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יֹודֵ֣עַ צַ֭דִּיק נֶ֣פֶשׁ בְּהֶמְתֹּ֑ו וְֽרַחֲמֵ֥י רְ֝שָׁעִ֗ים אַכְזָרִֽי׃
잠 12:10 義人(의인)은 自己(자기)의 家畜(가축)의 生命(생명)을 돌보나 惡人(악인)의 矜恤(긍휼)은 殘忍(잔인)이니라
A righteous man is concerned for the life of his beast; but the tender mercies of the wicked are cruel.
| Πνεῦμα ὁ Θεός,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ὸ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 |
| 요 4:24 하나님은 靈(영)이시니 禮拜(예배)하는 者(자)가 靈(영)과 眞理(진리)로 禮拜(예배)할지니라 God [is] a spirit; and they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truth. |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이공 생가를 출발해 이공기도터를 거쳐 천태산-홍골제-부활동산을 도는 5.83㎞ 성지순례길을 개설한 화순군에서도 구복규 군수, 하성동 군의회의장 등이 함께해 순례길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이세종은 남의 집 머슴으로 일하다 마을 최고 부자가 됐다. 성경을 읽고 개안한 뒤 스스로 ‘이공(空)’이 되어 재산을 빈자들에게 나눠주고, 부인과 해혼(잠자리를 하지 않음)하고, 사람은 물론 동식물까지도 지극한 생명애로 애경하는 삶을 실천한 인물이다.
전남 화순 이공 성지순례길
한국전쟁 때 고아와 폐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자신도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64), ‘나환우들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1880~1966) 등 성자적 삶을 산 이들이 그를 따랐으며, 그리스도적 토착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1890~1981)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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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한일장신대 신학과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에서 “이세종은 목사도, 신학교의 학자도 아니었지만, 치열한 삶의 실천 현장에서 성경을 통해 깨달은 기독교의 진리를 구경(최고의 깨달음)적 영성의 경지로 밀어붙여 가히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로 평가된다”며 “그의 활동 반경은 화순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의 실천적 유산은 세월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넓게 확산되고 있다”고 평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이공 이세종 생가터에서 이공의 삶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한영우 선생이 지난 2012년 이곳을 찾은 성지순례객들에게 이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현 기자
차 교수는 특히 이세종의 생태영성에 주목했다. 그는 “고사리를 꺾을 때 거기서 나오는 액체를 생명의 피로 여기고, 길을 가다가 혹여 자기 발에 개미 같은 미물이라도 밟혀 죽을까 싶어 심히 조심하여 살필 정도로 뭇 생명체에 대한 예민한 생태적 감수성을 지녔고,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공익기관에 다 분배하여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면서, 산속에 움막을 짓고 음식도 도토리 같은 열매, 말라 죽은 식물성을 위주로 생명 연장의 최소치만을 취하며 자족했다”며 “그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호랑이를 대면해 그 행실을 꾸짖고 나무라면서 동시에 ‘호 선생’이라고 이웃 피조물로 예의를 갖춰 존대하며 교화함으로써 늑대를 교화한 성 프란치스코와 같이 흉측한 동물마저 사탄의 분신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 품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피조 생명으로 여겼다”고 기렸다. 이에 대해 황종열 광주가톨릭대 강사는 이세종의 열린 생명적 삶과 달리 배타적인 현 개신교의 닫힌 관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차 교수의 발표를 통해 이세종의 자연 생태 차원에서는 하느님 보편에 열려 있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라 할 수 있는 불교 배타는 이세종의 보편 살이와 어떻게 상관되는가”라고 물음을 제기했다.
김창수 전 녹색대 교수는 “자기비움(케노시스)은 신이나 법(깨달음)과 하나가 되는 과정과 상태로서, 예수나 석가,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 최제우나 박중빈 등이 도달한 경지로, 이세종의 생명존중 사상도 깊은 영성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와 비교했다. 그는 “에크하르트는 사람들이 순종 가운데 자신의 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의 것과 결별하게 된다면 바로 그때 신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세종도 세상에 대해 공으로, 빈 껍질로 남아 거기에 깃든 신의 현현 속에서 살았다”고 봤다.
