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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1)
말 3:7-12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3:7-12 / 너희는 너희의 모든 조상들과 똑같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서 너희를 도와주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님을 떠난 적이 있다고 돌아오라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한다. 8)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의 물건을 강도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냐? 보아라, 너희들은 내 물건을 강도질하고서도 여전히 `우리가 주님에게서 강도질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반문을 한다. 너희는 수확을 하고서도 내게 십일조를 규정대로 바치지 않았고, 희생제물 중에서도 제사장의 몫을 제대로 떼어놓지 않았다. 9) 너희 백성 모두가 내게서 강도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 모두에게 무서운 저주가 따르고 있다. 10) 너희는 수확한 다음에 십일조를 정확하게 나의 성전에 가져다 바쳐서, 제사장들에게 먹을 양식이 있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에 양식이 모자랄까봐 염려하지 말아라. 내 말을 꼭 믿어라. 내가 너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는 복을 너희가 받을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풍족한 비를 내리고 11) 너희의 밭과 포도원에서 병충해를 제거하여 오곡백과가 풍년이 들도록 하겠다. 12) 그때에는 너희가 그토록 기름진 땅에 살기 때문에 세계 만민들이 너희를 복되다고 칭송할 것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약속하셨다.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죄악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돌이켜 순종하면 다시 복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7-9)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모습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인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 죄악을 저질렀지만,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죄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다시 내게 돌아오라”(7)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7)라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너희가 나의 것을 도둑질 했다”(8)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았던 대표적 규례가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9). 추수가 끝났음에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십일조가 지켜졌다고 언급된 것은 아모스 시대(암 4:4-5)와 히스기야의 개혁시대(대하 31:5-10) 그리고 느헤미야 시대 (느 19:34-39)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시대 속에서 십일조가 무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적질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인데 그 결과는 저주입니다. 지금 말라기 시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생긴 결과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10-12)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10).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겠다는 것입니다(10). 메뚜기를 금하여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는 수확물을 먹지 못하도록 해주시고, 포도나무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1). 이런 이스라엘을 보고 이방인들이 “복되다”라며 부러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적용: 삶이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헌신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을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헌신과 예물은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언제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거짓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다면 자족의 감사와 헌신이 우리 삶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 설 교 >
십일조의 진실
말라기 3:6-12 / 이한배 목사
ㅇ 질 문 - 온전한 십일조를 왜 못합니까 ?
I. 서 론
오늘은 제가 일 년에 한 번 헌금에 관하여 설교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설교입니다.
처음 오신 분들은 “왜 하필 헌금에 관한 설교야 하면서” 헌금 설교 때문에 시험에 드시지 마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귀한 설교를 듣게 하셨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며 말씀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헌금 중에 십일조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II. 본 론
1. 십일조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v. 7)
십일조는 우리의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인간의 문제이며,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행복할 것 같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을 떠나자 그는 모든 것이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① 죄악에 빠졌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창기와 놀아나면서 허랑방탕해서 다 써버렸습니다.(눅 15:30)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죄인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의 가장 큰 죄악이며, 비극입니다.
② 유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그 많은 유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것들을 다 허비하게 됩니다.
③ 재산을 다 허비했을 때 흉년이 들었습니다.
재산을 다 허비하자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때가 안 맞았습니다.
④ 돼지만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돼지를 가장 싫어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자 그가 얻을 수 있는 직장은 들에서 돼지를 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돼지는 먹는 쥐엄 열매를 먹지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것이 우리의 문제며,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한 번에 다 해결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가자 그의 모든 문제는 한 순간에 다 해결 되었습니다.
의식주의 문제가 한순간에 다 해결 되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감으로 해결된 것은 이 의식주의 문제가 주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의 인격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신을 신키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즉 그의 인격이 회복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됩니다.
영과 혼과 육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보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십일조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릎 끓고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 나아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인데, 그 도적질은 십일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죄악과 죽음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베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차지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레 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그러므로 십일조를 안 드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안 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2.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설계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설계도를 갖고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하시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설계도를 갖고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설계도대로 될 때 안전하고 편리합니다.
