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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내소사 (題邊山蘇來寺)
古徑寂寞營松根(고경적막영송근)-옛길은 적막해라 솔뿌리 엉켜
天近斗牛聊可門(천근두우료가문)-낮은 하늘 북두와 견우는 손 뻗으면 닿겠네
浮雲流水客到寺(부운류수객도사)-나그네는 구름따라 물 따라 절에 왔건만
紅葉靑笞僧閉門(홍엽청태승폐문)-스님은 문을 닫고 붉은 단풍과 푸른 이끼만 무성하네
秋風微源吹落日(추풍미원취낙일)-소슬한 가을바람이 지는 해를 재촉하니
山月漸白啼靑猿(산월점백제청원)-창백한 달이 산위에 떠오르고 잔나비 울음 우네
奇哉尨眉一老衲(기재방미일노납)-기이하구나 하얀 눈썹의 늙은 중은
長身不夢人間喧(장신부몽인간훤)-세상 일 모두 잊고 앉아만 있구나!
정지상(鄭知常)
훌쩍 떠나 변산반도 내소사(來蘇寺)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를 만나려가다 !
조선 철종(哲宗)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여러 서예가(書藝家)를 논(論)한 “논제필가(論諸筆家)”라는 글이 있다.
명지대학교 유홍준(兪弘濬)교수가 논제필가(論諸筆家)에서 영감(靈感)을 얻어
전국명찰(全國名刹)에서 뽑은 5개의 사찰 “논제명찰(論諸名刹) 5선을 발표했다.
아래 절들이다.
◮서산 개심사(開心寺)-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느낌을 주는 절
◮강진 무위사(無爲寺)-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 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
◮부안 내소사(來蘇寺)-늦가를 해질녘 할머니가 튓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 한 절
◮청도 운문사(雲門寺)-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 한 절
◮영주 부석사(浮石寺)-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 한 절이다
유홍준(兪弘濬)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제2권에
“한국문원(韓國文苑)”에서 편집한 “명찰(名刹)”을 보면 1995년 말 기준으로 우리
국보(國寶)와 보물(寶物) 문화재(文化財)는 총 1466점이라고 하는데 이 중
불교문화재(佛敎文化財)가 총 900점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들 불교문화재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 사찰(寺刹)이다.
2018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은
국보 314점, 보물 1728점이며 이중 개인 소유는 국보 162점, 보물 1108점으로 나와 있다.
이중 국보 보물 합쳐서 758점이 불교문화재로 사찰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寺刹)은 가히 한국문화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역사유적을 보기 위해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절을
찾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 필자가 부안 내소사(來蘇寺)를 찾는 주 목적중 하나는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懸板) 글씨를 보기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이 글씨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썼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懸板)에 관한 내용은 아래에 소개되어 있다.
필자는 붓글씨를 쓸 줄은 몰라도 보는 취미가 있다.
서예(書藝)는 문자적 조형예술(造形藝術)로 독립된 문자회화(文字繪畵)라고 주장
하고 싶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예서(隸書) 조형미(造形美)는 서양 미술의
피카소 큐비즘(Picasso Cubism)보다 더 강한 입체미(立體美)를 느낀다
(필자 개인 취향)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나라 역사 문화재는 사찰에 많다.
천년이 넘는 나무, 금방 신령(神靈)이 나올 것 같은 맑은 샘
8월의 능가산(楞伽山)을 떠가는 가벼운 흰 구름 그림자가 덮는 전나무 숲길
대웅전 창살 무늬, 이끼낀 돌계단 하나하나가 영겁(永劫)의 세월 속에 우리민족과
고락(苦樂)을 같이 해온 문화재들이다.
