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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자를 보내리라
말 3:1-6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1-6 / `보라! 내가 이제 내 심부름꾼을 보내어, 내 길을 준비하도록 하겠다. 내가 약속한 대로 너희가 고대하는 천사가 이미 너희에게 가고 있는 중이다. 그 다음에는 나도 너희가 기다리는 주님으로서 갑자기 내 성전으로 들어갈 것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2) 그러나 주께서 오실 때에 누가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또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누가 주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용광로의 불과 같고, 빨래통의 잿물과 같으시기 때문이다. 3) 그때에 주님은 제련공처럼 앉아서 저희를 녹이고 찌꺼기를 제거하실 것이다. 주님은 레위의 후손들을 금이나 은처럼 정화시키고 순도를 높여서, 그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여호와께 다시 올바른 제물을 바치도록 하실 것이다. 4) 그때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바치는 제물들이 다시 한 번 옛날처럼 주께 기쁨이 될 것이다! 5)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나를 똑바로 섬기지 않는 모든 자들을 내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심판하겠다. 죄 없는 사람을 속이는 악한들, 조강지처를 버리는 사내들, 남편을 속이고 정조를 버리는 여인들, 거짓말을 하는 증인들,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자들, 과부와 고아들을 속이는 자들, 나그네의 권리를 무시하고 압제하는 자들, 이 모든 자에게 형벌을 내리겠다. 6) [십일조]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의 자손들아, 내가 변한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면서도 “정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는 말로 불신을 드러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1-4)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시대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내버려두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인들의 번성과 의인들의 고난을 바라보며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2:17)는 말을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질문에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라는 답을 주십니다(1). ‘내 사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말라기’입니다. 내 사자가 말라기 선지자 자신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왕이신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를 먼저 보내신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세례 요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길이 예비되면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이신(1) 메시야가 임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가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금같이 만들고,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씻어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의 초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최후의 심판까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메시야가 오시는 그날은 죄악을 정결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는 날이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4). 예수가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참된 예배의 회복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5-6)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사자가 오실 것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하면서 죄악의 자리를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죄악의 모습을 일곱 가지로 언급합니다(5). 말라기 시대의 만연한 죄악의 모습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죄에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또한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 하면서 ‘언약의 사자’가 오셔서 연단과 심판을 하신다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6). 그래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적용: 재림의 예수가 심판주로 오시는 그날에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을 씻어내어 거룩한 백성으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의 감정이나 사사로운 일에 얽매여 있다면 주님께 쓰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그렇습니다. 자신의 일을 가장 먼저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일을 하기보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 설 교 >
냉소적인 마음을 경계하라
말라기 2:17-3:6 / 피영민 목사
서론
우리 속담 중에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편안한 자리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하는 말은 그 사람 마음속 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사람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는 그 사람이 평소에 하고 다니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 근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해서 택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택함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서가 더 훌륭해도 택하지 아니하고 야곱은 사기꾼 같아도 내가 너를 택하지 않았느냐? 택함의 은혜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택한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택함 받은 것이 뭐가 좋은 겁니까?”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제사장들이 부패하고 예배가 부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제물을 드렸습니다. 둘째, 그들의 가정생활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딸을 아내로 취하여 조강지처를 학대하며 이혼하고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가정생활이 피폐해졌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냉소적이라는 것은 영어로 Cynical, 하나님을 향해서 비꼬고 빈정대는 그런 마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일단 삐딱해집니다. 마음이 삐딱하니까 말도 삐딱한 말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냉소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언어도 냉소적인 말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냉소적인 말을 생각해보고 그 말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을 하셨는가? 이것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냉소적인 말의 의미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 2: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한 것을 보고 신앙적인 회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기뻐하는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악인을 선하게 보시는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은 하나님이신가? 도대체 공의로운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을 향해서 거침없이 빈정거리고 냉소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전 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엄숙한 순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동도 조심하고 말도 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벗어나서 평안한 자리에서 기록과 녹음이 되지 않고 모든 방어벽을 내려놓았을 때 불평을 했습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하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과연 공의로운 통치자이신가를 의심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솔직히 악인들이 형통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때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똑바로 통치하시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 성경에 한 사람 더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시편 73편을 기록한 다윗 시대 성가대장 아삽이라는 사람입니다. 아삽이 성가대장으로 충성스럽게 봉사했는데 하나님이 아침마다 때리고 온종일 때리는 것입니다. 온종일 징책하는 것입니다. 성가대장인 아삽은 매일 때리시는데 악인들은 소득도 많고 얼굴에 기름도 흐르고 장수하는 것입니다. 아삽이 자기는 성가대장으로 봉사해도 매일 혼이 나고 악인들은 잘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니 아삽의 마음속에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똑바로 하시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지식이 있으십니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아삽이 차마 그렇게 말은 못했습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시 73:15).
