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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말씀의 초대
죄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의 결말은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제1독서). 복음이 선포된 자리에는 모든 거짓 관계가 사라지고, 성령 안에 일치될 때까지 세상은 끊임없이 갈등과 분열을 경험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매우 바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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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불이 세계 한복판에 내려왔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저를 붙잡고 저를 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저는 그것을 그냥 바라만 보거나, 굳은 믿음으로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그 열기가 더욱 올라가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를 수 있도록 한 축성에, 있는 힘을 다하여 한몫을 했다면, 이제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은 영성체에 동의하고, 그렇게 하여, 그 불길이 저를 삼키고 저를 살라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의 주옥같은 글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샤르댕 신부님은 성체는 뜨겁게 타는 불덩이 같다고 했지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순간은 이렇게 주님의 불길이 우리의 온 자아를 태우고 삼켜 버리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가 사랑의 불꽃이 되어 뜨겁게 우리 삶을 봉헌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붙이시는 불꽃은 온전히 당신을 바쳐 이루신 성체성사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온통 당신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랑의 불길로 완성을 향하여 진화해 나아갑니다.
한순간이라도 불꽃처럼 살아 본 적이 있는지요?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쳐 본 적이 있는지요? 누군가를 위해서, 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온전히 나를 내어 주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지요? 가슴이 아니라 눈에 불을 켜고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까요? 우리를 삼키는 하느님 사랑의 불꽃, 인생에서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런 불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지상에서 하느님과 하나 된 합일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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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도 복잡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회생활은 분명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모임과 단체가 많아지고 의무 사항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정말 해야 할 일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은 포장이 요란합니다. 알맹이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평화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권태와 불안에 휘말릴 뿐입니다. 감사와 편안함보다 허영과 낭비가 느껴진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어둡고 습한 길’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련과 ‘망설임’은 서서히 불에 태워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신뢰’에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행동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희망입니다. 필요한 모임이라도 ‘이 사실’을 방해한다면 접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람이라도 박해자로 등장한다면 달리 처신해야 합니다. 복음 말씀은 가족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변화입니다. 불꽃의 점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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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입니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입니다. 그 불을 우리 각자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불은 서서히 타오르고, 작은 불이 결국은 거대한 산마저 태웁니다.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가 입교하게 만듭니다. 박해를 받지만 결국은 박해를 하는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언제나 박해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입교한 뒤 가족의 반대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면 반드시 보답이 주어집니다. 그 보답은 아무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집안을 변화시켜 새로운 집안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어머니의 신앙
- 신한열 수사-
오랜 유교 전통을 간직한 경상도 양반 집안의 며느리인 어머니가 세례 받으신 지 3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다. 누나가 수녀원에 가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딸이 그 길을 가는데 내가 어떻게 더 이상 교회 밖에 머물 수 있겠느냐.” 는 말씀과 함께.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종교적이셨던 아버지가 스스로 입교를 결심하신 것은 지금도 나에게 놀랍게 느껴진다.
명절날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정치와 종교 얘기는 피하라고들 한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언제부터인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또 하나의 분열 요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신앙을 가지면 당연히 불신자와 반목하게 된다.’ 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갈라지고 반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 복음을 살고 헌신하는 사람은 반대와 오해와 불신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두루뭉술, 좋은 게 좋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신앙인, 현실에 그냥 동조하는 타협주의자들을 향한 경고다.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으러 오신 예수님은 그것이 이미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되기까지 고통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당신이 주시는 평화와 일치는 십자가와 죽음을 거쳐 완성될 것이다. 분열과 오해는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이 때때로 주위에서 겪는 현실이다. 이웃을 비난하거나 탓하기보다 일치와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리라.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입교하신 어머니는 세례 받고 얼마 뒤에 아버지의 이해 부족으로 한동안 교회에 다니지 못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에게 엄청난 슬픔과 고통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우선하고 문중 대소사를 외면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 다시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신앙을 가정불화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사랑과 인내로 이겨내셨다. 덕분에 나중에 태어난 나는 신앙이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거룩한 분열, 맞불을 질러라!
-김찬선신부-
평화의 주님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 저를 당황하게 합니다.