아쉬운 것은 부안 출신으로 반속적(反俗的)이며 자연성 동양적 낭만주의 시를 썼다고 평가받는 신석정(辛夕汀)시인의 문학관과 채석정을 둘러보기로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농월
능가산(楞伽山) 위에 피어오른 8월의 흰 구름
푸른 산위에 흰 구름이 내소사 앞마을에 차양(遮陽)을 친듯하다
햇볕은 늙은이의 흰머리를 한 번 더 탈색할 정도로 뜨겁다
양산을 받아도 머리털이 익을 정도로 강한 더위다
그래도 얼마나 맑고 한적한 절앞 마을인가!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산촌 마을이다
寂静中自然呼吸(적정중자연호흡)이라 !
고요속에 자연이 숨쉬고 있다 !
▲위의 일주문 현판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글씨는 2000년대 한국 최고의 명필 고(故)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이 썼다.
일중 김충현(金忠顯)은 장동김씨(壯洞金氏) 집안이다.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1922~1991)형제는 2000년대에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인물들로 조선조 노론(老論) 명문가 집안 후손이다.
장동김씨(壯洞金氏-안동김씨)는 조선후기 300년 동안 권력의 중심이었던
“기호(畿湖) 노론당”의 중심이었고, 한국 최고의 명문가이자 학문과 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집안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보면 서울 장동(壯洞) 일대에 있었던 이 집안의 저택들이 그려져 있다.
장동김씨(壯洞金氏-안동김씨)은 세도가(勢道家)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문한가(文翰家)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장동김씨(壯洞金氏)중에는 유명한 “6창(昌)”이 있다.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이 그 6형제이다. 조선조 역사속에 유명인의 이름이다.
여섯 번째 창립(昌立)의 11대손이 바로 이 시대 최고의 명필인
일중(一中) 백아(白牙) 여초(如初)인 김충현(金忠顯) 3형제다.
※능가(楞伽)-표현은 범어(梵語)에서 그곳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몹시 험한 곳으로 가기가 어려운 곳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능가산(楞伽山)에서 설(說)한 경전을 능가경(楞伽經)이라 한다.
내소사로 올라가는 전나무숲 길이 일품이다.
요즘 30도가 넘는 폭염(暴炎)에 전나무숲 길은 극락(極樂)가는 길이다.
절 앞까지 차가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천천히 흐느적흐느적 걸었다.
전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보다 더 좋은 보약이 어디 있으랴
鳥歌美聲綠陰下(조가미성녹음하)-새소리와 녹음아래서
八月檜綠路陰途(팔월회녹로음도)-팔월의 전나무 녹음 그늘 길을
蟬鳴爲友徐徐步(선명위우서서보)-매미소리 친구 삼아 천천히 걷는다
急去不要陰下好(급거불요음하호)-빨리 갈일 무엇인가 이 그늘이 좋은데
농월(弄月)
▲내소사(來蘇寺) 천왕문(天王門)
천왕문(天王門)은 불법(佛法)을 지키는 불국토(佛國土) 즉 절을
지키는 외곽수호신(外護神)이다.
양쪽에 눈을 부릅뜨고 창칼을 든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이 천왕문(天王門) 현판(懸板)도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봉래루(蓬萊樓)
▲내소사의 가람배치에서 절 전체의 첫 문 역할을 하는 산문(山門)인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다음 천왕문(天王門)이 사찰내(寺刹內)의 정문(正門)역활을 한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봉래루(蓬萊樓)는 신앙공간 도량(道場)이다
봉래(蓬萊)는 중국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봉래산(蓬萊山)은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가운데 하나로 중국 도교(道敎)에서 가장 이상적인 영산(靈山)중의 하나가 봉래산(蓬萊山) 이다.
우리나라 금강산(金剛山)의 여름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한것도 중국 봉래산(蓬萊山)이름을 따 온 것이다.
▲처음에는 만세루(萬歲樓)인데 뒤에 봉래루(蓬萊樓)로 바꾸었다 한다.
