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심지 / 임정자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눈을 보고 말했다. 그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맑고 웃는 눈에 마음이 끌렸다. 우리는 첫눈에 서로에게 반하여 두 달 만에 결혼했다. 난생처음 고향을 떠나 최북단 강원도 원주에서 첫 살림을 꾸렸다. 텔레비전에서나 봤던 군인들의 행렬이 내 눈앞에서 움직였다. 장면 하나하나가 생경했다. 선두에 탱크 장갑차 등 군 장비들이 줄지어 가고 그 뒤를 이어 군인들은 마치 꼬마 인형 장병들처럼 긴 줄로 걸어갔다.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다.
남편은 공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다. 그는 직장에서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내 경험치로 본다면 조직 생활에서 좋은 사람은 자신보다는 주변 사람을 아랫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상사였다. 내 손익계산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큰 사람이었다. 남편도 그런 사람이었다. 직장 내에서 정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되어있었다. 그래서 매번 승진은 후 순위였다.
큰아이 아홉 살에 남편은 광주로 발령받았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라서 이사를 쉽게 결정했다. 원주에서 10년을 살았다. 낯설고 두렵던 장면은 강원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환호성을 치며 여행을 다녔고 치악산을 뒷산 오르듯 올랐다. 행복했다. 강원도에 정 붙일 만할 때 원주를 떠났다.
광주에서 6년 만에 남편은 대전으로 발령받았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직원 세 명을 본사로 불러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은 사람이 기대에 부풀어 좋아했다. 문제는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할 것인지 주말부부로 살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이라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나 또한 광주지방통계청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상태였고 무기계약직으로 변경될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무엇보다도 친정 언니와 헤어지는 게 서운했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질 게 분명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이 될 거라면서 함께 가자는 의견이었다. 가족이 함께할 수 있다는 위안을 안고 이사를 결정했다.
대전에서 남편은 회사 일에 바빠 얼굴 보기 힘들었다. 낮에는 일에 치이고 밤에는 만취되어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나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 잔소리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은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눈물을 마시고 있다. 이 꼴 저 꼴 장단 맞추느라 먹을 수밖에 없다.” 말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남편의 눈은 갓 태어난 아기 얼굴에 황달이 낀 것처럼 누렇다. 맑은 눈은 사라지고 피로에 지친 눈으로 변했다. 가정을 위해 눈물 젖은 술을 마셔대는 사람에게 청년의 맑은 눈을 기대하진 않았다. 가족을 위해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후려칠 기세로 핏발이 선 눈심지로 덤벼들었다. 전쟁 같은 세상에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조직 생활하기가 피로했을 남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아릿하다.
이젠 남편은 변했다. 무엇을 찾아낼 듯이 힘을 주며 살아온 남편의 눈심지가 풀렸다. 사회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자주 한다. 바쁜 딸에게 전화해 핀잔을 들으면서도 매일 전화를 해댄다. 처음부터 편한 아빠는 아니었다. 타인에게는 친절해도 자신에게만큼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식에게 기대가 컸다. 성에 차지 않아 부라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들을 부드럽게 안아주기 시작했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되었다.
남편은 한 직장에서 35년을 일하면서 근무지 변경된 곳이 원주, 광주 그리고 대전 다시 광주, 이동이 있을 때마다 이사했다. 나는 남편 때문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는 곳이 달라졌고,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타인의 삶에 관여하게 되었다.
첫댓글 35년을 애쓴 남편분도 또 낯선 곳을 따라 다니며 생활을 꾸리신 문우님도 너무 고생하셨겠네요. 앞으론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흘러 흘러 고향으로 왔습니다. 고향 음식. 전라도 말을 편안하게 주고 받고 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있어 더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눈물을 마시고 있다는 말이 참 슬프네요.
조직생활이 그런가 봅니다. 이 꼴 저 꼴을 다 봐야 한다는군요.
그게 직장인의 삶인가 봅니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조직의 일원으로 개인의 삶은 무시될 때가 많았는데
당찬 90년대 생이 들어 오면서 그 문화가 많이 달라지는 듯합니다.
원주는 때가 되면 한 달 살기 해 보고 싶은 곳입니다.
가 보지 못한 그 도시의 향기를 선생님 글에서 느낍니다.
잠시 행복해집니다.
원주에서 한 달 살기 해 보고 싶은 이유라도 있을까요? 제주도 살기나 서울살기 등 주로 유명세를 타는 곳으로 장소를 정하던데요.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먼 지역으로 옮기느라 고생많았습니다. 아이들도 전학 다니며 적응하느라 힘들었겠구요. 이제는 마지막 정착이기를 바랍니다.
그렇죠. 어른도 낯선곳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아이들도 힘들었답니다. 그 이야기를 쓸려니 할 말이 많아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으로 왔으니 종착역인겠지요. 이제 어디 갈 곳이 없습니다.
남편의 눈심지가 풀렸다. 이제 서로를 보살필 때가 되었나 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