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향 (歸 鄕 )---마지막편
경기도에서 교사발령이 나지 않아 , 중등교사 자격검정고시, 법원직, 검찰
사무직등 수 없이 공직에 도전하였으나 서울시 공무원으로 정착을 하게 되었으며
워낙 박봉의 월급에 살수가 없어 3번의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어 30여년의
공직을 무사하게 마칠수가 있었다.
서울시 공직이라야 영등포구 시흥2동의 수재민촌을 시작하여 노원구의 생활이 어려운
동네에서 어려운 이웃들과 삶의 애환을 주로 하여으며,그분들의 삶을 보살피는 쪽으로
나의 공직의 방향을 잡아서 주로 근무를 하여서 '자랑스러운 공무원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특히 1977년 안양천변의 집중호우로 시흥2동 수재민촌의 집들이 붕괴되어 사망자의
시체를 들것으로 날어 그때당시 옥성운수로 날려 가면서 수해복구를 위하여
땀을 흘렸던 추억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으며
도봉산의 기암괴석이 수려하고 사위(四圍)가 산세가 좋은 수락산과 불암산이
자리한 노원구에서 정년퇴임을 하였으나, 근무하면서 중계동의 장애인들이 삶 ,
상계동의 철도마을 ,노원마을의 가난한 시민들과 항상 삶의 애환을 함께 하면서
독거 노인들의 '상주없는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던 기억이 새삼 나의 공직을 보람차게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퇴임과 동시에 아내의 유방암으로 발병이 항상 공직의 박봉에 시달리면서 자녀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하다가 고생만하다가 아무 보상도 없이 2007년 저 세상으로
보내는 가슴 아픈 사연을 겪게 되었다.
정년 퇴직 후에는 젊었을 때 확보했던‘초등학교교사 자격’으로 전라남도를 시작으로
경기도 의정부에서 남은 제2의 인생을 보내게 되었으며, 초등학교의 교정에서 그낭에
쌓은 경험을 교육의 현장에서 정열을 쏫았다.
고향의 전남 곡성의 '고달초등학교'에서,강진의 '계산초등학교'에서 경기도 의정부의
의순초등학교, 효자초등하교 등등에서 그안에 못다한 나의 삶의 정열을 불태우며
2세교육에 조그마한 힘을 보태기 위하여 열심히 근무를 하였다.
그동안에 먹고 살기위해서직장에 충실했다면, 정년퇴직 후에는 무한히 많은 시간을
도서관과 학교를 오고가며 , 한자 1급을 확보하여 교육학, 고전문학, 역사 공부를 하였으며,
특히 한시 시조 가사등 국어국문학을 공부하여 노후의 삶에 내 나름대로 학문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움을 느끼고있으며,
특히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의
졸업을 앞두고 졸업논문도 통과하여 고희가 넘은 만학도의 면모로 나의 삶을 대변하고
싶으며, 돈이 없어 대학원을 남 같이 못갔으나, 통신대학교에서 '법학과'행정학과' 교육학과
노후에는 '국어국문학과'에 학문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2014년 10월달에 전남 화순에 정착하여 자녀들이 옆에 있는 고향에서
집안에 조그만한 서재에 내가 보고싶은 책들과 특히 고향의 향토문학지를 수시로
모아둬서 나의 생활의 반려자가 되고 있다.
부모님의 숨결을 느낄수 있으며, 고향의 친구들이 주위에 있어 친구의 우정을
쌓으면서 어렷을적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
서울시 문학회, 화순문학회, 나주향토문화 연구회등 향토문학과 선대의 훌륭한 문화
유적과 정신의 세계를 더듬으면서 지역신문에 기고도 하면서 고향의 지역사회에서
문화창달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져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저의 12대조 시서김선께서는 조선의 중기때 시인이시고 대학자이신 조상의
정신을 이어받어 '유고집'의 번역사업과 유적관리에 힘을 쏫고 있으며 '목포대학교
중어 중문학과 정일교수님과 전남대학교 고문번역반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산 친구와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중학교 '무정' 교수들과 고향의 향토문화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코져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동안에 나의 삶을 재 조명해 보면서
살아온 삶이 하두 한(恨)의 연속이기에 내마음에서 내 품어보고 싶은 심정에서 어줍잔은
삶의 이야기를 제시하여 보았습니다. 어떤 화려한 깃발이나 나팔을 불고 내놓을수 있는
삶은 못되지만, 어느 삶이나 어려움이 없는 삶이 어디있겠습니까?