아삽은 속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의문이 많았지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자기가 모르는 것도 있고 오해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있는 냉소적인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그런 점이 다른 것입니다. 둘째로 다른 점은 아삽이 마음속에 가진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전에 가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아삽아 내가 지금은 잠자는 것 같지만 깨는 날이 올 것이다. 내가 깨면 악인들은 졸지에 황폐되고 놀람으로 전멸할 것이니라. 악인들이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도 미끄러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라.” 악인들의 길은 미끄러운 길입니다. 넘어지면 졸지에 황폐하고 놀람으로 전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삽한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종일 때리지만 죽이려고 때리는 것은 아니다. 너는 바로 잡으려고 때리는 것이고 네가 수고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깨면 다 상을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천국에서 영접하고 상을 줄 것이다.” 그래서 아삽은 기도 응답을 받고 시편 73편 마지막은 성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 찬양의 언어가 된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의문이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냉소적인 마음을 갖고 냉소적인 말을 마음껏 쏟아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무익한 말, 냉소적인 말들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고 이런 말들은 결국은 심문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교회 나오기 싫다고 합니다. 또 예수 믿기 싫다고 합니다.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잘 됩니까? 왜 이렇게 이 세상에 악인들이 많습니까? 왜 이 세상에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일어나고 질병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가만 계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는 왜 그렇게 악이 많습니까? 세습하는 교회, 분열되어 싸우는 교회, 윤리가 타락한 목회자, 남의 돈 떼어먹는 성도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운 통치를 한다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롭게 악인을 심판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봐야 된다.” 하나님이 공의롭게 심판하시면 나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만약 공의만 갖고 와서 심판하시면 여러분 중에 누가 하나님 공의 앞에 서서 “나는 공의로만 심판하셔도 통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 지은 것은 벼락을 10번 맞아도 싼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죄인 아닙니까? 하나님이 공의롭게 재판하시면 우리가 하나님 공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왜 나는 빼고 남들만 하나님이 공의롭게 재판하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칼빈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검토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Self-examination” 자기 자신에 대한 검토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Long-suffering”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마음과 악한 말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여도 하나님은 그 고통을 오래 견뎌내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보니 하나님이 나 같이 나쁜 놈, 죄인 중의 괴수를 죽이지 않고 살리신 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나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 은혜였구나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래 참아 주셨다는 것을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악인이 많아도 그런 악인까지도 오래 참아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인가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지만 결국 악인을 심판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서 항상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문이 생긴다고 냉소적인 마음을 가질 것인가? 우리는 결정을 해야 됩니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하여 무관심하게 하는 말,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Ⅱ. 백성들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세 가지
백성들은 “공의의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하나님은 대답을 세 가지로 하셨습니다. 첫째, 말라기 3장 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 내가 내 사자를 먼저 보내어 갈 길을 예비하게 하겠다. 내가 그냥 가면 너희도 똑같은 악인이기 때문에 다 심판할 것이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 사자가 미리 가서 내가 갈 길을 준비할 것이다. 이 예언은 말라기 시대로부터 460년 지난 침례 요한에 의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와서 예수님 오시는 길을 준비했습니다. 침례 요한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도끼가 나무에 놓여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나는 메시야가 아니니 내 뒤에 오실 메시야 그분이 너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주고 그분이 너희에게 구원을 줄 것이다.” 나는 그분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데 그분을 맞이할 준비는 너희도 똑같은 악인들이니까 회개하고 물 침례를 먼저 받으라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자기 백성, 언약의 백성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도 똑같은 악인들이니까 하나님을 어찌 그냥 맞이하려느냐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메시야를 기다려라.”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둘째, 침례 요한이 앞길을 예비하면 너희의 구하는 주님이 홀연히 오셔서 그 분이 성전에 서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분은 언약의 사자이며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주가 오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자기들을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말 3:5). 만군의 여호와가 주로 오시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 사람들을 심판하고 우리를 건져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주가 오셔서 로마 사람들은 두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도 외식하는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일곱 번씩이나 ‘화있을진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의의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오십시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AD 70년 로마 장군 타이터스가 와서 100만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100만명 이상이 죽고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진 백성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갖고 오시면 심판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벧전 4:17).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내 사자가 먼저 가서 갈 길 예비하면 내가 가서 너희의 죄악을 심판한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심판하는 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셋째, 심판은 심판 자체로서 의미가 아니라 연단이요, 그것은 잿물로 표백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연단을 통해서 정금이 나오고 잿물로 표백해서 깨끗한 옷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말 3:2~3).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신 후 거기서 정금 같은 것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금 같은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약 교회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신약 교회는 정금입니다. 불로 금을 연단하는 것은 금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찌꺼기를 제하고 심판하지만 정금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사자가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정금을 끄집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았지만 그로부터 신약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분리 작업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분리하는 심판의 과정이 있어야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금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이단이 많습니다. 자기가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이상한 인간들도 있고 자기가 무슨 하나님 음성을 맨날 듣는다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고 신비주의자도 있고 종교 다원주의자도 있습니다. 다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느냐 딴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이상한 인간들도 있고 교권주의자도 있고 목사가 되서 맨 정치만 하고 이상한 짓만 하고 탐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외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의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심판하는 것이다. 그걸 통해서 가짜들을 걸러내는 중이다.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은 애당초 하나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역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단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있어야 가짜들은 따라 나가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금처럼 남게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 섭리의 위대한 원리
하나님이 이 과정 중에서 섭리하시는 위대한 원리를 6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이 세상이 항상 악에 빠져도 하나님은 항상 참된 교회를 살려놓으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악에 빠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시며 노아와 여덟 명의 가족은 살려주셨습니다. 참된 교회는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숫자가 적어도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세계 종교를 하나로 만들려고 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하실 때 뱀아 너는 여자하고 원수가 된다. 그리고 뱀의 후손하고 여자의 후손은 원수가 된다. 참된 신앙의 사람들과 마귀의 자녀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존재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 적대감을 없애버리고 세계 종교를 하나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세 자손들 함, 셈, 야벳의 자손들이 퍼져나갈 때 사탄이 역사하여 너희는 세계 종교를 하나로 만들라고 했고 그래서 시날 땅에다 바벨탑을 세운 것입니다. 바벨탑을 세운 이유는 종교를 통일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통일을 시키려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와서 보시니 이들이 헛된 짓을 하는구나라며 벽돌 나르는 사람들의 언어를 바꿔버리셨습니다. 사탄은 세계 종교를 만들어서 하나로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부수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소수를 보호해주셨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늙어서 약해지니 여호와를 섬기는 종교와 우상숭배를 섞어서 하나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라를 두 쪽으로 나눠서 우상숭배 하는 것은 북이스라엘,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백성은 남유다로 분리시켰습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세계 종교를 하나로 만들려고 합니다.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WCC같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이라고 하는 아주 무서운 기구를 중세기부터 만들어 놓았습니다. 메이슨이라는 것은 원래 돌을 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이상한 것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들도 프리메이슨 소속이 많이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에 속하지 않으면 아마도 미국 대통령 되기 힘들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 무서운 집단인 것입니다. 이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사탄숭배로 세계를 통일시키려고 하는 무서운 집단인 것입니다. 이 프리메이슨이 역사상 무슨 짓을 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역사가들도 다 알지 못합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한 운동들이 다 일어나도 언제나 참된 백성을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역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노아 홍수때 그랬던 것처럼, 솔로몬 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참된 백성은 비록 소수라도 분리시켜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게 하시고, 참된 복음을 믿고 살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는 소수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 다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소수라도 망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변역지 않는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이 세상에 악이 만연하고 교회 안에 배교가 만연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냉소적인 마음을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가라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알곡이 가라지 때문에 “저것들은 왜 가라진가. 저것들은 왜 알곡이 아닌가. 저것들은 왜 먹어도 영양이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잘못하시네.” 그렇게 고민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알곡은 자신이 알곡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이 세상에 아무리 만연해도 우리 성도들 마음속에는 냉소적인 마음을 갖지 마시고 냉소적인 말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인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면, 심판의 칼 공의를 대시면 졸지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빙판에서 쭉 미끄러져서 졸지에 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라는 선포를 하실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예수 믿어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 의를 행하며 사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하나님을 냉소하지 않는, 도리어 악인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함없이 지켜보시는 하나님
말라기 3장 1-6절 / 이한규 목사
< 변함없는 하나님 >
성공은 어떻게 주어질까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성공을 허락해주셔야 합니다. 또한 좋은 멘토를 만나야 합니다. 며칠 전에 방송된 세계 최고의 출판인 지영석 회장도 멘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자신이 좋은 멘토를 만났기에 누군가의 좋은 멘토가 되어 살겠다고 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성공 가능성도 커집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공 요소는 꾸준하게 자기 일을 감사하며 창조적으로 하는 자세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일하면 깊은 평안이 주어지고 그 평안의 기초 위에 성공도 주어집니다.
