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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거짓
말 2:10-17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말 2:10-17 / [혼혈 결혼과 이혼] 우리는 모두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 아니냐? 우리는 모두 똑같은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왜 우리들은 서로 속여서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욕되게 하는가? 11) 유다 나라는 배신과 속임수의 천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일들만 꼬리를 물고 있다! 유다의 남자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방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선민의 피를 더럽혀 놓았다. 12) 이러한 사내들은 여호와께서 모조리 제거하여, 더 이상 주님의 백성에 들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한사람도 이 벌을 모면하지 못하며, 화해의 제물을 바쳐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조차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13) 다음으로, 너희는 이런 짓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제물을 더 이상 돌아보시지도 않고 너희의 손으로 바치는 예물을 기쁘게 받아주시지도 않기 때문에 너희는 주님의 제단을 눈물로 적시며 주님의 성전을 울음과 탄식 소리로 가득히 채워 놓는다. 14) 너희는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다. 너희에게 죄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죄를 아신다. 주님은 남편들에게서 억울하게 쫓겨난 여인들의 옹호자이시다. 여러 해 동안 너희 남편들에게 정조를 잘지킨 아내들을 버리고 떠나며, 너희도 본래 아끼고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내들을 쫓아 보내었으니 너희의 이혼은 사기와 배반이다. 15) 나와 맺은 계약의 정신이 조금만 남아 있어도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된 자녀들을 두기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욕을 조심하여라! 그리고 각자 젊어서 결혼한 첫 아내를 내쫓지 말아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 아내를 내쫓는 것은 살인과 똑같이 흉악한 범죄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욕을 억제하여라! 어느 누구도 자기의 아내를 내쫓지 말아라!' 17) [주께서 오셔서 심판하신다] 너희는 주님을 괴롭힐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짐짓 놀란듯 반문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였기에 저희가 주님을 괴롭혀 드렸을까요?' 그러면서 너희가 하는 말들을 들어 보아라. `악한 짓을 하는 사람마다 주님의 눈에는 아마 귀엽게 보이는 것 같구나! 주님의 간섭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가?' 또 너희는 이런 말도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을 주시지 않는다! 상관을 않으신다니까...' 너희는 이토록 주님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제사장들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이스라엘 사회가 두 가지 큰 죄악에 빠졌습니다. 하나는 이방여인과의 통혼이며, 또 하나는 이혼입니다.
이방여인과의 통혼(10-12) 여기서 ‘한 아버지’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방인들과의 통혼이 많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였습니다(신 7:3, 4).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방신들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렘 2:27). 이스라엘은 수많은 아버지들의 나라가 되었으며(참고, 스 9:1,2; 느 13:23),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이로써 유다의 유대관계(unity)가 크게 흔들렸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깨졌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를 범한 자들을 끊어 버리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지식인인척하며 통혼을 합법화하는 자나 이런 말을 듣고 반응하는 자입니다. 제사장들 가운데도 통혼한 자가 있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영원한 기업에서 제외시키겠다고 공언하십니다.
이혼(13-16)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봉헌물을 드렸으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이혼하여 버린 아내들이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제단을 가리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최초로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입니다(창 2:24). 두 사람의 서약에 대한 증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행하는 죄입니다. 결혼에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연합하는 것이며, 이로써 경건한 후손이 나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아내를 버림으로써 경건한 환경을 파괴하였고, 이방 여자와 통혼함으로써 이방의 악한 문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17) 말라기 시대에는 악인이 의인보다 잘 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에 백성은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라고 말하며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이 말 가운데는 하나님의 존재와 정의에 대한 백성의 의심이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불평하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Boice). 이 세상에 불의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으로 누구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8, 9).
적용: 아담의 갈비뼈가 여러 개지만 그 중에 하나만을 뽑아 여자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행상인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의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잠자리가 가장 불편했습니다. 이때부터 가난한 이 소년은 호텔사업을 꿈꾸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성경말씀을 굳게 믿고 꿈을 가졌습니다. 드디어 가난한 행상인의 아들은 1924년 댈라스에 큰 호텔을 세웠고 이 호텔은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소년이 바로 저 유명한 힐튼호텔의 창업자 콘라드 힐튼입니다.
< 설 교 >
한 아버지 One Father
말라기 (3) Malachi 2:10-16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한 중요한 길은 인간과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 The one of the important ways of keeping the covenant with God is keeping the covenant with man.
언약(covenan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베리트”(בְּרִית, berieth)입니다. 좀 더 쉬운 말은 계약(contract)이나 조약(treaty)입니다. 주로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계약이나 조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주전 2100년경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르에서 부르십니다. 오늘날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우르는 이미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국가였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약속을 받은 것은 현재지만, 그 내용은 미래입니다. 현재 약속을 붙드는 것이 곧 소망입니다. 땅은 이미 가나안의 선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땅과 자식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inheritance)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두 기업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기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의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겠다고 말씀드립니다(창 15:2). 하나님이 씨를 주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을 봐라. 네가 저 많은 별을 셀 수 있겠니?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거야”(5).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7절에서 땅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라고 되묻습니다. 무슨 뜻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계약서로 남기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보증해 달라는 거죠.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의식을 명하십니다. 9절을 보세요. 삼 년 된 암소, 삼 년 된 암 염소, 삼 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이렇게 다섯 제물을 준비하라고 하셨죠. 10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암소, 염소, 숫양을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 13-16에 나오는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4대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연기 나는 화로에 담긴 타는 횃불이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리고 18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횃불의 형태로 제물 사이를 지나가신 거죠.
언약이라는 단어 “베리트”의 동사 원형은 “카라트”입니다. 그 의미는 “자르다”(to cut)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맺을 때에는 동물 제물을 반으로 자르고 언약 당사자가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을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을 맺는 양측 누구라도 그 약속을 배반하면 그 제물처럼 절반으로 잘려 죽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그 제물 사이를 걸어서 지나감으로 언약을 맺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라기 본문은 아브라함 이후 1700여 년이 흐른 후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을 깨뜨리고, 그 결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도 역시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렸기에 사람과의 약속도 역시 깨뜨린 것입니다. 말라기는 사람과의 약속을 회복함으로 하나님과의 약속도 회복하라고 이스라엘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리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중요한 한 길은 사람과의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한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모두가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한 아버지” “One Father” (10-12)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아버지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0 "Have we not all one Father? Did not one God create us? Why do we profane the covenant of our fathers by breaking faith with one another?
