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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과
특강 주제: 시조 읽기(감상)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정환(시인, 전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과 강사)
Ⅰ. 프롤로그
학교 교육현장에서 시조 교육이 소홀함에도 불구하고 시조를 쓰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 점은 특히 2000년대 이후에 등단한 일군의 시인들이 열정적으로 창작하면서 저변이 크게 넓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들이 시조에 이토록 매료되어 있는 것일까. 시조만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매력 즉 창의적인 의미 공간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의미 형성에 깊이 몰입된 까닭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용을 담는 형식 미학의 이채로움으로 말미암아 쓰면 쓸수록 매력을 넘어 마력을 느끼게 되었을 법하다.
또 한 가지는 일평생 시를 써서 일가를 이룬 시인들이나 대학에서 시를 가르쳐온 문학평론가들 중에서도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어서 시조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자각하고 시조를 쓰거나 시조집을 펴내고 있는 일을 들 수 있다. 늦게나마 시조의 가치성을 알게 된 이들의 활발한 시조 창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평생 써온 시를 뒷전으로 물리고, 시조집을 여러 권 연달아 펴내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진작 그 힘과 열정으로 일찍 시조 사랑에 힘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늦게라도 동참하는 일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오래 전에 문단 일각에서 시조 무용론을 말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시조가 가진 형식이 현대인들에게 부적격한 지나간 시대의 노래 형식쯤으로 폄하한 것이다. 그들은 과연 시조를 한 편이라도 써 본 뒤에 그러한 주장을 펼쳤던 것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시조는 직접 써본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안다. 써 보지 않고서는 시조의 매력을 모른다.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정서적 휴식이 필요하다. 여유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석 줄의 글로 써 본다면 의미 있는 삶, 윤택한 삶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글 쓰는 일은 그리 많은 준비물이 필요 없다. 간단한 필기구만 있으면 가능하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도 기록이 가능한 만큼 종종 생각나는 짤막한 단상을 간략한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해 봄으로써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뜻한 정이 실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널리 확산되어 사회적으로 파급 효과를 일으킨다면 인성 면에서 무수한 파탄을 겪고 있고, 갖가지 문제투성이로 만연한 우리 사회의 내면에 뜨거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만큼 시조는 우리 선조가 물려준 정신 문화유산 가운데 최상급이고, 상호소통과 개인적 정서 표출을 위한 언어·예술적 도구로서 시조가 가진 정형 율격은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일용할 양식이 해결되고 나면 정신적 위안이나 윤택한 생활을 위한 길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이때 삶과 세계에 대한 한 대응방식으로서 시조를 제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조가 어떤 전문적인 집단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오인하는 이들에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처음 입문하는 이들에게 기본 형식을 숙지시키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지나치게 형식을 강조하고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부담 없는 시조 쓰기, 형식을 따라 즐겁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해봄으로써 시조와 먼저 친해지게 하는 일이 앞서야 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좋은 시조를 많이 읽고, 외고, 옮겨 써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정형률을 체득케 하는 일도 병행하면 좋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결국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일이다. 글을 통해 마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생태적인 삶, 생명시학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 말로나 힘으로나 서로를 죽이는 일이 허다한 험하고도 번잡한 세상살이에서 시조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곧 시조를 쓰는 시인들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무이기도 하다.
한 편의 시조가 상처를 치유하고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한다. 빛을 비추어야 한다. 소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절망의 벽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속삭임이어야 한다. 다시금 새 기운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넓게 바라보면 시조라는 문학의 한 갈래가 작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강이 장강이던가. 작은 흐름이 큰 강물을 이루듯 훈향 높은 시조로 이 혼돈의 시대를 견인하고, 정신의 위의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창작을 앞세우기보다 근래에 생산된 좋은 시조를 많이 접하는 기회를 가져야할 것이다. 학습자가 찾아 읽는 일은 어려우므로 일선 현장의 교사가 좋은 텍스트를 두루 수집하여 제공하는 팔품을 팔았으면 한다. 시조 관련 사이트나 무수히 많다. 감식안을 가지고 선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많이 읽다가 보면 저절로 암송하게 된다. 그러다가 나도 한번 써 보자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때 형식을 충분히 익혀 단시조부터 쓰기 시작하면 된다.
아래 “시조 읽기의 실제”에서는 동시조와 단시조와 연시조 및 사설시조에 대해 살핀다.
Ⅱ. 시조 읽기의 실제
1. 시조 형식론
형식 문제에 관한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크게 볼 때 철저한 정형 율격 고수를 주장하는 부류와 3장 안에서 변용과 변주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는 이들로 나뉜다.
3장 6구 12음보
전구 | 후구 | |||
초장 | 3 | 4 | 3(4) | 4 |
중장 | 3 | 4 | 3(4) | 4 |
종장 | 3 | 5 | 4 | 3 |
내용 면에서의 표현 여부를 떠나 표에서 보다시피 제시된 율격에 딱 떨어지게 쓰거나 거의 근접했을 때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가장 바람직한 율격 운용이 가장 좋은 시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정형 율격에 충실하면서 언어 미학적으로 일정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 의미 부여를 크게 두는 이들의 창작 태도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의 원형을 잘 좇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시조성에는 엄연히 가변성이라는 것이 있다. 표에서도 보듯이 초장과 중장 후구 앞마디 ‘3(4)’이 그것을 잘 증명하듯 각 마디별로 가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엄격히 제한된 종장 첫째 마디 3자 불변과 둘째 마디가 5미만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 즉 가(+)는 가하나 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다른 마디에서의 한두 자의 가감이 가능한 일은 시조의 가변성이 주는 특장이다. 그러므로 이 가변성을 적극 활용하여 품을 넓힘으로써 시조를 보다 역동적이게 한다면 정형의 기율 안에서 얼마든지 ‘또 다른 목소리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다. 정형 고수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 점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견해가 다르다고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거나 존재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즉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실은 시조를 보다 다채롭게 하고 음역을 넓히는 일에 일조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근간에 다시금 대두된 단장시조와 양장시조 문제다. 기본적인 전제에 충실하자면 시조는 3장의 유기체계다. 그러므로 한 장이 없거나 두 장이 없는 것을 두고 굳이 시조라고 부를 수가 없고, 다만 시조 가락을 가진 1행시, 2행시로 규정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태생 때부터 3장의 틀을 가진 시조가 한 장 또는 두 장을 상실한 상태의 시를 두고 시조라고 고집하는 일은 맞지 않다. 단시조의 확산이 연시조․사설시조로 나아갔다면 축소도 일종의 확산이라고 볼 때 양장시조나 단장시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논리를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시조가 시조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3장을 구비해야 한다. 이것은 본령이다.
