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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함석헌
그날의 소식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 나는 집 앞 채마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오후쯤 해서 내 생질 최창복(崔昌福)이가 용암포로부터 자전차를 몰아서 들어와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우리나라 독립이 되게 됐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날까지 36년 깸에 잠에 그리던 그 날이건만 막상 듣고 나니 그저 벙벙, 갑자기 흥분이 되는 것도 날뛸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메고 있던 거름통도 내려놓지도 않고 그저 “그래, 그날이 오긴 왔구나” 할 뿐,주던 거름 마저 주려했다. 그랬더니 창복이 말이 용암포의 여러분들이 나와서 축하식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보다도 하던 일을 어서 마치고 조용히 앉아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기쁘지 않기쁘겠냐 마는 나는 축하를 해도 내 식으로 할터이니 그대로들 하시라고 해라”해서 내 보내고는 다시 거름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갔던 창복이가 다시 헐덕거려 오더니 하는 말이 여러 사람이 그래서는 아니 된다고 꼭 나와야 한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벌써 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이상 더 거절할 수도 없고, 이런 일은 도무지 첨이다. 나는 생각해 봤다. 왜 그들이 나를 찾을까? 나는 보통 때 나와 세상 사이에 적지아니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1943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 년 동안의 미결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일본의 압박은 날로 심하지, 앞으로 다시 교사질을 할 희망도 없지, 그래서 농사를 하지만, 내가 아무리 농군이 되려해도 그들이 나를 자기네 동무로 알아 주려하지 않았다. 서로 어울리지를 안았다. 거리에는 한 달에 한 번 이발을 하러 나가는 것뿐이었으나 누구 하나 아는 척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가는 말대로 “경찰서 형무소 살이만 밤낮 가는 사람”을 아는 척 해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그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혼자마음이 늘 외로왔다. 그래 별 다른 생각이 없이 그저 땅을 파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나를 보잔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 끝에 나는 알았다. 축하식도 하고 이제 앞으로 새 일이 벌어지는데 누가 그것을 이끄느냐 그것이 그들에게 문제였을 것이다. 일본 쪽에 가까이 해서 나다니던 사람은 자연 나설 수가 없지. 그렇다고 기독교 사람이 나오면 천도교측이 허락 아니 하지, 천도교가 나오면 기독교가 따르려 하지 않지, 이런 관계여서 요구되는 것은 순전히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이것이 평소에 별로 가까이 다니지도 않던 나를 나와야 한다고 강요하는 이유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럴만하다고 수긍되는 점이 있기 도해서 나가기로 했다. “그래, 나를 이용하잔 것인데 이런 때는 이용당해도 좋다. 모르고 당하면 어리석지만 알고 당하는 것은 괜치 않다. 하리만큼 해준 다음엔 나는 물러난다. 내가 정치를 아느냐?” 창복이에게 그렇게 말을 해주며 따라 나갔다.
나가니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지금 인천 와 있는 이기혁(李基赫)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 들이 터질 지경으로 사람이 모였는데 일은 벌써 자기네가 다 짜 놓은 것이므로 사양의 여지가 없었다. 무슨 말을 했던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좌우간 내가 나서서 식을 주장했고 시가행진을 늦도록 했고, 그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용암포자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돼버렸다. 내 이름의 장 자가 붙은 것은 이것이 첨이었다.
그래서 할 일 해주고는 곧 내 밭으로 돌아온다던 것이 예상과는 달리 아주 잡혀 버렸다. 그래 계속해서 용천군 자치위원회가 조직됨에 따라 그 위원장으로 올라갔다. 하고 싶다기보다는 마음이 약해서 버리지 못해 맡는 일인데 세상은 참 우스울 것이 어서 그 자리에 앉으니 저마다 와서 평소부터 잘 알았다는 것이요, 존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은 아니 그런다. 그 마음 내가 알지.
그러는 것은 소위 행세한다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요렇구나” 속으로 혼자가 없이 생각하며, 정말 일을 의론 할만한 친구 하나 없이, 나도 아무 구상이 없는 일 맡아 놓으니 앞이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또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이 부락 저 부락을 돌면서 보노라면 평소에는 나와는 먼 것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친구가 된 것을 느꼈다. 이날껏 억누름 밑에서 죽지를 펴지 못하던 민중이 활기를 띠고 굉장히 대담해졌다. 그리고 바다 물결 같은 선심이 어디서 나왔을까? 나라를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빼내람 낼듯한 기세였다.