어떤 성도는 어려울 때는 기도하다가 성공하면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려울 때도 기도했고 나중에 총리가 되어서도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가난할 때보다 부요할 때 더 잃을 것이 많기에 성공하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조금만 편해지면 기도를 외면합니다. 사실 지금 잘 사는 것은 이전에 기도의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는 외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갈 때까지 계속 기도하십시오.
어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터에서 변함없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일을 잘하다가 훌쩍 떠나버리면 더 손해가 됩니다. 결국 탁월하다는 사람보다 부족하다는 사람이 나중에 보면 더 잘할 때가 많습니다. 교인 중에도 “내가 우리 교회에서 제일 잘났지!”라고 하면 시험과 갈등과 상처가 많이 생깁니다. 반면에 “내가 우리 교회에서 제일 부족해!”라고 하면 교회를 위한 가장 선한 청지기가 됩니다.
영적인 전투는 빨리 달리는 토끼보다 꾸준한 거북이가 결국 이깁니다. 크고 빨리 잘하는 것보다 자기 일을 꾸준히 잘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멀리 보고 목표를 정해 꾸준히 기도하며 나가야 성공합니다. 교회도 떴다방 식으로 대중을 따라 몰려다니면 인물의 길은 멀어집니다. 자기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면서 움직일 때는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결국 인물이 됩니다. 그처럼 변함없는 사람이 복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변함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선한 변화를 이루는 길 >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결한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몇 십 년 후에 생활이 안정되자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후퇴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변해야 할 때도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할 때는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좋은 것을 향해서는 변해야 합니다. 그처럼 복된 존재로 선한 변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죄를 제거하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 구절에서 ‘내 사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고 ‘너희가 구하는 바 주’와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즉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준비되면 곧 메시아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을 예비하려면 가장 먼저 죄를 제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은 금을 연단하는 불과 표백하는 잿물처럼 죄와 각종 불순물을 멸하시는 심판자로 임하십니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죄와 불순물을 제거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최고의 통로입니다.
왜 성도에게 가끔 고난이 주어집니까? 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존재가 되도록 죄와 불순물을 제거하는 하나의 준비과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성도들을 고난으로 연단해 하나님께 바쳐질 만한 공의로운 제물로 만듭니다(3-4절). 그래서 연단을 잘 견뎌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쓰실만한 선한 제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연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즉 사탄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성도를 연단하십니까?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심판을 받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제거해야할 불순물로 하나님은 본문 5절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먼저 점을 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구약시대에 우상숭배와 무속신앙이 창궐할 때는 예언을 빙자한 점이 성행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이기에 재미로라도 혹은 호기심으로라도 점을 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은 잘 몰라도 매일 최선을 다해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의지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나가는 사람에게 가장 복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또한 간음하지 말고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약자를 괴롭히지 않도록 품꾼의 삯에 대해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말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 모든 잘못된 행동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그를 통해 선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소멸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변함없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약속도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는 사람들과 살면서 상처와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사는 제일 비결은 변함없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변함없는 성경 안에 있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계시는 계속된다면서 성경의 변화를 시도하면 성경은 불완전한 책이 되고 성경 말씀을 믿는 것도 불완전한 것을 믿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변화와 수정을 시도하거나 성경 외의 다른 경전을 첨가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완벽한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되기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요새 자칭 신 사도란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로 사도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계시에 특별한 권위를 둡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집착하는 것을 꽉 막힌 교조주의로 여기며 자신들의 영성을 자랑합니다. 그처럼 계시를 펑펑 잘 받는 것이 더 영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 외의 계시를 내세우는 것은 성경을 불완전하게 보는 태도이기에 꽉 막힌 주장 같지만 66권 정경으로 확정된 성경은 세상 끝 날까지 변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것은 그 전의 성경이 불완전했음을 인정하는 성경 남용 행위가 됩니다.
작가는 자기 글이 인터넷 등을 통해 남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이트 운영자는 수많은 남의 설교들을 허락 없이 수집해 자신의 설교 사이트에 축적한 후 가입비를 받고 회원가입을 시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모습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러면 이익금의 50배 이상을 물어주고 큰 제재와 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구입하려면 설교 한 편에 4불 이상을 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돈을 내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습니다.