작가인 성금란 목사는 발표문에서 이세종을 따르며 생태적 삶의 실천가로, 독신영성가로 살아온 한영우(1929~2019)와 이원희 등의 삶을 조명하며, 이공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유적지 순례 여정을 소개했다. 김종옥 이세종선생기념사업회 이사는 “이공기도터를 중심으로 천태산, 화학산 일대가 스페인 산티아고 같은 성지순례길로 부상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세종의 영성사상
1. 수도사의 금욕적 영성
이세종에게 동방의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 같은 금욕적인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은 예수님도 고운 옷을 안 입으셨다고 말하면서 평소에 홋바지 저고리로 지냈으며, 더운 때나 추운 때나 같은 옷을 입었고, 언제나 걸인과 같이 떨어진 베옷을 기워 입고 구멍뚫인 모자를 쓰고 다녔다. 옷만 다른 사람보다 좋게 입어도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게 된다고 일부러 낡은 검정색 무명옷만 입고 다녔다. 이세종이 한번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아 갔는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우스운 모자를 쓰고 거지 옷을 입고 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설교보다도 그 꼴이 신기해서 거지가 설교를 한다고 모여 들기도 했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하루 한 끼만 식사했으며, 육식도 금했다. 성 안토니도 수도를 시작한 후에 주로 해 진 후에 하루에 한 끼, 이틀에 한번 혹은 나흘에 한번 음식을 먹었다. 성 안토니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동방의 수도사들은 수도를 하면서 주로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육식을 금했다. 이세종의 생활유형이 이들과 유사 하다. 이세종은 음식 먹을 때는 상에 차려 먹지 않고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혹시 누가 밥상을 차려와도 마음이 높아진다고 싫어하고, 자기는 죄인이라면서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이세종은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서 가져온 명절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의 주식은 보통 사람들은 역겨워서 도저히 먹기 어려운 쓱 범벅이었다. 이세종은 자신의 설교에서 “인간은 식욕이 폐하면 자연히 색욕이 패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상은 요한 클리마쿠스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배불리 먹은 배는 간음을 일으키지만 억제하는 위는 순결로 인도한다.”고 말했다. 이세종이 음식을 절제한 것은 정욕을 이기고 성결하여 궁극적으로는 순결을 통해 성경의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세종은 마치 수도사들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세종은 “바울선생은 시집가는 것이 죄는 아니나 안 가는 것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 7장이다. 과부가 시집가는 것이 좋으나 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다. 예수 믿는 것이 더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복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은 히브리서 13장 4절의 “결혼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권면이 있지만 그의 수도사적인 영성의 관점 때문에 고린도전서 7장을 선택하고 있다. 물론 이세종은 결혼을 죄로 보지는 않았다. 자식을 낳는 것도 죄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세종은 회심한 뒤에 순결하게 살기위해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야 한다면서 동거하지 않고 다른 방에 거처했다. 부인이 잠든 사이에 몰래 들어오면 어느새 알고 내쫓았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날 무렵, 얼마 동안 아내는 남편 시중을 들려고 한 방에 있었지만, 그것도 밤에 쉴 때는 중간에 칸을 막고 이웃 방에 거처했다. 이같이 이세종이 예수 믿고 부인과 부부관계를 단절한 해혼(解婚) 사상은 이집트의 동방 사막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니트리아의 아모운은 삼촌이 억지로 결혼을 시켜서 했지만 수도를 하면서 18년동안 부부가 한 집에 살면서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 해혼 생활을 했다. 그 후에 니트리아 산속으로 가서 그 곳에 수실 두 개를 짓고 22년 동안 각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모운은 매년 두 번 정도 부인을 만났다. 이집트의 수도사 유키리투스와 그의 아내 메리는 결혼하여 한 집에 살았지만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주위에 해혼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아모운 부부는 처음 18년은 같이 살면서 해혼을 하였고, 나머지 22년은 따로 떨어져 해혼 생활을 했다. 유키리투스 부부는 처음부터 같이 살면서 해혼 생활을 했다. 이들 수도사들의 해혼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해혼을 비밀로 하고 살았다는 점이다. 다른 제자들에게 강요 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이세종의 해혼 생활은 공개적이었으며, 제자들에게 해혼을 강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세종의 ‘해혼 사상’은 그 당시 기성교회로부터 신학적 공격을 받는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세종이 해혼 생활을 제자들에게 강요한 것처럼 보인 점은 지나친 금욕주의 형태로 보인다.