다음은 시조의 형식적 특성을 정리한 것이다.
1) 3장 6구 12음보(마디)가 한 수 즉 단시조다.
2) 각 구(전구, 후구)는 구절로서 의미 단위가 형성되어야 한다. 즉 전구 뒷마디가 후구 앞마디와 의미 단위로 묶이는 것은 구 고유의 구실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3) 한 글자가 한 마디 구실을 하지 못한다.
4) 각 구는 앞마디가 짧고 뒷마디가 긴 것이 호흡상 자연스럽다.
5) 각 마디는 1, 2자의 가감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장 첫째 마디 3자와 둘째 마디 5이상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6) 종장 둘째 마디는 5이상 7이하가 정격이나 9까지도 가능하다. 요체는 자연스러움에 있다.
7) 시조의 정형 율격은 음보율과 음수율을 동시에 적용한다. 그 범위가 더 넓은 것이 음보율이다. 예를 들면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에서 전구를 음수율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음의 걸음걸이로 읽어야 한다.
8) 종장 첫 구에 적용되는 특별한 율격이 있다. 즉 의미 단위와 율독 단위다. 예를 들어 ‘가까운 것도/먼 것도 두루/밥상 받듯/대한다.’와 ‘먼 것도/가까운 것도 두루/밥상 받듯/대한다.’의 경우다. 전자는 율독 단위이고 후자는 의미 단위의 실례가 되겠다. 이 때 의미 단위로 율격이 구성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모든 고시조들이 그것을 잘 지키고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9) 단시조의 전개 유형은 많은 경우의 수가 있어서 다채로운 시조 쓰기가 가능하다.
10) 연시조는 의미망 형성 혹은 수와 수 사이의 내적 · 유기적 결집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작품에 따라 길게 쓸 수도 있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연시조의 길이는 두 수 내지 세 수다. 길면 대체로 군더더기가 붙게 마련이다.
11) 사설시조는 자유시와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이 있다. 조운의 「구룡폭포」의 구조적 특징을 면밀히 고찰할 일이다.
12) 소위 일컬어 단장시조, 양장시조, 단시조, 연시조, 사설시조가 한 작품에서 혼용되어 표현된 이른바 혼합연형시조를 시도할 수는 있겠으나, 시조가 가야할 올바른 방향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단장시조와 양장시조’는 시조성은 일정 부분 가지고 있되 3장이라는 유기체계를 결여하고 있어서 시조라고 부르기 어렵다. 다만 시조 가락을 가진 1행시, 2행시로 규정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13) 기사형식이다. 즉 표기법인데 모든 시조는 그 나름대로의 형태미가 필요할 때가 있다. 물론 장별 배행을 통해 3장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좋겠지만 시조마다 그 작품만의 고유성을 살리고자 할 때 조형미는 매우 중요한 미학적 자질을 가지게 된다. 지나친 연행 갈이로 시조인지 자유시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다양한 조형 형태를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작품의 완성도나 완결 미학의 문제는 온전히 시인자신의 몫이다.
14) 큰 주제는 인간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을 써야한다. 자연을 노래하든 특정 사물을 조명하든 인간에 대한 고뇌와 사색과 탐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15) 천편일률을 뛰어넘어 千(천) 篇(편) 千(천) 律(률)이 되어야 한다.
16) 쿠오레적인 것과 피노키오적인 것의 혼융이 필요하다.(특히 동시조에서)
17) 스토리텔링을 활용해야 한다.
18) 초기에는 단시조 쓰기에 주력해야 한다. 단시조 100편 창작 후 연시조로 나아가야 한다.
19) 무엇이든지 시조로 쓸 수 있다. 음악 그림 영화 폐철….
20) 시조 가락으로 호흡하라.
21) 내면 혹은 심연에 많은 것을 쌓아두라.
22) 시대정신을 구현하라.
23) 단아함을 버려라. 투박한 대로 거침없이 써라.
24) 때로 탈주정하라.
25) 자신만의 시어사전을 널리 확충하라.
26) 字眼을 두라.
이상과 같은 조건들이 두루 잘 갖추어지고 작품성이 담보된다면 좋은 시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2. 현대시조
유성호(2005)는 “현대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다가서는 데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시조의 진로에 대한 명쾌한 지적이다. ‘새로운 시대적 요청’은 말과는 달리 쉽지 않다. 그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 개개인마다 일종의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정형의 틀 안에 용해시킬 것인가와 더불어 참신한 시각이 요구된다.
새로움에 대한 부단한 내적 쟁투 없이는 그저 그런 작품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는 아무도 쉬이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면으로 발표되는 순간 눈 매서운 독자는 재빨리 읽어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써야 시인 자신과 나아가서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터인가. 내용과 형식의 균형과 조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궁구하고 탐색하고 고뇌해야 할 일이다.
특히 신진시인들의 경우 도발적이고 저돌적인 작품 창작에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복잡 미묘하고 예측 불허의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곳이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도전적·혁신적·급진적 의지 없이 삶과 세계를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고 육화할 수도 없다. 일찍부터 고답적이고 관조적인 세계에 빠져들게 되면 조로할 가능성이 높다. 시대의 아픔을 아는 일이 시인의 몫이라면 그 몫을 감당할 창작 철학을 견지해야 한다. 그것은 부단히 참신하고 젊은 작품 생산에 전념하는 일이다. 회고적인 추억담에 머물거나 단순한 자연 예찬으로는 곧 한계에 이르게 된다.
짧은 시에서 가끔 인용을 남발하는 예를 더러 본다. 소설의 한 문장이나 다른 시인의 시 구절을 삽입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 온전히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굳이 그렇게 해서 꼭 작품을 써야 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한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창조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이라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작시 방법은 가급적 지양해야 할 것이다.
2.1 읽기의 실제
3장 6구 12마디라는 기본 율격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변주와 변용이 가능한 것이 시조다. 한정된 반상임에도 바둑의 수가 무궁무진하듯이 정형의 형식을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작품이 창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의 밀도 높은 결합을 통해 한 편의 좋은 시조는 출산된다. 보다 다채로운 시조 창작을 꾀하는 방안으로 시조의 여러 가지 전개 유형 즉 구조적 특징을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단시조는 시조의 본령이다. 종장은 초장이나 중장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 창의적 의미 공간이다. 반전이 있고, 주제가 담긴다. 대부분의 시조는 종장에 의도한 주제가 함축되어 나타난다. 앞의 두 장이 보통 걸음걸이인 데 비해 종장은 극적인 전기를 보인다. 단시조는 시조의 본령이기에 많이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초보자에게 단시조 읽기는 기본을 익히는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전개 유형들이 작품마다 다채롭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꾸준한 탐색과 천착으로 자신만의 전개 방식을 창출하는 일도 궁구해볼 수 있다.