더구나 보고 좋은 것은 일본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사실 나는 전에 만보산 사건도 보았기 때문에 혹시나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옅은 흥분에 어떤 보복적인 소동이라도 일어나지나 않을까, 첫날 용암포로 끌려 나갈 때도 그것부터 걱정스러웠는데, 그런 일이 하나도 없었고, 거리를 지나다가 일본 아이들이 그냥 마음 놓고 전과 같이 나와 노는 것을 볼때는 “마음은 정말 착한 백성인데” 하고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그러는 동안에 두 세 주일이 지나 가고 아마 9월 초였다고 기억되는데, 신의주로부터 평안북도 자치위원회를 조직하니 군 대표를 뽑아 보내라는 통지가 왔다. 회의 끝에 나와 부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李龍洽)과 두 사람이 가기로 했다. 이제 일의 규모가 켜지는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수염을 기르고 메트리를 신고 농사꾼으로 남은 날을 살자던 사람이니 사회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신의주에 가니 거기는 이미 서울에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시국의 대체 형편을 좀 더 짐작할 수도 있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저 일이 돼가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주자치위원 중에 알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산 있을 때 학부형으로 한두 번 만난 사람으로서 이름의 이황이라고 했는데 신문기자 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고 적지 아니 협잡성을 띤 인물이었다. 그가 이끌어낸 이로서 이번에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될 분이 이유필(李裕弼)씨, 호를 춘산(春山)이라고 했다. 나는 첨으로 만났으니 세상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듯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오래 있었고 일본 관리한테 잡혀 삼년인가 징역을 마치고 나와 신의주 맞은편 안동에 살고 있었다고 했었다. 몸집이 뚱뚱한데 붉은 낯빛이고 인후해 뵈는 인상이었다. 긴 투쟁의 역사를 가졌으니 믿을만한 데는 다시 말할 여지가 없으나 위원회가 조직된 후 언젠가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이 자치위원회를 지켜 치안을 유지하다가 중국에 서 정부가 돌아오는 날 고스란히 그것을 가져다 바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정치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도 “너무도 단순하구나, 구식적인 생각이로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각 고을 대표가 모여 회의 결과 평안북도 자치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장에는 그 이유필 선생이 됐고 부위원장은 백용구(白容龜)라는 사람이 됐다. 그는 좌익적인 사상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때 신의주에는 이미 공산주의 단체가 있었으나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치위원회와의 사이에는 얼마쯤 마찰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 백이 부위원장으로 되 는 것도 그러한 관계에서 된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문교부장의 책임을 맡게 됐는데, 생각하면 이것이 내 잘못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일본에 굽혀본 일도 타협해 본 일도 없지만 정치적으로 반항해 보잔 생각은 해보지 못했고, 또 스스로 내 성격을 보아도 정치에 적당치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교부장 말이 나왔을 때 내 마음은 결코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몰라도 그들은 나를 아노라고 강권도 했고, 또 용암포 자치위원장이 된 이래 시국에 접해보는 동안 “이왕이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한번 실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으냐”하는 생각도 있어서 끝내 사양하지 않고 받아 버렸다.
한 달 동안 참 열심이람 열심으로 일했다. 내가 아는 한으로는 믿을만한 뜻있는 사람으로 교육 진영을 짜오려 했다. 어느 날까지 그 상태가 계속될지 일의 결과가 어찌될지, 아무도 알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일을 해보려고 활발히 움직였다. 모르지, 정말 그랬는지 그때 벌써 속으로는 딴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룻밤 새의 환장
그러던 9월 말경에 가서 갑자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 날짜를 기억 못하는데 그날 마침 위원들이 모여 정무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누가 들어와서 소련군이 시내로 들어온다고 전해 주었다. 그 소리를 듣더니 회의하던 사람들이, 소위 무슨 부장 무슨 부장 하는 것들이 서로 의논할 겨를도 없이 온다간다 소리없이 제각기 다 뛰쳐 나가버리고 자리에는 위원장과 나 두 사람이 앉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청사에서 서로 만나니 하룻밤 새에 대변동이다. 거의 다 공산당이 돼버렸다. 이유필 선생이 비서격으로 신임하는 청년이 하나 있어서 일본서 무슨 전문엔가 다녔다고 내가 보기에도 가장 똑똑한 지식 청년으로 보였고, 그도 무슨 부장인가 맡고 있었는데 그 사람조차 공산당 편으로 돌아버렸으니 이 위원장의 심경이 어떠할까 짐작할 수 있었다.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온 시내는 공포 기분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 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 (내라)다. 그담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들을 환영하는 모임을 하기 위해 의론을 하는데 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 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無水알콜 병을 들고 한 손에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았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 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정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뺏어 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 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 내어 소련 군인께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그것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그날부터 일을 자꾸 기우러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든 그 열심은 다 달아나 버리고, 있는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 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 뿐이고 사실은 소련일색으로 기우러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 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 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 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위원 일동이 평양을 나갔다. 내가 조만식 선생님을 뵈온 것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 말씀도 아니 하고 가만 앉았는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괴로와 보였다. 분과로 모여 토의도 하고 했는데 이제 하나도 그것을 기억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해서 모든 것이 우리 생각과는 어긋나는 것뿐이었다.