저는 종교가 달라 남편과 시집과 갈등을 겪는 자매들에게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종교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리고 성당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면 신앙을 간직하되
사랑의 순종으로 성당에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저의 충고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의한 평화는 당신의 평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야합적인 일치는 당신의 일치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스러운 관대함은 당신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경우 오히려
정의로운 분열,
거룩한 분열,
참 사랑의 분열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에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그렇다면 반대하는 경우 성당에 가지 말라는 충고는 무엇입니까?
반대와 분열이 두려워 나의 신앙이나 무엇을 접는 것이라면
저는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에 대한 반대로 맞불을 질러야 합니다.
불의에 대한 정의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억압에 대한 자유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독재에 대한 민주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불의보다 정의를 더 사랑하고
정의보다 평화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불의에 대한 반대도,
정의와 평화의 실현도 사랑 안에서 열매 맺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성당에 가지 말라 함은 사랑의 승리를 위한
전술적인 후퇴이고 양보를 하라는 것입니다.
불의에 굴복하고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가 승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져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남편과 맞서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시부모의 뜻을 거슬러야 합니다.
야합적 일치와 평화보다는 정의롭고 거룩한 분열이 낫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전삼용신부-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서 제가 첫 번째로 추천서를 써 주어 지금 수련중인 예비 수녀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 자매는 제가 보좌 신부로 있던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하던 자매였습니다. 매주 다른 교사들보다 일찍 나오고 모든 일에 열심이었고 기도와 교육에 참여하는 것도 남달랐습니다. 저는 ‘저렇게 신앙심이 깊은 것을 보니, 수녀원에 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말도 해 보았는데, 사실 놀랍게도 그 자매는 세례를 받은 것이 일 년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수녀원에 들어가려면 세례 받은 지 삼년은 지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계속 성소 모임에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다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기에 본당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있으면서 수도회에 추천서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첫 딸이 된 셈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 자매에게 불을 놓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타오르다 말 줄 알았더니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성령의 불을 놓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신 성령의 불은 당신의 수난공로의 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바로 예수님 심장에서 나오는 사랑의 불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놓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셔야 하는지를 미리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께서 짓눌려져서 당신 안에 있는 사랑의 불을 세상에 쏟아 부으셨지만 사실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키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위의 자매가 갑자기 성당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당연히 비신자들입니다. 성당 다니자마자 교사를 한다고 해서 거의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이젠 수녀가 된다고 하니 가족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형제 중에 반대를 하지 않는 형제도 있었지만 부모님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그 결정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딸을 보려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매도 아버지에게 그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집에서 쫓겨날 각오도 하였었습니다. 다행이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가정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분열일까요? 또 평화가 다 좋은 것일까요?
그 자매 가정엔 분열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엔 평화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도 거부했다면 가정엔 평화가 있었겠지만 그 사람 마음엔 평생 주님의 뜻을 어겼다는 생각에 분열이 있었을 것입니다.
평화와 일치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 두목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유다 지도자들이 모함을 하자, 한 나라도 서로 갈라져 싸우면 망하게 되는 법이라고 하면서 마귀들도 서로 단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들이 하느님을 미워하고 인간들을 미워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한 마음으로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는 것이 참다운 일치이고 평화일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분열은 외적인 것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가족들도 모두 주님께로 오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경우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버지께 제일 마지막에 말씀드렸습니다. 화를 내시고 반대하실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안 이상 육적인 부모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맞서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불타고 있다면 가정의 분열은 큰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지금은 아버지께서도 제가 사제가 된 것을 기뻐하시고 성당에 열심히 다니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필요도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분열을 이길 힘도 얻게 되는 것인데 자칫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님에게 성당에 다니시는 것을 남편이 매우 싫어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참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도 그리 강한 믿음을 지니시지는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은 남편과 갈라지면 안 되니까 미사를 나오지 못하더라도 잠시 동안은 남편의 뜻에 따라주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에 남편의 모든 박해를 참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령의 불이 타오른다면 그 때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뜻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 처음엔 힘이 듭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이들을 당신 안에서 일치시키려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당분간 힘든 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진통과 피를 흘려야합니다. 