예언자 말라기는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셨고, 낳으셨고,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속하셔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각 사람은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함으로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거짓이 무엇입니까? 계약, 언약, 약속을 파기하고도 숨기고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는 것은 조상들을 욕되게 합니다. 그들에게 이어받은 언약을 욕되게 합니다. 그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자기 형제가 누구죠?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배우자, 부모, 자식, 형제, 성도, 이웃이 바로 자기 형제입니다. 거짓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고, 속이고, 숨기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거짓일까요?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1 Judah has broken faith. A detestable thing has been committed in Israel and in Jerusalem: Judah has desecrated the sanctuary the LORD loves, by marrying the daughter of a foreign god.
거짓, 가증한 일, 성결을 욕되게 하는 것,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다 서로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배우자를 속이고, 주님이 거룩한 성전인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는 아주 대표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그 증표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바로 십계명과 그에 수반되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 보니 이스라엘은 싯딤이라는 곳에서 모압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멸망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자기 여자들을 내세워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했습니다. 자기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대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바알 숭배의 핵심은 신전 매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6절부터 보니 심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 가문의 한 사람은 미디안 여인을 자기 장막으로 데리고 와서 음행했습니다. 이를 본 제사장 비느하스가 그의 막사로 따라 들어가 그 이스라엘 남자의 등부터 창을 찔러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 그 둘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구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도 동일한 죄에 빠져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을 봅시다. 15절부터 보죠.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5-17). 그리스도의 지체인데 동시에 창녀와 한 몸이 되는 끔찍한 상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가증한 일, 주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것, 이방 여인과 합하는 것, 자기의 아내를 속이는 것 등이 예언자 말라기가 고발한 내용입니다.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도 끊어 버리시리라
12 As for the man who does this, whoever he may be, may the LORD cut him off from the tents of Jacob - even though he brings offerings to the LORD Almighty.
이에 대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무엇입니까? 12절의 본문은 번역이 여러 가지로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리며 예배를 하던, 영적으로 깨어 있거나 하나님께 응답을 한다 하더라도, 지도자이든 학자이든, 그 누구이던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경고하십니다. 몸으로 말하자면, 수술입니다. 몸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고린도교회처럼 무서운 범죄를 행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거짓을 행할 수 있습니다. 탐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할 수 있습니다. 간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마음에 있을 때, 주님께 고백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보혈로 사함을 받읍시다. 마음의 습관, 행동의 습관, 말의 습관이 되었을 때에는 단골처럼 떨어지기 힘든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매를 드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지 맙시다. 말씀을 듣고 돌아서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2.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The wife of your youth” (13-15)
13 너희가 이런 일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3 Another thing you do: You flood the LORD's altar with tears. You weep and wail because he no longer pays attention to your offerings or accepts them with pleasure from your hand.
속으로는 이러한 가증한 범죄를 행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거짓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 울음, 탄식으로 회개도 하고,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도 합니다. 마치 자기는 할 것을 다 했고,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런 회개, 그런 예물, 그런 마음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순수한 마음, 거룩한 성전인 마음입니다.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4 You ask, "Why?" It is because the LORD is acting as the witness between you and the wife of your youth, because you have broken faith with her, though she is your partner, the wife of your marriage covenant.
그러면서도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은 “어찌 된 일입니까?”라며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린 눈물과 예물과 제사로 인하여 하나님은 당연히 그들에게 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기계가 아니십니다. 어떤 원리도 아니십니다. 이방 신들처럼 예물만 받고, 아무 윤리적인 삶도 요구하지 않는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이 시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합니다. 말라기의 앞에는 이스라엘의 보통 남자, 결혼하여 아내가 있고 자녀를 기르는 보통 남자들이 서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하여 예언자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남자들과 그들의 아내들 사이에 증인이 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들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그들이 어려서 맞이한 아내입니다. 결혼은 두 남녀의 언약이요 서약입니다. 하나님은 남편에게 아내를 주시고, 아내에게 남편을 주셔서 둘이 짝이 되어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결혼이라는 언약을 통해 부부가 되고 한 몸이 됩니다.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증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사람과의 언약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바로 그 아내, 젊어서 언약을 통하여 맞이한 그의 아내에게 거짓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과의 언약을 깬 것은 즉각 하나님과의 언약을 깬 것이 됩니다.
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15 Has not the LORD made them one? In flesh and spirit they are his. And why one? Because he was seeking godly offspring. So guard yourself in your spirit, and do not break faith with the wife of your youth.
15절 말씀도 번역이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어 번역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실 때, 한 명이 아닌 두 명 이상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거죠. 어느 민족이나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1:1에 가깝습니다. 전쟁 등으로 성인 남자들이 많이 죽는 경우는 특수한 예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상황에서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아내로 삼으면, 아내를 얻지 못하는 남자가 당연히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이 지지하는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일부다처는 문화나 관습이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른 것은 아닙니다. 다윗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 솔로몬의 우상 숭배는 다 그 기원이 일부다처에서 온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남자와 여자가 장성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부모를 떠나 하나님 앞에서 결혼의 언약 관계로 한 몸, 한 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자녀를 낳아 경건하게 기릅니다. 그리고 그 심령을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가 늙었다고 다른 젊은 여자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3. “심령” “Spirit” (16)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16 "I hate divorce," says the LORD God of Israel, "and I hate a man's covering himself with violence as well as with his garment," says the LORD Almighty. So guard yourself in your spirit, and do not break faith.
