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A4지 9장이고, 이거 말고도 앞뒤 복사로 된 표와 통계 자료 등이 2장 더 있어요.
원래는 그냥 단순 서술과 설명 보고서로 하라 했는데
주문이 좀 일본의 근대화를 비판적으로 쓰라 해서 신경써서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쪽 방면 분들이신 여러분 정도면 아시겠지만,
부제들. 예를 들어 ㄷ. 군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우리는 무적의 황군이다. 의 "우리는 무적의 황군이다"
를 잘 보시면 분명이 뭔가 크게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오.
기본적으로 이 부제에는 엄청난 양의 개그와 패러디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발표할 때 아무도 모르더군요. 역시 내공이 없는 범인들에게는 무리인가 봅니다.
한번 하나하나 다 찾아봐서 다 맞추는 것도 한번 재미삼아 좋겠지요.
그럼 시작합니다.
들어가며
일본은 1853년 페리 함대의 흑선내항(黑船內港)(각주 1. 앞으로는 주1로 표기), 1854년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주2)으로 문호를 연 이래 3차례의 내전과 2차례의 외국과의 충돌(주3)을 치르고 마침내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 국가를 성립한다. 여기서는, 이 메이지 유신 정부의 주요 성격을 살펴보고 과연 그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메이지 정부의 주요 성격
1. 천황제 이데올로기-시계바늘을 왼쪽으로 돌리다.
ㄱ. 신도에서 국학으로, 국학에서 유신으로-일본은 신국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은 주로 서남부의 웅번(雄藩) 출신이며, 하급무사 출신이고, 또 주로 국학의 수업을 받거나, 아니면 최소한 막부 타도와 막말의 여러 혼란의 타결책의 논리로 국학을 많이 인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국학은 외래 사상을 일체 배격하고 순수한 신도만을 내세우는 학문 사조이다. 이는 원래 막부가 조정의 권위를 빌리면서도 조정을 통제하기위해 사상적 근거로 주자의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론(尊王論)(주4)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허나 오히려 막부 비판의 근거가 되어 천황 중심의 신도를 내세워 천황을 받들고 패자(覇者), 즉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소위 존왕척패(尊王斥覇) 사상으로 발전된다.(주5) 또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의하면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命神)은 “우주 사이에서 견줄바 없는” 존재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나 유교의 천명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가 태어난 일본은 “만국의 원본대종(元本大宗)이 되는 나라”이고, 그 후손인 천황의 “대군주”로서의 지위는 불변이며,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고한 천양무궁(天壤無窮)한 신칙(神勅)이야 말로 “도의 근본 대본(大本)”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국학과 신도의 복고주의의 형태를 취하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혁신적인 주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에서 뒷받침된 국학의 존왕론과 국체론(國體論)을 기본 사상으로 해서 메이지 일본은 탄생하였다.
1 매튜 칼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 동인도함대 사령관이 1853년 7월 8일 4척의 함대를 이끌고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나타나 당시 미국 대통령인 필모어의 국서를 전달하며 개국을 요구한 일을 말한다. 흑선이란 그 함선이 검은색의 증기 외륜선인 것을 당시 사람들이 부른 명칭이다.(실상 페리 함대의 저 4척이 동인도함대의 전부였으며, 4척 중 2척은 단순 범선이었다)
2 1854년 1월 페리 제독이 다시 7척의 함대를 이끌고 에도(江戶)만에 내항하여 국서의 회답을 요구하자 막부는 요구를 받아들여 그해 3월 맺은 조약. 일본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며 주요 골자는 시모다(下田), 하코다테(箱館)의 개항, 식료와 연료의 보급, 표류민의 구조, 최혜국 대우, 영사의 주재 등이다. 일명 카나가와(神奈川)조약이라고도 한다.
3 3차례 내전으로는 제 1차, 2차 쵸슈(長州)정벌, 무진전쟁(戊辰戰爭)이 있으며, 2차례 외국과의 충돌은 사쓰에이(薩英)전쟁, 4국함대의 시모노세키(下關) 포격 사건이다.