저작권이 존중되는 사회가 선진사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약해서 지금도 수시로 광고 스팸메일이 거의 매일 옵니다. “VIP 목회자료 판매!” 그 자료들 중 자기네들이 만든 자료나 판매를 허락받은 자료도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자기 홈페이지 자료실에 보관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팔아먹는 것입니다. 용기가 대단합니다. 그런 자료는 불법으로 사지도 말고 그런 사이트에는 유료 회원으로 가입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남의 글을 남용할 때 생기는 문제는 그 글들이 인터넷을 떠돌면서 출처불명의 글들이 되거나 저작자가 바뀔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글로 자세히 검색하고 추적하면 누구 글인지 대략 파악되고 결국 허가 없이 남의 글을 대량으로 살포하면 나중에 걸려들어 크게 배상하는 경우도 요새 많이 생깁니다.
얼마 전에는 한 대형 꽃가게에서 홈페이지에 있는 남의 꽃 그림 하나 잘못 사용해서 5백만 원을 배상했습니다. 요새 왜 백화점에서 캐럴을 듣지 못합니까? 허가 없이 맘대로 틀면 몇 천만 원을 보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점차 저작권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결국 남의 글을 허락 없이 퍼 나르고 이용해 수익을 취하거나 방문자나 회원자 수를 늘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메일로 좋은 글을 보낼 때도 개인이 소수의 지인들과 좋은 글을 공유하려고 출처를 밝히고 인용해 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몇 만 명이나 몇 십만 명의 회원을 가진 단체가 남의 글을 허락 없이 뿌려 새로운 회원이나 후원자를 모집하는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저도 분명히 제가 쓴 글인데 남의 이름으로 되거나 무명으로 처리되어 수십 만 명에게 뿌려진 경우를 몇 번이나 당했습니다. 그때의 불쾌감은 꽤 컸습니다. 그때 성경을 왜곡하고 계시를 남발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실 불쾌감의 크기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누가 출처를 명확하게 밝힐 테니 제 글을 자기 사이트에 실어도 되느냐고 하면 다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퀄리티를 높이려고 수정작업을 하는 글도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완성한 41개 설교파일 중에 3개는 이미 출판했습니다. 출판한 것은 특별 사유가 없으면 더 이상 내용을 바꾸지 않는 최종적인 확정 글입니다. 반면에 나머지 38개 파일은 지금도 계속 수정 중입니다. <산상수훈>과 <스가랴>는 지금 출판 직전 단계인 4교를 진행 중입니다. 저는 교정할 때 내용까지 바꾸면서 교정하기에 처음 설교파일과 4교 후의 설교파일은 내용이 상당히 바뀝니다.
가끔 오래 전 설교를 다시 할 때는 전체 내용의 3분의 2 이상 바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 포털 사이트에서 마구 수집해서 보관된 설교들은 대부분 수정 전의 옛 설교들입니다. 그런 설교들이 그대로 인터넷에 떠돌면 솔직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처럼 계속 교정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하면 책으로 출판하고 더 이상 교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제 글들 중에 어떤 글들은 ‘수정 중인 글’이고 어떤 글들은 ‘확정된 글’입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확정된 글은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한 제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제가 죽어도 후세 사람들이 맘대로 수정하고 뜯어 붙이면 안 됩니다. 후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해석본을 만드는 것은 괜찮지만 원 저자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내용을 바꾸고 첨삭하는 것은 마치 역사 왜곡과 같습니다.
그처럼 한 개인이 최종적으로 확정한 글도 함부로 내용을 바꾸면 안 되는데 하물며 최종적으로 확정된 완벽한 성경을 자기가 받은 계시로 맘대로 내용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리 강론>이나 <몰몬경>을 만들고 교주가 받은 계시를 따라 성경을 영생교 버전이나 다미 버전이나 신천지 버전이나 신 사도 버전으로 엡데이트 하는 것은 탁월한 영성의 표시가 아니고 성경을 불완전한 책으로 만드는 이단 행위가 됩니다. 성경이 계속 수정되고 첨삭되면 어떻게 성경이 영원한 진리가 되겠습니까?
글 중에는 계속 수정되어야 할 글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확정되어야 할 글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진리는 최종적으로 확정될 때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기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화하거나 발전하지 않습니다. 진화하거나 발전한다면 그 전의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변함없는 분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닫히고 막힌 분이라고 하지 않듯이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고 열리지 말아야 할 것은 열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후 397년에 열린 칼타고 공의회 때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어 신구약 66권의 정경이 확정된 후 지금까지 성경은 고집스럽게 꽉 닫힌 상태에서 단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구시대의 교조주의 책입니까? 아닙니다. 온전한 진리는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을 수많은 이단들이 바꾸려고 시도했고 요새는 신 사도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계시도 성경적인 권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렇게 계시를 남발해야 성령 충만한 신앙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계시와 영성을 강조하며 성경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태도에까지 마음이 열리면 안 됩니다. 성경을 온전한 진리로 여기고 그 기반 위에서 해석이나 실천을 다르게 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계시를 남발하며 성경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이고 영성이 아닌 영성의 배반입니다. 그처럼 영성주의자들이 자기 계시를 내세워 성경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훼손한다면 거기에는 마음이 닫혀야 합니다. 성경은 온전한 책이기에 변함없어야 하고 하나님도 온전한 분이기에 변함없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영원히 굳게 믿을 하나님입니까? 속성이 변함없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도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왜 성도에게는 현실이 어려워도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변을 살펴보면 탄식할 일이 참 많지만 그래도 왜 희망이 있습니까? 지나온 경험에 의한 지식과 내일을 향한 의지도 약간의 희망을 주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변함없는 하나님이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은 변함없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희망의 뿌리입니다.