고통 없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영혼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진통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진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그 진통 뒤에는 그 진통을 충분히 잊고도 남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기쁨이 온다는 것을 믿는 굳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도 물론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확고한 믿음만 있다면 더 이상 신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교도 두렵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가정 안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혹 믿음 때문에 가정이 분열 됩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는 더 큰 일치를 위한 진통입니다. 나의 고통을 통해 온 가족이 주님 안에서 일치하면 그 이전의 고통은 기쁨으로 남을 것입니다.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면>
-양승국신부-
언젠가 예비자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 신자가 되려는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여러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서 불안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완벽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 그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때로 편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양심을 따르고 정도(正道)를 걸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려다보면 왠지 손해보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벌써 주말마다 갈등 상황 앞에 놓이게 됩니다. 남들은 단풍놀이다 가을낚시다 아무런 부담 없이 신이 나서 떠나는데, 신자가 된 후로 꼭 주일미사가 마음에 걸립니다. 남들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잘도 승진하고 잘도 임용되는데, FM대로 살려다보니 평생 말단이요, 응시하는 족족 낙방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 하소연까지 하십니다.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하소연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신자가 됨으로 인해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손해본다는 느낌"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은 어떤 말입니다. "먼저 용서하라", "네가 좀 참아라", "크게 양보하라",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 등등 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우리가 얻게되는 기쁨이나 행복도 큰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스트레스 역시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 진정한 회개, 하느님과의 합일, 부활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체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여정은 고되고 험난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삶으로 인해 우리가 누렸던 기쁨은 얼마나 충만한 것이었습니까?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알게됨으로 인한 우리의 행복은 또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십자가 역시 기꺼이 져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함으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 역시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기꺼이 수용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 마음 안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을 태워버리는 불, 극단적인 이기심을 살라버리는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삼라만상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려는 열정의 불, 세상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강한 의지의 불을 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그 예수님의 불이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불사르리라 -상지종신부- 불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듭니다. 재는 죽음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죽음입니다. 죽음만이 보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당장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선뜻 불을 지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십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과 어둠을 살라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가리워진 증오와 상처를 드러내 아물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죽음을 기쁘게 맞아들이며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섬김과 나눔, 정의와 평화와 진리 가득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억압과 착취, 탐욕과 위선으로 물든 세상을 사그리 태우는 예수님의 불쏘시개가 되렵니다. 잘라 없애버리기 위한 분열이 아니라 진정으로 보듬어 안기 위한 갈라섬이기에 예수님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세상을 가르렵니다. 썩은 것을 묻어버리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는 참 평화를 갈망하기에 썩은 것을 들춰내는 예수님의 평화의 사도가 되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사랑의 불
-이수철 신부-
커다란 방의 어둠도 작은 등불 하나가 환히 밝힙니다. 불빛이 아닌 그 무엇도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이런 등불이 사라지면 방은 다시 캄캄해집니다.
역시 불이 피워내는 열이 아닌 그 무엇도 방안을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불이 꺼지면 방은 냉방이 됩니다. 불이 아닌 그 무엇도 온갖 쓰레기를 말끔히
태울 수가 없습니다. 그냥 쌓여가는 쓰레기에 속수무책입니다.
영적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이 사랑의 불입니다. 마음에 사랑의 불이
꺼지면 곧이어 몸도 마음도 어두워지고 차가워집니다. 사랑의 불이 있어야
밝은 마음이 되고 따뜻한 마음이 됩니다. 냉담자들이 마음과 몸이 어둡고
차가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속 죄악의 쓰레기들을 말끔히 태우는 것도 이 사랑의 불입니다.
영혼을 단련시켜 순수하게 만드는 사랑의 불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과 얼굴은 밝고 따뜻합니까, 혹은 어둡고 차갑습니까?
사랑의 불을 끊임없이 붙여야 합니다. 한 번 사랑의 불이 붙었다고
영원히 타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가 소홀하면 곧 타다 꺼져버립니다.
매일 미사나 성무일도의 수행이 이래서 좋습니다. 이런 전례기도를 통해
매일 끊임없이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붙여주시기 때?都求?
샛길로 간 동무들
-노미화-
몇 해 전 존경하던 선생님의 병환이 깊어지자 가까운 제자들이 모여 그분이 사시는 시골집 옆에 사무실을 하나 냈다. 거동이 힘드신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담아듣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정말 온몸으로 일하는 그들이 나는 더 놀라웠다. 매달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대여섯 시간씩 걸리는 곳까지 와서 밤새워 편집회의를 하고 문장 하나 토씨 하나라도 틀릴세라 조심하며 회지를 만들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 한 스승을 모신 제자들의 그 진한 애정에 나는 감탄하면서 5년을 함께했다.