만세루(萬歲樓)와 봉래루(蓬萊樓)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
기록된 “내소사(來蘇寺)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의 “변산의 4대사(大寺)”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측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하는 곳에“만세루(萬歲樓)”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가가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蓬萊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위에 있는 봉래루(蓬萊樓) 편액(扁額)왼쪽 세로된 글자에는 다음과 같이
판각(板刻)되어 있다
세재정유추칠월기망단주인서(歲在丁酉秋七月旣望潬州人書)
(해는 정유년(丁酉年) 가을 칠월(七月) 16일 단주사람(潬州人)이 쓰다)
※기망(旣望)-음력(陰曆)으로 매달 16일을 말함
내소사 대웅보전 보물제 291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현판 글씨
화장끼 하나 없는 민얼굴로 곱게 늙은 백골(白骨)집 내소사 대웅보전 처마에
날아갈 듯 춤추듯 머무를 듯 네 글자 편액이 결려 있다.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는 호남지방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필자가 기억 한 것만도 아래와 같다.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내소사 설선당(說禪堂)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 천불전(千佛殿)
대흥사 침계루(枕溪樓)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大雄寶殿)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一柱門)
천은사 명부전(冥府殿)
강진 백련사 만경루(萬景樓)
고창 선운사 천왕문(天王門)
원교 이광사는 당대의 뛰어난 명필(名筆)이다.
안평대군,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4대 명필에 꼽히는 인물이다.
이광사는 나주벽서사건(羅州僻書事件)으로 23년을 유배지 생활을 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전남 진도로 옮기고 다시 완도 옆 신지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호남지역 사찰 주지와 스님들이 그의 필명(筆名)을 듣고 찾아가 받아온 편액 글씨들이 이곳 내소사 대웅전 말고도 여러 곳에 전해 온다.
이광사는 유배지에서 고독한 생활로 문을 닫고 외부와 접촉을 금하면서(杜門斷交)
자기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만든 것이 원교체(圓嶠體)다.
원교체를 다른말로 동국진체(東國眞體)라 한다.
이광사의 서예 세계의 생명성(生命性)은 정해진 것이 없는(無定形)의 변화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광사의 글씨는 자연물(自然物)처럼 모양이 울퉁불퉁 서로 맞지 않고 어긋나거나
기울어지고, 크고 작음(大小) 길고 짦음(長短)이 다양하며, 왕성(旺盛)하고 기이한
느낌이 호탕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천기조화론(天機造化論)은 그가 창안한 “길곡법(佶曲法)”과
만호제력(萬毫齊力), 삼과(三過), 추전법(推展去) 등의 필법이 뒷받침되어 근육과
뼈(筋骨)의 신기(神氣)를 지닌 속기를 떨쳐내어 필력이 굳세고, 예스럽고, 노련하며,
빼어난 글씨(蒼勁拔俗)의 서예미학(書藝美學)을 성취하는 토대가 되어
“원교체(圓嶠體)”로 완성되었다.
추사 김정희는 이광사의 글을 졸렬(拙劣)하다고 비판했다.
그의 시문집 “잡지(雜識)”에서도 “옛 선사(禪師 禪佰)가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는데, 동쪽(조선)
사람들이 원교의 필(筆)에 묶여 있고, 또 왕허주(王虛舟·청나라 서예가) 등 여러
거장이 있는 것을 모르고 함부로 붓을 놀리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한 번 웃음이
나온다”라고 비판했다.
왕허주(王虛舟)를 예로 든 데서 알 수 있듯 청(淸)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김정희는
청(淸)에서 습득한 서예이론으로 조선의 자연을 묘사한 이광사를 비평했다.
또한 이광사는 소론(少論)이었던 데 비해 김정희는 노론(老論)으로서 반대 당파에 대한 당파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8년간의 유배생활을 제하면 순탄하고 화려한 인생길을 걸었던 추사로서는
전 인생이 쓰라렸던 이광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삶을 이해하지 못하니 글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남 대흥사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악평한 후 제주도 유배가 풀려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선사에게
원교의 글씨를 다시 칭찬한 것은 유배동안에 추사도 많이 겸손해 저셔 이광사를
인정한 것으로 도 알 수 있다.
