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의 포엠조명
심미적 기억
ㅡ이은규의「나무의 눈꺼풀」
나무의 눈꺼풀
잎은 나무의 수많은 눈꺼풀
둥치가 바람에게 말을 걸고 나무의 기억이 흔들린다
기억 몇 잎 떨어진다 해도 한 뼘 그늘을 개의치 않을 나무
잃어버리다, 잊어버리다
잠든 당신의 눈꺼풀에 반달이 내려앉으면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외운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꼭 두 개의 잎을 갖는 슬픈 종(種)
눈꺼풀을 떠나보낼 때의 나무는
새로 돋아날 後生의 잎들을 이미 깜박이고 있을 텐데
다만 몇 잎의 기억, 후두둑 강물 위로 떨어진다면
물 위로 흐르는 눈꺼풀의 변주에 오래 귀 기울일 뿐
물에 관한 나무의 기억이란, 내 몸의 수액이 나이테를 돌아 당신에게 가
닿는 이치
잠든 눈꺼풀에 눈꺼풀을 포개어보는 일
몸에 푸른 물이 들어도 좋겠지만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어느 방랑
또한 잠들지 않기 위해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처럼
당신은 내 검은 안구마저 지우는 黑點의 시간일 것
언젠가 눈꺼풀의 떨림으로 오는 당신의 안부를 맞겠다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다 외우기도 전에
텅 빈 나뭇가지에 걸릴 반달의 눈꺼풀
ㅡ「나무의 눈꺼풀」전문
눈꺼풀의 떨림으로 오는 당신
이재연(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상상력은 대상이나 사물을 지각하는 능력 중의 하나이다. 낯선 상상력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다시 태어난다. 그 때 태어난 사물과 대상은 기존의 사물이 아닌 낯선 사물로 혹은 새로운 세계로 거듭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잎은 나무의 수많은 눈꺼풀”이라고 명명했을 때, 나무는 새롭게 태어난다. 이 때 태어난 나무는 물질문명의 대척점에 있는 자연 속의 나무도, 삶의 배후나 배경 속에 서 있던 나무도 아니다. 자신의, 자신을 위한 눈꺼풀을 매달고 있는 고유한 나무의 속성으로서의 나무이다. 잎이 나무의 눈꺼풀이 되는 순간 나무에게는 수많은 눈꺼풀이 태어나고 바람에게 말을 거는 둥치가 태어나고 흔들리는 기억(잎→눈꺼풀→기억)이 태어난다. 수많은 눈꺼풀을 깜박이고 있는 새로운 나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잎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 둥치가 말을 걸자 “나무의 기억이 흔들린”다. 나무에 있어 흔들리는 것은 숙명이다. 나무는 뽑히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의 흔들림은 무의미한 흔들림이 아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고 시간을 내면화 시키고 있는 나무의 흔들림은 곧 순환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기억의 흔들림이 되는 것이다. 이은규의「나무의 눈꺼풀」에서 기억은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의 이야기나 사건이 아니다. 잎이 눈꺼풀이 되는 순간 잎은 또다시 기억으로 변주되고. 기억은 잎이라는 사물과 중첩되어 시각화가 된다. “기억 몇 잎 떨어지”는 것은 새로운 기억의 형태가 된다. 사건이나 이야기가 아닌 기억 자체가 사유화된 기억이므로 이 기억의 이미지는 둥치가 바람에게 말을 걸 때의 형상이 되었다가, 잎이 떨어져도 한 뼘 그늘을 개의치 않을 나무가 무언가를 “잃어버” 린 후 “잊어버리”는 일처럼 내면의 일이 형상화 되어 있는 기억이 되기도 한다. 그 기억 끝에 화자는 잠든 당신의 눈꺼풀을 생각한다.
잠든 당신의 눈꺼풀에 반달이 내려앉으면 “기울지 마, 기울지 마”라는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읊는다. 나무의 그늘에서 빌려온 소절의 내용은 무엇일까. 잎이 돋아나고 떨어지는 평범한 순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무의 그늘이다. 이런 순환의 기억과 연관하는 것이 “잃어버리다, 잊어버리”다 로 축약되어지는 소멸에 대한 형상이기도 하다. 이 형상 또한 그늘과 연동하고 있으므로 나무의 그늘 속에서 빌려온 것은 소멸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라고 당신의 희미함에 대해 안타까움을 간구하고 있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꼭 두 개의 잎만을 갖는 슬픈 種”이라며 대상에 대한 간절한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다.
