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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곧 ‘축복’입니다. 「感謝」がまさに「祝福」です。( 2024년 10월 27일 추수감사주일예배)
본문: 디모데전서 2:1~7
2:1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2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3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6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적절한 때에 그 증거를 주셨습니다. 7 나는 이것을 증언하도록 선포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아 믿음과 진리로 이방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참말을 하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1. そこで、まず第一に勧めます。願いと祈りと執り成しと感謝とをすべての人々のためにささげなさい。2. 王たちやすべての高官のためにもささげなさい。わたしたちが常に信心と品位を保ち、平穏で落ち着いた生活を送るためです。3. これは、わたしたちの救い主である神の御前に良いことであり、喜ばれることです。4. 神は、すべての人々が救われて真理を知るようになることを望んでおられます。5. 神は唯一であり、神と人との間の仲介者も、人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ただおひとりなのです。6. この方はすべての人の贖いとして御自身を献げられました。これは定められた時になされた証しです。7. わたしは、その証しのために宣教者また使徒として、すなわち異邦人に信仰と真理を説く教師として任命されたのです。わたしは真実を語っており、偽りは言っていません。
오늘 우리는 올해의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에 추수감사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원래 추수감사주일의 성경적인 근원은 구약시대의 ‘칠칠절’과 ‘수장절'이라는 절기로부터 유래합니다. 현대적인 추수감사절의 본격적인 시작은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당시 신대륙이었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다음 해에 추수한 곡식들에 감사의 예배를 드린 절기를 지킨 것에서 유래하지요.
한 해 동안의 농사와 그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고백하며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전에 비하면 농업인구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에는 직접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계신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물론 취미로 어느 정도 수확의 기쁨과 농사의 보람을 느끼는 경우는 있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올해 열매를 맺는 과일과 곡식, 채소를 구입해서 봉헌하여 강단을 꾸미고 예배를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모습이나 형식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지만, 굳이 이렇게 하는데는 전통적인 추수감사주일의 외형적인 의미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1차적인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지키며 기억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일상의 근본적인 생존을 지탱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앞에 장식되어 있는 모든 먹을 것을 우리가 직접 재배하거나, 수확한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농부들과 어부들을 비롯해서 농작물과 과일을 재배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비를 내리시고, 농사에 알맞은 날씨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오늘 이 모든 봉헌물들은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생명체들을 태초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생존하게 하시고,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자라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마시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구약에서 각각 두 구절만 여러분과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고후 9:10)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신 11:14)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밥상에 차려진 먹을 것을 보면서 항상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밥상 위에 올라오는 모든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직접 간접적으로 수고한 모든 손길들을 축복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오늘 우리가 힘을 합하여 드리는 모든 봉헌물들은 물론 우리의 일상에서 매 끼니마다 마주하는 모든 음식들을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공장에서 가공된 식료품이라고 할지라도 실은 땅과 흙에서 나는 모든 농산물들을 주된 재료와 원료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존과 생활과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음식은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하심인 것을 우리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며 다시금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가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며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과 ‘감사’의 상관관계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존과 생활만 추수감사주일 예배의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영역인 구원을 믿는 믿음과 감사의 태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요. 일본에는 “只より高い物はない。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거저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공짜인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대속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원래가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이라는 값을 주시고 사신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값어치를 실감나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몇 대째 믿는 집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매주 빠지지 않고 주일예배를 지키며 헌신하는 공로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나라와 그 의가 현실에 구현되는 데에 방해물만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죄의 본성을 따라서 죄를 지은 일 밖에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의 선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부어 주신 은혜로 받은 선물인 구원에 속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의 돈을 헌금으로 바쳐야 할까요? 아니면 목숨을 드려야 할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흘려보냅니다. 심지어는 순교를 각오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공로나 대단한 능력이나 종교적 경건의 행동으로 겉을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감사로 드리는 찬양과 예배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농산물과 수확물을 봉헌하며 예배를 드리지만, 실제로는 은혜로 선물해 주신 구원의 삶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산물들이 열매 맺는데 우리가 한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좋은 보상이나, 값진 간증이나 체험, 혹은 기적만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치르신 대속의 값어치를 기억하며 감사로 외치며 찬양하는 것이지요. 예배할 때 뭔가 보상을 받겠다는 마음이나, 혹은 예배하는 것을 어떤 자기중심적인 결과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감각하거나,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종교적인 퍼포먼스를 한편 구경하는 것 정도,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강연 한편을 듣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배다운 예배와 성령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값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감사하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 올 때 감사를 고백하러 나온다는 생각과 마음이 회복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을 통해 감사의 고백으로 이 땅의 성도들이 구해야 할 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루스드라에서 혈통적인 경계선과 문화적, 종교적 경계선에 서 있는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나서 전도여행에 동행으로 삼았습니다. 그 후에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디모데처럼 영적, 문화적 경계선에 서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고, 기도하고, 중보로 기도하며, 감사의 고백으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생존하고 생활하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기억하며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생각하며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은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이들이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구원자이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로 구원받은 자들이 감사할 것을 찾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지요. 자신의 일상에서 보석을 발굴하듯이 감사의 제목들을 캐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단지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이나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겉모습만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을 찾아내고 발굴하여 예배할 때 가져오고, 봉사할 힘을 감사한 것에서 공급받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 이들이 자신의 믿음을 감사로서 증언(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감사의 고백으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의 고백으로 자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자랑하기 위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고백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하루에 하루만큼 자라고 강력해지기 때문에 감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감사의 능력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광활합니다. 저는 감사하는 것과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는 것에 대한 효능과 효율, 그리고 유익함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면, 전심으로 그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더 잘 믿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면 종교적인 노력보다 감사하는 습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나라의 지도자와 관원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고, 중보하고, 감사로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성도의 삶이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증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다운 성도의 경건한 모습을 품격있게 지키고 싶다면 지금 모든 일을 감사로 표현하며 기도하기를 회복하실 수 있기를 정말 정말로 소망합니다.
세속적인 의미로, 혹은 감사하는 삶의 효용성과 효율만을 위해 감사할 것을 찾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감사할 것이 없는 삭막하고 사악하기 그지없는 흉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감사밖에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크고 값진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미 성도로서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평생 감사만 해도 모자랄 것이라고 믿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라서 특별히 감사해야 할 것이 있지만, 꼭 추수감사주일이 아니라도 우리의 모든 일상과 삶의 현장에 감사가 더욱 풍성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은 감사가 곧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감사함으로 자신이 축복을 받을 일이 많아진다는 1차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감사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축복하는 거룩한 행실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가치의 구원을 선물로, 은혜로 거저 받은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인생이란 감사만 고백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모든 삶의 기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여건과 형편에 감사하는 것이 이 땅을 축복하며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가르쳐 주신대로 감사로 이 땅을 축복하는 진정한 영적 제사장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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