부족한 글이고 보잘것 없는 삶이지만 ,그 동안 잘 읽어보시고 댓글로 참여하여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림니다.감사합니다 ---- 전남 화순에서 만장봉 인사드림
나의 삶을 위로하여주고 ,항상 지근에서 바라볼수 있었던 도봉산
첫댓글 그동안 간간이 들려 주시던 삶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간추려 주셨네요.
우리 나이때의 삶이 모두 그렇게 힘들고 고 달펐지만.
그 힘든 세월을 이기고 여기까지 와서
지금은 그 시절을 옛이야기로 하며 살고 있지요.
그래도 왜 그 고생하던 그시절이 그리울가요?
인구도 훨신 적었고, 이런 인터넷도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순했으며
사람과 사람들의 사이는 정겨웠다고 생각해봅니다.
간추린 망장봉님의 일생 잘 보았읍니다. ^*^
왜!
그 어려웄던 추억은 영원히 잊을수가 없는지?
어즙잔은 삶의 이야기이지만 ,
옛날의 추억을 자주 캐고 싶은지?
은숙 방장님 ..........
감사합니다
같은 시대에 돌이켜보면. 본인의. 향학열 의지가 약한. 친구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지요
만장봉님은. 본인의 강인한. 투지로
멋진인생을. 잘사셨는데 불행한 아내와의. 이별만 늦쳐졌으면 바랄것이. 없는데. 늘 애잔하거
생각이 듭니다.
영화로운 과거사보다는. 현실을
잘 타협하여 즐거읍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낭주 방장님하고는
동 시대를 살아온 시대....
살아가는 방법이라고는 공부를 하는 방법뿐이 없으니
위로와 격려 감사합니다.
이제는 그냥 그런데로 잘지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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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잘살아왔다기 보다
가난과 어려운 삶의 현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번 풀어 보았습니다
노원구에서 항상 '수락산, 도봉산, 불암산을 이웃하면서 살아왔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어줍잔은 삶의 이야기.........
삶이 청빈한건지? 능력이 없는건지?
항상 가난하고 싸워 왔으니........
이제는 가난은 실어짐니다. 감사합니다
참 성실히 열심히 쉼없는
아름다운 삶이네요
늘 그리 살고팠다고
갈증만 내고는
닥친 현실에만 허덕대고 살았습니다
잠깐 잡았던 교편의 평생 미련이
장농 속 숨막히게 밀쳐 둔
국어2급정교사 자격증.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내 꿈이 저 색바랜 종이 한 장으로만 남아있네요
어떤 핑계도 변명도 없을
열심히 살지 않았을 뿐이란 걸.
가난과 청빈의 연속이었으니
갖은 유혹도 있었지만, 다 물리치고 성실히
살았다고 보아짐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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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청빈이 나의 모습이었는지?
공직에서 유혹도 가끔은 있었지만 , 다
뿌리치고 근검 절약하게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굶어죽지는 않고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고 사는지 ?
집안에 돈보다는 책으로 채웠으니.......
감사합니다
성공한 삶이라고 하실만 하지요
그 만 못한 인생이 더 많은 시대에서
노력해도 안되고 아직도 첩첩 산중인 노년이
부지기수 인 이 시대에 ..
이젠 건강하시고 좋은 글
늘 기다립니다 ..
감사합니다
운선님..........
성공이라고 보다.가난과 싸워오다보니
자꾸 지나간 세월을 조명하게 되군요.감사합니다
과연 만장봉 이십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