4 한편 막부 말기 미토(水戶) 번에서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국학과 신도를 융합하여 조정을 받들어 막부의 권위를 지키자는 미토학이라는 학풍이 일어난다. 한때 막말의 도막(倒幕)운동의 중심지가 미토 번이었고, 에도 막부 15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미토 번 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다. 한편 또 다른 조정과 막부의 공존책으로는 공무합체(公武合體)론이 있는데, 이를 주장한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쓰마 번이다.
5 여기에 당시 외세와의 접촉을 통해 외국을 배격하는 양이(攘夷)론이 결합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으로 발전한다.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근대문명 흡수에 주력하는 한편 왕정복고를 추진하여 이른바 진무의 창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정일치적인 고대로의 회귀를 표방했다. 이는 만세일계의 초대 진무 천황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건국 정신으로 돌아가 온 국민이 일체가 되어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하자는 뜻이다.
1869년 7월, 무진전쟁(戊辰戰爭)이 끝나자 메이지 정부는 정부기구를 개혁하여 “천황이 직접 정치하던 시대”와 같은 2관6성제(2官6省制)(주6)를 확립하였다. 이는 신기관(神祇官)(주7), 태정관(太政官)의 2관과 민부성(民部省), 병부성(兵部省), 외무성(外務省), 궁내성(宮內省), 형부성(刑部省)의 6성으로 구성된 형태로. 특히 정무결정기관인 태정관과 함께 고대 율령제 하에서 신도행정을 관장하던 신기관도 함께 부활시켰으며, 1868년에는 이전까지 오랜기간 습합해 있던 신도와 불교를 분리하는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을 포고한다.(주8) 이어서 신도에 의한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하고 1871년 전국의 모든 신사를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정점으로 하여 관사(官社)와 제사(諸社)로 나누는 신사제도를 확립해 신도의 국교화, 즉 국가 신도를 실시하여 전통적 종교체제를 부정하고 종교와 사상을 통제하였다.(주9) 즉, 메이지 정부는 서세동점에 대한 위기감으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던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신도신화에 바탕을 둔 복고적인 정책으로 일본인의 정신적 정체성을 확립하려하였다.
6 이는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廢藩置縣) 직후 태정관 밑에 정원(正院), 좌원(左院), 우원(右院)을 두고 그 밑에 8성을 두는 3원8성제로 개혁하였다. 황인영, 『日本史 여행』, 일본문화연구센터, 1995, p167 주요 관직 보직표 참조.
7 이는 신도로 그리스도교의 유입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1868년 5방 게시에서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을 계승한다 하였고, 1869년부터는 나가사키의 그리스도교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압력과 정교분리를 요구하는 불교 측의 저항으로 인해 신기관이 1871년 신기성(神祺省)으로 격화되고, 1873년에는 그리스도교를 금지한다는 게시판(高札)도 철거되었으며, 그리고 교부성(敎部省)으로 격화되었다가 1887년 내무성에 병합되었다.
8 이제까지 사원이나 승려들이 막부나 번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기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들이 극단화 되어 사원, 불상, 불경 등을 훼손하는 파괴적인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발전, 전국적으로 번지기도 했다. 심지어, 나라(奈良)의 홍복사(弘福寺) 오중탑(五重塔)은 단돈 50원에도 원매자가 없었다고 한다.
