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 나간 날
칠월 첫날이다. 거제로 건너와 생활한 지 넉 달이 지난다. 금요일 오후 창원으로 복귀해 일요일 오후 고현으로 와 연사 원룸으로 든다. 주중 퇴근 후 근무지 인근 야산을 오르거나 시내버스로 갯가로 나간 산책으로 시간을 보낸다. 고현으로 나갈 일은 드문 편인데 월요일 퇴근하고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연사에서 자주 있는 시내버스로는 십 분 남짓이지만 걸으면 사십 분 정도 걸린다.
연사에서 들길을 걸어 연초교를 지났다. 거기부터 고현까지 연초 천변은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우레탄으로 깔아 먼지가 일지 않고 벚나무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워 뙤약볕도 피할 수 있다. 고현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저녁 산책을 즐겨 나오는 곳이기도 하였다. 연초천 하류는 민물과 바닷물이 고현만과 만나는 곳이라 기수역 특유의 여러 동식물이 자란다. 철새들도 찾아왔다.
장맛비가 그친 오후에 산책로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길섶에는 조경용으로 심겨진 원추리가 제철을 맞아 주황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름에 피는 꽃들은 비가 와도 꽃잎이 시들거나 쳐지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이맘때 피는 수국이 그러하고 산나리도 그렇다. 장맛비를 함초롬히 맞고도 꽃잎은 온전하다. 연꽃도 비를 맞고도 우아한 기품을 보여준다. 그처럼 원추리도 그랬다.
중곡지구 아파트를 지나 고현만 매립지 근처로 나갔다. 예전 카페리가 접안했다는 고현만은 많이 달라져 가고 있다. 항만의 상당 부분 해수면이 매립되어 다른 용도로 개발을 앞두었다. 건너 삼성중공업 조선소가 가까워졌다. 내가 퇴근 후 고현으로 나간 1차 목적은 내과 주치의를 만남이다. 당뇨 수치가 높다기에 약을 타러 가는 길이다. 고현터미널 근처 다니는 내과를 찾아갔다.
간호사가 혈당을 체크하니 정상치였다. 접견한 의사의 소견은 혈당이 정상이라도 복용하는 약은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많이 걷기에 혈당 관리는 잘 되는 편이데 술을 즐겨 드니 문제였다. 당뇨는 의사한테 한 번 코가 꿰면 봉이다. 의사는 별다른 문진이나 진찰을 하지 않아도 처방전을 손쉽게 내보낸다. 더 할 말이 없으니 혈압을 재고 가라나, 내 혈압은 지극히 정상이다.
의사가 끊어준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들려 약을 탔다. 내과나 약국을 찾을 때마다 언제까지 시간을 내야하고 카드를 긁어야 하는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팔다리가 골절되거나 피가 철철 흘러 붕대를 감는 형편이 아닌 사지가 멀쩡하지 않는가. 어디에 통증이 느껴짐도 아니다. 그럼에도 경계선에서 살짝 벗어난 혈당으로 보름이나 한 달 치 약봉지를 받아야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고현으로 나온 김에 시외버스터미널 곁 상가가 궁금했다. 터미널에서 좀 떨어진 고현 재래시장은 두어 번 들렸다. 바다와 바로 접하진 않았지만 활어나 조개를 파는 곳도 있었다. 나는 거기 시장 골목에서 국밥으로 한 끼 식사를 때운 적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 규모가 제법 되는 상가가 여러 블록 나왔다. 주로 식당들이고 노래방이나 모텔을 비롯한 18금 구역이었다.
불판이나 석쇠는 취향에도 맞지 않고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었다. 대부분 갈비나 삼겹살을 굽는 식당이었다. 그 가운데 생선구이를 파는 가게를 찾아냈다. 날이 저무는데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여러 테이블 가운데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밑반찬이 나올 때 맑은 술을 한 병 시켰다. 계란말이와 부추나물로 맑은 잔을 스스로 채우고 비우니 고등어구이 두 토막에 밥공기가 나왔다.
잠시 뒤 한 사내가 들어와 나처럼 생선구이를 시켰다. 그는 반주 없이 식사만 하더니 밥을 한 공기 더 달라고 했다. 난 공기 밥은 남기고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고등어구이로 안주가 모자라 계란말이를 더 요청해 소주 두 병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상가 골목엔 네온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연사로 가는 시내버스 정류소로 향했다. 19.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