한데 선생님이 돌아가실 무렵이 되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우린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했지만 장례식 때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형제처럼 여겼던 그들이 이상한 글을 인터넷에 올려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5년 전에 무슨 일로 사무실을 옮겼네, 어찌어찌해서 선생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었네 하면서 5년 동안 먼 길 마다 않고 선생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매도하여 샛길로 가는 무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슬픔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판에 이런 공격을 어찌 감당할까? 우리는 모든 걸 놓아두고 조용히 떠났다. 우리는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는데`…. 차마 선생님 영전에서 싸울 수 없어서 조용히 떠난 것이 밖에서 보면 분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 두 달 동안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린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이들도 저마다 아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무들 맘에도 평화가 찾아들고 있다. 평화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활의 기쁨을 얻기 전에 예수께서는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의 길을 걸으셔야 했다.
눈물의 힘일까?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 나약하기 짝이 없던 내 안에 무엇이든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
-이경식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며,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인 하느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반대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질러야 하며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화보다는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가장 가까운 가족의 반대까지도 극복해야 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 꿈에도 그리는 그 영원한 행복이란 바로 부활의 생명이다. 그런데 그 부활의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부활의 생명의 씨앗을 받는다. 그 생명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이기심에서 죽고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삶은 한마디로 십자가다. 이기심에 죽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삶이기에 매일 겪는 죽음과 부활의 체험인 것이다.
주님은 이 부활의 생명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과하도록 마련하셨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하고 공포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의 힘 앞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은 무너진다. 그때야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정신을 차린다. 지금까지 쌓아온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기 시작한다. 그때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믿기 시작하며 주님은 죽음 안에서 사랑의 폭발을 일으키시어 우리의 모든 죄와 잘못을 정화하고 부활을 완성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 모든 것은 자비로우신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다!
돛대에 나를 묶고서
-최영균 신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오랜 방랑
끝에 가정과 왕국을 되찾습니다. 전쟁과 신들의 재앙과 여러 가지 험난한 여정을
지치지 않고 지략과 용기로 정면 대결합니다. 특히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선원들의 귓구멍을 밀랍으로 막아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험을 벗어났으나, 그 자신이 혹시나 유혹에 빠져 배를 엉뚱하게 몰지
못하도록 자기의 몸을 돛대에 묶게 하고서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상징하는 고향으로의 귀환을 위해서 그는 스스로
수인(囚人)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무질서와 어둠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바로 질서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서
온 것이라니 정말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얻고자 하는 것은 구원과 행복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추구하는 것뿐입니다. 오히려 삶의 온갖 유혹과 위험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결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 문학작품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처럼, 평화가 아닌 죄와 불의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지 않고, 이 어둔 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북돋아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손태성 신부 -
사람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안정과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대체로 인간은 그 삶의 목표가 안정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노력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까? 편하고 안정된 삶을 한번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왜 예수님은 안정과 평화를 깨고 불을 지르며 분열을 일으키고 가족들을 갈기갈기 갈라놓는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물론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를 원하시며 그 평화를 우리가 누리길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와 안정을 깨고 분열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안정이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트리는 것을 우리는 매우 싫어합니다. 평화란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분열과 대립이 서로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평화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대체로 평화롭고 안정되기 위해 진리를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안정되면 남에 관한 일들이 귀찮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노동사목을 하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약하고 억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집회를 하면 시민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불편하다고 욕부터 합니다. 그들이 처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나도 좋아진다는 것을 모릅니다. 남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임을 모르는 것이지요. 도로가 잠시 막혀 차가 밀리는 것보다 그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구체적으로 한쪽으로 편드는 일을 안정된 사람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남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겠지만 정작 남의 일이라면 좀처럼 나서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 것보다 안정된 삶이 더 우선적인 가치로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분열을 말씀하셨을까요? 아마도 우리의 그런 태도를 질타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안정이란 것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이 잘못된 탓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분열을 원하시는데 우리는 안정을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만 스승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참된 안정이 아니라면 분열되어야 마땅하고 불타서 없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내가 만든 안정된 세상, 내가 만든 안정된 사고방식, 내가 만든 안정된 공간 그것들이 예수의 제자직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들이 걸림돌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갈라놓아야 하고 불태워 없애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과격한 표현은 그만큼 우리 안에서 과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약한 본성으로 인해 좀처럼 과격할 줄 모르는 나를 향해 예수님은 불같은 말씀을 오늘 던져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결단
- 이기양 신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
세상에 불은 지르러 오셨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로 느껴지고 낯설기조차 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당신께서 오신 이제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예견하십니다.