더 나아가 예언자 말라기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들의 정욕을 위하여 아내를 버리는 것을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사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을 분명히 미워하십니다. 또한 아내를 학대하고 구타하고 그것을 옷으로 가려서 숨기는 것도 미워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여자가 분명히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법과 관습, 그리고 특히 경제적으로 남편에서 의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우리의 영혼이고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씀이죠. 죽고 사는 것이 우리의 심령, 우리의 마음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Conclusion:
우리의 심령을 지켜 믿음 안에 거하자. Let us abide in faith by guarding our spirit.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과 언행을 주님 앞에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의 마음부터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것이 있는지 말씀이라는 자기공명촬영장치(magnetic resonance imager) 위에 올려놓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통찰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더러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수술대에 올라 하나님의 성령의 수술 칼로 환부를 도려내시도록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보혈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합시다. 끊어진 모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합시다. 이 한 주간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심령을 지킴으로 주님의 믿음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언약 백성의 결혼생활
말 2:10-16 / 피영민 목사
서론
말라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430여 년 전에 기록된 마지막 예언서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문제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특별한 언약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여 구원하셨다는 진리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택함을 받은 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냐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믿은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두 가지가 오염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오염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는 점 없고 흠 없는 제물을 드리라고 했지만 좋은 것들은 자기들이 취하고 병들고 온전치 못한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들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지 않으시니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죄사함을 못 받으니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오염에서 오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가정생활이 붕괴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말 2:10). 이 구절은 종종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사용하던 말씀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고,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인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매력적인 이론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 그러므로 말라기 2장 10절의 말씀은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대로 아브라함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백성이란 구약 시대의 아브라함 후손뿐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받은 성도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백성들의 가정생활이 붕괴된 것입니다.
Ⅰ. 언약의 백성들이 가정생활에서 행한 두 가지 궤사
말라기는 언약의 백성들이 가정생활에서 두 가지 궤사를 행하였다고 고발합니다. 궤사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네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말 2:10).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말 2:11).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5).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6). 그리고 한 번은 궤사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뜻이 동일한 단어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말 2:11). 궤사라는 말은 영어로 ‘treacherous’인데 ‘믿을 수 없다’ 혹은 ‘배반을 잘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궤사를 행했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배반을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정에서 두 가지 궤사를 행했는데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말 2:11). 모세는 율법을 가르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신 7:3). 언약의 백성들은 이방신의 딸들과 혼인을 하지 말라고 율법으로 철저하게 금지하였습니다. 단순히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등은 신앙인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의 딸, 즉 우상숭배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언약의 가정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참된 신앙을 타락시키게 되어 있고, 참된 신앙이 타락하면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자들과 혼인하여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기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나옵니다.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홍수를 내리신 이유가 창세기 6장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2). 어떤 사람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고 사람의 딸들을 사람으로 해석하여 천사와 사람이 결혼해서 괴물 네피림을 낳았고 이로 인해 홍수가 났다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사가 장가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했다는 것은 언약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결혼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아벨을 죽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줄이 끊어지지 않고 아담에게 다시 셋을 주셨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셋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여자들의 외모에 이끌려 결혼함으로써 인류 대재앙인 홍수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나이가 들면서 아주 어리석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상 11:3~4). 솔로몬은 아내가 700명이고 첩이 3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젊은 처첩들이 이방신들을 들여왔고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른 신들을 쫓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이 결혼을 잘못하여 결국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계속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에스라와 느헤미야 선지자가 힘겹게 싸웠던 것은 바로 유다 백성들이 이방신들의 딸들과 결혼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느 13:25). 느헤미야가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시키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머리를 뽑고 때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 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시킨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강력하게 대처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이것은 매우 큰 문제였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이 연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총각은 그리스도인이었고 처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미모에 이끌려 석 달은 즐거울 것입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고 나면 영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는 것은 성령과 악령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상의 예화인데 기차역에서 두 남녀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연착되어 두 남녀가 오랫동안 대화를 하게 되었고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확신한 나머지 기차역에서 역장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기차가 도착했는데 남자는 상행선을 타야 했고 여자는 하행선을 타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송대관의 차표 한 장이 참 심오한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부부로 살다가 죽을 때는 차표 한 장만 받는데 남편은 천국행, 아내는 지옥행이면 어떻겠습니까? 평생 함께 살았는데 그렇게 갈라지게 되면 과연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서로 받는 차표가 각각 다른 가정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혼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혼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신자와 불신자가 있는데 불신자가 신자를 버린다면 신자는 그런 것에 구속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 불신자가 신자를 버렸을 때 신자는 그런 일로 정죄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가 신자와 살고 싶어 한다면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와 신자가 사는 경우 신자가 신자를 버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조강지처인 신자를 버리고 불신자를 외모에 이끌려 재혼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6). 조강지처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되는 궤사입니다.
Ⅱ. 두 가지 궤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행하시는 궤사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독감을 느끼셨습니다.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말 2:11).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거룩함을 욕되게 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사랑하시는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장자권을 받았는데 이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의 축복을 모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한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지만 이것을 하찮게 취급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자와 불신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구원의 축복을 하찮게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과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말 2:13). 눈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버림받은 아내들이 여호와의 단에 와서 눈물로 “아버지, 내가 버림받았으니 나를 버린 저 남편을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눈물로 기도하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내를 버린 남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여호와의 단에 와서 눈물로 “여호와여 축복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누라를 버리고 이방신의 딸을 아내로 취하여 나를 모독했으면서도 내 재단에 와서 눈물로 기도하느냐?” 아무리 울면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고 헌물을 드려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된 것입니다. 남자들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내를 학대하고 버린 뒤 이방신의 딸을 미모에 이끌려 재혼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신약성경에서도 나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사람으로 알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마누라를 학대하고 때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막히는 것입니다.
Ⅲ. 택한 백성들의 가정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두 가지
결혼을 남자와 여자만의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혼은 양자관계가 아닌 삼자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 2:14). 남편과 아내가 결혼할 때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에 결혼은 삼자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인이 되셔서 성도의 가정생활을 통해 두 가지를 원하십니다.
첫째, 결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돌보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짝입니다. 짝이라는 것은 세 가지 ‘C’가 필요합니다. Commitment(헌신), Communion(교제), Caring(돌봄)입니다. 서로 헌신하여 교제하고 돌보는 것이 Companion(짝)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가정을 위해서 밥도 정성껏 하고 집안을 편안한 곳으로 만드시고, 남편은 나가서 부지런히 일하고 집에 와서는 청소도 도와주면서 아내와 가정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해 건강한 삶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통해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결혼생활을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기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5).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여자를 천명도 더 만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와 한 사람을 주셔서 아담과 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룰 때 경건한 자손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가정을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기 원하십니다. 물론 불신자의 자손들 가운데서도 신자들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성도의 가정에서 성도가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복음을 듣고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신앙인으로 성장할 확률이 그만큼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의 가정을 통해 건강과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의 가정을 통해 경건한 자손들을 얻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결혼의 목적인 것입니다.