9 이는 2차대전 후 미군정이 ‘국가신도,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 지원, 보전, 감독 및 홍보의 폐지에 관한 건’(일명 신도지령)을 일본 정부에 통고함으로써 신도는 국가와 분리, 국가 신도체제는 막을 내리고 1945년 종교법인령으로 신도는 종교로서 재출발하게 되어 신사본청(神社本廳)이라는 총괄적인 종교 법인이 조직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래서 현재 일본의 절, 교회, 신사 등의 종교시설은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절이나 신사 부지에 유치원을 짓던, 묘지를 짓던, 주차장을 짓던, 빌딩을 올리던 세금을 안 낸다는 뜻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존왕 제번의 연합 병력으로 메이지 유신을 이룩한 이후, 1871년 2월 사쓰마, 쵸슈, 토사(土佐) 번의 병사로 편성된 최초의 정규군인 친위대인 어친병(御親兵)이 조직된다. 이는 말 그대로 천황의 호위병이었고, 또한 1871년 7월 14일 이들의 무력을 배경으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한다(주10). 번의 폐지와 현의 설치, 번의 무사 상비군의 폐지, 무력의 중앙집중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한편 해체된 각 번의 부대는 1871년 4월 2개 진대(鎭臺), 8월에는 4개 진대를 설치하여 각 현에 1개 소대씩 배치시켜 전국의 요지를 정부 군대의 감시와 통제 범위 하에 두려 하였다.(주11)
한편 1873년 징병제가 실시되었다.(주12) 하지만 이는 본격적인 국민개병제는 아니었다. 이상으로 그 방향을 제시하긴 했으나 종래의 번군을 중앙정부의 용병으로 하고, 절대주의적 용병을 건설하면서 전국적 징병에 근접하려는 것이었다. 이 징병령의 특징은 면역자가 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다.(주13) 이 면역 개요를 살펴보면 호주, 호주가 될 자나 대신하는 자, 지조 부담자 외의 대상자를 징집하는 부역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즉, 국민개병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또 다른 봉건적 부역인 것이다.(주14) 이 징병제에 반대하는 사족과 농민의 불만도 많았다. 혈세봉기(血稅蜂起)라는 이 징병령 반대 봉기는 73, 74년에는 많았지만, 막상 시작된 75, 76년에는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는 실제로는 그렇게 잘 실시되지 않은 것을 뜻한다. 이 징병제의 모순은 여기에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대중군대는 아직 멀었던 것이다.
1877년 서남전쟁이 발발하였다. 주전장이 된 초기 구마모토(熊本) 진대의 징병 비율은 약 2/3가량이었다. 처음에는 이들 징병이 주력이 된 정부군이 사쓰마의 무사 부대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주15) 하지만 사쓰마군을 격파하고 진압하는데는 성공한다. 이 전쟁은 징병제의 의미를 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되었는데, 징집되면 목숨을 걸 상황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되어 기피현상은 더더욱 심해졌다.(주16) 더구나 복무의 구분은 상비군 3년, 그 이후 제1후비군 2년, 제2후비군 2년으로 구성되고, 그 이후는 국민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실제로는 적격자 중 제비를 뽑아 상비군에 편입된 자만이 병역을 부담하였다.(주17)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식 군제(주18)로 건설하고 있었다. 허나 지주를 기초로 하고, 부역적인 징병으로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천황제 군대가 소농민을 기초로 하고 혁명의 경험과 국민군의 전통을 가진 프랑스식 군제에 준하는 것은 큰 모순이었다. 이에 프러시아제(주19)와의 절충인 3년 현역의 상비군 제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80년부터 서서히 프러시아식 군제로 전환해 가고 있었다. 이 전환이 용이하게 결정된 근거 중 하나는 천황제 정부가 서남전쟁 이후 자유민권운동과 대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반동적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프러시아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1885년 3월 육군성은 프러시아 육군소령 멕케르를 초빙하였다. 그는 육군대학교 초빙 교관 겸 육군 전반에 걸쳐 최고 고문으로써 군제개혁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일본군은 기본 탄생부터가 메이지 천황 정부의 호위병에서 시작되었고, 그 임무 역시 국외의 방비가 아닌 국내의 감시와 통제였다. 성격은 국민개병이 아닌 오히려 봉건적 부역에 더 가까웠고 대다수가 참여하는 국민군이 아니라 소수에게 군사 교육을 한정시키고 국민에게는 무장 기회를 극력 피하여고 하는 절대주의적 용병의 성격을 띠는 군대인 것이었다. 즉, 그들은 국민의 군대가 아닌 천황의 군대, 즉 그들은 황군이었다.
