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온 세상을 얻고도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온 세상’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기 자신’이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이란 어떤 ‘자기’일까? 앞 구절에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였으니 ‘구하려는 목숨’과 ‘구하게 되는 목숨’이 다르다. ‘구하려는 자기’와 ‘구하게 되는 자기’가 다르다. ‘구하려는 자기’는 ‘본성적 추동에 의한 자기’라면, ‘구하게 되는 자기’는 ‘수동적 영성에 의한 자기’라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자기 보호 본능’이 있어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는 보다 높은 선을 향한 영적 욕구도 있다. 이 영적 욕구가 있기에 ‘사랑의 계명’도 실천 가능한 것이 되고, 그렇게 인간은 (본성적) ‘자기’를 초월하여 (영적) ‘자기’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본성적 자기’는 ‘죽음’으로 끝나는 ‘자기’다. 그러기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자기’를 살리려 애쓴들, ‘온 세상을 얻고도’ 죽음으로 소멸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니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영적 생명을 얻으려 애써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이란 말로 잘 알려진 여기에 덧붙여진 것이 있다. 그것은 “나 때문에”라는 말씀이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은 죽고, ‘나 때문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산다는 것이다. 일부러 ‘자기’를 죽일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기를 죽여야 한다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것이다.
의리에 죽고 사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벗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에 ‘예수님 때문에’ 죽는 것이 된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추어보면, ‘예수님’은 그분 존재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다. 우리가 자신의 본성적 욕구를 뛰어넘어 빛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자신의 본능적 생존 욕구를 초월하여 진리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면 거기에는 ‘본성을 초월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왼뺨을 때리는데 오른뺨을 돌려주는 것은 우리 몸의 본능이 거부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초월의 능력이 없다면 몰라도 우리가 자기를 초월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계명은 ‘초대장’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생명으로 초대하신다.
물론 이 초대에 응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에 맡겨진다. 그렇다고 누구나 이 초대에 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적어도 ‘본성적-본능적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 거기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모두에게 문은 열려있되 ‘예복’(마태 22,12)이 필요하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위세에 기대지 않고 자기 내면을 살피고, 자기 존재의 품위와 삶의 의미를 찾아 자기 충만을 위해 애쓴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보다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평가를 더 무겁게 받아들인다. 세상이 아무리 칭송해준다 해도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더 두려워한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되 세상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좇는다. 진리와 정의는 그의 벗이 되고 사랑은 그의 지붕이 되어준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 3,1-5)
시편 12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노래한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8,31) 라고 물으며,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중략)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라고 외친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를 알아야 하는데, 이는 자기를 만나는 일과 같다. 그리스 신전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글귀가 있다지만,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릴켈은 “내가 만약 나를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 거야!”라고 말했단다. ‘자기를 만나는 일’이란, 절대로 유쾌하지만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일은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여기에 ‘자기 사랑’이 필요하다. 여기에 ‘피해의식’이나 ‘자기 연민’이 있으면 자기를 직면하여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방어하는 태도로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 할 것이다.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심리 내적 작용은 우리의 삶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간다. 자기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며 억울한 피해자로 여기는 ‘연민’에 빠지게 한다. ‘사랑’은 더욱더 ‘자기’가 되어가도록 ‘성장’시켜가지만, ‘연민’은 점점 ‘나르시스의 늪’에 빠지게 할 뿐이다. 그러기에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루카 9,25)이 있을까? 과학이 참을 증명하는 학문이라면, 사랑도 과학이고, 영성도 과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