시조는 일정한 틀이 있는 만큼 긴장이 뒤따른다. 이 긴장의 정도가 지나치면 경직된 느낌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3장 중 어느 한 장은 풀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맺고 풀렸다가 되감기는 이치다.
▮ 창의력과 언어능력 함양을 위한 상상력 작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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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동시조 읽기
동시는 문학 갈래 중에 가장 까탈지다. 어른이 쓰고 아이들이 읽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지 못하면 곧 외면당한다. 아이들의 생각과 생활이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좋아한다. 동시 속에 그러한 정서가 들어 있지 않으면 독자를 확보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어른이 어릴 적 겪은 일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회고에 그친다면 울림을 줄 수 없다. 동시조는 어떤가? 일단 형식적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더욱 까탈지다. 자칫하면 틀에 매여서 자유롭게 시상을 펼칠 수 없게 된다.
요즘 시조문단에 동시조 쓰기 붐이 일어나고 있고, 동시조 관련 잡지도 정기적으로 나오고 있어 창작열기가 뜨겁다. 시조는 독자 확보가 힘든데 동시조는 주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독자층이 넓다. 초등학교 중학년이 되면 드물지만 교과서 수록 동시조를 통해서 시조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을 터득하게 되므로 좋은 동시조를 많이 공급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아이들로 하여금 동시조를 읽고 외고 시조 형식을 익혀 쓰게 하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또한 국어교과서에 체계적으로 동시조를 수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시조가 창작자의 문학적 성취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심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하며, 오늘의 어린이들의 삶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수십 년 전의 정서로는 별다른 감흥을 안겨 줄 수가 없다. 아이들의 고민과 생각이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효용성을 가진다. 어른이 어린이들을 위해 쓴 작품이 동심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동시조 창작은 일차적으로는 시인의 문학적 자아실현에 있겠지만, 나아가서는 동심을 위한 것이다. 즉 이 땅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안겨줄 수 있는 갈래로서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요즘 어린이들은 수십 년 전보다 정서적으로 더욱 메말라 있다. 급박하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이 오늘의 어린이들에게는 엄청난 짐이다. 어린이들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평온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별로 보기 어렵다. 소위 모범생의 입에서도 욕설은 쉽게 튀어나온다. 행동이 거칠고 과격하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태도가 미흡하고 매사에 공격적이다. 이런 것들이 축적되어 극단적인 일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어린이들에게 시인은 무엇을 선물로 줄 수 있을까. 시조를 쓰는 이들은 좋은 동시조로 그들의 가슴을 울려야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은 알곡의 동시조를 읽게 함으로써 꿈을 가꾸게 하고, 정서적으로 윤택하게 해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시조의 형식을 익혀서 쓰게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남다르게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창작 동기를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일은 기성세대의 몫이다. 시조 읽기와 창작이라는 색다른 경험이 올곧게 자라게 하는 하나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조가 창작자의 문학적 성취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심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하며, 오늘의 어린이들의 삶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수십 년 전의 정서로는 별다른 감흥을 안겨 줄 수가 없다. 동심들의 고민과 생각이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효용성을 가진다. 어른이 어린이들을 위해 쓴 작품이 동심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동시조는 어린이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기에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예술성 높은 작품이어야 하고, 그들의 삶의 현장을 절실하게 조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분이네 살구나무 – 대비의 묘미를 통한 진정한 삶 구현.
동네서 젤 작은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2) 풀잎과 바람 - 탄력이 넘치는 시다. 여러 번 읽다가 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정의 물결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좋아’의 되풀이가 그것을 한 몫 한다.
나는 풀잎이 좋아, 풀잎 같은 친구 좋아
바람하고 엉켰다가 풀 줄 하는 풀잎처럼
헤질 때 또 만나자고 손 흔드는 친구 좋아
나는 바람이 좋아, 바람 같은 친구 좋아
풀잎하고 헤졌다가 되찾아온 바람처럼
만나면 얼싸안는 바람, 바람 같은 친구 좋아
2) 저녁 - 생활의 고단함 가운데 행복감을 느끼는 아버지의 마음, 뜨거운 가족애.
방방곡곡 먼 길
밥벌이 가신다고
개미처럼 줄지어
나섰다 돌아올 때는
꽁무니
반딧불이처럼
어둠을 헤쳐 온다
이삿짐 나르는 아빠
무거운 짐 많았는지
늘어진 팔이지만
들어와 다시 한 번
오누이
들어 올리며
깃털보다 가볍단다
2) 나무야 – 말 건넴 즉 말 주고받음을 통해 정서적 교감이 일어나면서 품고 있는 꿈에 대한 의지 다지기.
나무야, 일요일에
무얼 하며 지내니?
아침을
물고 온 새가
고막을 두드린다
나무도
놀러 가고 싶겠지
담장을 넘고 싶겠지
나무도 바랄 거야
안심하고 뻗을 각도
세상은 상상한 대로
굴러가고 있는 걸
나무야
꿈꾸는 미래로
핸들을 확 돌려 봐
3) 하루 – 진정한 안식에 대해 성찰케 한다. 이런 작품은 포근한 분위기를 마음 속 깊숙이 안겨 줌으로써 치유에도 도움이 된다.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하루가
아침마다 활짝 피어
손 내밀던 밝음이
저녁엔
어둠에 깃들길
조용히 기다려요
누구나 똑같이
나눠 가질 수 있는
밤은 참 좋아요
어둠이 포옥 감싸주니
하루도
이슥해지면
깊은 잠이 들지요.
4) 끝말잇기 필살기 –끝말잇기를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언어능력 향상을 꾀함.
한 방에 날려 버릴 끝말잇기 필살기는?
급식 중에 네가 제일 잘 먹던 달걀
죽어도 못 먹겠다던 만둣국 속 표고버섯.
2학기 회장 선거 내가 써낸 네 이름
결국에 한 표 차이로 회장이 되었을 때
솔직히 내가 된 것보다 더했던 그 기쁨.
개나리가 좋다고 좋아했던 샛노랑
장난으로 그렸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내 책상 한 귀퉁이에 네가 그린 꽃 무늬.
기다리던 체육시간, 넘어져 까진 무릎
불긋불긋 멍들려는 무릎보다 아픈 건
내 속도 다 모르면서 전학 가 버린 내 짝꿍.
5) 위험한 찌개 – 초등학생이 쓴 작품, “화찌개:라는 조어에서 기발한 생각과 색다른 비유가 주는 즐거움을 맛봄.
