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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5 / 하나님의 시작과 끝 사이에 (수3:7-17)
초보운전인 구세군 사관 한 분이 고속도로를 시속 30킬로의 속도로 달리다가 순찰차의 단속에 걸렸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우자 교통경찰이 다가와서 “고속도로에서는 이렇게 저속으로 달리시면 위험합니다. 혹시 차에 이상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사관이 대답하기를 “전 그저 도로 표지판에 30이라고 적혀 있길래 그 속도로만 달렸는데요.”라고 합니다. 이에 경찰이 웃으며 “아닙니다. 그건 속도 안내가 아니라 고속도로 번호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뒷좌석에 타고 있던 신도들이 기절초풍하더랍니다. 직전까지 이분들은 200번 도로를 지나왔던 겁니다.
인생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있곤 합니다. 딴엔 열심히 산다고 살았고 잘한다고 했는데도 일이 꼬이거나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감당치 못할 상황에 몰리기라도 하면 당황하게도 되고 낙심하게도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40년간의 오랜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이 그런 일을 당합니다. 요단강이 앞길을 가로막고 섰던 것입니다. 가나안이 코앞인데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형편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아실 겁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나 해야 할 일 혹은 할 수 없는 일을 만나거든 지체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하리이까?’를 묻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이미 그랬거나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 앞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감당치 못 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대처하는 것만이 해답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6절에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요단 앞에만 모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언약궤가 먼저 요단을 건너게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돈가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 먼저 건너가실 갓이다.”라는 믿음이고 “하나님이 앞서 건너가 주세요.”라는 소망입니다.
아시겠지만 영어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나 문에 들어설 때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순서를 양보한다는 의미로 ‘After you.’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의미는 다르겠지만 믿음 안에서도 우리에겐 늘 ‘After GOD’ 즉 ‘하나님이 먼저!’ 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는 답이 없고 세상 그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인생의 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또는 하려 하든 언제나 하나님이 내 앞에서 나보다 먼저 그 일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린 ‘여호와이레’를 믿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이 먼저’라고 믿기만 하면 모든 게 다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 먼저’라는 말에는 당연히 ‘나는 그 뒤에’라는 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겐 우리가 나중에 해야 할 것도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뒤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하나님이 끝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먼저 하실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나중도 책임지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작과 끝, ‘그 중간’에 위치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만약에라도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에게서 믿음은 시작도 되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끝내실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적의 타이밍에 적절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우린 본문을 통해 믿음이 있다면 행함도 있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자. 그럼 믿음 뒤에 어떤 행함이 있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행해야 할 일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것들 모두를 통합하는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데 적은 강하고 가진 힘은 없고 더구나 시작 전부터 요단강이라는 복병을 만나 오도 가도 못 할 형편이다 보니 이스라엘의 처지에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요단에 들어서라.”
그런데 이 부분이 홍해 바다 앞에서의 모세와 비교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홍해 바다에 들어서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바닷가에 서서 지팡이만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겐 강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깊은 물 속에 들어가는 것과 물 밖에서 지팡이만 내미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습니까? 어느 게 더 할만할까요?
하나님은 모세에겐 감당할만한 것을 시키시더니 여호수아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홍해는 바다라 깊어서 안 되고 요단은 강이니까 깊이가 낮아서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에게서 믿음의 성장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출애굽 직후 모세 때엔 이스라엘에겐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무늬만의 신앙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고 불만만 가득했었는지를.
그럼에도 믿음이 어릴 땐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출애굽 한 후 이스라엘이 우여곡절 끝에 시내 산까지 왔을 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에겐 독수리 날개 같은 사랑과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이 약할 때나 닥쳐온 시련을 도저히 감당치 못할 때면 하나님은 우리를 업어서 인도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눈물 골짜기에 내버려만 두겠습니까? 고생 구렁텅이에 빠져 있게만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뭐든지 하십니다. 여러분을 실패와 아픔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천상의 독수리를 보내셔서 그 날개로 업어서라도 우리를 복 받을 자리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더라도 믿음은 자라야만 합니다. 태어난 아이는 자라야, 그것도 잘 자라야 부모의 기쁨이 되듯이 하나님 앞에서 성도 된 우리의 어린 믿음도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육신의 부모가 벽에 눈금을 그려 놓고 자라는 아이의 키를 수시로 확인하듯이 하나님도 순간순간 저와 여러분에게서 자란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바로 그 믿음의 잣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모세 때와 비교하여 이스라엘의 자란 믿음을 보실 기쁨으로, 그들의 자란 믿음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은 지금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향해 “네가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작과 끝, 그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믿음’ 뒤엔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시작하심, 그리고 우리의 믿음, 그다음엔 하나님의 끝내심.’ 이것이 믿음으로 복 받는 일종의 공식입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말씀하신 대로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나요?