만약에 설계도대로 되지 않으면 불완전하고 불편합니다.
① 옷도 우리의 몸에 맞게 설계도를 만들고 그대로 만들어야 편리합니다.
만약에 설계도 없이 만들어 입으면 우리 몸에 잘 맞지도 않고 불편합니다.
② 기계도 설계도를 만들고 그대로 만들어야 안전하고 편리합니다.
만약에 설계도도 없이 만들어 사용하면 그 기계는 안전하지도, 편리하지 않습니다.
③ 집도 설계도를 만들고 그대로 만들어야 안전하고 편리합니다.
설계도 없이 지은 집은 안전하지도 편리하지도 않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신 설계도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며 살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하고 편리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설계도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왠지 삶이 불안하고, 불편한 분이 계십니까 ?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이 편안하고 안전해 질 것입니다.
3. 십일조를 안 드리는 것은 무엇을 도적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는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무엇을 도적질하는 것일까요 ?
이것은 돈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하나님의 돈을 도적질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하나님의 돈을 도적질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 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9-1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무엇을 도적질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늘 문을 여는 기회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문입니다.
그런데 하늘 문을 여시는 것은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여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여시는 하늘 문을 여실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기회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문은 물질의 복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모든 복을 주시는 문입니다.
① 하늘 문이 집에 열리면 집에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② 하늘 문이 사업에 열리면 사업이 번성합니다.
③ 하늘 문이 우리 마음에 열리면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있습니다.
④ 하늘 문이 우리의 몸에 열리면 몸이 건강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기회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의 기회만 도적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복의 기회도 도적질 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지 않으면 나만 복을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비가 내리지 않고, 그러면 나의 논밭에만 비가 안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논밭에도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복의 기회까지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4.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이유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수 있을까요 ?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을 하는 것일까요 ?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지를 몰라서 도적질을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명하게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② 십일조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유혹 때문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것을 먹으면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따먹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우리가 가지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부유하게 될 것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우리도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것을 가지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내가 사용하면 내가 더 부유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이유는 사단의 이 유혹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더 부자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것은 뱀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가 ①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②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주신 것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도적질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① 우리가 그 십일조로 하나님과 같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②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들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5. 십일조가 가져다주는 복
그러면 십일조를 드릴 때 받는 복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에게 어마어마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받는 복일까요 ?
이것도 십일조를 드릴 때 받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드릴 때 우리가 받는 복의 진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받는 복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것은 탕자가 아버지를 인정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의 복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복 중의 최고의 복은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주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말 3:7-12 / 피영민 목사
서 론
오늘 본문은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제가 일부러 택한 것이 아니고 지난주에 이어서 순서가 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 이야기 한다고 시험에 들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는 오늘날도 논쟁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고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니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 다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에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이 있는데 제사와 관련된 의식법은 없어졌지만 도덕법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에 도덕법도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율법폐기론자입니다. 그리고 시민법도 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국가의 형법들은 모두 구약시대의 시민법을 참고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십일조가 도덕법과 의식법 중 어느 것에 속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한 편이 결론을 내도 다른 편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일조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재물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보니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죗값을 치러 주신 것에 감사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면서 자신의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신자가 내는 것입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전 9:7).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물을 드립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모세의 율법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야곱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부터 근동지방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십일조가 편입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는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십일조는 규례에 속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탄생하기 전부터 시행되다가 율법에 편입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을 시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일조에 관한 강력한 말씀입니다.
