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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죄(Felix culpa)>
“밀농사에 도움이 안 되는 ‘가라지’들을 보는 족족 솎아낼까요?”라는 질문에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와 무서운 분이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자녀에게 호통을 치면서 빨리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아버지의 모습일 텐데, 잘못을 저지르는 그 순간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대박’으로, ‘보란 듯이’ 크게 손 좀 봐주겠다는 의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였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정말이지 큰 뜻, 엄청난 배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보면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청소년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로 열매 맺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어떤 죄에 한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 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기대를 합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의 원천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지체 없이 공격하여 하루 빨리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오게 하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보다 깊게 호흡하시며 보다 큰 걸음을 옮기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램도 너무 기대치가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추구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의 이 고통, 이 부족함, 때로는 참혹함을 견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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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27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탈출24,3-8 마태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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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
-영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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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밀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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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발설하신 예수님은
농사일에도 많은 관심을 지니신 분임이 분명합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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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나는 농부다’라는 제하의
나눔 텃밭 지킴이 이복자씨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농사일 보다 사람이 힘들죠.
…농사일을 하다보면 맑아지고, 순해지고, 편해지는 것 같아요.
…다 다르잖아요. 씨앗, 열매, 잎, 뿌리 생김새도, 빛깔도 같은 게 없지요.
맛도 그래요. 상추는 상추 맛, 배추는 배추 맛이죠.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까 편해요.
힘들다고 느끼니까 힘든 거지요.
예전에 싫으면 내가 그만두면 되지 그랬죠.
근데 농사짓다 보면 소통하고 상생하려는 기운이 북돋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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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수행을 통해 하느님을, 자연을, 이웃을, 나를 만남으로 깨달음에 이른,
밀같이 선한 분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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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으면 밀이고 나와 다르면 가라지인가?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가?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성선설이여 성악설이냐?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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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선악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지혜로운 처방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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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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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현실이나 내 마음을 봐도 분명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100%순도의 선한 공동체도,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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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나 밀과 가라지가, 선과 억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만일 가라지가 없는 현실이라면 바람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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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겁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영적전쟁 중에 성숙되어 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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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선악의 공존에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라는 영원한 숙제가 오히려 전의를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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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선악의, 밀과 가라지의 공존인데 적정한 균형상태의 공존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온통 가라지들 무성한 균형을 상실한 가라지 밭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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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밀과 가라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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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닌 그 누구도
선악을 구별해내지 못하거니와 악을 제거하지도 못합니다.
잡초를 없앤다 하여 제초제를 뿌리듯 가라지 같은 악인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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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를 거두어 낼까요?’
묻는 눈먼 열정의 종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인은 그대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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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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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를 뽑다간 폭력의 악순환입니다.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깰 수 있습니다.
단점을 없애려다 장점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가라지인 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라면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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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인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밀인 경우의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의 판단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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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밀과 가라지의 현실을 끝까지 인내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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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바로 이게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공존현실을 살아내는 게 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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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를 본받는 일이며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를 둘 때 가능합니다.
가라지의 운명은 온전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형제들에게 약점의 가라지를 뽑지 말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촉구합니다.
세상에 가라지의 악을 제거하려던 혁명이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뽑아도 줄기차게 솟아나는 잡초처럼 계속되는 악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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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끊임없는 수행입니다.
내적혁명의 수행만이
밀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가라지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수행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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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 소홀하거나 이완될 때
공동체나 마음 밭은 곧장 가라지 밭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수행으로 공동체를, 나의 내면을 가꾸고 돌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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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 탈출기가 복음의 밀과 가라지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계약이 흡사 성체성사의 새 계약을 연상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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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계약의 책을 들고 백성에게 읽어주자 모두 화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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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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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은 후 이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 합니다.