가족 간의 유대를 바라고 평화를 원하며, 갈라져서 다투기보다는 화합하여 잘 살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이며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되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평화를 원하고 화합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와는 많이 다르지요. 참 평화를 위해서는 분열을 각오해야하고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다툼은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뇌물을 받고 문제를 일으킨 공무원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가 세계 40위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살아가는 정도에 비해서 부패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관행처럼 굳어진 우리 사회의 부패 고리를 안타깝게 이야기합니다. 교묘히 뇌물을 요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서 인허가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 몇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왜 자꾸 문제거리를 들추어내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느냐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말하며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부패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 모두가 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은 시끄럽고 불편해도 부패와 부정의 고리는 들춰내어 끊어야 합니다. 끊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큰 비극이 만들어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이런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갈라지고 딸과 어머니가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가장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수많은 도둑이 활개치고 다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그런 가정도 많을 것입니다. 그 가정의 어머니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른 척하고 있으면 그 집안은 불화와 갈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우더라도 가장이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 잠깐의 불화를 겪더라도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 가라는 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꿈꾸고 화합을 원하며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불의와 부정이 가득한 사회 구조에서는 결코 이룰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이 사회 구조를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구조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얻기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서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세상에 가 있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조금 더 빨리 진급하기 위해서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평화가 존재하겠습니까? 아마도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릴 것입니다. 누군가 뇌물 수수로 적발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우리 언행도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생각 없이 한 말 한마디로 남의 가슴에 상처를 내놓고 본인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지요.
참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며 바르게 행동하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평화는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기도하면서 평화를 줄 수 없는 것들, 돈이나 건강이나 세상의 명예 따위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결코 평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부쩍 “웰빙”을 얘기하면서 운동을 하고 외모를 가꾸면서 오히려 끊임없이 건강을 걱정하는 건강 염려증에 시달립니다. 변하는 곳에서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주름살이 생기고 신체는 위축이 되기 마련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옛날 수도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비유 중에 “마음의 문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선하고 정의로우며 선한 생각이고 남을 위한 생각이라면 스스로 받아들이고, 반대로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비판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면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나 스스로가 먼저 닫아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면서 살수 있기 때문이지요. 정말 참 평화를 원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지, 주변 환경은 어떠한지 등을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바르게 생각하지도, 바르게 말하지도, 바르게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참 평화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오로지 세상과 육신에만 관심이 있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평화를 얻을 수는 없지요.
우리 시대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안타깝게도 너무나 어리석기만 합니다. 평화를 줄 수 없는 곳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육신, 세상의 성공들은 우리에게 결코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불안과 갈증만을 줄뿐입니다. 참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들 안에서, 또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은총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바르게 말하면서 바른 곳에 관심을 가질 때 참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불의 정화, 분열, 하느님의 사람
-이성우-
50절은 십자가상에서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피하고 싶은 고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예수님의 고뇌가 엿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정을 거치며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씨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불은 처음에는 뜨겁고 아프고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금이 불에 단련되어야 금으로 완성되듯이, 인간 역시 하느님 사랑의 불씨가 들어와 정화과정을 거쳐야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것이 ‘분열’이고 ‘맞섬’이고 ‘갈라짐’입니다(12,52).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고통을 통해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고, 갈증을 통해 물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힘든 정화과정 중에 있다면, 나 자신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정화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토록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아픔을 거듭 거치고 나서 생기는 진주와도 같습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최명숙 목사-
바람은 그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나무를 둥치째 쓰러뜨리는가 하면 집을 무너뜨리고, 해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에게 나는 바람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부서지는 신비를 이야기해 줍니다.
