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묵주기도/양로사
아빠가 지난 일요일 식사 대화중에 “묵주기도 자주하니?”하고 불쑥 물으셨다.
빠듯한 일정 관계 등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서로 볼 수 없었음에도, <그럼.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배운 실력을 열심히 발휘하지! 아마, 아빠 보다 더 자주 할 걸~>하고 받아넘겼다.
그러자 아빠는 “평화방송 TV에서 매일 저녁 7시에 방영하는 <묵주기도>처럼 알차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단체나 신자를 본 적이 거의 없었노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신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깊이 묵상하며 기도해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주일학교와 교리시간에 배운 대로 <성호경 ― 사도신경 ― 주님의기도 ― 성모송 3번 ― 영광송 ― ○○의 신비 제목 언급― 주님의 기도 ― 성모송 10번 ― 영광송>순서에 따라 끝까지 했다는 성취감에 목표를 두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자상하게 묵상하며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감사드리는 진지한 묵상기도였다기보다는 일상적인 통과의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차할 때마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시는 아버님 모습이 선명하다. “수영장 탈의실에 들어서서 나사 풀린 옷장 문걸이가 보일 때마다 꼼꼼하게 조이며 느껴지는 기분이 짱이라는 아빠,”“목과 어께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될까 염려된다.”며, TV방송출연도 가능한 정중히 사절(謝絶)하시던 불혹과 지천명 호시절 때의 아빠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너무 커져버린 나, 실체보다 너무 부풀려져 있는 자신을 떠올려 본다.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내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해 버릴걸!!!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자비와 도우심을 기다리면 될 것을 괜스레 고해성사감만……!
사실 묵주기도만큼 종합적인 염경기도는 없을 듯싶다. 묵상하는 신비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곧 주님의 구원사업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의 전부이고 복음전체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즉 <환희의 신비(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유년시절), 빛의 신비(예수님의 세례와 기적, 공생활), 고통의 신비(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영광의 신비(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모님의 승천과 천상영광)>를 통해 복음의 함축적 묵상이 가능하므로, 개개인의 기쁨 충만은 물론 소공동 체에서의 성경말씀나누기도 훨씬 자연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는 어느 신부님 강론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이라는 말씀이리라!
오늘날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 제1순위는 ‘정치인’이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환경 미화원’이라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결과를 어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젊은이들 마음속에 가장 힘없어 보이지만 묵묵히 세상을 위해 일하는 가난한 환경미화원이 가장 존경스러워 보였던 것일 것이다.
이 시각은 나를 비롯한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 같다. (과거와는 달리) 아무리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졌어도 목에 힘줄이나 세우는 사람은 멸시받는 반면, 아무리 힘없어 보이며 작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들은 존경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주여 어서 오시어 나를 구해 주소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님의 기도문을 묵상하며 성찰해야겠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우리의 발밖에는.//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선을 행하십니다./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로사 성녀님 축일에 眞希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