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123) - 100세 시대의 생애주기
오곡백과가 여물어가는 가을,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모두가 거두어야 할 열매는? 아무쪼록 알찬 인생 가꾸시라.
창밖으로 펼쳐진 황금들녘
어렸을 적 까마득하게 바라보던 8순에 접어들었다. 얼마 전에 접한 통계에서 살핀 80세의 생존율은 30%,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이에 이른 것이 감사하다. 젊을 때 좌표로 삼은 생애주기는 공자의 담론,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품고 서른에 똑바로 서며 마흔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헤아리며 육십에 귀가 부드러워지고 칠십에 마음먹은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성현도 미처 경험하지 못한 연륜에 접어들어 그 다음 가르침을 새길 수 없음이 아쉬워라. 100세를 훌쩍 넘긴 김형석 교수의 강건함과 지혜로움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며.
가을의 품격을 드러낸 국화의 향연
언론에서 접한 ‘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에서 나름의 힌트를 얻으시라.
‘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志于學), 서른에 자립하고(而立),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不惑). 오십에는 천명을 알고(知天命),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이 되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 주지하듯, 공자가 구현한 생애주기다. 그런가 하면, 이런 생애주기도 있다. 학습기(스승을 찾아 베다의 진리를 배우는 시기), 가주기(결혼과 직업을 통해 사회적 다르마<의무>를 실행하는 시기), 임서기(숲으로 가서 명상과 성찰에 들어가는 시기), 유랑기(천하를 유행하며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 이것은 아슈라마, 곧 인도의 힌두교가 제시하는 생애주기다. 공자와 힌두교 모두 BC 5세기 전후에 등장한 영적 비전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수명은 125세다. 오행(목화토금수)에 25를 곱해서 나온 숫자다. 생물학적으로 추산해도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과 자연재해, 역병 등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오랫동안 50세 안팎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100세 시대가 도래하였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기대수명이 100세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대단한 축복이자 행운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사이에 생애주기에 대한 비전이 증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100세 시대와 관련한 담론들이 넘쳐나긴 한다. 고령화(및 그에 수반되는 저출산), 노인일자리 및 연금제도, 요양과 돌봄 등등. 이런 담론을 접하다 보면 노인이 된다는 건 그 자체로 스트레스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잘 관리되고 처리되어야 하는 잉여인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참 허탈하다. 언제나 그래왔듯, 모든 기술적 혜택을 번뇌로 만드는 문명의 아이러니가 또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과 화폐라는 기준이 생애주기 전반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찬찬히 따져보자. 공자의 생애주기나 힌두교의 아슈라마가 보여주듯, 우리 시대 역시 청년기는 배움의 시기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인생의 기본기, 즉 생로병사 전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인식의 지도를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교육은 노동을 위한 예비기간이다. 아니, 학습 자체가 이미 노동이다. 그럼에도 서른에 자립하기란 요원하다. 사회적 다르마를 실행하기는커녕 경제적 자립조차 어렵다. 그러니 마흔에 불혹은커녕 노동과 화폐에 완전히 미혹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50 전후해서 퇴사하거나 명퇴를 한다. 이때부터는 생의 변곡점이다. 지천명이나 숲속의 명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생리적으로도 갱년기, 즉 리셋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지만 기준은 여전히 노동과 화폐다. 다가오는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에 더더욱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니 환갑 이후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청력이 급격히 저하된다. 들리는 모든 것이 못마땅해진다. 혹은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청춘을 모방하는 데 골몰한다. 하여, 다시 돈이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천지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공자의 일흔이나 해탈을 향해 천하를 떠도는 유랑기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오직 노동과 화폐의 깃발이 주도하는 일직선의 평면 위를 달리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공간은 직선도, 평면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이 끊임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하고, 공간은 다시 물질을 운동하게 하는 식으로.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이것을 일러 우주의 탱고라 이름 했다. 하여, 그 매트릭스에선 인생 또한 사계절과 더불어 리듬을 탄다. 봄여름에 발산하고 가을겨울에 수렴한다. 전자가 성장과 확충의 때라면, 후자는 교감과 성찰의 시간이다. 전자가 열정과 모험의 장이라면, 후자는 지혜와 유머로 충만해야 할 때다. 공자의 생애주기나 힌두교의 아슈라마도 이런 우주적 리듬의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시대 역시 100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애주기를 창안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이런 리듬 속에서만이 청년과 노년은 비로소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인생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벗! 청년기의 고립 혹은 노년기의 단절이라는 시대적 난제를 극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조선일보 2024. 9. 22 고미숙의 ’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에서)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언 20장 29절)
젊은이의 영화를 발산한 야구선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