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3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성전을 건물 성전으로만 오해했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지극히 구약적 사고였는데 그것이 당연한 듯 했으니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성전은 다름 아니라 내가 바로 성전이라고 천명하셨사오니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나의 몸을 성전으로 여기며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온전히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고전 6:19-20).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새롭게 주신 이 하루를 새 사람으로 살기 원하오니 아담에 속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하여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26:1-12
제목 : 영생의 소망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회복이다.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상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나의 묵상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으로 하여금 바울을 심문하게 한다.
그 이유는 바울을 가이사에게 보내는데 있서 죄목을 정하기 위함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변론하기를 허락하자, 바울은 손을 들어 연설의 자세를 취한 후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대인이 고발한 문제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모든 관습과 문제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본문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서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헬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였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참수하였다.
헤롯 안티파스의 아들 아그립바 1세는 사도 야고보를 참수하였고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지금 바울을 심문하는 아그립바 왕이다.
아그립바의 가문은 유대인과 친분이 있었지만 대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사적인 원한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고 그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바울의 일생을 다 알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동족들 가운데서와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바울이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
그가 지금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읮 ㅗ상들에게 약속하신 소망을 인함이다.
이것은 그들의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약속이다.
바울은 이 소망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하는 것이다.
그 소망은 곧 죽은 자의 부활이며, 바로 그들이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다.
바울 자신도 한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 일이었고, 대제사장에게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가두고 그들이 죽임당하는 일에 찬성했던 자였다.
여러 회당에 다니면서 그들을 처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저주하도록 시키기도 하였다.
그가 다메섹으로 간 것도 대제사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성도들을 박해하러 가는 중이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비롯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소망하던 약속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성취되는 것이었다.
(창 12:3b)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들들이 되는 것 곧 영생을 얻는 복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갈 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소망하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담 안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하고 아들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며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복이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약속은 다름 아니라 ‘영생의 소망’이다.
이 영생의 소망은 창세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바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여기서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나,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으로 이루어지는 실재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전 아들이 아버지 안에서 가졌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며 영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바울은 조상들과 같이 영생의 약속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영생을 주시는 이가 나사렛 예수인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그저 나사렛 예수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로서 율법에서 말하는 그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 엄격한 바울은 하나님이 저주한 자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무차별 박해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요 16:2-3)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런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시고 복음을 계시하셨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리스도는 율법대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다.
하지만 이는 자기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을 바울이 알게 된 것이다.
복음은 바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복음을 박해하던 자가 복음으로 박해받는 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창세전부터 약속하신 영생의 소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생의 소망이 성취되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었다.
다만 기회가 닿는 대로 영생의 증인이 될 뿐이다.
나는 구약 시대를 살아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구약의 율법이 내 삶을 지배하는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마나 많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규범들을 율법으로 여기며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하여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 규범들을 정말 잘 지켰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다 죄일 뿐이었다.
심지어 성경의 규범을 잘 지키면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본성이 내 안에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순간순간 아담 안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이름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나의 의를 드러내는 자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하지만 나를 창세전에 택하여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소망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믿는다.
어제는 회사 경건회에서 ‘구원열차’를 불렀다.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없어요.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우리의 구원은 나의 행위로 인하여 기각되거나 변개되지 않음을 역설하였다.
무엇보다 한 번 탄 구원열차는 내가 내리고 싶다고 해도 내릴 수 없음을 그 찬송의 가사에서 분명히 한다.
‘죄악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나의 객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며 신실하심이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나를 두른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생의 소망을 알고 깨달은 바울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따위로 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당하게 사망을 꾸짖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 또한 죽음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하던 자였습니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기에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사망을 향하여 호령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숨지 말고 문 열어!” 하고 말입니다.
객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객기가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믿는 믿음의 호통입니다.
땅의 것에 치심하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온전히 하늘을 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