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은 예산 신암면 용궁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옛 집이다.
그는 여덟 살 때 큰아버지인 김노영(金魯永)에게 양자로 들어갈때까지 이 집에 머물렀다.
고택의 건물 전체는 남향으로,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추사고택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추사의 묘가 안치되어 있으며 묘 바로 남쪽에는 추사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고택 북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과
부인인 영조대왕의 둘째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소가 있으며,
조금 더 북쪽에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인 화순옹주 홍문이 있다.
홍문의 북편에는 새로 조성한 백송공원이 있고, 400여m를 더 가면
추사의 고조부 묘소와 천연기념물로 유명한 용궁리 백송이 있다.
고택 왼편 옆에 있는 우물인데, 추사가 태어나던 날에
갑자기 우물이 마르고 산천초목이 시들었는데 그가 태어나자마 자
우물에서도 물이 나오고 산천초목도 생기를 회복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는 예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
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년(1836)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의 괴지초당(과천 주암동 184)에 은거한채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이 열녀문의 주인공인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딸로
당시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한신과 혼인하였으나,
38세의 나이로 한신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었다.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
(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
정효공 김한신(1720~1758)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732년 13세 때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과 제용감제조를 역임하였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던 그는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으며,
도장을 새김에 있어서도 뛰어나 인보(印寶:임금의 도장)를 새기기도 하였다.
그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애도의 정이 극에 달하여
곧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났는데 현재 묘역에는 그와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이 묘의 특징은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라 하더라도 묘막을 설치할 수 없었으나
정조대왕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것으로 월성위에 대한 안타까움을 달랬다고 한다.
김흥경(金興慶,1677~1750))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유(子有)·숙기(叔起),
호는 급류정(急流亭)이며. 서산 출생으로.
조선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 나무는 김정희(金正喜)가 1809년(순조 9) 그의 아버지인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함께 따라가서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서 자라는 백송을 보고 그 종자를 얻어다
고조부 묘소 앞에 심어 키운 것이라 하며, 천연기념물 제106호이다.
첫댓글 몇번 들린봐있지만 새롭습니다
양택과 음택이 나란히 있는 아주 특이한 형태의 공간들입니다
뜻깊게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