국어시간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선생님 화찌개가 머리에서 끓고 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뚝배기가 곧 터질 듯
6) 산골 물 – 산골 물과 자아의 친밀한 교감.
산새도 날아가고 바람도 잠을 자고
같이 놀 친구 없어 심심했나 보구나
살며시 손을 담그니
내 손을 꼬옥 잡네
친구야 반갑다 악수하는 산골 물
어서 와 우리들과 발 벗고 함께 놀자
가랑이 반쯤 젖어도
내 마음은 기쁘다.
7) 물수제비 – 재미난 상상력.
너는 왜 날지 않고 물위를 뛰어가니?
날개가 아픈 거니? 다리를 다친 거니?
물위로 너를 띄우니 하늘로 날아가렴.
8) 이웃 – 사회성 함양.
우리 동네 이웃들은 인사말이 달라요
아랫집은 안녕 얘야 윗집은 학교 가니?
옆집은 우리 또 만났네 모두 달라 신기해요
인사하는 방법이 달라도 좋아요
마음이 통하면 말 안 해도 알지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끝났어
9) 새우 등 – 세밀한 관찰을 통해 얻은 자연의 이치.
새우 등이 굽은 이유 이제야 알겠다.
아기를 안으면 등이 굽어지듯이
바다를 껴안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 동시조 - 단순미 속의 깊이!, 쿠오레 시각과 피노키오 시각
길도 잠잔단다
어어, 엄마!
길이 하나도 안 보여요.
그래, 길도 밤엔 어둠에 안겨 잠잔단다.
해님이
내려올 때까지
곤한 잠을 잔단다.
빨주노초파남보 과일
일곱 빛 뜯어 먹자.
빨주노초 파남보
빛깔마다 다른 맛
다른 향기 다른 살결
때 맞춰
골고루 먹자.
알록달록 베어 먹자.
어쩌면 저기 저 나무에만 둥지를 틀었을까
하필이면 다른 아홉 그루는 다 놔두고 어쩌면 저기 저 느티나무에만 둥지를 틀었을까? 언제쯤 그 둥지 아기 새에게 그걸 물어 볼 수 있을까?
친구야, 눈빛만 봐도
봄이면 꽃피는 소리 두 귀는 듣는단다.
겨울날 눈 내리는 소리 두 귀는 듣는단다.
친구야, 눈빛만 봐도
네 마음의 소리 들린단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국어 읽기교과서 수록작(2002-2010년)
혀 밑에 도끼
혀 아래 도끼 들었단 말 들어본 일 있나요?
남을 자꾸 헐뜯는 사람들의 혓바닥 아랜
도끼가 숨겨져 있대요, 서슬 푸른 쇠도끼.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읽기교과서 수록작(2011년)
공을 차다가
공을 차다가 그만
햇빛을 뻥!
차버렸어요.
운동화가 우아! 하고
한참 솟구쳐오를 때
친구는
공 몰고 어느새
골문까지 간 걸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 읽기교과서(가) 수록작(2018∼ )
될성부른 나무
이담에 뭐가 될까, 선생님은 보인대요.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나요.
그러면 우린 떼를 쓰지요, 미리 알려 달라고.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교사용지도서 수록(2011년)
검정 비닐봉지 하나
앙상한 나뭇가지에 찢긴 채로 걸려 있는
검정 비닐봉지 하나 쉴 새 없이 펄럭인다.
머잖아 다가올 봄에 새가 되고 싶은 거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교사용지도서 수록(2011년 )
몽돌
매끌매끌 동글동글
누가 다듬었을까요?
이리 봐도 동글동글
저리 봐도 매끌매끌
어떻게
살아왔냐고요?
말 안 해도 알겠죠?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교사용지도서 수록작(2011년)
비 그치고
젖은 잎사귀들
젖은 채로 흔들릴 때
네 마음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겠니?
바람에
매미울음도
휘어지는 저 언덕길.
매미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하늘 보이지 않는 숲속 고욤나무 꼭대기
애타게 부르는 소리
나, 여기 있어요.
가만히 보면
가만히 보면 세상엔
사람과 나무뿐이어요.
나무 천 그루에 한 사람
나무 만 그루에 열 사람
세상은
사람과 나무가
서로 기대어 사나 봐요.
아기 참새 아랫배를
아기 참새 아랫배
누가 받쳐줄까요.
바람이 받쳐줘요.
물결이 받쳐줘요.
저 들녘 벼이삭들이
넘실넘실 받쳐줘요.
물과 얼음
먼저
얼지 않으려고
한참
몸싸움하다
힘이
조금 모자란 물
얼음이
되었대요.
어쩌나
힘 센 물은 그만
얼음 밑에
갇혔대요.
피구
싸우고 싶은 마음
맞추어서 없애요.
미워하는 마음도
맞추어서 없애요.
아프지 않을 만큼만
힘차게
던지고 던져!
Ⅳ. 단시조 읽기
시조는 첫머리를 ‘3’으로 시작하여 끝마디 ‘3’으로 마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좋은 시조가 요구하는 자연스러움에 가장 근접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종장 자수율 ‘3/ 5/ 4/ 3’은 반전으로서 대단히 혁신적이다. 이러한 마무리는 최상의 품격을 담보한다.
1) 고매
매화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2) 개화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3) 출렁다리
건너가다 흠칫 놀라서 돌아본다
건너오다 철렁 설레어 바라본다
간혹 나
흔들릴 때면
거기서 너 잡아줘
4) 동백꽃 반지
시들지도 않았는디
똑 떨어징께 맴 아퍼
손구락 새 한 송이
꽃 피웠네, 울 엄니
이쁘다
오지게 이뻐
동박새 또 오것다
5) 바람
내 어느 날 그대 향한 바람이고 싶어라
울 넘어 물 넘어 뫼라도 불어 넘어
그 가슴 들이받고는 뼈 부러질 그런 바람
6) 밥도
나이 쉰다섯에 과수가 된 하동댁이
남편을 산에 묻고 땅을 치며 돌아오니
여든 둘 시어머니가 문에 섰다 하시는 말
7) 섬과 섬 – 상생의 관계맺음.
너와 나 마주보는
그리움의 연대였다
해와 달 나눠 갖고
별빛 서로 견주며
파도가
거세질수록
맞은편 더 살폈다
8) 새들이 먼저 일어난 새벽
새로이 열린다면
설레며 맞이하고
새로운 벽이라면
깨야 할 일이겠지
네 시다
남은 별빛이
안간힘으로 여는 하루
9) 이 질량으로 충분하다
붉디붉은 노을이 들불처럼 번진다
구름에 묻어둔 내 말이 타고 있다
다 타다
남은 말만으로 살기에도 충분하다
10) 아버지
첫 줄을 뽑으며 허공을 나는 거미
범람하는 파랑계곡
밧줄 풀며 길을 내는
맨 처음
다리가 된 당신
나는 타고 건넙니다
11) 묘미 – 미묘한 묘미.