< 변함없이 지켜보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성도의 불순물은 태우지만 성도를 소멸시키지는 않습니다. 성도는 연단은 받지만 버림은 받지 않고 넘어질 수는 있지만 망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의 연단은 정제를 위한 연단이지 버림을 위한 연단이 아닙니다. 요새 불의한 현실에 교회가 침묵하거나 오히려 편승하는 것에 분노해 교회 출석을 포기한 성도들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면 오히려 그의 내면은 더 하나님을 향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와 큰 인물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프랜시스 톰슨은 자기 시에서 하나님을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라고 표현했습니다. 네트영어의 원리로 설명하면 ‘hound(사냥개)’는 ‘hide(뒤에 있게 하다, 감추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 hide라는 단어에서 hind(뒤의)라는 뜻과 behind(뒤에)라는 뜻도 나왔습니다. hind의 분사형 변형형인 hound는 원래 ‘뒤에 있는 존재, 뒤따라가는 존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뒤에서 추적하는 존재는 ‘사냥개’ 뿐만 아닙니다. 어떤 존재이든지 집요하게 뒤따르고 추적하는 존재는 다 hound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끊임없이 추적하는 하운드(hound, 추적자)이십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하나님의 추적을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한 팬이시고 선한 스토커이십니다. 세상 현실에 절망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실망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도 이미 그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의식이 깊이 있기에 하나님의 추적하는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 있기에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통스런 현실을 하나님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베드로가 회개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돌이켜 그를 보셨습니다(눅 22:61). 그 변함없는 사랑의 시선이 베드로를 돌이킨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느낄 때 여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고통에 빠진 성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음을 절감할 때가 많습니다. 물질과 건강을 줄 수도 없고 취직을 시켜줄 수도 없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기도하며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알베르 까뮈에게 질문했습니다. “까뮈씨! 당신은 인생의 허무나 좌절이나 부조리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살아있고 노벨상 수상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신의 삶을 붙들었던 밝은 면도 있었을 텐데 그 밝은 면이 무엇입니까?” 그때 까뮈가 즉시 말했습니다. “제 삶에서 유일하게 밝은 면 한 가지는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머니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알제리에서 탄생한 까뮈는 생후 한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잘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인 홀어머니가 행상과 가정부를 하며 까뮈를 키웠는데 까뮈가 20세에 파리로 떠날 때 어머니는 평생 잊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까뮈야! 항상 너를 생각하며 지켜보겠다. 용기를 가져라!” 그처럼 어머니가 지켜본다는 사실로도 힘을 얻는데 변함없는 하나님이 지켜본다는 사실을 믿으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이제 변함없는 하나님을 믿고 선한 변화를 추구하십시오. 새 일을 시작해서 2014년을 선한 변화의 해로 만드십시오. 그것을 위해 과거를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저어도 왜 건너편에 닿지 않습니까? 배의 밧줄을 육지에 묶은 채 노를 저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과거의 실패와 수치에 묶이면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갈 수도 없고 창조성도 생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잘했던 일도 잘 잊어야 합니다. 잘했던 일을 잊지 못하면 인생을 끝없이 괴롭히고 넘어뜨리는 교만이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죄도 회개했으면 다 잊고 남의 죄도 회개했으면 다 잊어주십시오. 그처럼 자기와 남을 잘 용서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새로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매일 손과 얼굴을 씻듯이 과거에 붙잡힌 마음도 씻으십시오. 과거의 수치와 실패에 젖어 분노와 한탄으로 살면 정신이 병듭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죽고 싶었던 마음을 성령으로 세척하고 그 마음을 내일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승화시키십시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지 말고 지금 남아있는 것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해서 인물 되는 꿈을 이루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큰 기대를 하지만 하나님도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려는 큰 기대를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멋지게 이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거룩한 비전의 조력자가 되도록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잘 잊어야 합니다. 부스럼은 긁으면 더 심해지고 종기는 만지면 더 커지고 디스크와 관절염과 위장병은 계속 신경 쓰면 더 심해집니다. 그처럼 과거의 잘못된 일을 자꾸 긁으면 영혼은 약해지면서 새로운 역사는 더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꿈같이 찬란한 역사를 우리를 통해 펼쳐주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희망차게 가지십시오.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마음속의 절망입니다. 자기 내부의 적을 극복해야 합니다. 내일은 희망을 가진 사람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 안에서는 희망이 있습니다!”고 하며 일어서는 사람에게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처럼 변화하지 않는 하나님 안에 희망을 두고 창조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영적 성장하여 주여
말 3:1-4 / 김근중 목사
바울 선생이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기록하기를,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그리고 기쁨에 넘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처음 복음을 듣던 때부터 지금까지 이 복음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협력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 성장 발전시켜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완성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 것도 하나님의 역사요, 복음의 진리 안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성장해서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완성되는 때가 언제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믿음이 온전케 되어야,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온전케 된 믿음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빌리보서 1장 10-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선택하여 사는 생활입니다.
에스겔 44장 23절에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淨)한 것을 분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도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옳은 것은 선택하여 실천에 옮기고, 그릇된 것은 단연코 배척을 해야,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②누구한테나 비난 받는 일이 없도록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하나님, 우리의 악행이 우리 앞에 쌓이고 쌓였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악이 우리를 규탄합니다. 진실로 우리의 모든 죄가 항상 우리를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쌓이고 쌓인 죄악을 주께 고백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허물과 잘못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기 때문에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내 잘못을 지적할 정도가 될 때에는, '내 죄가 쌓이고 쌓였다'라고 표현해야 좋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한테서나 비난 받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정결한 사람이 되려면, 거듭나고 또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주님을 가까이 만나뵐 수 있습니다.