이세종이 제자 선택을 할 때도 동방의 수도사가 제자를 받을 때같이 절대적 순종을 요구했다. 박복만이 이세종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을 때 이세종은 자기가 먹던 밥을 먹으라고 밀어 놓으면서 자기가 먹던 숟가락을 새까맣게 때가 묻은 자기 버선 바닥에 닦아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박복만은 본래 병원에서 일을 했던 사람이라 위생 관념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걸 받아먹고 제자가 되었다. 성 안토니는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폴의 순종을 시험해 보기위해 사흘 동안 문밖에 세워 두었지만 폴은 떠나지 않았다. 안토니는 다시 야자수 잎으로 15미터짜리 밧줄을 꼬도록 했다가 다시 풀고 꼬도록 했다. 그래도 폴은 불평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순종했다. 성 안토니는 그제 서야 폴의 순종을 보고 제자로 받아주었다. 제자의 자격으로 순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세종의 제자 선택과 성 안토니의 제자 선택 방법에 유사점이 보인다.
이세종은 어록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유케 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번은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이세종은 “얻어먹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복희는 추운 겨울날 탁발을 실행 했다. 이세종도 거의 거지같이 생활을 했다. 이세종의 탁발 강조는 도미니코의 탁발 강조와 프란치스꼬가 가난을 자신의 신부라고 말한 것과도 유사하다. 이세종도 가난을 이상적 삶으로 생각했다.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정신을 여제자 글라라가 계승했다면, 이세종의 가난의 정신은 여제자 오복희가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세종은 죽기 전 마지막 3년은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한새골에서 지냈다. 3년간 산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전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았다. 얼굴과 손에는 때가 너무 끼어서 까맣게 되었는데, 그래도 음식 먹을 때에 쓰는 손가락 끝만은 짐승 발톱마냥 하얗게 드러냈다. 이세종의 이런 금욕적인 모습은 니트리아의 수도사 이시도르와 유사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머리끈 외에는 좋은 내의를 입지 않았고, 목욕을 하지 않았으며, 고기도 먹지 않았다. 이세종이 임종하면서 남긴 유산은 바가지 세 개 뿐이었다. 이세종은 평생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직 성경만 읽고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났던 금욕적 요소가 나타났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실천했던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처럼 이세종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실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자연 사랑과 생태적 영성
이세종에게 자연을 사랑하며, 보존하는 생태적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은 평소에 우거진 산천을 바라보며 한량없이 기뻐했다. “만물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라며 큰 소리로 찬양했다. 길을 가다가 이름 모를 초목들이 멋대로 우거진 것을 보면 손으로 풀포기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풀잎을 잡고 춤추듯 흔들면서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이 “인간들의 비정함 같아서는 너는 벌써 잘렸으련만 하나님의 자비가 너를 지켜주셔서 사람이 너를 베지 않게 했으니, 너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춤추고 감사하라.”고 했다. 그는 칡넝쿨이 가는 길을 막아도 밟지 않았고 일일이 치우며 다녔다. 길가에 잡초도 안전한 곳에 옮겨 심었다. 쓰러진 풀들은 걷어 세워 주었다. 산길을 가로질러 뻗어간 칡넝쿨이 지나 다니는 사람의 발에 밟혀 줄기와 마디가 다 터지고 우유 빛 진액이 피같이 흘러내리는 것을 볼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서, “아이쿠, 뉘게 짓밟혀 이렇게 물이 뚝뚝 흐르는 구나.”하고 울상이 되어 어찌 할 줄 몰라 했다. 때로 자신의 발에 새싹이 꺾여 지면, “비켜 가지, 이 귀한 목을 깨뜨렸구나!”하고 안타까워했다. 때로 자기 발밑에 개미 한 마리라도 밟혀 버둥거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를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 마땅한 놈인데 네가 내 발에 밟혀 죽다니.“하면서 울었다. 이세종은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았다. 이세종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자연 사랑과 생태적 영성의 관점에서 자연을 아끼고 사랑했다.