나로 살고 있을까
역할로 사는 걸까
결명자 애를 녹여
명주에 물들이며
다 좋다
바라던 색이어도
의외의 색이어도
12) 만두를 빚으며
만두의 최선은
입술 꽉 다무는 것
바늘구멍도 구멍
치사량의 무관심
들끓는 물고문에 져
허위 자백하지 마
13) 가족사진
식탁 위 수저 한 벌
덩이진 밥 뚝 떼어낸다
잎사귀 떨어낸 나무
얼비치는 유리창에
밥보다
더 차지게 엉긴
오래된 가족사진
Ⅴ. 연시조 읽기
시조는 엄연히 정형시다. 율격의 가변성이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정형시의 의미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엄격히 규제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시조에서 종장 후구 마무리를 느슨하게 하는 경우를 본다. 결구에서 시조성이 약화되어 버리면 시조 고유의 맛이 반감된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다. 결코 별다른 멋으로 보일 수가 없기에 깔끔한 종결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예를 들면 종장에서 ‘물속에 잠긴 하늘로 미망을 지우고 있다’라거나, ‘꿈에 본 그리운 나라 그 바다를 향하고 있다’와 같은 종결 처리는 매끄럽지가 않다. ‘지운다, 향한다’로 끝맺을 수 있는데 굳이 현재진행형으로 풀어놓은 것은 시조의 맛을 반감시킨다. ‘아무도/달리지 않고 걷는다/주르륵, 봄비 내린다’와 같은 구조도 마찬가지다. 가락이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다음 예를 한번 보자.
1)
제비도 잠자리들도 부러워하는 날개
-박필상, 「바람」 첫 수 종장
2)
밀폐에 실패한 틈새로 찬바람이 인다
-「자리」둘째 수 종장
3)
이 몸은 오직 당신에게 온 것입니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첫 수 종장
4)
만인의 밥은 평등하다는 기사를 쓰기 위해
-「밥」셋째 수 종장
1)의 종장 후구는 음수율로 볼 때 ‘5/ 2’, 음보율로 읽을 때 ‘4/ 3’구조다. 2)의 후구는 ‘4/ 2’의 형태로 정형율격인 ‘4/ 3’에서 뒷마디가 한 글자 모자람으로써 율격의 파탄을 가져온다. 시조의 맛을 떨어뜨린다. 3)은 후구가 한 마디가 없는 상황이다. ‘온’을 한 마디로 간주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 글자가 한 마디 구실은 파격이다. 최소한 두 자는 되어야 정격이다. 4)번은 율독 단위로 읽었을 때 전구가 ‘5/ 5’의 틀이다. 넓게 보면 시조이지만, 종장 첫 구는 의미 단위로 구성될 때 시조 본래의 맛을 낸다. 수천 편의 고시조를 새겨 읽어 보아도 의미 단위를 벗어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1) 백자부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갸우숙 바위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2) 내 사랑은
한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3) 산그늘 인화
적막 엉금엉금 등성이 타고 내려
외딴집 뒷방 들창 간신히 두드린다
여보게 허무 있는가
이러면서 두드린다
아무런 기척 없어 머뭇머뭇 하는 적막
허허 자네까지 뜨고 없기인가
이러며
징검다리께로 가는
허리 구부정한 적막
4) 노을이 지는 것은
무엇보다 소소한 건 시간을 맞추는 일
기다리는 사람이 서너 명 혹은 네댓 명
강물이 채비하는 동안 마침내 내려옵니다
얼마큼 싣고 가다 어디서 내려놓을지
노을에 얹힌 마음 늦도록 술렁입니다
단 하루 산 까닭인지 처절하게 아름답네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이마 위로 돋은 별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를 때 알았습니다
순장의 풍습 같은 저녁 오고야 마는군요
5) 안심스테이크라 할지라도
편안해진 사람이 눈앞에 앉았으니
반쯤 익은 고기도 허물없이 먹습니다
잘 드는 당신의 칼을 경계는 합니다만,
한 점씩 넘어갈 때 거드는 배경 음악
이미 붉은 포도주는 비어서도 가득하여
모든 게 끝이었다가 처음이듯 돌아옵니다
6) 수국이 세 번 피고 세 번 지는 동안
오늘을 갖자마자 어제를 다 버렸다
저녁이 오기도 전 그마저 또 버렸다
내일을 몹시 탐하는 여전한 중독이다
누구나 그럴 거야 너스레를 떨다가도
아무도 없을 거야 나무라며 살아가지
어렵다 하고많은 날 하루를 거두는 일
7) 돌연,
곰곰이 살펴보았지만 알 수 없는 고인
마구잡이로 보낸 부고 단잠을 깨운다
무심코 돌멩이에 맞아 옹그린 두어 시간
아팠을까 사고였나 잘 살다 가신 걸까
알 듯 말 듯 우련한데 명복을 비는 한밤중
깨어나 숨 쉬는 것이 밤새도록 다행이다
긴 팔 내려 산 자들을 일으키는 햇살
기다란 그 촉으로 하루를 써 가야지
때때로 두려울지라도 꽤 살만한 날이다
8) 께냐
한 사람을 잊는 데에 한 평생이 걸렸다
뜨거웠던 몸과 다리 싸늘히 식고나면
연인의 정강이뼈로 만들어서 부는 피리
그대가 오신다는 바람결에 꽃은 핀다
외롭게 걸어왔던 이번 생의 부은 발등
그리운 이름 부르며 무릎 꿇고 앉은 밤
온 생을 기다려온 다리뼈에 구멍 내어
절뚝이며 걷듯이 외로움을 채우면
쓸쓸한 입술 속에서 다시 피는 당신 이름
9) 훈맹정음訓盲正音
거꾸로 찍어서야 바르게 읽어가는
손끝엔 눈이 있다 어둠을 밝히는 눈
아이는 여린 손끝에 눈물 같은 눈을 단다
점자를 훑어가는 저 여린 손가락
요철의 그리움이 문자가 되는 동안
빛은 다 귀가 솔깃해 손끝에 닿는다
마음에도 눈이 있다 느낌으로 닿아가는
훈맹정음 1학년 낯이 선 점자책을
손끝에 빛을 세우며 아이가 읽고 있다
10) 웃음에 관한 고찰
1
백무동 첫물이 물안개 뚫고 내리며 무연한 참꽃 마주쳐 곁눈으로 훔치다 헛디딘 발목을 끌고 바위에 미끄러지는 소리
2
처마 낮은 지붕 아래 다저녁 내릴 무렵 시집간 첫째 딸이 손자 안고 들어설 때 앉혀둔 찰옥수수가 솥뚜껑 여는 소리
3
가을볕 목덜미에 잔광이 빌붙기 전 콩이야 팥이야 하늘 바라 말리는 시간 깻단이 성질 못 참고 제물에 터지는 소리
11) 저만치 가고 이만치 오려고
번호를 지우려다 얼굴 한 번 더 본다
한때 따뜻했으나 지상에 없는 사람
손가락 들었다 놓았다 들킨 듯 미안하다
허공에 다시 개통할 이것 하나쯤 놔두자
길들인 암호처럼 서로의 단서로 삼아
빗소리 귀청을 울리면 뛰어나가 받지 뭐
12) 안개 분수
당신이 짙어지면 비로소 설레지요
연유룰 알 수 없는 그 푸른 심연에서
서서히 길어올리는 유장한 천의 목소리
당신이 느껴지니 온 빛으로 춤추지요
외로 돌아 바로 돌아 자늑자늑 스러지는
뒷모습 그것마저도 오롯이 거두는 밤
당신은 목비처럼 가슴 흠뻑 적시고요
어둠 속 한 순간을 피었다가 지는데
미련한 잔불로 남아 꿈틀대는 아직 너
13) 외달도
때때로 틈이 날 때 곁이 되어 주는 섬
바람과 파랑에 밀려온 배 떠나보낸 뒤
느긋이 뒤돌아서서 달동 바다 거닌다
물때 오래 기다려 길을 여는 별섬처럼
내어주고 바랄 것 결코 없는 외사랑
포도시 털어놓으면 파도가 다독인다
외로운 건 섬 아닌 지독한 사람의 일
놀구름 내려앉아 함께 물드는 저물녘
노을에 타고 있는 난 맨 나중의 섬이다
*포도시: '겨우'라는 뜻으로 전라도 사투리.