이러한 바람처럼 불 역시 눈에 잡히는 실체가 없으면서도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모든 것이 타버리고 변화됩니다. 음식물은 삶아지고 구워지면서 먹을 수 있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오신 성령은 불처럼 임함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사르고, 용기와 확신과 담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연약하기만 한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달라진 가치관·인생관·인간관·생사관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 세계를 보게 하고, 생각과 행동이 확연히 달라지게 합니다. 기쁨의 이유와 생의 목적이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과 염려, 불만과 원망, 시기, 미움이 사라졌습니까? 사랑과 확신과 소망과 능력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보지 못하던 영적 세계를 보고 있습니까? 그 신비로운 세계를 지금 살고 있습니까?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앞에 깨갱>
가출만 했다하면 빈집이나 가게, 차 등에 불을 지르던 아이가 기억납니다. ‘방화범’인 경우 피해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여성청소년계’가 아니라 ‘강력계’에서 수사를 담당하지요. 수사도 엄중합니다.
상습적으로 불을 지르는 아이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아이 내면에는 그냥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주체하지 못할 에너지로 가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에너지는 굉장히 부정적인 에너지, 무척이도 파괴적인 에너지, 그래서 정말 위험한 에너지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온 상처와 소외에 대한 반발, 사회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방화로 발산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내면도 조금 더 참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해있습니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표현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 가득 찬 에너지는 철저하게도 생산적인 에너지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는 세상을 파괴하는 에너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에너지가 아니라 다분히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녕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 사랑, 사랑이 아닌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참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불신과 냉랭함, 상호비방과 다툼만이 활개를 치는 이 세상에 연민의 눈물, 그 소중함을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폭력과 분열, 전쟁과 무고한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참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난데없이 “예수님으로 인해 식구들이 분열될 것이라”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제대로 된 사랑을 주시는 분, 평생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참 평화 그 자체이신 분, 그간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따뜻한 위로를 베푸시는 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이제 다른 모든 것들은 한 마디로 ‘깨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세상만물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시어머니...등등의 존재가 이제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이 아닙니다. 멀쩡한 그들을 갑자기 원수 보듯 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우리 삶의 제1순위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대상도 예수님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말입니다.
열정 -서인덕 신부- 저의 집은 제가 중학교 때까지 아궁이에 연탄을 피워 방을 데웠습니다.
내 마음에 타올랐던 불길 - 김인옥 수녀- 수도 성소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입회를 준비하던 시절, 신자가 아닌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언니와 나만 성당을 다니던 때였다. 온 가족은 나를 회두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반대는 가장 크고 강력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직장으로 찾아온 둘째 오빠는 “네가 나를 설득하면 어머니는 내가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나를 꼬마라고 불렀던 둘째 오빠는 나에게 설득당하지 않을 마음 자세가 확고(?)했다. 아니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너 하나만 마음을 제대로 잡으면 우리 가족이 모두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구원의 불길 -조욱현신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49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빛과 열을 통하여 지금의 상태를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불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내 편의, 내 고집, 그리고 모든 것을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단지 내가 그 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 불이 되어, 그 말씀이 떨어지는 곳마다 그로 인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구원을 향한 불길이 붙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새벽을 열며
어떤 영업사원이 저녁 무렵에 한 기업의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장은 허락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성당에서나 이 사회 안에서나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혹시 똑같이 나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겠죠? 빠다킹신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강영구 신부-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왔다.