어느 날엔 부엌에서 풍덩하는 소리가 났다. 구정물을 담아 둔 통속에서 무엇이 덤벙덤벙 헤엄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구정물 통 속에 쥐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세종은 부엌 구석에서 막대기를 주어다가 쥐가 기어오르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빨리 도망치지 못하는 쥐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이세종은 모든 동물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동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도 잡아서 죽이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파리도 죽이지 않고 두 손으로 휘휘 저으면서 밖으로 내쫓기만 했다. 어느 날 부엌에 나가보니 독사가 있었다. 이세종은 독사를 때려잡지 않고 막대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몰아내 산으로 가게 했다. 그러면서 쫓겨 가는 독사를 보고, “다른 사람이 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네 몸을 간직해라.”하며 사람에게 말하듯 했다. 어느 해 가물어 논에 물이 마를 때, 이세종이 길을 가다가 웅덩이를 보니 그 속에는 송사리, 미꾸라지, 올챙이들이 한데 어울려 죽어가며 파득거리고 있었다. 이세종은 입고 가던 옷에다 그것들을 주워 담아 냇가로 가서 물에 풀어 주었다. 말라 죽은 올챙이도 주워 담으면서 “이것들이 이렇게 물 없이 죽듯이, 인간들도 그렇게 되는 시기가 올지 모른다.”고 했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부인에게 유언하기를, “언덕으로 벗 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라.”고 했다. 자연으로 돌아가 대자연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세종은 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도 되신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 여성 영성가 노리지의 줄리안에게도 나타난다. 그녀는 “우리 어머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유익을 얻고 자라며, 긍휼 안에서 회복시킨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세종이 자연과 동물을 돌보고 아끼는 것은 예수님을 돌보는 어머니로 이해하는 생태 영성적 사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란치스꼬는 그의 유명한 ‘태양의 노래’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초대하고 있다. 태양, 달, 별, 바람, 물, 불, 땅 등을 불러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우주 전체가 한 형제애 안에서 가족을 이루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했다. 이세종 역시 프란치스꼬와 같이 자연을 사랑하며, 보존하는 생태적 영성을 가지고 있다.
3. 성령의 체험적 영성
이세종에게 성령의 체험적 영성이 나타난다. 어느 해 이세종은 이상한 열병을 앓는다. 노라복 선교사가 찾아와 광주 제중병원으로 가자고 했지만 워낙 약을 쓰지 않는 것이 이세종의 주장이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추운 밤에 말없이 누워 있던 이세종의 몸이 화끈 거리기 시작했다.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더니 꽁꽁 얼어붙은 연못가의 물을 퍼서 자기 몸에 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자나무 아래에서 신비스러운 빛 속에서 예수의 얼굴 반면(半面)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열병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완쾌되었다. 이 체험이 있은 후 이세종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육신으로는 예수의 형상을 볼 수 없다. 다만 성령의 조명하시는 빛이 내 안에 비칠 때에만 예수를 보아내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세도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았다가는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므로 다만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고 성경에 말했다.”고 했다. 이세종은 성령의 불을 받고 신적인 빛을 경험했다. 이 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모든 것과는 매우 다른 불변하는 빛이며, 동방 수도사 신신학자 시메온이 말하는 신적인 빛과 유사하다. 시메온은 이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과 하나님 안에서 진실한 사랑과 희망을 가진 자가 볼 수 있다고 했다. 동방의 영성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세종이 이러한 신적인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향한 강한 갈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세종은 “성신 못 받으면 시끄럽고 비방거리 뿐이다.”고 했다. 제자들에게도 “믿고 성령 받는 것이 목적이다. 성령을 못 받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기차 타는 사람이 차표가 있어야 하듯, 성령을 받아야 천국을 간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만 되면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욕을 끊어야 성령을 받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이 마음을 방으로 표현한 것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영혼을 궁방으로 묘사한 것과 유사하다. 또한 이세종이 정욕을 끊어야 성령을 받는다는 주장은 동방의 이집트 사막의 성령론의 대가인 대 마카리우스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마카리우스는 그의 설교에서 ”마침내 성령의 완전함에 다다른 사람은 모든 정욕에서 완전히 정화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교통 속에서 보혜사 성령에 의해 침투를 당하며 연합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세종은 성령의 역사를 세 가지 단계로 말했다. 첫째,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인데 이것은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불신자와 살인자도 감동을 받는다. 성령의 감동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쉽다고 했다. 둘째는 성령을 보통 받는 것인데, 이는 회개해야 받는다. 사람이 햇빛을 받으려면 방에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함과 같다. 보통 받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엔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고 보았다. 셋째는 성령을 충만히 받는 일이다. 이것이 성령을 완전하게 받는 일이다. 완전하게 받으면 그 때는 다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세종은 성령 충만하면 “먹는 문제”를 초월하고, ”입는 문제“를 초월하고 ”아는 문제“ 지식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이세종은 성령 충만을 가장 높은 단계로 두고 있다. 이세종의 성령론은 주로 오순절적 성령체험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인격적 성령 이해에 대해서는 부족함을 보인다.