14) 일탈
사막의 난쟁이처럼 눈부신 빛 마주하면
그 빛 찬란해도 쓸모없다 푸념하며
가려 줄 그림자 찾아 광야를 헤맬 테지
나무들이 이룬 숲에 마침내 다다르면
그늘을 베어 내야 환한 빛이 보인다며
밀림을 토벌해 버릴 듯 눈빛을 견줄 테지
내가 낳은 변덕이 사막과 밀림에서
오만하게 자라나 헝클리는 오랫동안
어둠은 올곧은 빛을 엎드려 섬길 테지
15) 통영에서 사는 법
토영 혹은 통녕이라 그래도 통영이다
차지게 아니 불러도 이미 잘 통하는
그 이름 맨 처음부터 통통 튀던 맥박이다
거, 됐나? 묻자마자 하, 됐다! 그러면
긴말 필요 없다, 한마디로 다 된 거다
굼떠서 궁싯거릴 땐 문디 새끼 톡 쏜다
욕되지 않을 욕은 곱씹어 보지 마라
한바탕 걸걸하게 웃고 나면 그만이니
오종종 오랜 섬들도 그리 문대며 살아간다
16) 내게 섬이 생겼다
어쩌면 저 섬을 가질 수도 있겠다
여러 해 눈여겨봐도 찾는 이 하나 없는
그 안이 너무 궁금해 정박한 배 타려 한다
빈 섬을 채우려는 요사이 들떠 있다
까다로운 법 따위 모르는 건 다행인 일
바다를 가로지른 생각 이미 섬에 닿았다
더불어 지낼 사람 덩달아 따라오면
나무와 새 풀꽃은 그 손에 맡기리라
지켜 줄 짐승도 몇 마리 수풀에 풀어야지
나달나달 분 단위로 쪼개어 사는 나날
자질구레한 마음의 짐 뭍에다 벗어두고
어서 와 정히 쉬라며 저 섬이 날 부른다
17) 진아영
턱 괴고 생각한다느니 한 턱 낸다는 말
그녀에겐 당찮은 슬픔의 관용어였지
씹어서 삼키지 못할 아픔이 우물거렸네
따뜻한 포유류의 둥근 턱이 사라진 뒤
어류의 아가미처럼 변해버린 입 언저리
죄 없는 사람이었다고 조아릴 틈 없었네
살아야 할 신념에 비할 바 없던 이념
오랜 총성 그 환청 무시로 관통하는
무명천 얼굴에 감싼 미안한 역사였네
18) 붉은 신발
넘어진 삶을 일으켜 다시 사는 이 봄날
당신은 돌아왔지만 당신은 여기 없고
바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는 길들
짐승 같은 시간들 바람에 씻겨 보내도
눈물은 그리 쉽게 물러지지 않아서
행불자 묘역에 들어 아버지를 닦는다
닦고 또 닦아내는 사월의 문장들은
흩어진 신발을 모아 짝을 맞추는 일
아파라, 동백 꽃송이 누구의 신발이었나
19) 가회동 꽃집 골목
모퉁이 돌아서다 와인병이 깨졌다
시금한 백포도주 보도블록에 흥건했다
참다가 정말 못 참아 주저앉은 그 여인
서둘러 시멘트가 체액을 쓸어 담았다
단 한 방울마저도 누가 알아채기 전
지금껏 믿을 수 없다 헛것을 보았는지
깨지는 소리도 바스러진 와인병도
발각되지 않았고 신고한 사람도 없다
골목을 적시며 번지던 내가 거기 있었을 뿐
20) 그 겨울의 뿔
1
까만 염소에 대한 새까만 고집이었다
힘깨나 자랑하던 뿔에 대한 나의 예의
어머니 구슬림에도 끝내 먹지 않았다
염소의 부재는 식구들의 피와 살
살 익은 비린내에 입 코를 틀어막았다
엊그제 뿔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서
2
그 겨울 식구들은 감기에 눕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던 나도 눈밭을 쏘다녔다
염소의 빈 줄만 누워 굵은 눈발에 채였다
21) 절망을 뜯어내다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닌다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철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절망을 뜯어냈다고? 철망을 뜯어냈다고!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22) 말끈이나마
마당에 토란 심으며 어머니와 약속한다
토란꽃이 피면 꽃 보러 꼭 와야 해요
그래라 다른 건 몰라도 꽃이 날 부르는데
어머니는 알고 있다 불러도 못 온다는 걸
토란꽃도 안다 혼자 피고 져야 할 걸
알면서 꽃을 보자고 말끈이나마 꼭 쥔다
23) 뿔, 뿔, 뿔
고요했던 순물질
비등점에
닿는 순간
최선의 방어이자
최후의 공격으로
뿔, 뿔, 뿔
들끓어 오르지
맹렬해진
심장의 서슬
차오르던 역한 기운
포화점을
넘는 찰나
한 모금 혼돈주로도
솟구치는 혀의 돌기
이맛전
짓이겨져도
치받아버리지
뿔
뿔
뿔
24) 눈
신축
공사장의
모닥불에 내리는 눈
그것이 불인 줄을 꿈에도 모른 채로,
무심코 내린다는 게
그만 거기
내리는
눈!