Ⅰ. 십일조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일대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헌금과 십일조를 드립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말 3:7). 하나님께서 십일조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규례’이고 이것을 떠나 불순종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열조 때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규례를 주셨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는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다는 기대는 부질없는 짓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도 축복의 보따리를 가지고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십일조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전염성이 강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졌고 십일조도 하지 않게 되었으며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9).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죄는 하나님께서 왜 공의를 베풀지 않으시냐고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막상 자신들의 죄에 관해서는 의식하지 않은 것입니다. 뻔뻔스러운 얼굴로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시겠다며 십일조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먼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결과도 본인이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바울이 마케도니아 교회를 칭찬합니다. 많은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풍성한 연보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 8: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Ⅱ.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과 재물의 주인 되시고 우리는 청지기임을 인정하는 표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명과 재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 것이라면 왜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까? 왜 늙고 약해져서 죽게 됩니까?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생명의 주인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재물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8).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고전 4:7).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도 맡기시고 재물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자신에게 맡겨진 것들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관리를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이 나이가 어리지만 똑똑하고 일당백의 일을 해내자 청지기로 삼아 보디발의 재산을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청지기이고 재물은 맡겼어도 당신은 맡기지 않았다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청지기로서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어 이삭을 위해 며느리를 구하고자 합니다. 늙은 종에게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어 맹세를 시킵니다.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3~4). 늙은 종은 아브라함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아브라함의 고향인 밧단아람 혹은 하란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리브가를 만났고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청지기에게 구할 것은 주인의 뜻에 따르는 충성입니다.
십일조는 왜 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규례를 정하셨으니 내가 주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우리 소득의 첫 부분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열매도 첫 열매를 드리고, 육축도 첫 새끼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소득이 있으면 일단 첫 부분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청지기가 주인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말라기가 이것에 대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위라고 강력한 단어를 사용하여 말합니다. 양수리수양관 집회에 강사로 오신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상도에서 어느 장로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패물도 가져가고 돈도 다 가져갔답니다. 그런데 서랍 속에 있던 십일조 봉투 안의 돈은 가져가지 않고 메모를 써 놓은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도둑이라도 하나님의 것은 차마 못 가져가겠습니다.” 그 메모를 보고 장로님이 십일조는 도둑도 손대지 않는다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청지기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주인의 뜻에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Ⅲ. 십일조에 대한 상벌은 하나님께서 직접 집행하신다
십일조에 대한 상벌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십니다. 여기서 ‘직접’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일조를 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3:10~12). 얼마나 좋습니까? 농사를 지어도 메뚜기가 와서 다 먹어 버리면 하나도 거둘 것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메뚜기를 막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태풍이 불거나 자연재해로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게 되면 먹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이것도 막아주셔서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는 법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순종하여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9). 때가 되어도 비가 오지 않고 황충이 들끓어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한 상과 벌을 물질적인 축복과 저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물질적인 축복은 신약시대의 영적인 축복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물질의 복도 물론 받거니와 영혼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영혼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하워드 휴즈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에비에이터’라는 영화로 알려졌는데 ‘에비에이터’는 개인적인 비행조종사를 말합니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 제작자이자 라스베가스에 호텔을 7개나 가진 부자였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너무 좋아해서 매일 비행기를 타고 다녔고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혼자 비행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병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균 공포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컵을 잡을 때도 소독한 물티슈로 감싸서 잡았고 그에게 무엇을 건네줄 때는 흰 장갑을 끼고 건네주어야 했습니다. 음식도 살균한 다음에 먹었는데 결국 그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죽었습니다. 죽을 때 그의 몸무게가 42kg이었습니다. 그가 죽고 유언장이 공개됐는데 자신의 재산을 몰몬교에 기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이 유서에 대해 반박하며 재판을 하였고 결국 그 유언장이 가짜로 밝혀져서 그의 조카 22명에게 재산이 나누어졌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재물이 많았지만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십일조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상벌은 하나님께서 직접 집행하십니다. 만약 국가가 상벌을 내린다면 국가 공무원들이 바빠서 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벌을 받거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상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마약사범이 미국이나 멕시코에 왜 많은지 아십니까? 마약사범은 잡히면 중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중벌을 받을 줄 알면서도 계속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것은 마약사범이 걸리는 확률이 2~3%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큰돈을 벌게 되니까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도둑이 정말 많지만 형벌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면 100% 상과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해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 영혼의 만족과 물질의 축복을 받으실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도 규례가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 드리는 것, 십일조를 하는 것, 기도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규례가 있습니다. 영혼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천국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이런 규례들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회는 십일조를 100% 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봤더니 대답하기를 교회에 내는 사람도 있고 도둑에게 내거나 병원에 내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꼭 받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둑에게나 병원에 내지 마시고 하나님께 내시기 바랍니다.