태우지 않는 불꽃처럼 -박상대신부- ‘십계’(十戒, The Ten Commandments)라는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십계’는 구약성서 출애굽기 전반부(1-20장)의 내용을 소재로 삼아 1956년 세실 감독과 율 브리너와 찰튼 헤스턴 출연으로 제작된 불후의 명작이다. 필자는 중학교를 다니던 1973년쯤에 단체관람으로 이 영화를 보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십계’를 생각하면 스릴 만점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 중에서 오늘 복음의 주제가 될만한 ‘불’과 관련된 장면은 ‘불타는 가시덤불’(3,2), ‘구름기둥과 불기둥’(13,22), 그리고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불 속으로 내려오신 야훼’(19,18) 등의 모습이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던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게 된다. 그 때 하느님 야훼의 말씀이 불덩이가 되어 암벽에다 계명을 하나씩 새기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불덩이가 나의 가슴속에 계명을 하나씩 새기는 것과도 같아 온 몸이 섬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불’은 구약과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하느님의 현존과 세상의 심판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49절)라고 하심은 정의로운 하느님에 의한 세상 심판이 임박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고 계시며,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이미 보고 계신다. 어쩌면 그 날과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의 불이 타오르기 전에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셔야 한다. 예수님의 세례(洗禮)는 수난과 고통의 바다에 침례(浸禮)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과 세례는 심판과 속죄, 정화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불과 예수님의 세례, 하느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속죄, 그리고 하느님의 정화와 예수님의 구원의 시간이 다가와 눈앞에 펼쳐진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젠 결단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떠한가? 마치 한 가정의 식구들이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반대하여 갈라져 있듯이, 예수님을 두고 세상은 온통 갈등과 혼란에 빠져 있다. 허나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그분을 반대하여 등을 돌릴 것인지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림이나 무관심이나 중립은 통하지 않는다. 요한도 묵시록에서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하고 말한다. 예수 편에 서기로 결정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예수를 선택한 것은 곧 불과 세례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원하시는 불이 자기 안에 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이 불이 타오르고 있다면 이는 예수님께 기쁨이다. 그렇다고 이 불이 자신을 태워버려서는 안 된다. 이 불은 자신을 태우기 위한 불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출애 3,2)와도 같은 것이다. 자신을 태우지 않고서 남을 위해 불꽃처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불과 예수님의 세례를 향하여 준비와 기다림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다시금 기쁨과 즐거움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성녀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던 분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불에 의해 자신과 세상을 향한 크나큰 열의와 불타는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횃불이 된 이들이다. 이제는 우리가 내심의 불타는 사랑과 열의와 격정으로 인류의 횃불이 되어야 할 차례이다.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49- ) -유 광수신부 -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어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불은 어떤 불인가? 그 불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요, 그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예수님이시고 그 불은 오늘 우리에게는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하셨듯이 죽으셨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불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 번져 나가야 한다. 그럼 이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고 하셨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느님의 나라에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바로 복음이다. 내 안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오로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 3, 6-11)라고 말한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던 바로 그날 "네 고향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이와 똑같이 우리 각자도 저마다가 회개한 그날 마치 아브라함 앞에 약속의 땅을 숨긴 거대한 지평선이 펼쳐졌듯이 그렇게 자기 앞에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우리 역시 약속의 땅을 정찰하던 선조들처럼 성경을 정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유목민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순례자처럼 의미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면 복음의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뜨끈한 아랫목은 참으로 좋았지만 자다 일어나 불구멍을 막아야 했고,
연탄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번거로움은 연탄이
저의 가족에게 주는 따뜻함과 훈훈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예수님께서 무슨 불을 어디에 지르실까 묵상해봅니다. 왜 불을 지르실까?
지금 제 안에 있는 열정에 대한 물음이라고 묵상해봅니다. 제가 가졌던
첫 마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제 안에 있는 열정이 뜨거운지 식었는지
돌아볼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나의 들숨과 날숨으로 드나드시는
성령께 이 시간 청해봅니다. ‘나의 들숨으로 들어오셔서 저의 열정을 다시
불태워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날숨으로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을 빼내어주십시오.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첫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순수하고, 뜨거웠던 첫 발걸음을 떠올려봅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뜻을 굽히지 않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결국 앓아누우시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웃음을 잃었다. 내 마음에 타오르는 불길이 가족에겐 빛이 되지 못했다. 그 당시 누구의 반대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언니의 반대였다. 식구들 중 유일하게 가톨릭 신앙을 가졌던 언니는 나에게 “네가 수녀원에 가면 그날로 나는 냉담할 거다.” 하고 말했다.