출애굽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모세의 믿음과 행함으로 인해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말살하시므로 출애굽을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본문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모세 때와 같은 논리라면 그 결과는 가나안 축복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믿음과 행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서도 가나안 축복이 완성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그러하십니다. 어떤 일이든, 무슨 일이든 나를 위해 이미 먼저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 일의 완성하고 끝내시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서 믿음이 있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은 안 해주시는 것 같고 혼자 힘으로는 해결되지는 않는 그런 문제가 있으시다면, 또는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을 만나 고전하고 계신다면, 이젠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그럴 때면 그런 것들이 나보고 하라시는 하나님의 사인이 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네가 기도해라” “네가 견디고 이겨내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안 되고 못 하고 있는 그 일을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에 있어 우리의 ‘중간 믿음’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믿어야 하나님은 믿음대로 끝을 완성시켜 주십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요단강을 향해 들어가라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들어가라. 그리하면 그 강이 끊어져 멈추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가라’가 끝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요단이 멈추리라.’가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이 요단강을 끊어 멈추실 것이기에 우리보고는 요단강에 주저 없이 들어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무턱대고 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멈춘다 하십니다. 시험이 멈춘다 하십니다. 고난과 실패, 병마와 슬픔이, 가난과 분노가 멈춘다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실 수 있으십니다.
일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사이에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왕에 믿는 사람을 축복하실 하나님이시라면 굳이 믿음을 꼭 확인하셔야만 하는 걸까요?
예! 그러셔야만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항상 사탄의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영물인지라 하나님의 축복 계획을 사람보다 먼저 알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에게 앞서가서 시험함으로 복 받는 걸 방해합니다. 유혹함으로 복을 놓치게 만듭니다.
본문에서도 15절을 보세요.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큰맘 먹고 와보니 하필이면 강물이 가장 깊은 때더라고 했습니다. 강을 건너려는 ‘순종 앞에’ 강을 건너지 못할 ‘시험이 먼저’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탄의 역사는 그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맘먹고 믿어 보려는데 안되는 게 있습니다. 힘든 게 있습니다. 유혹도 있고 시험 거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가되 언약궤를 앞세우고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어 이것들이 상징하는 바에 의해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 약속과 하나님의 기적이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언약궤는 무엇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 앞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 때면 스스로를 격려하세요. 힘들고 두려울 때라도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세요. ‘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가? 내가 믿는 예수님은 마귀보다 강하고 세상의 그 어떤 시험보다 강하시다.’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요단강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랐을 때 인생 최대의 고비이자 고민이었던 문제가 해결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나아갈 때면 우리 앞을 막아섰던 모든 문제의 강물들이 내 앞에 멈추고 해결될 것입니다.
시험의 요단강일지라도, 실패의 요단강일지라도, 가난의 요단강이라 해도,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는 그 어떤 요단강일지라도,
(한번 따라 하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 요단아 멈추어라!”
이제부터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선포해야 할 믿음이 바로 방금 따라 하신 문장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포할 때면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가 믿은 대로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 사는 중에 어려운 일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지금 잠시 평온한듯해도 사탄의 역사는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날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까짓 사탄이 그러든 말든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믿음과 행함입니다.
사탄이 시작한 시험 앞에서 믿음이 흔들려 사탄이 끝내는 대로의 인생이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시작하신 은혜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끝내시는 복된 인생을 볼 것인지는 전적으로 저와 여러분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시는 과정에서 그 중간에 있어야 할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으시는 한은 어떤 상황에서든 믿음을 붙들고 다시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요단강이 아무리 깊다 해도, 숨어 역사하는 사탄의 시험이 아무리 악랄할지라도 결국에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입니다.
단, 이때 중간 과정에서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시고 우리가 믿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오해는 하지 마세요. 본문 17절을 보시면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도록 우리가 믿어야 할 중간 과정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니다. 내가 온전한 믿음을 갖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결국엔 하나님의 복 받는 자가 되기까지 그 모든 과정들 속에 하나님이 굳게 서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즐겨 부르고 좋아하는 복음 성가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서 헤맬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할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아무도 모르게 선한 일할 때도 주님 나와 함께 계시네.’ 아멘!
이 찬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때와 관련한 부분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맬 때,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 은밀한 곳에서 기도할 때, 아무도 모르게 선한 일할 때’와 같이 이 가사 중에 여러분에게 해당 되는 ‘그때’가 혹 있으신지요?
오늘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우리 앞에 계셔 주십니다. 본문에서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식으로 풀어보면 “너 나를 따라 요단강에 들어갈 수 있겠니?”라는 하나님의 물으심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었으면 하나님이 물으시기 전에 했겠지요. 할 수 없기에 아직도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때 우린 고백해야 합니다. ‘After GOD!’. ‘하나님이 먼저!’를.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After JESUS!’. ‘예수님이 먼저!’를.
하나님이 앞서서 내 일을 해 주실 것이기에 우린 매사에 그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믿음으로 우리도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되어지는 모든 일의 끝이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인생에는 언제든 사탄이 가져오는 시험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겐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이 여러분의 믿음을 이기게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반대로 내 믿음으로 세상의 시험과 시련을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끝내시는 그 복을 나도 받겠다고 하는 믿음만을 붙들고 다시 세상에 나가 승리하는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