결론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은 불신자와 결혼을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이 불신자와 결혼한다고 말하면 절대로 양보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사람과 꼭 결혼해야겠다고 한다면 교회로 데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도록 권해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의 자녀들이 불신자와 결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이미 하신 분들은 이혼을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혼이라는 말의 ‘이’자도 꺼내지 마십시오. 참된 신앙인과 경건한 가정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언, 통변, 예언을 잘하고 은사가 많아도 가정이 건강치 않으면 그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령한 사람은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자손들을 경건한 자손으로 양육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과 건강한 가정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해지고 교회가 건강해야 우리 사회도 건강해집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언약의 백성들이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정이 행복해지고 자녀들 모두 경건하게 자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듭시다
말 2:10-16 / 이수관 목사
지난 7월 첫째주에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매주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가며 설교를 했는데 오늘 12월 말일날 말라기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에 계획을 잡기는 오늘 요한 계시록으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난번에 제가 식중독에 걸려서 한 주를 건너 뛰는 바람에 말라기에서 끝을 맺게 되어 섭섭합니다. 그런데 잘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오늘 이 구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결혼 생활에 대한 내용인데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우리가 우리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고 내가 새해에는 어떤 가정을 만들어야 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결혼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엉망이 되어가는지 우리가 잘 압니다. 이혼율은 40%를 넘은지 오래되었고, 게다가, 어떤 Survey에서 당신의 현재 결혼 생활의 만족도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미국인 가정의 87%가 그저 그렇다 또는 마지 못해 산다 라고 대답했고, 행복하다 내지는 좋다라고 대답한 가정이 13%밖에 안될 정도로 결혼 생활에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면서 가장 먼저 가정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모든 인간의 사회 구조의 기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평안하면 모든 것이 같이 평안하고 반대로 가정이 불안하면 모든 것이 같이 불안해 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라기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게 하시는 음성을 좀 듣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고 우리의 가정은 그런 하나님의 소원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 봄으로써 혹시 부족하다면 새해에는 좀 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말라기 선지자가 왜 갑자기 결혼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는지 그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말라기는 대충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가 다시 유대땅으로 돌아와서 성전도 새로 짓고 예루살렘도 재건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생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일이 잘 안풀리는 겁니다. 흉년은 계속되고 고난도 계속되고 그래서 도데체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여기로 돌아왔는데 왜 이리 일이 안풀립니까? 하고 묻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게 왜 그런지 아니? 하면서 세가지를 얘기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의 타락에 대한 문제, 즉 교회 생활의 문제이지요, 그리고 두번째는 결혼의 타락에 대한 문제, 즉 가정 생활의 문제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한가지가 유명한 십일조의 문제, 즉 물질 관리의 문제, 이렇게 세가지를 얘기하면서 바로 이 세 부분에서 너희가 타락해 있기 때문에 그런것이다라고 얘기하시는데 그 중에 두번째 2장 10절부터 16절까지 있는 결혼의 타락에 대한 문제를 살펴 보는 것입니다.
1. 결혼은 믿음의 우선 순위하에서 맺어져야 한다
10-12절을 보면 말라기는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 어떤 행동은 우리가 서로 배신하는 행위이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방 사람과의 결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특히 11절을 보면 말라기는 두 가지 행위를 지적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그것은 번역의 문제이고 사실은 '이방의 여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의 거룩성을 더럽혔다는 의미로, 말라기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결혼을 위해서는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크리스천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이 구절을 근거로 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와 오늘날의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 구절을 보면서 자동적으로 우리도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자라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하나님의 그 본뜻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될 테니까 그 본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좀 살펴 보겠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는 구약 전체에 수없이 반복되는데, 그것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이 걱정하는 문제는 이방사람들과 결혼을 할 경우 결국은 그들의 믿음을 쫓아가고 너희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때문에 하나님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경고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제 내 자녀가 되었으니 결혼을 한다하더라도 이방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을거야. 난 너희를 믿어.” 이러지 않으셨다는 얘기입니다. 언제든지 그들과 결혼하면 따라가게 되니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방 문화가 주는 매혹이 강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습게 보지 말라는 말이지요.
가장 좋은 예가 솔로몬이지요. 솔로몬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천번제를 드리고 그 많은 잠언과 전도서를 쓰면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하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이 변질 되는지 열왕기상 11:9-10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문제입니다. 휴스턴에 있을때 아무리 신앙이 좋던 사람도 이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 돌아가자 마자 도착하는 그날부터 교회를 정하고 작정을 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조금 있으면 시들해 지고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또 아무리 신앙이 좋던 자매도 신앙이 없는 집으로 시집을 가면 금방 신앙이 식어 버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그 염려는 오늘 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이 구절은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는 적용이 된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피해야 합니다. 즉, 결혼은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피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현실적인 측면에서 좀 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보기에는 적극적인 이유가 있고, 소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적극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입니다. 공동체로의 부르심, 거룩한 크리스천의 삶으로의 부르심, 그리고 사역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다시 얘기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공동체에 몸을 담고, 크리스천다운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주신 은사를 가지고 사역에 헌신하는 여러 각도에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의 결혼은 다른 어떤 것 보다도 그런 사명을 같이 수행해 나가는 동역자로서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적을 만나는 거라고 볼수가 있지요.
그에 반해서 소극적인 이유로 한가지만 예를 들면, 결혼은 그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30년동안 전혀 다른 문화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던 두 사람이 만나서 같이 사는 결혼은 그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두 강물이 만나는 것 같다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가면 어떻습니까? 엉망이지요. 수면위는 잔잔해 보일지 몰라도 밑은 엉망입니다. 흙탕물이 만들어지고, 뒤섞이고… 결혼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으로 부부싸움이 시작되고, 조금만 다른 습관이 있어도 그것으로부터 다투다가 서로 미워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비부부의 삶을 인도하면서 노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떤 다른 생각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의 충격을 상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믿음은 다른 문제도 아니고 영적인 문제인데 그것이 달라서 어떻게 두 사람이 하나 될 수가 있겠습니까? 힘들지요.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결혼은 피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미 믿지 않는 분과 사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 해야 하는 것은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상대방이 신앙을 갖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고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특별한 교제의 시간, 정말 상대방이 감동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서 눈물로 호소해 보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니까 그거야 강제로 되겠습니까만은 적어도 내가 결혼할 사람이 이토록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그럼 내가 교회를 다녀봐야겠다 여기까지는 마음을 먹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결혼전에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시작하도록은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결혼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상대방이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애원을 하는데도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사랑한다고 보기가 어렵지요. 또 예를 들어서 "6개월을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설득해 보고 그래서 변함이 없으면 하나님이 주신 짝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하고 노력했는데도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짝이 아닌 것이지요.