Ⅳ.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일조 규례를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온전한 십일조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을 이뤄 드리는 진정한 십일조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통해 세 가지를 이루려 하셨습니다.
첫째, 레위인들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 18:21). 둘째, 절기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것을 위해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 14:22~23). 셋째,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신 14:24~25).
이처럼 오늘날도 십일조를 통해 교회에서 전임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예배와 선교에 필요한 경비를 사용하며, 구제와 장학금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사역자들도 생계가 어려우니 주중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되고, 예배와 구제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는 일주일에 하루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저와 일주일 내내 같이 다녀보십시오. 아마 2주 안에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많이 내든지 적게 내든지 상관없이 정해진 사례를 받습니다. 저는 뇌물이나 부정한 수단으로 주는 것은 받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공사가 아무리 많아도 그분들에게 커피 한잔 얻어먹지 않습니다. 밥을 사주면 사줬지 얻어먹지는 않습니다. 교회 카페에서도 공짜로 먹지 않습니다. 저한테 뇌물을 주면서 부정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은 꿈 깨십시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감사기능을 강화해서 교회 재정을 한 푼이라도 함부로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또 너무 자린고비처럼 그러지는 않습니다. 넉넉하고 풍성한 것이 좋다고 판단될 때는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 론
“그러면 십일조만 내면 되지 왜 또 건축헌금을 내라고 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솔직히 지금까지 십일조를 온전히 내지 못했다면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이제 그것을 건축헌금으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인 것이 많습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 17:33).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일조에 관한 교훈도 매우 역설적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오히려 재물이 더 넘쳐나고, 내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도 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라고 끝까지 우기신다면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율법 시대에도 10%를 드렸는데 은혜의 시대에 10%도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가난해서 못 내고 나중에 돈 벌면 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원도 안 내는 사람이 십억을 내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라는 최자실 목사님의 책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십일조를 띄어 먹는 사람은 도둑놈이라는 말을 듣고 도둑놈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십일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보고 사람들이 제 주머니가 춤을 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많이 베풀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제 주머니가 춤을 춘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았습니다.
아직까지 십일조를 하지 않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6). 많이 심고 많이 거두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바른 십일조의 정신과 삶
말 3:7-12 / 윤삼중 목사(대구신창교회)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도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경제성장과 풍요로운 사회를 좋아합니다. 성경에도 물질, 돈에 대한 구절이 1500구절에나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돈, 재물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한 신약학자는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님 교훈의 6분의 1이 돈과 관련된 교훈들이라고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3분의 1은 돈하고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혜로운 종과 어리석은 종의 비유에서 주인은 달란트를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외에도 한 여인의 드라크마 비유,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므나 비유가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합니다. 또한 포도원 품꾼이 품삯을 받는 비유, 일만 달란트의 빚진 자의 비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는 비유 등 예수님은 이 비유 가운데 돈과 관련된 비유들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과 돈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은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며,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세계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참으로 회개한 사람은 호주머니의 지갑도 회개해야 한다” 라고 말했고, 요한 칼빈도 그 사람이 가지고 돈을 어디에 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경건한 리차드 포스트 목사님은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창세기 14장에 최초로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입니다. 포로로 잡혀있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무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때에는 이 전쟁에서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브라함은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쟁에서 얻은 수많은 재산과 전리품들을 가지고 당당히 자신이 살고 있는 땅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이 이끌고 있던 318명의의 사병들은 아브라함을 영웅처럼 칭송하고, 그와 함께 동맹을 맺었던 사람들 역시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도시의 왕이었던 소돔왕은 아브라함에 가서 허리를 조아리며 아브라함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그때에 살렘왕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너희 힘으로,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고,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절) 외쳤습니다. 