5도 회의에서 돌아온 후인가 그 전 인가 잘 알 수 없으나 최용건(崔鏞健)이가 신의주를 왔다. 그는 같은 용천 출신이요, 오산 학교에서 한반에 있었으므로 잘 아는 처지다. 한반에 있다가 스트라익을 하고 학교를 나갔고 그 후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가 또 스트라익을 하고 나가서는 이날껏 중국에 가 있었다. 들리는 말에 연안군(延安軍)에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어느만큼 애국운동을 했는지 누가 알 수가 없지만 지금 공산군편으로 나라에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 날 동창 몇이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만나고 난 후 나는 실망했다. 나라를 떠나 몇 십년만에 돌아온 사람으로서 정말 나라를 위할 생각아 있다면 우리와 의론하지 않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청하기 전에 제가 먼저 우리를 찾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모처럼 환영한다고 만났는데 한마디 말이 없었다. 전날 학교에 있을 때에 지나본 것으로 보아 첨부터 그리 큰 것을 기대는 아니했지만, 그리고 따져 말해서 그동안 몇십년 독립군 노릇을 했는지 마적질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오늘 조국을 위해서 들어왔으면, 옛친구 아니고는 나라의 실정을 알 길이 없을 터인데 그것을 하려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첨부터 주의해서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 벌써 나는 믿지 못할 사람으로 단정해 버렸다. 그는 선생님이 안아서 길러낸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 말대로 선생님을 달래기 위해 열아홉 번 찾아뵙노라고 했다. 그렇게 듣고 나면 그래도 종시 고개를 돌리신 선생님의 위대에 감탄하는 대신 최용건의 속살이 무엇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의 이름도 그때부터 차차 나돌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직 이북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때요, 이제 그것을 하려는 참이었다.
우리청년회
내가 문교부장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아마 지금 이만갑(李萬甲) 교수도 그때의 한사람이 아니었든가 생각하지만 그 회원들의 이름을 알 수는 없고 다만 회장이 김성순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신의주 내지 평북의 인텔리의 정예분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적 경향을 말하면 대체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신의주 용천 일대는 땅이 평평하고 기름져 전국에서는 유수한 쌀 고장이므로 일반으로 자작농이 많은 비교적 넉넉하게 사는 곳이었다. 그러기에 일제 때 전국적으로 유학생이 다른 곳보다 엉뚱하게 가장 많은 곳이 이곳이요,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곳도 여기었다. 동양서 제일 크다는, 어떤 사람은 세계서 제일이라는 영락 교회는 사실 신의주 용천교회다. 한경직 목사 자신이 용천 출신이요, 그 교인이, 지금은 물론 다르지만, 서울서 첨으로 설 때는 주로 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듯 구한국 말년이래 지식, 사상이 가장 진보된 것이 이 지방이었다. 이제 이 우리청년 회는 그러한 층의 새로 오는 새 역사의 부름에 대해 일어나는 자각운동 혹은 행동의 첫걸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회를 조직하면서 청년들이 나한테 왔다. 회장이 돼 달라 했으나,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당신들의 활동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도리어 그러느니 만큼 내가 직접 회장이 되면 하고 싶 은 일도 못한다. 그러니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뒤에서 응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들도 이해하고 내가 고문이라는 이름을 띠고 이 따끔 만나곤 했다.