4. 성경의 문자적 영성
이세종에게 성경의 문자적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은 신학적인 공부나, 교회에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문자 그대로 믿은 사람이었다. 정경옥에 의하면 이세종은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는 동안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절이 바뀌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때를 좇아 음식 먹는 것을 잊었다.”라고 할 만큼 성경연구에 집중했다. 윤남하에 의하면 이세종은 어디를 가든지, 꼭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으며, 무엇을 묻던지 성경 어디 몇 장, 몇 절을 읽으시오 하고 성경으로 대답했으며, 말 한마디를 해도 성경이오 하루종일 이야기를 해도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말했다고 한다. 이세종의 어록에는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추 파면 너 죽는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 밖에 나는 것이 없다. 나무뿌리도 생명의 물줄기 찾아서 깊이 파고들어야 사는 것이다.”라며 성경말씀을 깊이 파라고 강조했다. 이세종은 성경을 거의 통달할 정도였다. 낮이면 종일 성경을 읽고, 밤에는 암송을 했다. 성경 요절을 밤을 세워가며 암송하고 요지를 표해 놓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 필기하고 읽고 하기를 해 넘어가기까지 계속했다. 제자들 앞에서 자기의 손가락을 펴들고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는 정도다.”라면서 “단지 본문을 통독하는 정도를 가지고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며 암송했다.“고 한다.
이세종은 제자들이 사경회에 가서 성경을 배우는 것을 권했다. 한 가지 이야기만 듣고서는 참과 거짓을 알 수 없는 법이니 둘을 놓고 서로 비교하여 보라고 했다.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고한 것은 이세종파를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이세종에게 배운 바를 어디에서 가르칠 때“ 이 말씀을 이공께 들은 것이 아니라 개천산 돌 틈에서 들었다하라.”고 말했다. 한번은 이세종의 제자 중에 송동근이 이세종의 가르침을 책으로 내면 어떻겠는가 하자 이세종은 그러면 성경이 파묻힌다고 반대를 했다. 이세종은 자신의 성경공부만이 절대적이라는 폐쇄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기의 가르침은 없어지고 성경만 나타나는 겸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오직 성경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이세종은 성경을 최고의 약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약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위생이다. 겉으로 정결해도 죽고 병난다. 그러나 신령한 말씀을 따라가면 부활이요 영생이니 얼마나 좋은 위생이냐. 이 약은 의심 없다. 세상 약 쓰는 것은 꼭 나을지 모르니까 미신이다.”라고 말했다. “약을 풀 잎사귀로 알고 먹어도 좋지만, 하나님 은혜로 병이 나았는데 약으로 나은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니, 신자는 약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경을 ‘신약과 구약’이라고 부르듯 우리에겐 말씀의 약이 있으니 세상 약을 먹으려 하지 말고 말씀을 먹어라.”라고 가르쳤다. 심지어는 신자가 약을 먹는 것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라고 까지 극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은 이세종의 성경에 대한 문자적 영해로 인한 그의 독특한 영성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의 문자적 해석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이세종은 성경 읽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음란을 멀리하고 양심이 맑아야 성경을 읽어도 모든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 것도 바로 이해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나 아무렇게 읽어도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을 바로 읽으려면 먼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까루투시오 수도원의 귀고 2세는 보다 깊은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 안에서 악한 생각들이 정화되고, 마음이 순결을 갈망할 때 비로소 깊은 묵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세종이 음란을 버리고 순결해야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다는 사상은 귀고 2세의 사상과 유사하다. 이세종의 성경관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신학에 가까운 영성을 보이고 있다.