여러분 이 문제는 인생 전체가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쉽게 생각하고 넘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결혼 전에 설득을 못하면 결혼해서는 절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가 그래도 가장 부탁을 잘 들어주는 시기인데 그 때 안되면 힘들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동반자를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 기억하시고 혹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현명하게 대처하셔서 꼭 결혼 전에 적어도 교회로는 인도하시는 지혜로운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결혼은 언약임을 기억한다
자, 여기까지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를 지적한 말라기 선지자는 13절부터는 이스라엘 가정의 불성실한 결혼 생활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우리 가정을 향한, 그리고 우리의 결혼생활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과 의도가 어떤것인지 정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13-14절을 읽어 보면 여기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결혼이 언약이라는 개념입니다. 14절 중반에 보면 네가 성실하게 살겠다고 언약을 맺었다라고 얘기하고 주님께서 이 일에 증인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시 얘기해서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약과 언약의 차이점을 아세요? 계약은 쌍방이 책임을 다할 때만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할 테니까 너도 이만큼 해. 그리고 그것이 않되면 계약은 끝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반해 언약은 그러한 당사자간의 협약이나 계약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언약은 일단 영구적인 성격이 있고, 상대방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나의 일방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언약입니다. 창세기 9:11절에 잘 나와있는데 이 말은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깊은 의미는 다시는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고 사람을 멸하지는 않겠다는 말씀이거든요. 이 언약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 관계를 이어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상대편인 사람은 계속 내가 해야할 책임을 지키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상관없이 결국 예수님의 통한 구원의 기회를 만들어 내시지요.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상대방의 하는 것과 상관없는 나의 일방적인 성격이 강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결혼이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내가 결혼을 해 보고, 상대방이 나에게 잘하나 못하나 보고 살지 안 살지를 결정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던지 나는 당신을 지키겠다는 일종의 일방적인 언약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사람은 그런 마음에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결혼식은 바로 그런 언약식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출애굽기를 설교할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에 있었던 언약식을 설명해 드렸던 것 기억 나시지요? 3일전부터 깨끗이 씻고 자기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나아가서 하나님과 얼굴을 뵙고 서로가 언약을 맺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키겠습니다” 하고 선언을 하고,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라고 선언을 하시지요. 그렇게 선언식이 끝나고 출애굽기 24:11절을 보면 기념으로 같이 먹고 마시지요. 우리의 결혼식 장면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즉 우리의 결혼이 바로 언약식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은 결혼의 언약을 배신한 사람은 나를 배신한 것이라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결혼식은 나와 나의 배우자 사이만의 언약식이 아니고 나와 나의 배우자, 그리고 하나님 이 삼자가 맺는 언약식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결혼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결혼식이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면 신부가 드러날까?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감각적인 행복함이 있을까 거기에만 온통 관심이 있잖아요. 물론 결혼식이 예쁘고 재미있어야지요. 제가 드리는 얘기는 그것뿐만 아니라 결혼식은 내가 나의 배우자와 하나님과 맺는 언약식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혼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언약입니다. 상대방이 잘하면 나도 잘하고, 상대방이 날 불행하게 만들면 헤어져 버리는 그런 단순한 계약의 관계가 아니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중에서라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나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언약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시작하고 그렇게 해 나가는 결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결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언약의 개념을 마음깊이 새기시고 그래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이 오더라도 인내하고 해결방법을 찾는 노력을 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아름답게 지켜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동반자 개념을 개발해야 한다
두번 째 14절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동반자라는 단어입니다. 이 동반자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창세기를 좀 참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렇게 보니까 혼자 있는 남자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실 때는 흙으로 빚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흙으로 만드시지 않았어요.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셨어요. 이 말은 즉 남자와 여자는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 하나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하나이기에 그래서 24절에 부모를 떠나 하나가 되라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부를 동반자로 만드셨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마음을 다 터놓고, 서로 비밀같은 것 없이, 모든 것을 의논하고 협조하면서 완벽한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동반자의 개념은 결혼하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개념을 개발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생각이 틀린 것을 같게 맞출려고 노력해야 하고, 취미가 틀린 것을 같게 맞출려고 노력해야 하고, 습관이 틀린 것을 같게 맞출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리고 그런 생각과 성격과 취미와 습관을 맞추어 가는 노력을 통해서 그러면서 동반자 개념이 자라가는 것이 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그럽니까? 우리는 두 사람이 만나서 필이 꽂혔다는 이유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무 노력도 안하고 서로가 살던 방식과 생각을 고집하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운좋게 방식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은 그냥 그렇게 맞추어 살고, 서로 다른 사람은 고생 고생을 하다가 “우리는 잘못 만났어” 그러면서 이혼을 합니다.
왜 이혼하는 줄 압니까. 처음부터 이혼을 생각하고 결혼하는 부부는 없습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결혼을 위해서 여자를 막 따라다니다가 결혼을 딱 하고 나면 목적을 달성했다는 어떤 승리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관심을 여자에게 두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직장이나 사업이나 나의 경력을 쌓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빨리 안정을 하는 것이 여자에게 인정을 받는 길 또는 남편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깥으로만 돌아요. 그런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실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잔소리가 늘고, 잔소리 좋아하는 남자 있나요. 그러니 피하고 더 바깥으로 돌고 그러면서 실망이 쌓이고 싫어지고 그러면서 점점점 벌어져서 이혼하게 되는 거예요.
조사에 따르면 이혼의 60%는 최초 5년안에 일어 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혼하느냐 안하느냐는 100% 4-5년안에 결정이 납니다. 그것이 언제냐가 문제지. 따라서 우리는 결혼을 하면 최초 5년동안에는 동반자 개념을 개발하기 위해서 양자가 부단한 노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취미생활도 같이 하고, 교회 사역도 함께 하고, 삶공부 사이 좋게 같이 듣고, 그러다 감정이 상하면 묻어 두지 말고 왜 그랬는지를 돌아보고 상한 감정이 몇일씩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부부의 삶도 듣고, 그러다가 문제가 좀 된다 싶으면, 이렇게 보면 젊은 분들 상담을 잘하는 분들이 여기 저기 있습니다. 가서 얘기도 나누어 보고 그래야 되요. 다시 얘기하지만 처음부터 이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이혼에 까지 이르게 되는 거에요.