가족은 운명을 같이하는 한 단체지만 가족끼리는 도리어 의식적인 단결은 없다. 의식적인 단결은 도리어 그 가족을 멸망시키려는 도둑편에서 먼저 한다. 그러나 도둑의 단체가 생기 면 가족도 자연적인 정의의 하나 됨만으로는 아니 되고 의식적으로 단결해 부서를 짜고 활동해서만 그 도둑의 단체를 이길 수 있다.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우리의 역사적 단계에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상적인 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계급적 대립이 심치 않았던 이북, 이북 중에서도 평안도지방은 그렇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공산군대 가 들어왔다. 권력에 대해 야심 있는 분자가 거기 달라붙었다. 이리해서 일종의 어거지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면 사회 양심이 멍청하고 있을 수 없다. 사회의 안전한 발전을 위협하는 그 세력에 조직적으로 대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의식적으로 어느 만큼 자각이 됐었는지 모르나 역사적인 의미를 판단할 때 우리청년회는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청년회와 하룻밤 새 만들어진 사이비 공산당 사이에는 충돌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비인도적인 비법적인 횡포가 늘어가면 갈수록 그 충돌은 표면화 해가고 격화되어 갔다.
공정하게 전체의 역사적인 운명을 생각해서 그 어느 편이 이겼어야 할 것이냐 하면 물론 우리청년회가 발전하고 마음껏 활동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문제가 없지 않다. 그 들은 일반으로 자작농 이상의 가정에서 났으니 만큼 부르조아적인 사상 경향을 청산치 못했으니 앞으로 그것을 하지 않고는 역사가 요청하는 혁명을 지도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게 하나의 큰 과제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런 세력에 등을 대고 하는 비양심적인 무리에게 사회를 맡길 것이냐 하면 적어도 공정한 양심이 죽지 않은 사람인 담엔 그렇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 슬픈 것은, 역사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말았다.
학생사건에 우리청년회가 어느 만큼 관계됐느냐 그것은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한으로는 직접적인 어떤 관계가 나타난 것은 없다. 회장 김성순이 사건 후에 시베리아로 끌려간 것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의심했기 때문에 된 일이겠지만, 내가 아는 한으론 없다. 일이 터지기 전 바로 하루 이틀 전이라고 기억되는데, 밤에 모임이 있어서 내가 가서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왔는데 그때에 그런데 관한 아무런 소리도 기미도 없었다.
그러나 법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도의적으로 사상적으로는 영향이 있지 결코 없다할 수 없을 것이다. 선배들의 생각이나 하는 일은 후배 학생에게는 크게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직접적인 관계가 있건 없건 신의주 학생사건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적 사건의 진원지를 찾는다면 우리청년회를 내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용암포 사건
어떠한 큰 사건도 도화선 없이는 되지 않는다. 4.19가 마산사건으로 인해 터졌고, 마산사건은 또 대구사건 때문에 일어났던 것같이 신의주 학생 사건에 앞서 가는 것이 용암포 사건이다.
용암포는 내 고향이지만 나는 그때 신의주에 가 있었으므로 그 자세한 것을 모른다. 한마디로 해서 그것은 그때 내 뒤를 이어서 군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의 횡포 때문이다. 그는 독일 유학도 했다고 하나 올바른 지식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일제시대에 무엇 했다는 것이 없이 해방 후 불쑥 나타나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성질이 온건치 못했다. 그 러나 소련군이 오기 전까지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그 온 후부터 아주 사납게 굴기 시작했다. 군위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마땅치 않은 일이 많아 민중의 원망이 많았는데 그것이 쌓여 가다가 분개한 학생들의 질문인가 데모인가 무슨 그 비슷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지독히 비인도적으로 탄압해서 사회의 격분을 일으켰다.
민중이란 약하다면 참 약한 것이다. 그렇게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때마침 위에서 말한 최창복이가 왔기에 내가 “그래도 우리 마을 사람들이야 아니 그랬겠지” 했더니 그 대답이 “뭐요. 우리 동리 사람들이 한층 더한걸요!” 했다. 듣고 참 슬펐다. 자랑을 하자 해서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부르조아 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라, 해방될 때까지 나는 그래도 인간적으로 그들을 대하노라 했고 그들도 나를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하기는 당초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부터 한 수법이 그렇다. 동리 안에서도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 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가진 악감정을 불어넣어 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을 조직해서 평지풍파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데마다 사회를 파괴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소위 계급투쟁의 과학적 방법인 것을 내가 모르지 않았다. 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인간 양심은 이렇게 약하단 말이냐. 인심유위(人心唯危), 도심유미(道心唯微)란 말은 안 줄 알았더니 알고도 몰랐었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생각있는 사람들의 격분을 일으켰는데 거기 또 하나의 불똥이 떨어졌다. 법원 점령 사건이다. 일제 때 쓰던 재판소를 그냥 재판소로 써 왔었는데 공산당이 위원회에 청원이나 교섭을 하는 일도 없이 하룻밤 새 불법으로 마구 점령을 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의 하는 일은 나날이 거만하고 사납고 폭력적이 돼 갔다. 그것이 일을 일으킨 가장 가까운 원인이었다.
