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될 것 같다.
북한은 우크라이나의 배후인 미국에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의 배경에는 미국의 개입과 NATO를 후원하고 있는 미국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로 벌어졌지만, 결국은 일본군이 개입하여 실패했으며,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대한제국을 병합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그 일부가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서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려고 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130년전 일본, 그리고 지금의 미국은 한반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남한은 균형을 가진 외교 감각이 필요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분쟁이 아닌,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를 가진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특히, 소련 해체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더 긴장 상태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현재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본 섹션에서는 소련 해체와 그 후유증,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독립 과정과 유럽 연합 가입 시도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소련의 해체는 1991년, 그간 지속되었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을 선언한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우크라이나는 그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으로 인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은 러시아의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해 왔으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는 두 국가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긴장 관계가 현재의 전쟁까지 이어진 주요한 요소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경제적 및 정치적 유럽 통합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유럽 연합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자주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서구와의 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러시아의 강력한 저항을 초래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2013년에 EU와 협상하던 중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가하자,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유럽 합작에 대해 증오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바로 2014년의 우크라이나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이 혁명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민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EU 가입 열망은 러시아의 심기를 더 건드렸고, 이는 궁극적으로 크림 반도 합병 및 동부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더욱 깊은 민족적,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고, 지금의 갈등에 대한 복잡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189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란으로,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동학란(東學亂)', '동학 민란'으로도 불린다.
조선의 양반이자 사상가인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데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조선 말기 순조 시대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크게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듯 자연스럽게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와 관리들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 농민들의 분노로 인해 발생한 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 농민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고부지역은 전통적으로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매우 심한 곳이었다. 특히 1880년대말경부터 봉건정부 스스로도 궁장토의 확대 특히 균전수도(均田收賭) 문제와 같이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거나 지대를 수탈하여 지주제를 확대·발전시키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의 고율수세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했다. 고부농민들은 1893년 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이었으며, 이른바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결국 북한은 130년 전 동아시아에서의 대한제국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