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 세종이 양화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 또한 따라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ㆍ임원준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 사인사의 연정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 권극지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하였다.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선생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 임자년 봄에 치숙 송찬은 좌사인이 되고, 나는 우사인이 되었더니, 만력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에 같이 연명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에 가서 술이 반취 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 온 지도 40년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오늘도 손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하였다. 사인 노직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 중종 때에 이락정 문경공 신용개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다투어 풍채 구경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라고 하였다.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중에서 이광전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이라 하고, 혹은 사마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
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는 81세로 벼슬이 부정이고, 유성남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은 75세로 승지로 산관이 되었고, 이권충은 74세로 벼슬이 장원이고, 권벽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은 72세로 벼슬이 사의이고, 이굉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 의경은 90세이고, 동지 송찬은 82세이며, 영해감사 지경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은 73세이다. 첨정 남전은 73세이며, 전 응패두 심수의는 72세이고, 주부 심수준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 이이수와 경력 안한은 80세이며, 좌윤 목첨은 78세, 첨지 서봉은 75세, 참의 송하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오늘 쓸쓸히 활 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하였다.
◉ 읍취헌 박은은 남곤과 용재 이행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연산조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 박공량이 읍취헌의 산일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와 박무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유고 권말에 오율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백 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한 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풍류는 일장에서 다 했네
차마 어찌 호해주를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하였으니, 이는 택지 용재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시 짓고 술 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지금도 종남산 빛이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하였으니, 이는 호숙 이원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하였으니, 이는 명중 이우의 시이다.
◉ 근래 석천 임억령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라고 하거늘 또 삼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하였다. 또 남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