11월 23일
그렇게 일이 점점 고성낙일(孤城落日)이 돼가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이위원장을 보고 사면할 뜻을 말했다. 그랬더니 내 손을 잡으며 “여보 그만두어도 같이 그만둡시다. 일이란 것이 시기가 있지 않소? 이제 어느 시기를 보아 그만두도록 합시다”했다. 말을 듣고 영감을 보니 참 불쌍했다. 비서 최영춘이 있어서 돕기는 하나 공산주의자들이 최영춘을 미워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나는 본래 춘산 선생을 안 것도 아니요, 여기서 만난 것이지만, 이 어려운 때에 차마 그를 혼자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간다 해도 나도 평안을 찾아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평안한 곳이 있을 리도 없지만, 이 어려운 자리에 늙은이를, 더구나 자기를 지지하고 돕는다 했던 놈들 한데 배신당한 이를 참아 나는 모르겠소 하고 갈 수가 없었다. 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내 손으로 끌어서 교육계에 세웠던 모든 사람들, 그들이 나를 믿고 왔다 해야 할 터인데 이제 어떻게 그들을 사지에 두고 나만 나가느냐? 그 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김희철(金熙哲)씨였다. 내가 오산을 떠난 후 오산에 가 있었던 일이 있고 그 후 알게 되어. 대번에 서로 마음이 허락되어 일을 같이 해보자고 이끌어 왔는데 이제 내가 물러서면 그의 입장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한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리해서 한 번 났던 생각을 누르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공산당 놈들도 내게 대해 정면으로 뭐라 하지는 못했다. 사상적으로 원수로 알 것이야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저희도 그러고 세상이 다 아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잡는 시기가 왔다.
11월 22일, 그러니까 사건 전날 어디서 보도가 들어오는데 시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일이나 위원회와 공산당 본부에 질문을 들어오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곧 각 학교 교장에게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그렇게 하면 큰일이 날터이니 잘 타일러서 미리 막도록 하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공산당의 속아지가 어떤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절대로 잘못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해서 죽일 수는 없었다.
이튿날 23일 아침, 그때 나는 위원회에 올라온 이래 친척되는 함국현씨 집에서 자고 먹고 있었는데, 후일에 하는 말을 들으면 아침에 밥을 먹으려다가 젓가락으로 상 위에 방아를 짛더라는 것이다. 일은 다가오고 나도 이렇게 할 수 없는 생각에 답답해서 그랬을 것이다.
출근을 해서 좀 있다가 정오 쯤 되니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청사 안이 긴장하고 사람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당황해 하기 시작 했다.
총소리가 몇방 땅땅 하고 났다. 방을 뛰어나와 정문 앞을 나가니 저기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오는 것이 보였다. 보안부장 한웅이란 놈, 그 부하 차정삼이란 놈이 “쏴라! 쏴라!” 다급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 다다 학생들은 티끌을 차며 도망했고 문앞까지 들어왔던 몇이 꺼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저기 멀건이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아무도 가까이 오려하지도 않았다. 청사 안에 직원도 여러 백명이건만 어디 간지 뵈지도 않았다. 하는 수없이 나는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문교부 직원 몇을 데리고 나왔다. 가보니 셋이 넘어져 있지 않나.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쓴 채 엎어진 것도 있고 자빠진 것도 있었다. 쓸어안아 일으켰다. 죽었구나! 죽었구나! 26년이 지난 오늘 이글을 쓰면서는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 글자를 완전히 이룰 수 없지만 그때는 눈물도 나올 수 없었다. 아직도 따근따근한 몸인데 눈을 번히 뜨고 말이 없었다. 왜 죽었냐? 왜 죽었냐?