이광사의 글은 흐르는 물과 주변의 사물과 어울리는 자연의 조화 속에서
글을 썼다는 점이 독창적이며 파격적이다. 내소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살펴보자.
사람의 눈과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大)자를 보면 마치 사람(부처님)이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 같다.
서예의 기본인 잠두(蠶頭)와 마족(馬足)의 틀을 벗어 버린 이광사만의 낭만(浪漫)과
자유로운 표현이다.
*웅(雄)자를 보면
짜임새가 있으면서도 아주 걸출한 표현이다
*보(寶)는 보배(寶貝)를 말함으로 귀중함을 뜻하는 글자이다.
위의 갓머리“宀”를 아주 여유롭고 넉넉한 지붕처럼 만들어서 그 안에 보배를
가득 채운 느낌을 주고 있어 이런 파격적인 글씨는 서예의 기본 틀에 묶여 있는
서생(書生)들이 당연히 입을 놀려서 원교를 비판하기에 안달을 했을 것이다.
*전(殿)자에서 “尸”의 내리삐침은 다른 대웅전(大雄殿) “전(殿)”자에서는 볼 수
없는 활달함을 준다.
“대(大)” “보(寶)” “전(殿)”의 왼쪽 삐침이 각각 모양을 달리하면서 해당글자에는
조화(調和)를 전체 네글자에는 조형미(造形美)를 보여 주고 있다.
서예에서는 글자 한자와 여러 글자 전체를 아우르는 조형미(造形美)가 중요하다.
추사체의 특징은 “예서(隸書)의 조형미(造形美)”가 특출하여 명필소리를 듣는다.
원교 이광사는 명필(名筆) 소리에 그의 사생활이 가려져 있다.
23년 유배 생활의 고통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 사건으로 부인은 자결(自決)을
하게 되자 그는 애절한 시(詩) 한수로 부인의 영혼을 위로한다.
이시를 옮기면서 필자도 마음이 울컥함을 감출 수 없다.
부인을 못잊어하는 애절한 도망시(悼亡詩)를 아래에 소개한다.
我死骨爲灰(아사골위회)-내 죽어 내 뼈가 재가 될지라도
此恨定不捐(차한정불연)-이 한(恨) 정영 사라지지 않으리
我生百輪轉(아생백륜전)-내 살아 백번 삼계(三界)에서 윤회(輪回)하더라도
此恨應長全(차한응장전)-이 한(恨) 응당 오래토록 온전하리
須彌小如垤(수미소여질)-수미산(須彌山)이 다 닳아 개밋둑이 되고
黃河細如涓(황하세여연)-황하(黃河)의 물이 다 말라 실개천이 되어도
千回葬古佛(천회장고불)-천 번 죽어 장사지내도 고불(古佛)이 될 것이고
萬度埋上仙(만도매상선)-만 번 죽어 파묻힌대도 상선(上仙)이 될 것이다
天地湯成樸(천지탕성박)-천지가 변하여 태고(太古)적으로 돌아가고
日月黯如烟(일월암여연)-일월이 어두워져 연기처럼 흐릿해져도
此恨結復結(차한결복결)-이 한 맺히고 다시 맺혀
彌久而彌堅(미구이미견)-더욱 오래토록 맺혀 더욱 굳어지리라
煩惱莫破壞(번뇌막파괴)-이 고통 깨뜨려 부서질 수 없고
金剛莫鑽穿(금강막찬천)-이 한(恨) 금강(金剛)도 뚫어 부술 수 없으리
藏之成一團(장지성일단)-이 한(恨) 깊이 감추어 한 덩어리 되어서
吐處滿大千(토처만대천)-토하면 삼천대천(三天大千)에 가득하리라
我恨旣如此(아한기여차)-내 한(恨)이 이미 이러할진대
君恨應亦然(군한응역연)-당신 한도 응당 이러하리라
兩恨長不散(양한장불산)-서로의 한이 오래토록 흩어지지 않으면
必有會合緣(필유회합연)-기필코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을 것이오
오랜 유배생활의 이광사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위의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懸板)은 1633년 조선 인조11년 계유년에 쓴 글씨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좌측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협시(夾侍)하였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봉안한 불전(佛殿)은 보통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보광명전(普光明殿)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 하던데 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했을까?