이웃에게 전교도 못하고 있는 마당에 신자인 언니마저 냉담자로 만들면서 내가 가고자 하는 이 길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족의 마음에 이렇게 큰 고통을 안겨주면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 꼭 이 길뿐이란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처럼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한번은 “내가 죽고 나서 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던 연로하신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 순교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는 내가 수녀원에 입회한 후 그 어려운 기도문을 하나하나 외우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으셨고, 냉담하겠다던 언니는 구역장에 복사단 자모회장까지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 마음에 타올랐던 불길이 가족한테도 불길이 되어 번져갔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불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몰라도 오신 이상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 마음속에 떨어져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 들이느냐 하는 선택의 가부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기 나름대로 살아 온 상태를 그대로 갖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변화시키고 마는 불 속에 잠겨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갈등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을 위한 선택의 갈림길에 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서 차선을 끊어버린다는 것을 다시 이해할 수 있다. 그 차선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끊임없는 싸움이 있게되고 이 싸움에서 이겨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이라고 하였다. 아마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불로 표현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온 세상을 태우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불이 더 크게 타오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전교주일을 지내며 생각해 보았 듯이 하느님을 확신시키는 것이 전교라고 하였다면, 오늘 복음의 불을 훨훨 타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전교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세상에 하느님을, 하느님의 사랑을 확산시키는 그것이다. 하느님을 먼저 나 자신 안에 현존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의 불을 태워 죄와 허물을 살라버리고 하느님 말씀으로 빛과 열을 내는 믿음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각자를 보시며 네 마음의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시고 계시다. 우리의 마음 안의 갈등을 모두 이겨내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지고 가는 나 자신이라고 하는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가능하다. 언제나 나를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당신은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퇴짜를 놓은 사람이 열 명이나 되거든요.”
그러자 그 영업사원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열 명이 모두 저였으니까요.”
만약 이 영업사원이 한 번의 거절로 인해서 쉽게 포기를 했다면 어떨까요? 아니 두세 번의 거절로 인해서 이 회사에서는 도저히 팔 수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면 어떠했을까요?
한 번 더 노력하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쉽게 포기하는 것은 물론, 도저히 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을 때도 너무나 많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은 별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것도 꽤 많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복권에 당첨되어 생각하지도 않았던 돈이 생길 때, 별로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을 때, 거의 포기하면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더 좋은 성과를 얻었을 때…….
바로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많아서 그럴까요? 우리들은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곳에서 쉽게 포기하면서 좌절합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난 운이 정말 없어.”
노력 없이 얻는 것은 그만큼 쉽게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것은 물론, 그 노력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는 법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불을 지르고 싶으셨을까요? 그 불은 바로 사랑의 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만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성당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이 사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들 모습이 다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즉, 성당에서는 아주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사회에서는 다른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불을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똑 같은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그 모습이 다른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기 때문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이 이 세상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나를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한 번 더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그대에게
오늘 아침에는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것 끼리 모여서 편을 가르는 것을 말합니다.
편을 가르는 이유는 세(勢)를 불려 힘자랑을 하거나 이득을 얻기 위함이지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편을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李)씨, 김(金)씨, 박(朴)씨, 강(姜)씨 따위로 성씨나 혈연(血緣)을 기준으로, 혹은 영남(嶺南), 호남(湖南), 수도권, 남한, 북한 따위로 출신 지방이나 지연(地緣)을 기준으로, 서울대, 고대, 연대, 경북대 따위로 출신 학교나 학연(學緣)을 기준으로 편을 가릅니다. 종교나 종파를 기준으로 편을 가르기도 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 따위로 편을 가릅니다. 혹은 이념과 사상을 기준을 편을 가르기도 하는데 요즘 한국 정치판이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편을 가르면 싸우고 다툴 일만 생깁니다.
예수님도 편을 가르려 오셨습니다. 애증(愛憎), 선악(善惡), 명암(明暗), 미추(美醜), 진위(眞僞)가 뒤섞인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혈연, 지연, 학연, 종교나 종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민족과 혈통, 신분과 지위, 자신의 종교 따위를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 앞에 회색(灰色)지대는 없습니다. 천사(天使)라 할지라도 악(惡)의 편에 서면 지옥으로 내쫓기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한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되는 이유는 종교나 종파 때문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랑과 증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와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편에 설 것인지 세상의 편에 설 것인지, 선의 편에 설 것인지 악의 편에 설 것인지, 사랑하며 살 것인지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 것인지 결단을 요구합니다. 결단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도 결정됩니다.(一明)
그럼 왜 내 안에 이 불이 타오르지 않는가? 그것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한 준비는 회개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 안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복음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내 안에 이 불이 타오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