둘은 벌써 숨이 끊어졌고 하나는 아직 숨 기절이 있었으나 가망이 있어 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몇이서 병원으로 안고 갔다. 그 이름들이 무엇이던지 오늘까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돌아와 도청 정물에 오니 한 사람이 앞을 막아서더니 “이것만이오, 더 큰 것을 보겠소 갑시다.”했다. 직감적으로 알기를 했지만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럽시다.” 따라가니 간 곳은 문제의 공산당 본부였다. 뜰에 썩 들어서니 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까만 교복을 입은 것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그 때 인상으로 한 20명은 될까?
소련 군인이 뜰에 꽉 차 있었다. 그러더니 내가 온 것을 보고 한 사람이 일어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 2세로서 소련 군인인 사람이었다. 그보다 며칠 전 소련군 교육 고문이 찾아와서 면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 사람이 통역으로 왔었다. 그때는 자기 부모는 함경도서 났다는 이야기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아주 친절히 하고 갔는데 오늘은 태도 일변이다. 러시아 말을 내가 모르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나 그 태도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분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서 나를 이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듣더니 소련군인의 총칼이 일시에 쏵 하고 내 가슴으로 모여들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것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똑똑했다. 지금도 그때의 내 모양을 그리라 해도 그럴 수 있다. 숨결이 높아졌다는 기억도 겁이 났다는 기억도 없다. 열인지 스물인지 알 수 없는 총부리와 칼과 피스톨이 내 가슴에 방사선 형으로 와 닿았을 때 번듯 내 속에 비친 말은 “오늘은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 순간 “이왕 죽는 것이면 비겁하게 해선 못쓰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을 본 기억도 없다. 그때 남향을 하고 서 있었는데 그저 뵈는대로 저 먼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하다는 생각도 그들이 밉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이란 생각, 믿는다는 생각 옳은 도리라는 생각, 평생에 배우고 지켜온 것이 내 속에 살아 있었다. 스스로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소련장교로 뵈는 한 사람이 나서더니 그 총칼 떠밀어 제쳤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 순간 그 물결은 다시 밀려들었다. 또 떠밀었다. 또 쫓겨 갔다가 또 밀려들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한 후 장교는 이겼다. 군인들이 저만치 물러섰다. 그 순간 다른 물결이 닥쳐왔다. 이번은 우리나라 공산당원들이 하는 뭇매질 이었다. 또 선채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렇게서 좋으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옷이 찢어지고, 매질은 계속됐다. 나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앞은 감각도 없었다. 그저 터덕터덕 몸에 와 닿은 것을 알 뿐이지 아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마지막에 강한 타격이 뒤통수에 와 닿자 나는 머리가 뗑해 의식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정신을 잃는구나 하는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후는 알 수 없다. 얼마 후에 정신이 드니 나는 여러 사람에게 들리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찬물이 끼얹어지고 마시라는 대로 마시고 나서 정신이 들어 보니 둘러선 사람 중엔 알 수 있는 얼굴도 한 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노인희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비교적 이론적인 공산주의자로서 그전에 한 두 번 본 일이 있었다. “아, 선생님 않됐습니다” 어쩌구 하는 말을 했다. 그 순간에도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데 소련 장교가 하나 왔다. 먼저 그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나서라는 것이었다. 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나더러 앞서 가라는 것이다. 반항하고 싶지 않았다. 가라면 가지, 떨리지도 않았다. 도망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비겁하게 굴어서는 사람이 아니란 생각은 여전히 지구의 인력처럼 맘 속에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당하고도 다 잊었는데 후에 그 광경을 봤던 사람들이 말을 해주니 그것이 어떻게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지만 나는 그때는 조금도 겁나는 생각이 없었다. 