신축
공사장의
모닥불에 내리는 눈
그것이 불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피치 못해
내리는
눈!
25) 정도리에서
완도 끝 밤 바닷가, 자갈 쓸리는 소리 듣는다
차라리… 차라리… 끝없이 되뇌이는
내 귀엔 그렇게 들린다, 모서리가 다 닳아 버린
차라리 잊어버리자 차라리 떠나버리자
검게 물들어 가슴 쓸리는 물살들
수없이 다짐했지만 떠나지 못한 그 자리에…
26) 쑥
자갈밭 개똥밭에는 쑥이 참 잘도 크는데요
빈 손에 쑥대머리라고 핀잔만 주는데요
돌절구 쑥물 한 대접 오장이 다 편한데요
내 새끼 쑥쑥 자라 돈 많이 벌면요
날마다 쑥설쑥설 쑥덕공론 천지라도요
쑥대가 왕대보담도 못할 게 뭐 있나요
저 양반 쑥스러워 내 눈을 외면해도요
왕년에 쑥버무리 안 먹고 큰 놈 있나요
자줏빛 쑥부쟁이꽃 첫사랑도 숨겼지요
부황 든 도시마다 쑥대밭이 됐지만요
팔 뻗고 허공으로 쑥떡 한 개 먹이고요
등창 난 세상 물어서 쑥뜸질을 놓습니다요
27) 낮 귀뚜리 울음소리 – 景(경)中(중)情(정) 정중경
낮 귀뚜리 울음소리가 실국 위에 물을 앉힌다
찌르 찌르 찌르 찌르 꽃술 위에 그 적막 위에
굵은 테 안경 너머에 동그랗게 물을 앉힌다
낮 귀뚜리 울음소리가 늙은 아내 마슬 보낸다
찌르 찌르 찌르 찌르 햇살 주며 물살을 주며
손주 놈 반달 손잡고 신발 끌며 마슬 보낸다
28) 지금 이 속도가 좋다
그림자로 펼치는 설치 미술가 구름이
지표면 군데군데 작품을 드리운다
장광설 다 생략하고 작가 마음 그대로
지나간 그림자는 돌아오지 않는 재료
모두가 다른 시간 모두가 다른 걸음
구름은 지구를 누비며 늘 첫 작품을 건다
29) 빈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
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
내 입엔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 물리지
어느 낮은 처마 아래 묻어 둔 밤의 울음
그 울음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면
빈, 너는 갓 씻은 햇살로 반듯하게 내게 오지
심심한 창은 종일 구름을 당겼다 밀고
더 심심한 나는 구름의 뿔을 잡았다 놓고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 번지듯 빈, 너는 오지
30) 연화지 연잎에는 눈물이 반짝인다
새벽을 실어 나른 연못의 푸른 여자
치마폭에 열린 이슬 물끄러미 바라본다
좌우로 몸을 흔들면
산란하는 무지개
더 크고 탄력 있는 온음표가 되고 싶어
물방울은 물방울을 찐덥게 껴안았다
기우뚱, 흔들린 중심
풍덩 빠져 버린 사랑
하나가 되려는 건 쓸쓸의 함정이다
달팽이도 홀로 가는 이 길은 자드락길
맨발로 꽃대를 밀어
꽃봉오리 앉히는
▼ 시조 –새로움의 새로움을 위하여!
냇가에 앉아서
갠 날 저물 무렵
찌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속눈썹살 아려 온다
봇물에
피라미 떼들
제 등빛을 퉁기고
물 위에 누워 보렴
맨살의 곳곳마다
무덤 속 그 적막이
쓰다듬어 주려니
밤 깊어
쳐다본 하늘
그믐달도 빛나리
두고 갈 그만치는
두고 가고, 떠날 것은
물소리로 길을 잃고
덧없음을 노래하다
웬만큼
물이끼도 앉은
조약돌이 놓친 상류
아침 반감
1
슬쩍
곁눈질로 본
그대 겨드랑이 터럭 몇 올
이 아침 맑은 허공 긴장시키고 있나니
살 맞아
일순 꼬꾸라지는
먼 들짐승 울음처럼
2
송진 묻은 넥타이를 목에 맨 적 있는가
어느 날 빽빽한 솔숲
허망히도 헤매던 날
봄 아침
똬리를 트는
밭두렁에 서 본 일 있는가
3
먼발치선
휴지조각처럼
나부끼며 떨어져 뵈던
그 아침 비둘기 떼 붉은 발목은 젖어
일진의
바람도 잠시
먼 환각에 붙들려 있다
별사
나
죽으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먼 산이나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볼
마침내
말 없을 그대
영영
말 잃을 그대
천지에
환한 봄일 적에
나 죽으리
천년을 읊은 그 봄날
나 죽으리
그날에
나 죽은 그날에
영영
말 잃을 그대
헌사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수천수만 줄기의 희디흰 나의 뼈대
저문 날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꺾이고 꺾이어서 마디마디 다 꺾이어서
꺾이고 꺾이어서 마침내 사랑을 이룬
저문 날
모든 뼈대는
물소리를 내고 있다
내 노래보다 먼저
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 그 산밑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에 노래를 부둥켜안고 홀로 사위어 가고 있던
내 노래보다 먼저 속울음이었던 그대 불현듯 산 하나의 둘레와 높이로 사랑을 이루었던 그대 천길 단애를 딛고 서서
산을 넘으면 거기 산비탈 오두막집 그리움의 문고리가 있어 아프게 흔들어대던 천년의 깊이로 내려선 그대 내 안의 먼 그대
에워쌌으니
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한밤중 한 시간에 한두 번쯤은 족히
찢어질 듯 가구가 운다 나무가 문득 운다
그 골짝
찬바람 소리
그리운 것이다
곧게 뿌리내려 물 길어 올리던 날의
무성한 잎들과 쉼 없이 우짖던 새 떼
밤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일순 뼈를 쪼갤 듯 고요를 찢으며
명치끝에 박혀 긴 신음 토하는 나무
그 골짝
잊혀진 물소리
듣고 있는 것이다
원에 관하여
1. 호미
몸을 낮추어야
속살 파헤쳐지는 것을
저렇듯 긴 이랑 땀방울로 적시기까지
쪼그려
앉은 그대로
뻗어 나가야 하는 것을
2. 삽
얼어붙은 땅을
파 본 사람이면 안다
삽자루가 가슴팍에 들이치듯 부딪칠 적마다
삽날에
불꽃에 튀듯
마음에 솟는 화염을
3. 괭이
힘껏 내리찍는
옹골찬 어깨에 실려
청석에 부딪쳐 푸른 불꽃 터뜨리는
언 땅에
봄빛 흩으며
실한 씨 흩뿌리는
4. 쟁기
속살 드러내며 젖은 흙 뒤집힐 때
가슴골을 깊숙이 파 들어갈 일이다
몸속의
피의 길도 이 봄
거꾸로 흐르고 흐를
5. 상평통보
삶이 둥글어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때로는 뚫려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세상을
줄줄이 꿰어
흔들어 보겠느냐
6. 지게작대기
세상을 가리키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세상을 떠받치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세상을 두드리기에 너만 한 것 있으랴
새와 수면
강물 위로 새 한 마리 유유히 떠오르자
그 아래쪽 허공이 돌연 팽팽해져서
물결이 참지 못하고 일제히 퍼덕거린다
물속에 숨어 있던 수천의 새 떼들이
젖은 날갯죽지 툭툭 털며 솟구쳐서
한 순간 허공을 찢는다, 오오 저 파열음!