결혼 생활은 우리가 힘을 다해서 가꾸어 가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장사 안된다고 매일 술 마시고, 일이 생각한 것처럼 안풀린다고 술마시고 아내는 아내대로 실망이 쌓여가고 그런식으로 가면 5년뒤가 뻔히 보이는데 어쩔려고 그래요. 아이들에게 무슨 상처를 줄려고 그래요.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크리스천이니 이혼 같은 것은 안 할거야. 이런식으로 쉽게만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죽 보니까 이혼이 죄라는 이유 때문에 참고 사는 사람은 안타깝지만 없더라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결혼은 언약이다. 이것을 파기하는 것은 죄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혼을 방지하려는 실질적인 노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부인을 잃은 어떤 분이 부인이 돌아가시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부인이 생전에 난초 화분을 많이 키웠데요. 그래서 부인이 죽은 후에도 그 화분을 남편분이 보관하면서 키웠는데 아무리 물을 주고 해도 하나 하나 죽어가더래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난초 화분하나 키우는데도 오만 정성을 다 쏟아야 되더래요. 행여 물이 너무 많을까, 너무 적을까, 햇볓이 너무 셀까, 너무 약할까 그런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우리의 결혼도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키워야 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린 어떻게 해요. 스프레이로 살살 뿌려야 하는 물을 뜨거운 물을 확 갇다 붓고, 화분 채로 물에다 첨벙 빠뜨리고…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처음부터 이혼하는 사람은 없어요. 조금씩 조금씩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난초를 키우듯 사랑을 키워야 합니다. 처음 만나서 데이트 할 때 좋은 감정 그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그것은 결혼하고 1년만 지나면 금방 죽어 버리는 허무한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언약도 더해져야 하고, 신뢰도 더해져야 하고, 고통의 순간을 함께 견디는 시간도 더해져야 하고 그런 여러 가지가 더해지면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반자의 개념을 잘 개발하셔서 시간이 가면서 점점더 가까와지는 부부관계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4. 경건한 성생활이 뒷바침되어야 한다
세번 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은 경건한 성생활이 뒷바침되는 것입니다. 15절에 잘 나와있는데 오늘은 시간 관계상 다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성의 타락에 관한 문제는 조만간 기회가 오면 한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한번 읽어보면 “한 분이신…배신하지 말아라” 이 구절의 히브리 원어는 워낙 어렵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불가능하지만 대충 보면 성적인 타락은 뭔가 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성적으로 타락할 때 그것은 나를 더럽힐 뿐 만 아니라 내 아이들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라는 거에요. 무서운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적으로 깨끗한 가정을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우려야 합니다.
5. 이혼은 안된다
자 이제까지 얘기한 말라기는 16절에 결론처럼 이혼은 안된다라고 얘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맞습니다. 재혼후 이혼율이 초혼때 이혼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지요. 그리고 이혼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쏟아야 할 노력의 반만 들여도 현재의 문제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혼을 해결책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보다는 이제껏 얘기한 것처럼 옳바른 배우자를 만나고, 영적으로 깊이 준비해서 결혼하고, 배우자와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성적으로 깨끗한 가정을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그런 가정을 만드는데 힘쓰시고 혹시 조금 늦었다 싶으신 분이 있더라도 지금부터 그런 노력을 시작하셔서 아름다운 가정을 만드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가정 만들기
말 2:10-16 / 이삼규 목사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려고 한 미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찾으려고 아침에 일찍이 집을 떠났습니다. 맨 처음으로 만난 이는 목사였는데 그에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는 서슴지 않고 "신앙이 제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어느 예배당으로 가십시오. 그리하여 믿음을 통하여 용서함과 희망을 발견한 그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것이 신앙인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화가는 다음 주일날 몇 교회를 찾아가 그들의 얼굴에서 신실함과 신앙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훌륭한 집 문 앞에서 있는 신혼부부를 보았습니다. 화가의 물음에 신부는 얼굴을 붉히며 "그거야 사랑이 제일 아름다운 것이지요"했습니다. 화가는 즉시 캔버스를 내려놓고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그 얼굴에 빛나는 사랑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마음이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피곤한 군인을 만났습니다. 군인은 화가의 물음에 지체하지 않고 "평화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전쟁은 고약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화가는 일찍이 맹렬한 싸움이 있었던 전장이 황금같이 익은 곡식으로 덮이고 농부들이 노래를 부르며 추수하는 장면을 기억했습니다. 그가 이러한 아름다운 장면을 그렸을 때 분명히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미를 그곳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실망한 화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어린 자식들이 그를 보고 달려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반겨 주었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 설 때 그의 아내는 따뜻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들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밖에서 무사히 돌아온 아버지를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얼굴에서 빛나는 사랑과 신앙과 평화를 볼 때 그는 확실히 지금까지 그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가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가정이야말로 축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타락과 불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사가 남긴 교훈 가운데 하나가 도덕불감증과 가정의 파괴였습니다. 로마 가정들의 붕괴와 함께 역사가 무너져 가는 그 마지막 황혼을 지켜보면서 한 철학자는 『애국자여 가정을 지키시오!』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이여, 기도하는 가정을 로마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가정이 타락하여 가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끊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정을 보신다면 기뻐하실 까요? 슬퍼하실 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가정이라고 자부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작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정의 회복이야말로 우리의 축복을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1.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혼을 해야 합니다(10-12절).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출발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출발은 결국 잘못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중대사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순간의 불장난으로 평생을 눈물을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어떤 여자와 결혼해야 할 것인가를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방신을 믿는 여자들과 통혼을 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70년이나 하고 이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연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양식도 특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와 같은 생활방식에 젖어 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방신을 믿는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하는 것은 결국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죄를 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10절에서 이렇게 책망합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거룩한 자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열조의 언약"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들은 구별된 삶을 살기로 약속한 언약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특별히 구별된 백성'이라 부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궤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궤사를 행하였다는 말은 배신과 반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배신하고 하나님께 반역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증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같은 원리를 적용하여 편지하였습니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에서는 이방여인과 결혼을 금하였고 신약에서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을 금하였는데 그 중요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잡혼은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던 위대한 왕 솔로몬이 왜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그때 당시 솔로몬은 많은 이방 나라 공주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방 나라 공주들이 솔로몬에게 시집을 오면서 각각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가지고 왔고 결국에는 솔로몬의 마음을 돌려놓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교육시키는데 30년이 걸리지만 아내는 3년 안에 남편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맞는 말이 아닙니까? 