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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유와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육체의 방종으로 남용하지 않고 사랑을 따라 행함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는 복음과 다른 복음에 대해서 논증했고 3장과 4장에서는 율법의 행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변증했는데 5장과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생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justification)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생활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과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누리는 자유와 평화에는 상응하는 희생과 책임이 따릅니다.
영적인 자유나 정치 사회적인 자유 그리고 개인적인 자유를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와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어 있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종이나 노예 제도가 있던 시대에 종으로 일하던 사람이 주인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될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는 것과 그 자유를 행사하며 누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 왕의 통치와 압제 아래서 종노릇 하다가 모세의 지도로 출애굽을 하여 해방을 얻었습니다.
몸은 바로의 통치와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나 사고방식과 습관은 종노릇 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원망과 불평을 반복하다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정착하여 자유롭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기 까지는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 일본제국에 강제 합병되어 36년 동안 통치와 지배를 받다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나라의 주권을 스스로 지키고 누릴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강대국들이 결정한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으로 분할하여 미국과 소련에 의한 식민 통치를 받다가 5년 후에 독립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방과 함께 자주독립을 기대했던 민족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군정 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남한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혼란을 겪다가 1948년 5월에 국회의원 총선거를 하여 처음으로 민주 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1948년 7월에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헌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의 침공으로 민족상쟁의 비극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남한에서만 군인과 민간인 52만 2604명이 사망하고 94만 408명 부상당했으며 43만 5468명 실종되어 189만 8480명이 희생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전쟁을 미리 준비하여 기습적인 침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더 커서 70만 명이 사망하고 182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80만 명이나 실종되어 33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으로 헤어진 일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산업시설과 주거지 등이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과 중공군도 50만 명 이상이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전쟁 후에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옷과 잠잘 곳조차 제대로 없는 폐허와 가난 속에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희생을 감내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영국의 한 기자가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것은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70개가 넘는 나라들 가운데 유일하게 민주화와 산업화와 정보화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피와 땀을 흘려 희생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런 자유와 풍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워싱턴 D.C에는 한국전쟁 참전기념 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판초 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비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The freedom is not free)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피 흘림과 희생 위에 민주화와 산업화와 정보화를 이루고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규모 11위에 이를 만큼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정쟁과 대립 그리고 사회적인 부조리와 부패도 극복해야 하고 극심한 빈부의 격차도 해소해야만 삶의 질과 행복지수가 높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나 정치 사회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희생과 투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영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에게 종노릇 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고 육체와 욕망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런 우리를 구원하여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속량의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와 저주의 형벌인 죽임을 우리대신 당하심으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고 누리는 구원과 영적인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은 선물이지만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그 자유를 선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기가 행사하는 자유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됩니다.
자유인은 어떠한 행동이든지 자기 의지로 선택해서 행동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유익한 면과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유는 칼이나 불과 비슷합니다.
칼은 매우 필요하여 바로 쓰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합니다.
그러나 칼을 잘못 쓰면 내 손을 상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불과도 유사한 성격이 있습니다.
불이 얼마나 귀한 것을 우리는 불을 사용한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정글의 법칙에 보면 김병만 족장을 중심으로 무인도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무를 돌에 갈아 마찰을 일으켜 불을 피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은 우리가 생존하고 생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불을 잘못 사용하면 건물과 산을 불태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이 아직 자유를 올바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동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기를 원하지만 부모님들이 부지런히 돌보고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고를 내거나 위험한 일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죄를 반복하여 저지른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자유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시민이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소중하고 유익하지만 자유를 선용하지 못하면 위험한 면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자기의 마음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할 수 있는 방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하나님 주신 법안에서 사용될 때에만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자연 법칙 아래서 우리의 자유를 사용될 때에만 자연이 우리에게 유익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의 법칙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서 우리의 자유가 사용될 때에만 그 자유가 나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결국은 그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자유에는 사랑으로 봉사하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것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자유를 사용할 때 자신의 편리와 유익을 위하여 방종하게 되고 결국 죄를 범하는 일에 자유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은 자유를 가지고 봉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계명과 율법이 있지만 하나로 요약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인 사랑의 원리를 따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은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안에 이런 의문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정죄와 저주를 당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율법의 행위로 의를 얻고 복을 받으려는 것과 믿음으로 이미 의를 얻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의 복을 받은 사람이 율법을 따라 자원함으로 행하는 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따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신대로 그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로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봉사하며 소망을 품고 인내함으로 칭찬을 받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 캔버라한인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꾼들이 많아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은혜 가운데 예배할 수 있도록 자원하여 봉사하는 찬양 팀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식사와 교제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사랑의 수고를 하는 귀한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섬기기 위하여 파워포인트를 준비하여 올리고 통역으로 자원하여 섬기는 일꾼들도 있습니다.
주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하여 출타 중인데 주일학교를 위해 사랑으로 봉사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청년부에서는 주일예배 전에 모여 중보 기도를 하는 것도 귀한 헌신이지요.
우리 어린 아동들이 유초등부 예배를 위하여 테이블과 의자들을 이동하여 준비하는 것도 사랑으로 돕는 귀한 봉사입니다.
어제는 안수 집사님과 이 권사님 가정이 이사를 했는데 비가 오는 가운데 시간을 내어 이삿짐을 나르는 사랑의 수고를 하고 권사님은 맛있는 음식으로 접대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자원하여 봉사하는 성도들은 사회에서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실천적인 생활을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이웃을 섬기는 최선의 봉사와 사랑의 실천은 무엇일까요?
내가 받은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으로 봉사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와 사망의 그늘에 매여 살고 있을 것입니다.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소에는 우리나라와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다가 잠들어 있습니다.
양화진에 잠들어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등 곳곳에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학교와 병원과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는 1863년 23살 어린 나이에 신혼의 꿈도 포기한 체 결혼하자마자 중국선교사로 상해에 왔습니다.
선교지에 온지 8개월 만에 영국왕족 출신인 아내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힘든 와중에도 토마스 선교사는 만주로 선교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조선 사람을 만나 조선에 선교하고자 제너널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습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의해 그 배는 불탔고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9월 2일 27세의 나이에 대동강 변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강변으로 던지고 또한 한 아름 안고 강가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칼을 들고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성경을 전하고 순교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사람은 조선 관군은 박춘권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박춘권은 그 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져다가 전부 뜯어서 자기 집에 벽지로 발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벽에 붙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박영식이란 사람도 종이가 귀한 때라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가지고 벽과 천장에 발랐습니다.
박영식은 벽에 붙인 성경을 읽게 되었고 훗날 예수를 믿고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교회 이름은 널다리 교회였으며 이 교회가 후에 장대현 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박영식은 장대현 교회의 영수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훗날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성경을 전해주고 순교한 후 41년이 지난 1907년에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교회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여 보낸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존 로스 선교사입니다.
그는 31살에 중국 심양으로 와서 선교하면서 조선에 한글성경이 없음을 알고 한글성경 번역에 평생을 바친 고마운 분입니다.
슬하에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어린 자녀 넷을 두고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로스 선교사님은 사명 감당을 위해 거절하고 처제에게 부탁하여 어린 자녀 넷을 키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녀 넷이 모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에 보낼 성경번역의 사명을 위해 중국에 머물다가 1910년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가서 5년 후인 1915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영적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에 있던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난과 희생을 감당하며 봉사한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구원의 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으로 봉사할 수 있는 최선의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먼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여 선교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여 남용하거나 방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선하게 사용하여 사랑으로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