마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뵈오며 성체를 모시는
미사잔치와 흡사한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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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맺은 계약대로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약화되는 악(가라지)의 세력이요 강화되는 선(밀)의 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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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평생 거행되는 이 거룩한 미사와 성무일도의 수행이 우리 안의 악(가라지)의 세력을 약화시켜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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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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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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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탈출 24,3-8
복음 마태 13,24-30
제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정전될 때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집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 양초였지요. 그리고 어두운 저녁시간에 정전이 되었을 때 이 양초만 켜면 아무런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즘에 정전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잠깐 정전이 아니라 몇 시간씩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마 커다란 난리가 날 것입니다.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는 어떻게 할 것이며, 습관적으로 보는 텔레비전이 켜지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복잡한 도로 역시 신호등이 켜지지 않아 교통대란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물건을 구입하고 싶어도 카드를 인식하는 기계가 작동하지 않으니 물건을 살 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전기를 정말로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긴 현재 서울시에서만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이 100년 전 전 세계 인구가 사용했던 에너지의 양보다도 더 많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전기 없이는 잠시도 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기에 혹시라도 부족한 상황에 놓여 지면 안 되기 때문에 ‘에너지를 아껴 쓰자.’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캠페인으로만 끝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활 안에서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나요? 정말로 중요하다면 아끼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과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소중하게 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중요하십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또한 지금의 삶 안을 더욱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과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주님을 소중하게 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소중하신 분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당신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가라지를 뽑다가 멀쩡한 밀을 뽑을까봐 수확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이처럼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날이 아직도 멀었을까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소중하게 대해주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지금 당장 안일한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을 내 안에서 몰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뽑혀 사라질 가라지가 아닌, 좋은 밀의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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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토요일>(2013. 7. 27. 토)(마태 13,24-30)
<가라지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 그는 이렇게 일렀다.
'...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30)
마태오복음 13장 36절-43절에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설명을 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고,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밀밭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것은
사탄이 신앙인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또 가라지가 드러났다는 것은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밭주인이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방치하라는 것이 아니라
밀이 완전히 자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밭주인이 보호하는 것은 가라지가 아니라 밀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2베드 3,9).
루카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집을 떠난 것은(루카 15,12-13)
일은 하기 싫고 놀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작은아들의 마음 밭에
'놀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는 가라지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가서 방종한 생활을 한 것은
가라지가 밀보다 더 많이 자라서 밀을 이긴 것입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마음 밭의 가라지만 보고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의절을 했다면,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면,
아들의 마음 밭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밀'이
(회개하고 성실한 아들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이)
완전히 말라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고,
아들이 돌아오자 환영하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마음 밭에 가라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자라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큰아들의 마음 밭에도 가라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라는 큰아들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도 놀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큰아들이 동생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가라지이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도 가라지입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것은
아들의 마음 밭에 가라지보다 밀이 더 많이 자라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들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신 것은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가라지만 잔뜩 자라는 황무지처럼 보여도
그래도 그 속에 밀도 조금은 자라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고,
잘 가꾸면 밀밭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이 자기들은 풍요로운 밀밭이라고 자만하면서
자기들 마음 밭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입니다(루카 22,3).
그것은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가라지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지만 유다를 꾸짖거나 파문하지 않으셨고,
마지막까지 사도들에게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마음 밭에 가라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고
유다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에 유다가 회개하고 되돌아와서 용서를 청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유다가 자살한 것은
자신은 용서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가라지 밭이라고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회개와 용서를 포기한 것도 그의 큰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은 '하느님의 밀'과 '사탄의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입니다.
가라지를 누르고 밀만 잘 가꾸면 밀밭이 될 것이고,
밀이 가라지에게 눌려서 말라죽게 내버려두고 가라지만 자라게 하면
가라지 밭이 될 것입니다.
이 밭에 가라지를 뿌린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지만,
밀이 가라지에게 눌려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방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처음에 유혹이 다가온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지 않고
그것에 빠져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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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아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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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의 밀밭에 그의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뿌려 버립니다. 밀이 한창 자라기 전에는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인지 몰라서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않고 기다립니다. 수확 때에 밀과 가라지가 확실히 구별되면 그때 뽑아 버릴 생각입니다.
사제품을 받고 꼭 10년이 되던 날, 지난 사제 생활을 가만히 성찰해 보았더니 ‘밀’도 있었고 ‘가라지’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께서는 ‘밀’의 선물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반면, 순수했던 열정이 다소 식어 가고, 좋지 않은 습관들이 쌓여 가며, 기도를 소홀히 하는 면에서는 ‘가라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찰 뒤에 성체 조배를 하는데, 하느님께서 제 가슴속 깊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모두 나에게 맡겨라. 농부는 네가 아니라 나다. 너는 내가 이끄는 대로 자라기만 하여라. 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나는 그대로 두겠다. 그렇다고 네 밭이 밀밭에서 가라지밭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만 맡기면 된다. 내가 농부이다.’
사제의 길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사제의 길뿐 아니라 부부의 길에도, 젊은이들의 길에도, 아니 모든 삶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농부이신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저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에 따르십시오. 밀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양분이 그분께 있고, 가라지의 성장을 가로막을 제초제 또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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