그의 깨우침을 받은 후에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고, 즉시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라고 성경학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기 전에 500여년 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라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받치다는 뜻이며,(겔45:11) 일반적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에 대한 헌금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느헤미야10:38-39) 저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해왔고, 십일조를 더 많이 드릴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배웠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십일조 생활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인터넷을 보면 십일조 반대론자들의 글이 너무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하여 이런 글을 읽으면서 십일조에 관하여 의심하거나 십일조 폐지론으로 주장하기도합니다. 십일조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보면 정말로 그럴 듯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쓴 내용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속에는 교회를 무너뜨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으려는 사단의 간계가 숨어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과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라기에서 말하는 십일조에 관하여 거부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실시하는 십일조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성도들에게 알리고, 올바른 십일조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는 인식하여 오늘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또한 어떤 정신과 자세로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까?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며, 물질의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며, 믿음으로 드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는지에 대한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면 너희가 은을 연단한 것처럼 깨끗하게 되어서 그들이 공의로운 재물을 나 여호와께서 받칠 것이라”(1-3절)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기적같이 승리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 드린 것처럼 너희도 십일조와 봉헌물을 이런 마음과 정신으로 드리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릴 때에, 봉헌물을 드릴 때에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을 인색한 마음으로, 억지로 드렸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제는 성전도 무너지고, 제사장도 별 필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릴 필요가 있겠는가? 거부하는 무리들도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거부함으로 성전의 운영은 급속도로 어려워지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산업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담대하게 전합니다. 8절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여기서 “너희”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반대하는 자들은 “악한 제사장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맥으로 볼 때에 “너희” 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6절에 보면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라기는 너희가 바로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도 돌아가리라” 여기서 너희는 단지 제사장들에게만 국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라기서는 제사장들에게만 국한하여 쓴 에언서가 아닙니다. 말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또한 결정적인 근거로서 9절을 보면 너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여기서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들만 저주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를 받은 내용이 11절에 풀어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여기서 너희는 제사장의 토지와 포도나무를 의미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은 토지를 경영하고나 밭에 심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고 사는 시대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와 봉헌물을 받아서 먹고 삽니다. 그러므로 문맥으로 볼 때 너희는 단순히 악한 제사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와 봉헌물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며, 그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한 자발적 헌신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은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발적인 것이었습니까? 앞뒤 문맥을 다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첫 십일조를 드릴 때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감사하여 드렸습니다. 제사장 멜기세덱이 요구한 것도 아니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받은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구나는 것을 인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훗날 이것이 아브라함 이후에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역시도(창28:22) 하나님 앞에 그의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서원하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 최초의 십일조를 드린 이후에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가서 모세가 등장하고, 모세시대 이후에는 십일조가 성막을 유지하고 제사장과 레위인과 가난한 과부를 돕기 위한 율법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 후에 십일조는 유대 사회와 성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의무와 규례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데 십일조가 복음적이 아니다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형식적인 면이 폐기되었다면 십일조 제도까지 폐기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구원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요, 거룩함에 도달하는 방편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정신을 따라야 한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형식만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율법의 그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시는 장면이 곳곳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십일조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23:23절을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물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로의 유전까지 철저하게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며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는데 작은 채소의 잎사귀와 줄기에까지 십일조를 적용시켰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율법을 지키기보다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임을 과시하고자 겉으로만 행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연구하여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율법의 근본 정신 즉 의와 인과 신은 저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이 행하는 십일조를 인정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잃어버린 의와 인과 신을 가지고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와 인과 신"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 즉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은 사랑과 덕을 의미하며, 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참으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계명을 지키기는 했지만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눈가림만 했습니다. 