여자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있습니까? 그러기에 여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말 2: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깨는 자와 응답하는 자'는 여러 가지로 번역도 하고 해석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야곱의 장막과 연결시켜서 양떼를 지키는 자들이 교대로 자는 자들을 깨워서 대답케 하는 당시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우는 자도 없고 깨는 자도 없으리만큼 그들을 진멸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달리 볼 수도 있는데 장막에서 살고 있는 가정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요즘 방학이 되어서 아침마다 엄마들이 아이들 깨우기가 힘이 드시죠? 그것이 사람 사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깨워주는 사람이 있고 깨울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깨울 사람도 없고 깨워주는 사람도 없는 가정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삭막합니까? 그것이 파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심지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느헤미야에 보면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느 13: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느 13:24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느 13:25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느 13:26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느 13:27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느 13: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그렇다고 성도와 불신자와의 결혼 자체가 무조건 하나님 보시기에 죄라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가 깊은 사랑과 이해심으로 맺어져 함께 하나님을 믿겠다고 서약하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고전 7: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고전 7: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고전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상대방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미모나 재산, 학벌 등과 같은 외적인 조건에 끌려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 그렇지 못한 가정이 있다할지라도 가정을 복음화 하여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3-16절).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라는 말은 직역하면 "또 너희가 두 번째로 이런 일도 행하나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두 번째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두 번째 잘못이 무엇입니까? 조강지처를 버림으로 그들의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취한 아내(조강지처)가 남편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의 제단에 나와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제단을 가득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고서도 제단에 나와서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물을 열납 하시겠습니까?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결혼할 때 어떤 서약을 합니까? "괴로우나 즐거우나 어떤 경우라도 아내(남편)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부부로서의 일정한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겠습니다"라고 서약합니다. 결혼할 때 몇 달만 살고 끝장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지난번에 어떤 결혼식에 갔는데 선물로 커다란 대파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까지 달렸는데 파뿌리는 정말 하얀 색깔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결혼할 때 그런 마음으로 결혼서약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조강지처를 학대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거절하실 때 "어찌하여 받지 아니하십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거절하셨을까요? 아내에게 궤사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제도입니다. 결혼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서약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
창 31:50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 하였더라
오늘 본문에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이라"고 하심도 바로 그 같은 말씀입니다.
잠 2:17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혼의 언약을 저버리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혼이 크게 늘면서 이에 따른 가정해체가 사회문제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12만쌍, 하루평균 329쌍이 이혼했습니다. 이는 99년에 비해 1.7% 늘어난 것으로 혼인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70년에 비해서는 무려 10배에 이릅니다. 결혼은 모두 33만4000쌍, 하루 평균 915쌍이었습니다. 3쌍이 결혼하고 1쌍이 이혼한 셈입니다. 인구 1000명당 이혼건수는 2.5쌍으로 일본(2.0) 독일(2.3) 캐나다(2.4) 스위스(2.3) 등 선진국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뜨고, 결혼한 뒤에는 한 눈을 감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대한 신중하게 결정할 게 결혼이지만 일단 검은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기로 작정했다면 가급적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면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이게 어디 쉽습니까? 멀었던 두 눈도 결혼하고 나면 번쩍 떠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영국 작가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서로의 오해에 바탕을 둔 것이 결혼" 이라 했고, 독일 시인 하이네는 결혼을 '어떤 나침반도 항로를 발견하지 못한 거친 바다' 에 비유했습니다.
최다 결혼기록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미국인 글린 스코티 울프는 '결혼서약' 을 평생 취미로 삼은 인물입니다. 결혼할 때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를 맹세했지만 사소한 일에도 눈을 부라렸습니다.
부인이 침대에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은 것이 발단이 돼 이혼하기도 했고, 부인이 남편 칫솔을 쓴 것이 화근이 돼 이혼한 일도 있습니다. 88세가 되던 1997년 의지가지 없는 신세로 양로원에서 숨질 때까지 그는 29번 결혼하고 28번 이혼했습니다. 그를 23번째 남편으로 받아들였던 마지막 아내 역시 여성부문 최다 결혼기록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습니다. 이혼도 처음 한번이 어렵지, 다음부터는 별게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혼의 후유증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주디스 월러슈타인 박사에 따르면 둘 다 초혼인 경우 이혼율은 40%지만, 재혼이면 60%, 세 번째 결혼에서는 75%로 높아진다고 한다.
성경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마 5:3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내를 학대하며 버리는 남편들의 행동을 미워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서 여자가 나게 하셨습니다. 둘을 하나 되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을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을 통해서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 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말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 말씀은 16절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어떤 뜻이 됩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을 아름답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눈물이 있고, 탄식이 있고, 울음이 있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아내를 배신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을 최고의 낙원으로 가꾸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최고의 낙원으로 가꾸는 비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이해합니다. 용서합니다. 모든 것을 참습니다. 성내지 않습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복하십시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순(矛盾) 관계의 불행
말라기 2:17 / 석원태 목사
여명을 기다리는 영적 암흑 시대에 태어난 구약 말기의 선지자 중에 말라기가 있습니다. 영적, 종교적 암흑은 언제나 정치적 불안이나 시대의 변동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부푼 꿈을 안고 포로지에서 귀환하였습니다. 저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들은 장차 큰 영광이 임하리라고 하던(학 2:6-7) 선지자들의 예언에 큰 감동을 받고 무너진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재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 임하리라 하던 황금시대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약속과는 정 반대로 오히려 하루 하루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기근과 흉작이 계속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저들의 심령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성전 재건 이후에 저들에게 일어나는 방심과 영적 타락의 처참한 상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모순의 논리와 의식 속에서 자가당착에 깊이 빠지고 있었습니다. ‘모순(矛盾)’이란 ‘앞과 뒤가 맞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들은 모순논리, 모순감정, 모순원리, 모순개념 속에 깊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불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신앙적 모순논리와 행동은 사실상 저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깊은 불신앙에서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입니다.