애월 바다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너의 초상
내 속에는 수천수만의 짐승 떼가 산다
내홍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불붙은 산
등짝에
불화살 맞은
내란의
짐승 떼가 산다
나는 도적이다,
그리움으로 채워진 궤짝을 훔친
나는 도적이다, 그 궤짝 등에 짊어지고
천년의
분화구에 뛰어든
슬픈 도적이다, 나는
아아, 이리도 가슴을 후려치는 북채가 있어
마침내
둥기둥 울리는 봄날의 북이 되었구나
꽃처럼
찢어지곤 하는
애련의 북이 되었구나
적벽
심호흡
심호흡
붉은 벽 앞의 심호흡
붉은 벽 안의 심호흡
붉은 벽 밖의 심호흡
무작정
다가설 수 없는
꽃밭머리
심호흡
예각에 대하여
유모차
천천히 밀며
길을 가는
할머니
기울어진 몸이 점점 땅에 가까워져서
종내는
저 언덕에 기대어
흙이 되어
갈 것이다
포토라인
가
장
강
렬
한
빛
이
쏟
아
지
는
곳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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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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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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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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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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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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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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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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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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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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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
1981년 1월 8일 금요일 하오 네 시
시상식 참석 바람 중앙일보 문화부
지례면
우체국 지붕에
첫눈이 쌓이던 날
월류봉
꽃이란 꽃 다 피워놓고 바람까지 초대한 봄의 불꽃 속내 헤아릴 길 좋이 없어 소리쳐 흐르는 물에 뛰어내리는 꽃발자국
네가 저 봉우리라면 나는 그 발밑 강물 즈믄 해의 깊이로 함께 할 수 있으니 발가락 하나하나씩 어루만질 것이다
속속들이 스미어 곳곳에 스미어들어 내 몸의 푸른 피 네 영혼 적시나니 네가 저 봉우리라면 나는 그 발밑 강물
주상절리
내 안에 나는 없고 꽃들로 가득했다
못물로 출렁였다 노을로 타올랐다
맨발로 달려오고 있는 그림자가 붉었다
내 목에 어느 날 별빛타래 걸렸다
자주구름 걸렸다 새가 사뭇 우짖었다
무한정 문이 열렸다 바람 들이닥쳤다
삼강나루
나는 나를 거두어 너에게로 가겠다
삼강이 별빛처럼 입맞춤하는 그곳
강 저편
갈대 사이의
네게로 가겠다
이젠 삼단머리 풀어 내리지 않아도
옥색 앞섶자락 풀어 헤치지 않아도
마침내
네게로 가겠다
강물소리 차디찬 밤
Ⅵ. 사설시조 살피기
사설시조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효용성을 지니는가? 이 절박한 물음에 대한 답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하게 짚어 둘 것은 사설시조 양식이 일정 부분 필요하겠지만, 현대시조의 본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창작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판단에 따라 그 정도는 달라질 수는 있다. 사설시조가 ‘일정 부분만의 몫’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현대시조의 미학적 활로의 확장과 변용에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와 같은 소수의 움직임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며, 소수가 일구어낸 또 다른 개성의 세계가 정형미학의 의미를 일정 부분 담보한다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1) 대천바다 한 가운데
대천(大川) 바다 한가운대 중침세침(中針細針) 빠지거다
여나믄 사공(沙工)놈이 끝 무딘 상앗대를 끝끝이 둘러메어 일시(一時)에 소리치고 귀 꿰어 냈단 말이 있소이다 님아 님아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쟉하소서
2)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다라 앉아 건넛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금즉하여 풀덕 뛰어 내닫다가 두험 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랜 낼시 망졍 어혈질 뻔 하괘라
3) 구룡폭포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怯)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江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Ⅶ. 에필로그
시조 읽기와 외기, 감상은 창의력과 언어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시조교육이 초·중·고등학교 학교 현장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국어교과서에 비중을 높여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야 한다. 정서적 리듬, 심미안과 상상력을 기르는데 시조만한 갈래가 없기 때문이다. 고루하다고 생각하는 그 고루함을 버려야한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호흡과 정서, 사상과 감정을 담기에 마침맞은 장르다. 일정한 틀을 갖추면서 가변성을 가진 시조의 형식미학은 어릴 적부터 쓰고 읽는 중에 자연스럽게 체득될 것이다. 또한 시조 읽기와 감상은 언어감각과 절제력 함양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의미 공간인 종장의 반전으로 말미암아 미학적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 매력은 배가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의견을 3장의 간명한 문장으로 축조하는 훈련을 통해 설득력을 기를 수 있다. 문장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연마가 가능한 점도 시조읽기와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안점이다.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조시인들이 이즈음 동시조 창작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다수의 아동문학가가 동시조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들이 읽을거리가 많이 확보되고 있는 점도 바람직하고, 여러 지역에서 학생들의 시조를 모집하여 시조 읽기와 감상 붐이 일어나고 있는 일도 고무적이다.
무엇보다 일선의 선생님들이 국어교과서에만 한정하지 말고, 좋은 동시조와 시조 자료를 수집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어릴 적부터 좋은 시조를 많이 읽고 외는 일은 정신적 자산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을 윤택케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글로 창작된 정신문화의 보고를 학교 일선 현장에서 적극 수용하여 체계적으로 시조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일에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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