5. 실천적 영성
이세종에게 성경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실천적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을 따라다니면서 이세종의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현필은 1961년 3월 1일 일기에서 “주님 닮은 북동 안(安)신부님! 주님 똑같았던 이세종(李世鍾)님!.”이라고 쓰고 있다. 이현필은 이세종이 예수같이 실천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은 후에 어렸을 때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 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주었다. 이세종은 동네 어려운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으면 자기 두 식구의 식량에서 떠다가 갔다 주고 그대신 자기들은 호박죽으로 연명하며 살았다. 이세종은 산에나 들에 나가서 일꾼들이 흔히 하는 대로 남의 콩 한 포기라도 뽑아먹었던 기억이 있으면 그 임자에게 찾아가 자복하고 다 갚았다. 곡식은 모아두었다가 노인과 어린이가 있는 가난한 집에 나눠 주었다. 대신 자신은 콩 잎사귀 하나도 아까워 맘대로 못 먹으면서 그렇게 했다. 창고 문을 열어 그 동안 쌓아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동리마다 전곡을 나눠주고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모두 대접해 보냈다. 어느 날 누가 찰밥을 해왔는데 찰밥을 붙들고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먹지 못했다. 결국 그는 눈밭을 누비며 가난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그 찰밥을 다 나눠주었다. 흉년에는 한 밤중에 몰래 동리의 가난한 집을 돌면서, 식구들을 헤아려 매주와 소금을 알맞게 나눠 주었다. 걸인이 이세종의 집을 찾아오면 자기는 땅에 앉아서 먹고 걸인에게는 좋은 상을 차려서 대접했다. 한번은 광주지방 대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양식(9일분)을 짊어지고 80여리를 걸어 광주에 가던 중 가난한자를 보고 양식을 모두 나눠주고 자신은 9일간 금식하며 집회를 참석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송기득은 이세종의 나눔의 실천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바로 그의 호(號)인 ‘이공’(李空)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공의 “비움의 철학”은 그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나타났지만, 특히 그의 ‘나눔살이’에서 제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애써 번 돈과 재산을 송두리째 내놓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다 나눠 주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비움’(空)의 행동실천(行動實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세종은 어록에서 “전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입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오늘날에는 행동으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은 실천을 통한 전도를 몸으로 보인 사람이다. 구제도 전도를 위한 그의 실천의 하나의 방법이었다. 어느 날,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나이 어린 불쌍한 거지 하나를 만나 돈 얼마를 주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생각하니 그 거지의 남루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눈에 떠올라 양심이 괴로웠다. 하루 종일 거지를 찾아 다니다가 해질 무렵에야 그 거지를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달려가 거지를 붙잡고는 “당신께 좋은 일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라고 말하면서 거지가 입고 있던 다 떨어진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의 옷은 거지를 주었더니, 이세종의 큰 몸집에 거지의 옷은 너무 작아 남 보기에 우스운 꼴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프란치스꼬가 성 베드로의 무덤을 순례 했을 때 교회 앞에 모여 있는 거지 무리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옷을 주고 그 거지의 누더기 옷을 바꿔 입고 기쁨이 가득차서 모인 군중들 가운데서 하루 종일 보낸 모습과 유사하다. 이세종은 성경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려는 실천적 영성을 보여주었다.
IV. 나가는 말
정경옥은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이세종에게 서양 수도사들에 뒤질 것이 없는 성자라는 칭호를 붙여준 바 있다.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살펴보면 실제로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났던 영성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동방 수도사 성 안토니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니트리아의 아모운, 성 안토니의 제자 폴, 니트리아의 수도사 이시도르. 스케티스의 대 마카리우스, 신신학자 시메온 등의 영성사상과 외형적으로 유사점이 나타나며, 서방 수도사로는 아우구스티누스, 귀고 2세, 아빌라의 데레사, 도미니코, 프란치스꼬, 노리지의 줄리안의 영성사상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이세종은 비교적 서방보다는 금욕적인 영성을 강조했던 초기 이집트 사막의 동방 수도사의 영성이 더 짙게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독수도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의 영성사상과 외형적으로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이세종의 개천산은 마치 이집트의 성 안토니의 콜줌산과 같은 묵상과 기도터이다. 성 안토니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말씀과 기도로 은둔하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같이 이세종도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개천산 기슭에서 말씀과 기도로 평생을 은둔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성 안토니가 주로 기도와 관상에 집중했다면, 이세종은 말씀 묵상 후에 전도하며 구제하는 활동을 동시에 강조 했다. 이처럼 이세종은 기도와 묵상과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영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영성사에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관상과 활동이 이세종안에서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와 활동을 강조하는 이세종의 영성사상은 종교개혁가들 특히 루터의 영성사상과 유사점을 보인다. 이세종의 영성사상은 루터의 신학적 방법론인 기도(Oratio)-묵상(Meditatio)-시련(Tentatio)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이세종은 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성령의 내적조명과 구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영성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이세종의 영성사상은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적인 영성과 종교개혁가의 영성, 오순절의 영성, 그리고 개혁주의 영성 등,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통전적 에큐메니칼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전적 에큐메니칼 영성은 예수의 영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동방과 서방 그리고 개신교회가 영성으로 상호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로 제시 해 본다.
주제어 Keywords
영성, 영성사상, 에큐메니칼, 통전적, 동방교회, 서방교회, 개신교회
(Spiritual, Spiritual Thoughts, Ecumenical, Integral, The Orthodox Church, Roman Catholic Church, Protestan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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