눈꺼풀을 떠나보낼 때의 나무는
새로 돋아날 後生의 잎들을 이미 깜박이고 있을 텐데
다만 몇 잎의 기억, 후두둑 강물위로 떨어진다면
물 위로 흐르는 눈꺼풀의 변주에 오래 귀 기울일 뿐,
물에 관한 나무의 기억이란, 내 몸의 수액이 나이테를 돌아 당신에게 가
닿는 이치 <!--[endif]-->
- 「나무의 눈꺼풀」4,5,연
잠든 눈꺼풀에 눈꺼풀을 포개어보는 일
몸에 푸른 물이 들어도 좋겠지만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어느 방랑
또한 잠들지 않기 위해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처럼
당신은 내 검은 안구마저 지우는 黑點의 시간일 것
언젠가는 눈꺼풀의 떨림으로 오는 당신의 안부를 맞겠다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다 외우기도 전에
텅 빈 나뭇가지에 걸릴 반달의 눈꺼풀
- 「나무의 눈꺼풀」6,7연
위의 4, 5연의 주어는 “나무는”이다. 그러나 4,5연의 핵은 정작 당신이다. 나무는 잎을 떠나보낼 때 이미 새로 태어날 잎들을 깜박이고 있다. 몇 잎의 기억이 강물 위로 떨어진다 해도 물 위로 흐르는 눈꺼풀의 변주에 귀 기울일 뿐, 물에 관한 나무의 기억이란 내 몸의 수액이 나이테를 돌아 당신에게 닿는 이치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잎을 강물 위에 떨어뜨린 나무는 물을 기억하고 그 나무의 기억으로 화자는 내 몸의 수액을 생각한다. 내 몸의 수액이 나이테를 돌아 가닿는 곳이 있다. 아무리 벗어나도 중심을 벗어날 수 없는 나이테를 돌아서 닿는 곳이라면 그곳은 매우 깊거나 은밀한 곳일 것이다. 그곳은 곧 ‘당신’이라는 곳이다. 그렇게 중심의 중심 속에 있는 당신이기에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당신이지 않을까. 그 “잠든 당신의 눈꺼풀”의“당신”에게 가 닿는 적극적인 행위란 “잠든 눈꺼풀에 눈꺼풀을 포개어보는 일”이다.
잠든 일이란 무엇일까. 현실을 잠깐 잊는 일이다.관계와 관계들이 잠시 관계망을 벗어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아주 잊어버리지는 않는 상태, 상황이나 조건에서부터 잠시 벗어나 있는 일이다. 뿌리가 뽑혀 죽거나 고사하지 않는다면 나무에 있어서 잠든 일이란 어떤 상태일까. 잎을 다 떠나보내고 난 후의 텅 빈 가지의 상태가 아닐까.
잠든 당신의 눈꺼풀이라고 했을 때 당신은 화자에 의해 불려 나오는 당신이다. ‘잠든’이란 단어는 시적 화자가 ‘당신’에게 부여하는 형용사로서 ‘당신’은 화자에게 있어서의 잠든 당신이다. 잠들어 있으므로 시적 화자에게는 간절하게 부르는 당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와 당신과의 시적거리는 멀 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먼 거리일 수밖에 없다. 멀고도 가까운 그 거리는 “눈꺼풀에 눈꺼풀을 포개어보는 일”, 또는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어느 방랑”처럼 절실해서 슬프고, 슬퍼서 절실해지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된다.
나무가 잎을 떠나보내는 일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다. 그것은 이미 새로 돋아날 후생의 잎들이 깜박이고 있기 때문이다. 잎이 떨어지는 것은 다시 돋아 날 새로운 후생, 없으면서도 있는, 후생의 잎들을 위한 순환의 일이기도 하다. 후생의 잎들은 나무속에 있을 것이다.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아닌 흑점처럼 엎드려 있을 것이다.
이미 당신은 무엇도 아닌 채, 무엇이 아니면서 또렷이 존재하는 흑점처럼 “내 검은 안구마저 지우는 흑점의 시간”이 되어 화자의 의식 깊이 들어 와 있다. 화자의 깊은 의식 속에 있는 당신은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흑점의 깊고 내밀한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이, 몇 잎 기억으로 떨어지는 당신의 형상을 심미적 형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 형상은 “눈꺼풀의 떨림으로 오는 당신의 안부를 맞는 일처럼” 매우 깊고 섬세한 떨림을 동반한 심미적 기억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나무의 눈꺼풀」속의 ‘당신’은 현실의 재현이나 반영 속에 있지 않다. 구체적 상황이나 삶의 토대 위에 있지 않다, 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므로 당신의 형상은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형상이 아니다.당신은 사회적 당신이 아니고 마음속의 당신이다.마음속의 당신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나무의 눈꺼풀」속의 나무는 화자의 ‘마음속’에 있는 ‘당신’에게 깊이를 부여해 주고 있다. 이때의 나무란 겉의 모습이 아닌, 내부를 깊은 시선으로 응시한 나무이다. 나무의 내면을 외면화 시킨 나무이다.
섬세한 감각과 더불어 지각 능력을 통해 잘 세공된 당신은 섬세하다. 이 섬세함이 깊이를 가지고 있고, 그 깊이가 사유를 포함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위의 시가 다른 시와 변별되는 지점은 감각적이면서도 지각을 잃지 않는 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한 시인의 스타일이라면 그 스타일은 표면인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스타일은 겉이 아니고 어떤, 안과 내면을 발현하고 있는 가이다. 소재와 주제가 어떻게 항상 다를 수 있겠는가. 그것을 새롭게 하는 것은 내부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나무의 눈꺼풀」은 겉이 아닌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