남이 말해 주는데 의하면 총을 재어 들고 앞서 가라는 것은 자칫하면 마지막을 의미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줄은 모르기도 했고 죽기는 첨부터 다 죽은 것으로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갈까 어쩌고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총살은 아니 당해고, 그때 거기 와 있다가 같이 붙들린 내 일가 매제되는 조공술(趙公述)이 와 같이 둘이서 시내에서 한 오리나 되는 비행장까지 끌려나가 유치장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랬다가 어슬어슬 해가 저무는 무렵 나만이 다시 끌려나와 철도 호텔로 갔다. 무엇 하려는 것인가 영문을 모르고 있는데, 좀 있더니 소련군 사령관한테로 데리고 갔다. 이 위원장도 거기와 있었다. 저녁을 먹으라고 가져다주나 먹을 마음이 없었다. 가만 앉아서 생각에 저 영감이 강경한 태도로 항의하여야 내가 나갈 수 있는데, 그가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조금 있다 그들은 자기 곳으로 가고 나는 끌려 도 경찰부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쉰 날
살문이 육중한 소리로 내 뒤에 덜컥하고 닫기고 감방 안에 주저앉으니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해방이 됐다기에 이제 밝은 날이 오는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내게 잘못이 없으니 마음은 평안하고 몸도 감옥살이는 여러 번 해봤으니 별로 겁날 것이 없었다. 이것이 나의 다섯 번째의 옥 길이다. 첫번은 1923 일본 처음 갔을 때 동경 지진 통에 한국 사람 모조리 학살할 때에 끌려가서 하룻밤자고 나온 것이고, 둘째 번은 오산에서 1930년 남강 선생 돌아가신 후 난데없는 ML당 사건의 연류자라는 이름으로 정주경찰서에 가서 한 주일 있은 것, 세째는 1940년 평양 송산리에 농사학원 하러 나갔다가 계우회 사건에 걸려 들어가 대동경찰서에 일년 있은 것이고, 네째 번은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 대문형무소에 와서 일년 있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그날 당장 죽지 않은 것도 다행이람 다행이지만, 이제 다시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공산당이란 법도 도덕도 없는 세계 아닌가? 저희게 맞으면 맞지 않으면 인정도 도리도 없다. 그래서 첨부터 나가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 일이다. 속이 그리 약한 분은 아니요 의리도 알고 신앙도 깊은 분이니 노상 어쩔줄 몰라하지야 않겠지만, 그전에도 내가 감옥에 갔을 때는 자기도 얼마나 심한가를 알아본다고 겨울 밤 밖에 나가 새워 보는 마음에 오늘 또 이렇게 된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떠할까? 더구나 아버지는 내가 대동경찰서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나서 이제 믿을 건 나뿐인데, 그 내가 이렇게 됐으니 이제 집일을 어떻게 꾸려나갈까? 평생에 시란 것을 써본 일이 없다가 이름이나마 시라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 어머니 생각 때문에 한 것이었다. 허락 되지 않는 조건 아래서 한없는 느낌을 표현해 보자니 자연 시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가족까지도 일체 면회를 허락지 않았다. 간수는 소련 군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고 먹는 것도 그리 부족 하지는 않았다. 나와 맞은편 간에 최영춘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노래를 잘 불러서 밤이면 서로 노래를 불러가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아무도 면회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밖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는데 한 주일도 더 지나서 비로소 첫 면회를 받았다. 본래 우리청년회와 비슷이 여자청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계명선 김일선 두 분이었다. 계명선씨는 나와 연갑되는 용암포 사람이고 김일선씨는 전라도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에 계명선씨께 배운 일이 있는 관계로 늘 같이 살며 용천지방에 많이 와 있었다. 청년회를 조직하자 내가 문교부에 있는 탓으로 자주 거리가 있었는데, 소련 사람들은 공공 단체는 상당히 존중하는 줄을 아는지라, 그 권리를 가지고 사령부에 대들어 나를 면회할 허가를 얻어가지고 온 것이었다. 가족도 엄두를 못내는 이 생지옥에 여자들의 몸으로서 거기까지 들어온 것을 보니 그 고마움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을 며칠에 한 번씩 꼭꼭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왔다 간 후에 그것을 되풀이 되풀이 생각해 보고 또 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단 하나의 위로였다. 몰래 들여준 연필과 종이 조각으로 기다리는 며칠 동안에 생각한 것을 적었다가 온 때에 그것을 주어 보내군 했다. 어머니 생각, 나라 생각에서 시작해서 여러 가지 느낌을 썼으나 그들에 대한 따뜻한 정을 느낀 것을 적은 것이 가장 많았다.
심문은 소련 사람이 했는데 그것이 가관이었다. 말이 통해야 심문을 하지 통역이란 것이 하얼빈서부터 데리고 온 일본 갈보인데 그들의 소련말 실력 정도는 알 수 없으나 도대체 그 지식 정도가 형편없었다. 역사 지리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다. 그러니 거기다 내 운명을 맡기고 심문을 당하는 내 신세란 우스운 것이었다.