10.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만약 정부의 명령에 불응하거나 이론을 제기하는 번이 있다면 당장 무력을 동원해 박살내겠다고 해 사전에 반대세력을 침묵시킨 일화가 이를 말해준다. 사실, 각 번의 부채를 대신 떠맡기로 했고 번주 가족에 대해서는 화족(華族)이라는 특권 신분을 보장하며 종래와같은 가록(家祿)을 주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쉬울 것은 전혀 없었다.
11 871년 12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육해군 충실에 관하여 가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와 함께 건의한 것이 있는데, “천하 現今의 군비를 논함에 있어 소위 친위대는 聖體를 보위하고 궁성을 지키는 데 지나지 않으며, 四管鎭臺의 군 총 20여개 대대로 국내를 진압하는데 쓰는 것이며, 밖을 대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중앙군사력 정비 시기에 관하여 그 실체와 목표를 명확히 하고 있다.
12 이때 전국을 6개 군관구로 나누고 각각 진대를 두었다.
13 상비역 면역 개요 참조.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일본 군사사』, 엄수현 역, 시사일본어사, 1994년 p50
14 그래서 1878년 서남전쟁(西南戰爭)까지는 크게 성과가 오르지 못했다. 1876년 면역자 현황에서는 전국 평균 82%의 면역자가 나타나고 있다. 성격과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1941년이 되어서야 겨우 징집율이 51%에 이른다.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일본 군사사』, 엄수현 역, 시사일본어사, 1994년 p51,
위의 책, p293 현역병징집률 표.
15 고쿠라(小倉)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소령이 이끄는 14연대는 구마모토 구원을 위해 진군하던 중 일어난 코바(木葉), 우에키(植木) 전투에서 같은 병력의 사쓰마군에게 완패했다. 정부군의 화력도 사쓰마군의 높은 사기와 전의를 바탕으로 한 돌격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구마모토 진대사령관 다니 간조(谷干城)는 전적으로 진대군의 전투력에 자신이 없어서 방어를 선택했다고 정토총독(征討總督)에게 보고했다.
16 1880년 육군성제4연보에 의하면 1873~1879년의 7년간 장정들이 백방으로 병역을 기피하기위해 노력하여 심지어 제1, 제4군관구는 상비 병력조차 부족해 타 관구에서 보충으로 보전하기에 이르었다.
17 1875년의 규정으로 육군의 각종 상비군 1년의 징집인원은 합계 1만 480인, 기타 보충징집은 4천 264인으로 실제로 병역을 부담한 자는 적령인원 30만 중의 3% 조금 넘는데 지나지 않았다.
18 원래는 모병의 7년 현역제로 예비군은 없었다. 허나 68년 이후 국민개병 의무를 제정하여 적령인원 중 8만을 제비로 뽑아 5년의 현역, 4년 예비역의 병역을 지고, 나머지는 유동군으로 5년간 연 1회 2주간의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유사시에는 현역병이 간부가 되고 유동군을 동원하는 프랑스 혁명 이래의 국민군의 전통을 지켰던 것이다.
19 1815년 제정된 국민 개병원칙으로 3년 현역, 2년 예비역, 4년 후비역과 40세 이하 전 국민이 속하는 국민 후비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사시에는 현역병과 예비병을 주체로 하여 편성되었다. 하지만 실제 현역 징집은 1861년 적령 인구 56만 5802명 중 5만 9459명으로 10%를 조금 넘었다. 즉, 국민개병은 말 뿐이며 10%만이 9년간의 병역의무를 지는 것이다. 1860년 이래 추진한 군제 개혁은 현역 2년, 예비역 4년, 후비역 5년에 국민 후비역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전시병력 21만 5천으로 45만까지 늘리려 하였다. 징집 인원이 증가되어 국민개병에 다가섰으나 여전히 현역 징집자만이 11년의 병역을 부담하는 것이었고 국민예비역의 폐지는 비록 형식이지만 국민군에서의 후퇴였다. 즉, 이 개혁은 교육시킨 예비병을 증가시켜 전시병력을 증대함을 도모함과 동시에 아울러 군사 교육을 그 부분에 한정시키고, 대부분의 국민에게 무장 기회를 부여할 것을 극력 피하려는 절대주의 희망의 표현이었다.