③하나님의 자녀답게, 언제나 착하고 친절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친절은 크리스챤의 대명사가 되어야 합니다. '아주 친절하기에 알고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 보면, 「사랑은 친절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도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새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성경, 골로새서 3장 4절에도 「언제나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항상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며 부드러운 말을 써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선택하며 사는 생활과, 누구한테서나 비난 받는 일이 없도록 정결한 사람이 되는 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언제나 친절하고 착하게 행동을 해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을 올바른 제물로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1. 온전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얼마전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부도 위기에 있는 광림기계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윤창의'라는 분이 세운 회사인데, 청소차와 소방차와 같은 종류의 차를 만들어 내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기업 운영이 참으로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그의 재산이라곤 성남시에 있는 조그마한 단독 주택 한 채 뿐이랍니다. 회사가 그래도 연간 매출 7백억 원이 넘는 것에 비하면, 그의 재산은 너무 미미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소유한 주식을 몽땅 다 내놓아 비영리 재단을 세우는 등, 좋은 일에 쓰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소유 주식을 사원에게 다 분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이 그의 선한 뜻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경쟁 업체들이 투서를 하고 고발을 계속하는 바람에, 관련 공무원들이 몸을 사리게 되어 납품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광림기계의 부도 위기 소식을 들은 저명 인사들이 발벗고 지원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저명 인사들이 누군고 하니, 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금요일자 신문에 실린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김종일, 박홍, 서경석, 서영훈, 정근모, 조향록 목사 등이고, 토요일 어제 신문에는 김범일, 홍정길 목사 등이 추가로 참여하여, 광림기계를 살리는 시민 모임을 결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을 적극 지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을 이끌어가고 있는 서경석 목사 같은 이는, 경제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을 꼭 살려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기독교인이라면 올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스스로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을 힘써 도와 주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잠언서 4장 18절을 보면, 「올바른 사람의 앞 길은 동틀녘의 햇살 같아서 점점 밝아져 대낮처럼 환해진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3장 10절에도 「복되어라, 올바른 사람. 자기의 일한 보람을 먹고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3장 10절에도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며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을 이모저모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님 맞을 준비를 소홀히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악된 길을 가는 자칭 크리스챤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①마음이 욕심으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뭏든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 수가 없거니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6장 9절에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도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진리를 잘 모르니까,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고, 세상사람들과 힙쓸려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깨달아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 욕심이 생기더라도 그 욕심을 극복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부정직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③구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오늘의 본문 말씀은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라기 3장 1-4절의 말씀을 요약해 볼 때, 「주께서 오시는 목적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올바른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라기 3장 3절에 「주님은 레위 후손들을 금이나 은처럼 정화시키고 순도를 높여서, 그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여호와게 다시 올바른 제물을 바치도록 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67편 2절에서도 「세상이 당신의 길을 알게 하시고 만방이 당신의 구원을 깨닫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은,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길을 가도록」하시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길을 가도록, 그 길을 열어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며, 그 길을 다 갈 때까지 도와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 살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저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또 다시 왜 오신다고 하는 것인지, 그 목적을 말씀 드렸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시고 그 길을 가시려고,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2.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성장케 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도와 주시고 있습니다
시편 69편 19절에 「날마다 주를 찬양하여라.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도 「하나님, 당신의 사랑 끝이 없사오니, 당신 구원의 진실됨을 나에게 들려 주소서」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가는데 짐이 되는 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광림기계를 살리는 시민 모임>에서는 윤창의 씨로 하여금, 다시 한번 '올바른 기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또한 기업 운영의 짐이 되고 있는 부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은 윤창의 씨로부터 무슨 댓가를 받고자 함이 아니라, 바르게 살려는 그를 돕고자 하는, 순수한 사랑을 갖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들보다 더욱 크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바르게 살려는 사람을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틀림없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 도와 주심의 첫번째가 바로,
①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믿음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말라기 3장 3절에 보니 「주님은 제련공처럼 앉아서, 저희를 녹이고 찌꺼기를 제거해서 순도를 높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순수하고 온전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녹아지고 새롭게 변화되어, 인간의 본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금을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할 때 정금이 되듯이, 우리 또한 죄와 허물을 벗겨냄으로써 '깨끗한 마음'을 지닌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②그렇게 되면,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비추게 하시며 평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79절의 말씀에,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는 길」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그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밝은 빛을 비추게 하시고 평안한 길을 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72절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잠깐 동안 기쁨을 주고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원은 잠시 괴로움이 따르지만 영원한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 말씀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맞을 준비를 온전히 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성장할 나이에 자라지 않게 되면 불구자가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을 하다가 자라지 않게 되면 영적 불구자가 됩니다.
국화를 키워보니, 꽃이 핀 뒤에도 키가 계속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이 성장하기를 멈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장을 하고 계속 성장해서 완성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거듭나기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①말씀을 지키고 증거하며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빌1:7).
빌립보서 1장 3-11절의 말씀을 분석해 보면, 복음과 예수, 그리고 하나님의 복과 선한 일이 다 같은 뜻을 지닌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그의 삶이 곧 복음이요, 그 복음은 올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인 것이며, 그 올바른 삶 자체가 하나님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켜 삶으로써 올바른 길을 가고, 올바른 삶을 삶으로써 말씀을 증거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삶이란,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윤창의 씨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그 윤 씨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많은 저명한 기독교인들이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이런 삶을 살려면, 회개하고 구원함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진정 돌와와야 합니다. 얽매인 세상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욕심으로 시작했던 일들을 팽개쳐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성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병든 살을 도려내야, 새 살이 돋아서 건강하게 됩니다. 병든 살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는 온 몸을 썩게 합니다.
지금 당장,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끊어버려야 할 것은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져야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뵙게 되는 순간, 내 인생 전부를 맡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사가랴가 예언하기를(눅1:68-75), 「주님은 오셔서 백성을 구원하여(68),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74), 우리를 깨끗하고 올바르게 만드신다(75)」고 했습니다.
①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어 주를 높이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자라서 성숙해지면 부모가 기뻐합니다. 성도가 믿음이 자라서 온전해지면 목사가 기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어 올바른 삶을 살게 될 때에,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되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누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윤창의 씨를 도와 주려는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그를 도와 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삶을 살려고 애쓰면서, 이웃이 주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 힘이 되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는,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주가 갑자기 임하시리니
말 3:!-5 / 홍인식 목사
말라기는 어떤 책인가?