그래도 일제시대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심문 조서를 꾸미는 데는 내 머리를 썼다. 일본 형사만 해도 이따금은 인정에 호소해서 나를 이해시킬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겐 첨부터 불가능 할 것을 알았다. 그러기 때문에 물적 증거가 있지 않는 한은 딱 잡아 때기로 했다. 그것이 효과가 있어 그랬는지 김일선씨 말대로 김일성이 그때 바로 나서려 하는 때임으로 민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해서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다시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못 했는데 꼭 오십일을 지나고 갑자기 나가라는 바람에 나왔다. 사실 김일선 계명선 두 분은 그때 그 불편 위험한 상태에서도 평양까지 왔다 갔다 하며 내 구명운동을 했다.
최영춘씨는 참 좋은 분이었는데 종내 나오지 못하고 시베리아로까지 끌려갔는데 그 후 어찌된 지 알 길이 없다. 그가 나오지 못하게 된데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하나는 공산당 놈들이 집어먹은 것 때문이라는 것, 사실 그는 아무 죄도 없었다. 다만 이유필씨를 진심으로 도왔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사람한테 나쁘게 보고를 해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심문을 다한 다음 무엇이나 할 말이 있거든 하라고 하니 이가 그것을 곧이들어 이날까지의 공산당의 잘못된 행실을 일일이 들어 말했다는 것이다. 나도 그것은 그 자신의 입으로부터 심문 받고 나온 후에 들은 기억이 있다. 물론 그의 말은 다 사실이지 거짓말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것을 심문 관리에다 말했다는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나 헌병은 아무리 인정미를 뵈는 듯해도 거기 넘어가서는 아니 된다. 언제나 심문대에 앉을 때는 저 사람과 나는 이해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 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리를 해도, 농담이라도 그것은 결국은 나를 잡자는 것임을 늘 명심해야 한다, 최영춘씨 경우도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여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아까운 사람이다.
갑자기 턱 내놓으니 어디로 갈까? 아무리 가까워도 미안한 일이 되지 않을 데로 가야지. 그래 여자청년회로 갔다. 내 마음은 순 인간적인 열린 마음으로 갔을 뿐이었다. 한 주일을 유하고 용암포 집으로 내려갔으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색안경으로 보려는 생각은 도무지 못했다.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휴지 조박에 몇 수씩 적어 내보낸 글이 나와 보니 고대로 정서가 되어 책으로 매어있었다. 삼 배수가 넘었다. 곧 인쇄를 하자하며 제목을 묻기에 생각 끝에 쉰 날이라고 했다. 있는 날 수가 쉰이니 쉰날이요. 격에도 맞지 않는 정치한다 나셨다가 잡혀가 썩고 썩다가 왔으니 쉰 날이요. 내 혼은 그동안 편안히 쉬었으니 또 쉰 날이다.
살아난 줄 알았으나 나와 보니 산 것이 아니었다. 1946년 1월 11일에 나왔는데, 그해 12월 24일 바로 크리스마스 저녁 때 마침 내 맏딸 은수가 첫아기를 낳게 됐고 집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내가 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보안대 사람이 오더니 또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 끌려가서 또 한 달을 있었다.
또 놔주기에 놔주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내 보내는 대신한 주일에 한 번식 보안서에 오라는 것이다. 첨에는 멋모르고 갔다. 지방에 무슨 사정이 없느냐 묻는 것이었다. 별일 없다고 몇 번은 넘겼으나 나중에는 화를 내고 아주 사람의 이름을 지명하면서 그 사람의 뒤를 밟아 보고하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아, 스파이질을 하라는구나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때 이유필씨 후임으로 위원장으로 알고 내 존경 하는 선배인 백영엽(白永燁)목사 아닌가? 그것은 죽어도 못할 일이었다.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 38선을 넘을 결심을 했다. 그래서 1947년 2월 26일 문밖에 기대서 “내 생각 말고 어서 가거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에 두고 떠나서 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인 줄은 모르고 그래도 멀지 않아 일이 바로 되겠지 하며 나를 이남으로 넘겨주기 위해 일부러 박천서 이백리 넘는 길을 걸어 온 박승방(朴勝芳)씨의 뒤를 따라 나셨다. 그렇게 온 이곳이 이렇게 쉴 곳이 못될 줄은 알지도 못했다.
그날에 총을 맞아 죽은 혼들인들 어찌 평안히 쉴 수 있을까?
씨알의소리 1971년 11월 6호
저작집30; 6- 311
전집20; 4-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