이는 국학에서 나오는 단어이다. 이 국체가 문제가 된 것은 주로 1930년 이후이나, 여기서도 국학에서 유래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간단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원래 국체라 함은 보통 “국가의 위상”에 관한 뜻으로 국수(國粹), 혹은 국풍(國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이 국체라는 단어는 통치권이나 나라의 격을 넘어서 “일본의 ‘국체’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세계에 비교할 수 없다는 그저 황공한 존재다.” 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 늘 등장하게 된다. 앞서 말한 아마테라스 오오카미가 태어난 일본은 “만국의 원본대종(元本大宗)이 되는 나라”이고, 그 후손인 천황의 “대군주”로서의 지위는 불변이며,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고한 천양무궁(天壤無窮)한 신칙(神勅)이야 말로 “도의 근본 대본(大本)”이 되는 논리 하에서 나오는 국가의 정체성인 것이다. 말 그대로 일본은 신의 후예인 살아있는 신이 존재하고 다스리는 나라이니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나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고 그 모순이 드러나는 것은 1930년대 천황기관제설, 그리고 1945년의 항복조건에서의 논의에서지만, 일본이 동아시아를 침략할 때 사용하는 논리도 될 수 있다. 일본은 신국이기 때문에 마땅히 타국보다 우월하며 지배하고 다스릴 권리가 있다. 이것이 확대 발전되 나온 슬로건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英圈)이다. 어쩌면 메이지 정부의 시작아자 끝, 알파이자 오메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쇼와 천황은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소식을 듣고, “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 전쟁을 끝내야 하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군부와 관료들은 항복조건에서도 오직 하나, 국체의 존속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메이지 일본의 국가 정체성인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야 끝났다.(주20)
각주 20 쇼와 천황의 포츠담 선언 수락 선언, 이른바 종전 선언을 한 시각이다.
2. 번벌 정치-마지막 황제.
ㄱ. 초기 메이지 정부구성-번벌의 극에 달한 자.
일본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 셋이 있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쵸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인데 이 셋을 일러 “유신 삼걸”이라고 한다. 이들은 1878년까지의 주요 관직에 올라 초기 메이지 정부를 이끌었다. 여기서 초기 메이지 정부의 구성원을 보겠다.
앞서 말했다시피 1869년 7월 2관6성제의 태정관제는 1871년 7월 3원8성제로 한차례 바뀌기는 했지만 태정관이 정무결정기관의 수장이 되는 태정관제는 1885년 내각제도가 설치될 때 까지 계속된다. 초기에는 그 인사구성이 메이지 유신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쓰마, 쵸슈, 토사, 히젠(肥前)의 출신자를 중심으로 해서 황족과 공경 등이 가미되어 어느정도 균형(주21)을 이루다가 서서히 황족과 공경, 기타 번의 인물들이 탈락하기 시작하여 1881년 때는 사쓰마, 쵸슈, 토사, 히젠의 4번이 독점(주22)하고 1885년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범할 때는 거의 사쓰마와 쵸슈가 독점(주23)하게 된다.
이들 번벌 관료들이 군으로 진출하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쓰라 타로 라인의 “쵸슈의 육군”과 사이고 쓰구미치-가와무라 스미요시-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계열의 “사쓰마의 해군” 군벌(軍閥)이 형성되며, 또 상인들이 관료나 군부 장성들과 결탁하는 정경 유착을 통해 특권 대재벌, 콘체른으로 발전한다.
