례 성사로써 거룩한 진리를 실천할 각오로 새로운 삶을 출발시키며, 고해 성사로써는 속된 세상에 물들어 저지른 죄를 깨끗하게 씻고 거룩함에로 귀의하고, 성체 성사로써는 거룩하신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게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성사(聖事)’로서 거룩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바오로의 사도직을 연상케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그들의 신앙을 불타오르게 하여,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전하며 그분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성사를 베푸려는 열의로 가득차게 하였던 것이다. 선교사가 도착하기 10 년 전이요, 한국교회에 교구가 설정되기 40년 전에, 당시 조선 사회의 엘리트인 젊은 유학자들이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사명감을 느끼고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베푼 이 선도적 움직임은 당시 한양 선비 천여 명을 입교시킬 정도로 매우 효과적인 선교방식이었으며, 이 무렵에 각 지방의 명망있는 선비들을 다수 포섭한 결과 향후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국에 퍼질 수 있게 만든 매우 조직적인 선교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매우 이례적인 선교열 현상에 나타난 자발성, 평신도 주체성 그리고 성사적 갈망이 향후 민족 복음화 과업에서는 물론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서 매우 중요한 성령의 이끄심이 될 것으로 본다. 이 평신도 성사조직은 사상과 글로 그리스도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시작한 한국교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을 조직화시킨 진전된 토착화 조치로 볼 수 있다.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을 아시아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아시아인들의 심성과 문화 그리고 종교 속에 이미 개입하신 하느님의 신성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야 이미 오랜 종교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그들의 종교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화의 세속적 풍조에 물들어 가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서구적 문명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려는 사회교리에 따라서 서구 세계와 아시아 세계가 다 함께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려면, 세상에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직업활동을 하는 평신도들의 각성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이 땅에 그리스도 신앙을 들여온 선각자 선조들은 신앙을 추구함에 있어 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한편, 신앙에 대한 박해가 닥치자 이에 저항하는 의지로 순교를 감행하고 이를 순교 정신으로 계승하였다. 그 배경이 된 원동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앞서 최양업이 보고하는 바와 같이, 신분차별적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회악 현상에 대한 저항 의식을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백성에게 하느님 신앙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갈망이 그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무속으로 취급되어 오면서 잡신과 뒤섞인 전통적 하느님 신앙에 대해서 그리스도 신앙에 의한 식별 작업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토착화 작업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선조들은 한국의 전통적 하느님 신앙의 기반 위에 그리스도 신앙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흔적은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 그리고 정약종의 ‘주교요지’,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그리스도교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를 동일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에서 찾는 하느님의 성격과 유사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묘사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김웅태).
우리는 이미 제1장에서 제12장까지의 복음서 본문 해설의 부록에서 전통적 하느님 신앙의 흔적으로 추적해 왔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아시아의 동방으로 불러내셨으며,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계시해 주셨음을 확인하였다. 이 계시에 대해 한민족의 선조들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이념으로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과 주변 민족들에게 전하고자 하였으며, 8조법금과 홍범9주의 질서로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묘한 섭리로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 민족에게 전해지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를 ‘신관의 토착화’라 부를 수 있다면, 신앙 선조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으로 성사조직을 창안하여 운영한 일은 ‘교회 조직의 토착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들의 성사조직을 ‘가성직제도’라고 부르는 교회사가들도 그 조직이 이룩한 성교적 성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체계화된 연구 훈련을 받아 교회사 연구를 시작했던 최석우는 “한국교회는 토착화된 교회인가?”라는 물음을 필생의 화두로 삼아 연구했는데, 이른바 ‘가성직제도’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활기찼던 시기”라고 평가하였다. 이벽과 이승훈이 주축이 되어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던 활동은 처음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사람이 늘어나자 중인 출신으로 의원을 하고 있는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서 계속되었다. 이 활동이 추조적발사건으로 중단될 때까지 한양 선비 천여 명이 입교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이벽이 천주교 모임의 지도자로 알려지자 이벽의 집안에서 일어난 문중박해로 이벽이 세상을 떠나자, 강학회 선비들은 대책회의를 열고 이승훈을 주축으로 모두 10명의 선비들이 명륜동과 회현동, 두 군데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푸는 활동을 은밀히 계속하였다(정민). 추조적발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이 선비들은 그때부터는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양반 선비, 중인, 상민과 천민을 신분별로 구분하여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편, 경기(양평, 포천), 충청(내포), 전라(진산, 전주) 등 각 지방으로도 이 모임이 퍼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4천여 명이 입교하는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그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이미 약속한 대로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를 1795년 1월경에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주 신부는 1797년에 명도회(明道會)라는 신자 조직을 조직하여 남자 회장에 정약종, 여자 회장에 강완숙을 임명하여 가동한 결과,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만여 명에 이르는 신자를 얻을 수 있었다(방상근).
이상의 역사적 사실만 상기해 보아도, 이들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직자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사를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성직자의 성사 거행이 실현되자 열심히 교리를 가르치고 교리를 배운 이들을 성사에 참여시켜 커다란 선교적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는 성사 활동이 얼마나 선교적 위력을 발휘했는지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독성죄’ 논란은 이 사태와 현상의 본질을 한참 비껴간 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교회법과 성품성사 규정에 무지했을 뿐이며, 그것을 지적받자 즉시 자신들의 성사 거행을 중지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에 돌입했으며, 그러다가 정식 성직자가 파견되어 오자 성사 거행에 전심으로 협력함으로써 놀라운 선교 성과를 거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사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성사적 갈망을 회복해야 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역사적 모범 사례로 규정지어야 한다고 본다.

첫댓글 <그리스도 현존의 징표들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옵고 말씀이신 그분과 함께 새 역사의 창조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멘 !
요즘 겪어낸 일들로 새롭게 주시는 상황들을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남편의 전폭적 지지와 동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에 희망을 갖습니다.
20.1.<카리스마적 공동체들이 이런 지혜를 발휘하기 위한 요한의 처신>
<‘몸을 굽혀’ 현장의 상황과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처신이 필요하다. 베드로를 기다려주는 것이다.>
지혜롭게 봉사하는 자세를 생각하며 마음에 담습니다.
20.2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이때 전해야 할 복음이 바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는 막달레나의 메시지이다.>
<제자들은 막달레나로부터 스승께서 부활하셨고
자신이 만나 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다.>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이란 생각을 하며 용기 있게 막달레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주님 저희에게 대담한 용기를 허락하시어 이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