즉 자신의 불의한 마음을 낱낱이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 믿었다면 외식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강조하시는 말씀은 ‘그러나 너희가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채소까지도 철저히 구별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버리지 말고, 십일조 정신인 의와 신과 의를 버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이 나쁘다라고 해서 율법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큰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에게 무슨 약속을 하십니까?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기복주의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였더니 이렇게 많은 복을 받았다는 간증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 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예를들면 내가 하나님께 이 달에 100만원 십일조를 드리고 나니 하나님이 그의 말씀대로 내게 복을 부어주사 그 다음달에 1억의 수입을 주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잘못된 마음과 자세입니다. 그 당시에 10절의 말씀은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식어지면서 십일조에 대하여 많은 의심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믿음과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온전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표현이요, 이웃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반드시 하늘 문을 열고 그들에게 큰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꼭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드린 십일조를 하나님이 가져가는 것도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드린단 말입니까? 인간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기를 거부하자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권면하고 동기부여하기 위하여 주신 메시지입니다. 예를 들면 몸의 각 지체들이 모여 맛있는 것을 혼자 먹고 모든 영광을 다 독차지 하는 입이 얇미고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입이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도록 하자 그래서 발도 멈추고, 손도 멈추고, 위장도 멈추고, 모든 지체들이 자기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일이 지나고 나니까 서서히 발도, 손도, 위장도 모든 지체가 힘을 잃어버리고, 죽을지경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힘이 빠지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입으로 음식물이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런 고통이 임하는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모든 지체들이 입을 통하여 음식을 먹지 아니하는 것이 곧 자신들에게 재앙이요,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존중히 여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의 출발점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강요나 협박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구별하여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오늘날 가정을 꾸미고 살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깨닫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가장 귀한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 감사의 응답인 것입니다. 내 가정의 주인, 내 직장과 사업장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도구와 통로에 불과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내가 겸허하게 도구가 되고, 통로가 되기를 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고, 우리의 일평생 주인이 되어주십니다. 제 경험상으로 볼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물질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은 자는 많은 복을 받게 되고, 적게 심은 자는 적은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선한 일, 선교하는 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기를 소망합니다.
3. 올바른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약속을 주셨습니까? 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여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 땅에 임하는 모든 재앙을 없애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땅에는 메뚜기 재앙, 황충 재앙, 각종 질병으로 인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막아주시고, 넘치도록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정함을 받습니까? 12절에 보면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는 드린 자들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1)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 2)메뚜기. 황충을 금하여 주며, 각종 재난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3)각종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라고 칭찬할 것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십일조를 굳이 바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 드린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에서 함께 먹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식구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며, 삼년마다의 십일조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먹고 그들을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땅에서 나온 풍족한 양식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땅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인이심을 배우게 하셨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되새겼고, 무엇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웠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게 하셨고,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과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으며 함께 배부르고 즐거워하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지가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위해 매 삼년마다의 그해의 십일조를 저축해 두고 그들이 그것을 먹고 배부르게 하였습니다.