한편 1878년 서남전쟁을 계기로 유신 삼걸이 모두 죽는다. 이에 정치, 외교, 군사에서 쵸슈 출신의 세 정치인이 두각을 나타낸다. 정치의 이토 히로부미, 외교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薰), 그리고 군사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이다. 이들은 제1차 이토 내각에서 모두 고위직에 오르면서 그 힘을 발휘하고, 향후 20여년간 메이지 일본의 정치를 좌우하게 된다. 필자는 이들을 “신(新) 유신 삼걸”이라고 부른다.(주24)
한편 세월이 지나면서 관직에 오른 메이지의 초기의 주요 인사들이 죽거나 은퇴를 하게 되면서 그 공백을 정규 관료들이 메우게 된다. 그리고 1910년대 초부터 민주 정당운동이 일어나고 마침내 1918년 하라 다케시(原敬)의 정당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정계에서도 정당 정치인들이나 한동안 힘을 못 쓰던 귀족 정치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표면적으로는 번벌이 많이 와해된 듯 보였지만 군부에서는 버젓이 남아있었다.
육군은 쵸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츠라 타로-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군벌이 형성되었고, 해군은 사이고 쓰구미치-가와무라 스미요시-도고 헤이하치로-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라인이 형성되었다. 이들의 대다수가 정치에 직접 참가하거나 혹은 영향력을 미쳤으며, 각 군에서의 인맥 형성은 절대적이었다. 번벌은 죽지 않고 군부와 더불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것이었다. 더욱이 사쓰마-쵸슈의 경쟁 관계로 시작한 육해군의 갈등은 거의 적의에 가까웠다.(주25)
결국 운명의 1945년 8월 15일. 당시의 일본 총리는 전 시종무관장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예비역 해군 대장이었고, 조선 총독은 전 수상인 아베 노부유키 육군 대장이었다. 번벌은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황제였던 것이었다.
각주 25 육군이 독자적으로 수송선단을 운용하거나 심지어 독자적인 항공모함을 설계하기도 하였으며, 해군은 육군이 오른쪽으로 돌리는 나사를 사용하자, 왼쪽으로 돌리는 나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 사사건건 부딪치는 육해군의 갈등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주요 패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3. 정상과 유신-우리는 모두 친구.
ㄱ. 유신과 상인-태초에 상인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메이지 유신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인물로 토사의 향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있다. 온건한 존왕개국론자(주 26)였던 그는 1864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주식회사인 카메야마샤츄(龜山社中)을 설립한다. 그는 해운업으로 각 번에게 무기와 식량 등을 판매하다가, 1866년 사쓰마와 쵸슈가 손을 잡아 막부에 대항한다는 삿쵸동맹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1866년 제2차 쵸슈 정벌에는 쵸슈번에 무기와 물자를 공급하였다. 이후 카메야마샤츄를 해원대(海援隊)로 개명하였으나 1867년 료마가 암살되자 해체된다.
이후 토사의 향사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가 폐번치현 때 번의 배와 자산을 불하받아 츠쿠모(九十九)상회를 만든다. 그는 1873년 회사명을 미쓰비시(三菱)상회로 바꾸고 이후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유착하여 기선불하, 보조금지원 등의 정부 지원을 받아 외국 회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한다. 이후 그는 대만 출병, 강화도 조약, 서남 전쟁 때 병력, 군수물자를 수송하여 급성장해 해운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막신(幕臣) 출신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榮一)은 유신 이후 대장성에 들어가 은행제도를 확립하고, 이후 은퇴하여 금융, 제사, 철도, 조선 등에 투자하고 조선과 중국에도 진출하는 등, 500여 회사에 관여해 마침내 시부사와 재벌을 이루어 ‘실업왕’, ‘재계의 대부’라고 불려진다.
이렇게 메이지 정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미쓰이(三井), 미쓰비시 등 정치가와 결탁한 민간인이나 시부자와, 고다이 토모아쓰(五代友厚), 후지타 덴자부로(藤田傳三郞) 같이 정부와 가까운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불하, 전매 등의 특혜를 받아 금융, 무역, 운수, 광산 등의 분야에서 독점적인 사업을 전개해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주27) 이들 상인은 정상(政商)이라고 하며 후에 재벌로 발전, 일본의 동아시아 제국주의 침략에 견인차이자 추진력이 된다.
ㄴ. 정상 이후의 재벌-독점의 끝에서 전쟁을 외치다.