지난주부터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믿음의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회복하게 만드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섬김과 나눔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오심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향한 희망을 갖게 만드는 기쁨의 소식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주의 오심은 믿는 이들의 삶의 모습을 결정짓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일과인 말라기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오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말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성경이름입니다.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말라기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말라기를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라기는 주전 450〜35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는 이미 바벨론 포로 이후 성전 건축이 마무리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덧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이미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자들은 부패하였습니다. 한편 백성들은 거기에 대해서 나태해졌고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 말라기는 이러한 신앙의 형식주의와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 예배를 비판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라기의 주요 내용입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심지어는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마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말 1:10)라고 전하면서 타락하고 부패한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부패한 성전예배를 비판하는 가운데서 말라기는 십일조에 대하여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말라기를 읽으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처럼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의 삶은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말라기가 예언한 것처럼 오늘 하나님도 우리들을 향하여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하고 싶으신지도 모릅니다. 말라기는 믿음과 삶의 실천이 너무나도 동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오늘과 같은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의미 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오심에 대한 예언
말라기는 이처럼 당시의 부패한 종교제도를 향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거나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드시고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못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기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하여 다시금 그의 백성들을 회개를 향하여 부르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준비시키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사자를 보내시는 하나님
먼저, 하나님은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형식적이고 타락한 성전예배를 갱신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자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자, 자신의 사람을 보내신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일의 경우에 하나님이 직접 오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즉각적인 심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그의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즉각적인 멸망을 당하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포함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러한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을 향한 사랑과 깊은 배려의 표현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심판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즉각적인 멸망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하고 형식적인 신앙을 질책하시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제 2의 기회를 주시고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되었으며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믿지 못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으로부터 우리는 회개하고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처럼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고 예비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삶에 경고하시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나라에 걸 맞는 모습이 되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에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임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나라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이 땅을 향하여 오시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 모두가 하나님나라의 길을 닦고 준비하는 대강절 기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의 길을 닦고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길을 닦는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라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3:3)
그렇습니다. 형식만 남아 있는 우리의 신앙, 그 뿐만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하고 부패되어 있는 우리의 모든 신앙의 모습을 단련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임무는 우리들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올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는 어떤 일들을 하는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자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 가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지적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될 것이고 그 뿐만 아니라 그 말이 너무나도 거북하여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며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3:2)
하나님의 사자는 금과 은에 혼합되어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뜨거운 불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는 천에 묻어 있는 온갖 잡티와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여 옷을 하얗게 만드는 양잿물과 같은 따가운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할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짚어주고 지적해 주는 것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아픈 말을 견디지 못하고 오늘의 위치에서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희망은 오늘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힘들지만 내딛는 발걸음들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들을 향하여 들려지는 아픈 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단지 교회성장을 방해하기 사탄마귀들의 계략이라고 하면서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면 돌들이라도 소리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은 우리를 향환 질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2009년 대강절은 우리로 하여금 2010년을 희망으로 맞이하도록 할 것이고 내년도 우리 교회의 살아가는 모습을 크게 변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도약하는 한 해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자는 우리를 깨끗케 하여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3:3)
하나님의 사자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식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한 삶의 모습을 교정시켜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가끔씩 질문을 갖습니다. 과연 내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실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과연 나는 올바른 신앙인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내가 드리는 예배는 올바른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시인도 늘 그런 질문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시 15:1)이라고 노래하면서 자신의 갈등과 고민을 했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15:2〜5)
이러한 모든 고백들은 우리 모두의 갈등과 고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들을 다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로 하여금 점차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 주님의 삶의 태도와 삶의 모습을 배우고 그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은 하나님의 사자인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되시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분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대강절 기간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면서 오직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며 또 하나님께 바쳐지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제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감으로서 하나님께 올바른 제물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
오늘의 본문은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사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라는 예언을 통하여 말라기는 우리들에 대한 심판이 임박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오는 하나님의 사자는 심판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 길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경고나 격려의 차원을 넘어서서 주님의 사자는 심판이라는 강력한 방법을 사용하여 주의 오시는 길을 닦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날은 갑자기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될 것인데 그 심판을 피해 나갈 방법은 애초부터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3:5)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주님의 심판의 기준은 두 가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점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자신의 삶의 길로 삼지 않고 이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정당치 않은 방법이라도 성공을 이루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점치는 것, 간음하는 것, 거짓증언 하는 것 등은 모두 삶의 정당한 방법들이 아닙니다. 정당치 않은 방법으로 얻은 모든 것들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녹슬게 만들고 썩어 들어가게 만듦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심판을 면치 못하게 할 것입니다.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의 사자를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당치 못한 삶의 방법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방법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결단하게 하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 기준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의 삶에만 몰두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삶이 편안하고 좋으면 다른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과 이웃의 삶을 분리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결단은 나 혼자만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삶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과부와 고아들이 발생하지 않고 인권이 유린되지 않으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또한 나그네들의 삶이 외롭지 않도록 친절과 관용의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2009년 대강절 기간 동안에 우리는 주님의 사자의 말을 경청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서 주가 갑자기 임하시더라도 그 분을 진정으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
말 3:1-6 / 이삼규 목사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한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입니다.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 씨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이가 조금 있다 얼굴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 "나에게 제일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 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 내가 말하는 말, 내가 행하는 행동,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선생이면 선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장관이면 장관으로서 행한 모든 것,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서 행한 모든 것, 대통령이면 대통령으로서 행한 모든 것, 목사면 목사로서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요즘 들려오는 소식마다 우리의 마음을 암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게이트가 생겨나고 며칠 전에는 군산에서 유흥주점에 화재가 발생하여 12명의 생명을 앗아간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작년에도 같은 군산 대명동 화재 사건으로 세상을 얼마나 떠들썩하게 하였습니까? 그럼에도 그런 일이 같은 시내에서 또 다시 발생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끔찍한 인명 피해를 자초한 것은 업소 입구에 여성들을 감금하기 위한 특수 잠금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는 열 수 없는 특수 잠금 장치가 12명의 인명 피해를 불러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접하면서 이것이 먼 나라 또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요, 우리의 죄악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봅시다.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장 17절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말씀을 보면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자신들이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에 대한 답변이 오늘 본문 1절에서 6절에 나타납니다. 심판하러 오시겠다는 말입니다. 오늘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1. 길을 예비할 하나님의 사자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심판의 주님이신 언약의 사자가 오시기 전에 먼저 "내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말라기란 이름 자체가 '나의 사자'(my messenger)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하였던 세례요한을 가리킵니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세례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씀합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어떤 고을을 행차하게 될 때 먼저 사자를 보내어 그 길을 마련합니다. 멀리 옛날을 생각할 것도 없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대통령이 어떤 지방을 시찰하게 되면 갑자기 시골이라도 곧 바른 포장길이 생기기도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그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나의 사자'는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눅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말라기 4:5절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입니다.
