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난설헌 허씨(蘭雪軒許氏, 1563년 ~ 1589년 3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점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의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
생애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유년기와 수학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를 한 구절 써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에 직언했다 한다.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고 말았다.
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
생애 후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 였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