1907년 공황 이후 그 수습과정에서 재벌자본과 대기업이 전 산업을 장악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대기업이 자금력이 약해진 중소기업을 흡수 합병해 나가는 것이다. 이때 당시 재벌인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주28) 등이 자가사업을 직계회사 형태로 조직하여 금융, 산업, 상사를 다각적으로 독점력을 발휘하는 콘체른, 즉 기업결합체를 결성한다. 또 대외침략이 가속화 되면서 조선과 만주에서 국가 자본이 국가 권력을 이용, 경제뿐만이 아니라 군사적, 정치적 진출과 지배의 강화를 시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만주철도주식화사, 즉 만철 콘체른과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특히 만철은 군부와 연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진주한 관동군과 함께 사실상의 정부로써 활동했다.
1931년 일본에 경제공황이 닥친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재벌들은 대외침략을 통한 시장 확보를 요구하게 되고, 군부는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잠시 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전 조선 총독의 군부 내각이 들어선다. 이어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재벌들은 서남전쟁, 러일전쟁과 같이 군수품을 지원하고 각 점령지의 자원을 점령지 노동력을 이용해 약탈한다. 대표적으로 미츠비시는 조선과 항공기, 나카지마(中島)의 항공기, 닛산(日産)의 자동차, 닛콘(당시에는 일본광학)의 카메라, 가와사키(川崎)의 항공기 등이 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도 군수물자의 불하나 군수품 납품대금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던 재벌들은 점령군 정부의 재벌 해체령으로 인해 마침내 재벌로써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주29)
나오며
1868년 천황을 받드는 지방 웅번들은 1년 반 간의 전쟁 끝에 마침내 에도 막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 메이지 신정부는 사상적으로 자신들의 위기 극복 방책과 집권 명분, 그리고 타국을 침략하는 논리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르고 시계바늘을 왼쪽으로 돌리는”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막말기의 경쟁에서 패한 막부 및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아닌 타 번을 배제하고 오직 자신들만이 집권하는 독점적인 정부 구성을 보여주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초기의 혼란 때 접근한 상인들을 비호, 대재벌로 성장시켜 이들을 침략의 선봉으로 삼았다. 가장 큰 특징은 천황제 이데올로기, 번벌정치, 정경유착이 메이지 한 시대만의 특징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 12시까지 3대 77년간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이 메이지 정부의 성격이 13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 (주3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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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영, 『日本史 여행』, 일본문화연구센터,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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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는 기본적으로 막부와의 무력 충돌 없이 평화롭게 왕정복고를 한다는 온건 존왕론자였다. 선중팔책(船中八策)과 이후 정부 구성론에서는 이후 메이지 정부가 철저하게 배제해버린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의 막부의 인사들을 과감히 참가시키는 등의 온건적인 주장을 폈고, 특히 이를 가장 잘 실현한 것이 대정봉환(大政奉環)이다. 그는 1867년 암살당하는데 통설은 막부측의 암살이지만, 존왕양이 과격파의 소행이라는 추측도 설득력이 있다.
27 이노우에 카오루와 미츠이, 후지타의 관계와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와 미쓰비시와의 관계는 유명했는데, 특히 이노우에 카오루는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미쓰이네 지배인”이라고 야유받을 정도였다.
28 미츠이는 경공업, 미츠비시는 중공업, 스미토모는 은행, 중화학, 야스다는 금융, 숙박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29 이때 해체된 재벌로는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의 4대 재벌, 아사노, 후루카와, 시부사와의 구재벌, 나카지마, 닛산, 이시하라, 리켄 등의 신흥 재벌이 있으며 이들 11개 재벌 83개사의 주권은 약 200억엔의 주식이 공개 처분된다.
30 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대신은 고향과 지역구가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横須賀)지만, 본가는 가고시마 현이라고 한다. 숙부가 가미카제 특공으로 전사했다고 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특공대의 생각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는 외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총리대신으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이자 지역구 요코스카는 메이지 시대 이래의 해군기지이며 그는 할아버지 대 이래 3대를 이어온 세습정치인이다. 이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첫댓글 고이즈미는 한국민에게있어 내각sorry대신이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