중국 용정에 가면 일송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용정에 살던 독립투사들이 모여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의논하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에 푸른 소나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일송정이라 부르는데 물론 지금은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일송정이 있었던 그 자리에는 일송정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고 그 아래 조두남씨가 작사한 선구자의 노래 시비가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해란강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온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살기 싫어하는 광야에 거처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결국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고독하고 외롭고 인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을 우리가 이야기 할 때 그가 정말 위대한 설교자였고, 세례를 주는 분이었고, 사회 개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그렇게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설교를 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세례를 주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사회를 개혁하고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세상을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삶의 목적과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의 인생의 사명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자기 생애 전체를 던져서 증언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그의 목이 잘려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사회 정의나 설교가 아닌 예수였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예수님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발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당신이 누구요' 라고 말할 때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 말은 거짓되고 과장된, 사람들이 기대하는 자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이기를 바랬습니다. 그가 예수이기를 바라는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세례 요한에게 다가와 질문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첫 대답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위기는 아니오 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적당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와 생각에 적당히 타협하고 나는 이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혼돈이 옵니다. 갈등이 오고 섭섭함이 옵니다.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왜 이토록 자신을 그리스도라 칭하는 재림 예수가 많습니까? '아니오'라는 말을 못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기 때문에 은근슬쩍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에게서 배워야 하는 중요한 것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요한은 대답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엘리야냐? 선지자냐? 라고 계속 질문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우는 두 번째 메시지는 당신을 정의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정의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당신에게 부여해준, 하나님이 부여해준 사명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만 주는 사람도 아니오,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오, 사회 개혁가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그에게 부여해준 별명대로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만나볼 수 있도록 높아진 것을 낮게 만들고 낮은 것을 높게 만들고 그의 길을 곧게 만드는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역할,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소리"는 포네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주님을 태우는 나귀가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예비한다'는 말은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여 깨끗케 한다(make clear)는 뜻입니다. 진실로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최후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주의 길을 깨끗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오랫동안 죄악의 잠을 자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움을 선포하며 회개의 세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죄악과 담대히 싸우며 율법의 정죄를 선포하고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는 실로 율법의 마침이요, 복음의 시작이었고, 빛에 앞서는 등이요, 말씀에 앞서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신약과 구약의 중보자요, 약속과 성취의 고리였고, 아침을 알리는 새벽별이었으며, 태양에 앞서는 여명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는 지나긴 밤의 끝이었고 밝은 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구자가 길을 닦아 놓았을 때 오신 분이 계십니다.
2. 심판의 주님이신 언약의 사자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장 17절에서 그들이 누구를 구하였습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로 너희가 구하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모하는 메시아는 자기 나를 다시 일으켜 줄 군사적인 메시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중요한 이유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유대나라를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였는데 그것이 무산되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언약의 사자'는 그런 메시아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는 홀연히 임하시는데 심판의 주님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말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의 임하시는 날,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당하며 누가 능히 설 수가 있겠습니까?
시 130: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욜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이 말씀은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경건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 죄악 중에 있는 불경건한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날은 그저 파괴를 위한 무서운 심판의 날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금을 연 단하는 것 같이 택한 백성들을 순결케 하기 위한 날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재림 때만 있을 일이 아닙니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처럼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심판은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초림의 심판이나 재림의 심판은 별개의 것이라고 볼 수 없고 하나의 연속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심판의 방법
죄인을 깨끗케 하는 심판의 두 가지의 재료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불입니다.
"금을 연단하는 불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불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소멸하는 성질과 정결케 하는 성질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바울 사도는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되는데 불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눅 12:49)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불은 모든 것을 녹입니다. 그러나 금은 불로 연단하여도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금도 불에는 녹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정금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과 같은 시련을 통과하여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불과 같은 시련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불의 심판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까?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2)잿물입니다.
하나님은 불로만 아니라 "잿물"로 택한 자들을 표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형벌을 받아야 하는 흉악한 죄인들에게는 '소멸하는 불로' 임하여 저들을 멸할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표백하는 잿물'로 저들을 깨끗이 씻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빨래를 하려면 비누나 표백제가 없기 때문에 재를 가져다가 물을 부으면 거기에서 잿물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빨래를 하였지만 오늘날처럼 깨끗하였습니까? 아마도 성경이 오늘날에 기록되었다면 '표백하는 잿물'이라는 말 대신 "표백하는 락스" 또는 "표백하는 옥시크린(표백제)"으로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저희 어렸을 때 보면 양잿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광목을 떠다가 양잿물을 넣고 푹푹 삶으면 하얗게 표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에 보면 잿물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렘 2: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그렇다면 잿물이 더러운 옷감을 깨끗하게 표백하는 것처럼 인간들의 죄악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사도 요한도 계시록에서 증거하였습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심판의 주님께서 불로 연단하시고 잿물로 표백하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연단 받을 때 낙심하지 맙시다.
4. 심판하시는 목적
주님은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시되 금, 은과 같이 그들을 연단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 까요?
1)의로운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말 2: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연단 하시므로 의로운 제물을 드릴 수 있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레위 자손은 문자 그대로 레위 자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영적인 레위 자손들을 말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믿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의로운 제물'이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예배와 생활 예배를 통해서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신령한 제사장들입니다.
2)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헌물을 드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옛날 고대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모세의 시대나 다윗의 시대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에는 형식적인 제물이 난무하였고 불의한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불과 같은 심판을 통해서 연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헌물을 드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말씀이 주어지고 만 백성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을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
사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첫 교회가 세워진 후 어디서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의 주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금과 은을 연다하는 것처럼 연단하셔서 죄인들로 회개하게 만드시고 또한 잿물로 빨래를 희게 표백하는 것처럼 보혈로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술수를 행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삭에 대하여 억울케 하는 자,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는 자, 나그네를 억울케 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들이 어떻게 심판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6절에 보니까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로 심판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소유하셔서 신령과 진정의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는 헌물을 드리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