▼아래 내소사에는 종각(鐘閣)이 2개 있다.
보종각(寶鐘閣)과 범종각(梵鐘閣)이다.
보종각(寶鐘閣)은 보물 제277호이다.
고려시대 동종(銅鐘)을 봉안(奉安)하고 있기 때문에 보종각(寶鐘閣)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보물 제277호 보종(寶鐘)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중종(中鐘)으로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한 고복형(鼓腹形)이다. 이 종에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 종의 원래 위치는 내소사가 아닌 1222년인 고려 고종9년인 임오(壬午)년 청림사(靑林寺)에서 1222년 6월에 장인(匠人) 한중서(韓仲敍)가 주조하고 담묵선사가 창건한 부안의 청림사 종을 1853년
철종 4년 청림사(靑林寺)에 은거(隱居)하던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찾아내어 내소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소사 지역 사람들의 구전(口傳)에는 1880년경 조선 선조(宣祖) 17년쯤에 충남 태안군(泰安郡)에 있던 것을 전북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라는 사람의 누각(樓閣)에
사용하다가 다시 전북 부안군 보안면 만화동으로 옮기어 구병서라는 사람이 보관하다가 1965년 을사(乙巳)년에 당시 내소사 주지를 역임하였던 원경(圓鏡)스님이 내소사로 옮기어 보종(寶鐘)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종각(寶鐘閣)은 원래 이 자리가 아니고 대웅보전 법당의 서남향(西南向)에 세워졌으나 도량(道場)을 정비하던 시기에 혜산(慧山)스님이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으니 그때가 1983년도이다.
보종(寶鐘)은 보관하여 관리하고 다시 새 종을 주조(鑄造)하여 종각(鐘閣)을 지은 것이 범종각(梵鐘閣)이다.
▲범종각(梵鐘閣) 편액(扁額)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다.
▲위의 건물은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앞마당에 있는 설선당(說禪堂)과
함께 내소사(來蘇寺)의 절을 찾는 손님들을 위한 대중방(大衆房)이다.
두 건물은 “무설(無說)”과 “설선(說禪)”의 명칭처럼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무설(無說)-없는 것. 생각의 대상(對象)이 못 되는 “무(無)”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의 원리다.
※설선(說禪)-선(禪)을 강의 하는 것 즉 있는 것을 말한다. “유(有)”
▲무설당(無說堂) 편액(扁額 懸板)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다. 내소사에는 김충현의 글씨가 여럿 있다.
▲내소사(來蘇寺) 설선당(說禪堂) 요사채(寮舍寨)
설선당(說禪堂)은 인조(仁祖)18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중앙의 설선당(說禪堂)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 안마당은 회자형(回字型)의 특이한 건축양식이다.
필자가 설선당(說禪堂)을 소개하는 것은 설선당(說禪堂) 편액을
호남 출신 최고의 명필이며 양명학자(陽明學者)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소개 하기 위해서다.
※요사채(寮舍寨)-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을 부르는 총칭.
▲위의 설선당(說禪堂) 편액(扁額)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설(說)”자의 마지막 획의 위로 삐침을
무풍기량(無風起浪)-바람은 없는데 파도가 이는 듯 하다고 격찬했다.
부안 태생 신석정(辛夕汀) 시인은 가야금을 자진머리로 연주하는 듯하다고 했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