말라기 1장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타난 사랑은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bh'a')을 가리킵니다. 무궁한 사랑(렘 31:3), 언약적 사랑(신 4:37, 7:7, 8, 10:15)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도전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적 배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의 마음은 공허상태에 빠지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모순 천만의 도전입니다.
Ⅱ. 주의 이름(聖號) 곧 예배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입니다.
말라기 1장 6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을 멸시한 그 구체적인 내용과 증거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멸시함에서 나타났습니다.
말라기 1장 7절에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답하시기를 너희가 드리는 제물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말 1:8). 이것은 주의 상을 멸시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말 1:7). 이것은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말 1:10).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말 1:10).
이는 지도급에 있는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종교적 배신과 배은, 배약의 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멸시하는 죄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들에게 약속된 축복들을 저주로 바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말 2:1-2).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순의식, 모순논리, 모순감정, 모순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이었습니다.
Ⅲ. 가정 도덕의 타락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입니다.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가정타락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류의 한 아버지였다고 하였습니다(말 2:10). 오직 하나를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말 2:15).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①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말 2:11). ② 어려서 취한 짝인 아내를 저버리고 그에게 궤사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말 2:14). ③ 이혼하고 학대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말 2:16). ④ 그 결과 이스라엘의 가정의 눈물과 울음과 탄식들이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이르기를 「어찜이니이까」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말 2:14). 말라기 2장 17절에 보면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한 것이 무엇인가?
말라기 2장 17절에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불신앙의 언사요 도전입니다. 이러한 저들 가정의 타락은 오히려 여호와의 눈에 선하고 그에게 기쁨이 된다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17절 하반절에서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도전입니다. 모순천만의 불신앙적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학대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찜이니이까」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순 천지의 암흑가였습니다.
Ⅳ. 경제적 생활의 빈곤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깊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적, 가정적 경제 도탄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 곧 국가적으로도 경제적 도탄에 빠져있다고 하였습니다(말 3:9). 그 명백한 이유를 말라기 3장 8절에 밝히기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경제적 도탄의 저주는 그들이 하나님의 것, 십일조를 도적질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말 3:10).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도적질 한 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였습니다(말 3:8). 말라기 3장 13절에는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말 3:13).
참으로 대단한 담력이 아닌가?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심성이 저렇게도 불신앙으로 담대해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소행을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한다」라고 하였습니다(말 3:13). ‘완악한 말’이란 담대하고 뻔뻔스러운 마음과 말과 행동까지를 포함합니다.
그 완악한 말이 무엇인가?
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것이다, 곧 십일조와 헌물로 하나님을 섬김이 헛되다고 한 말입니다(말 3:14). ② 하나님의 십일조 명령을 지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한 말입니다(말 3:14). ③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에 유익이 없다고 한 말입니다(말 3:14). ④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 말입니다(말 3:15). 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한다고 한 말입니다(말 3:15). ⑥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하게 된다고 한 말입니다(말 3:15). 정말 무서운 모순논리의 큰 산맥입니다. 모순감정의 바다입니다. 모순행동의 광야입니다. 불신앙과 불법, 배신과 배약, 불순종과 배은이 극치를 이루고 있는 모순의 정글(jungle)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물질적 축복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명령이요 계명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 축복의 법칙을 우리에게 알려오고 있습니다(창 14:20, 28:22, 레 27:30, 민 18:24, 신 14:28-29, 마 23:23). 십일조는 ① 물질의 창조주, 소유주에 대한 우리 신앙고백의 표현입니다. ②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받아 관리하는 영예로운 청지기적 사명입니다. ③ 그것은 땅에서 물질적으로 부유하며 잘 되는 축복의 방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예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말 3:8), 바친다고 해도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였습니다(말 3:10). 이것이 개인 가정을 위시해서 전 국가적으로 팽배해져버린 버릇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말 3:9).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물질적 도적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말 3:8). 그 결과 저주를 받아 궁핍하다고 하였습니다(말 3:9).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선언에 이스라엘은 완악한 말로 하나님께 항변하고 도전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모순의 주인이다.’라고 파스칼은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그가 원하는 바를 거부한다. 그는 다시 그가 포기한 바를 원한다. 그는 항상 부동(浮動)하며, 그의 인생은 끊어지지 않는 모순이다.’라고 호라티우스는 말하였습니다. 앞과 뒤가 맞지 않는 것이 모순이라면 그것은 무질서가 아닌가?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인격의 혼란이 아닌가?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질서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조화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일치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모순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확실히 모순논리와 모순개념과 모순감정과 모순행동은 사탄적 산물입니다. 저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의 계명을 명하였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창 2:16-17).
그러나 사탄은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창 3:4). 그것을 먹는 날에는 오히려 사람의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창 3:5). 하와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하는 사탄의 회의적 모순논리에 휘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와는 ‘임의로 먹을 수 있다’는 인간 자율성의 축복을 도적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지지도 말라’는 거짓말을 부과시켰습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성을 ‘죽을까 하노라’라는 말로 삭감하고 말았습니다(창 2:16-17, 3:1-3). 그 다음에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말과 행동이 다른 모순논리의 핑계행각을 벌이고 말았습니다(창 3:8-13). 인간은 정말 길고도 먼 모순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 속에 인간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작고 큰 일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나 바른 분별력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결과 온갖 불신앙과 불법과 사욕의 지배를 받게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역사의 비극을 만들어내고 마는 화근이 된 것입니다. 모순관계, 모순시대와 만나는 개인의 불행, 가정의 불행, 나라의 불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모순시대의 불행 속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고 일어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의 예배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 가정 도덕 타락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 경제적 빈곤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순을 지적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하면서 완악한 말로 하나님께 도전하였습니다(말 3:7).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모순의 도전이었습니다.
혹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중에 이런 모순 천만의 삶을 사는 자가 없습니까?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삶,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깨어지고 찢어져버린 삶은 없습니까?
30배, 60배, 100배가 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구속적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였습니까?”라고 하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제물)를 더럽혀 놓고도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하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인 가정 질서를 파괴해 놓고도 완악한 말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나이까?” 하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십일조를 도적질하고도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는 사람 말입니다. 모순 관계의 생각은 육입니다. 모순개념과 모순논리와 모순행동과 모순감정은 육으로 난 육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것은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된 약속은 마음과 입(말)과 행동이 언제나 일치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결국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결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마 7:16-19). 그러므로 주님은 그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하였습니다(마 7:20).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