십일조 규례는 토산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든 물질은 물론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행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로 드린 각종 토산물을 분깃이 없는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와 객들과 함께 나눔으로 구원을 공동체적으로 소유해 누린다는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족에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십일조 규례는 보상의 개념이 아닌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과 이웃 사랑의 도리 차원에서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차원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크게 잘못될 뿐만 아니라 더욱 교만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드리는 더욱 낮아지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게 되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십일조의 개념과 인색함과 억지가 아닌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겨 낼 것을 권면하는 신약의 관점(고후8:3, 9:7)을 참고해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십일조를 크게 강조가 안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약 성경에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았는가? 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기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이미 충분하게 십일조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바울도 재차 강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구약의 전통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십일조 생활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에,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에 십일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신서에 십일조를 강조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서신이나 바울서신에서 십일조는 율법에서 나온 것임으로 복음에 배치되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만약 십일조가 율법에서 나왔거나 복음에 배치가 되었다면 바울은 목숨을 걸고 강력하게 거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연구해 보아도 사도들이나 바울도 십일조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말씀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율법주의를 거부하였지만 한 마디도 십일조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십일조가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 사랑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도 자연스럽게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써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전한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릴 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함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진정한 십일조에 대한 개혁이 있어야 함은 그것을 폐지함이 아니라 믿음으로가 아닌 기복적인 조건으로 하는 것이나 세금처럼 강압적인 요구로 강조되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신앙의 기준으로 높임 받으려고 이름을 알리며 외식적으로 하는 그런 분위기나 교회내 전통으로 된 것 등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십일조는 모두 목회자의 것이라거나 십일조 명단을 주보에 공개하는 것이나 일일이 호명하며 기도해 준다거나 교회 재정 충당을 위해 강요하거나 협박하는 식의 설교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예물과 믿음, 헌금
말 3:7-12 / 길승민 목사
서 론
오늘 나눌 말라기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해, 그것도 정확하게 십일조를 강조한 것으로 거의 유일하다 싶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봉헌 설교하면 말라기서를 활용합니다. 지난주에 제가 우리교회 재정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재정이 부족하니 특별헌금을 하자’ 이런 명분만으로는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힘을 모아 급한 불부터 끄자는 일차원적인 반응이 아니라 봉헌에 담겨 있는 그 본래적인 의미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봉헌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나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말라기서를 설교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본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흔해 빠진 설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늘 이 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축복의 말씀이 되길 기대합니다.
본 론
말라기 ‘מלאכי 말르아키’는 선지자의 이름입니다. 뜻은 ‘나의 사자(使者), 나의 메신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인 말라기 선지자는 왜 십일조와 봉헌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던 것일까요? 말라기가 활동했던 시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말라기는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시대라는 것은 앗수르, 바벨론, 바사제국으로 이어지는 70년간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런 귀환 명령을 듣고 꿈인가 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놀랄 일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이 70년의 기한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렘25:11입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하나님은 남왕국 유다가 망하기 전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70년의 세월동안 종살이를 할 것이고 때가 차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70년은 말처럼 그리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잊혀졌고 백성들은 내일이 없는 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70년을 기억하는 사람을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단9:1-3입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다니엘에게 알려주셨고 미리 기도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미리 준비할 사람을 찾으셨고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니엘 다음 세대인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말라기 같은 선지자와 스룹바벨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예루살렘 귀환이 실행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에 대한 성경 기록을 보면 민족적 재건, 예배와 말씀 회복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이 기적 같은 일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그들에게 대단히 혁명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거대한 제국 한 가운데서 우리 민족이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들어 쓰셔서 땅의 나라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하늘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나라를 넘어서 메시야의 도래,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을 꿈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돌아온 백성들은 에스라를 통해 말씀으로 돌아가는 전적인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는 성벽이 재건되었고, 학개를 통해서는 성전이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쭉쭉 뻗어나갈 줄 알았지만 이내 동력은 사라지고 가슴은 식어져버렸습니다. 성전은 말이 재건이지 백향목과 황금으로 지어진 솔로몬성전과 비교했을 때 그냥 야산에서 벌목해온 잡목으로 지어진 허름한 성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70년 전 어렸을 때 보았고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사람들은 좋아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곡을 하며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스3:12)
정치적 독립성에 있어서는 극히 부분적인 자치권만 보장되었고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로서 여러 의무와 제약 때문에 속박되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제국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거의 벗어나 있어서 주변 이방 민족으로부터 늘 공격과 약탈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가뭄과 빈발하는 병충해로 상당수 귀환한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상은 너무 크지만 현실상황이 절망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신앙이 공허하게 느껴졌고, 나와 우리 가족이 최우선이 됩니다. 자칫하면 굶어죽는다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갉아먹게 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생존의 절박함 때문에 일반 백성만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을 포함한 지도자들이 오히려 더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말1:7-8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제사장은 더러운 떡인지 정결한 떡인지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눈 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은 굳이 제사장이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다 분간할 수 있습니다. 즉, 백성들, 제사장 할 것 없이 뒷구멍으로 자기 것을 챙기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다고 뻔뻔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라기가 봉헌에 대해 단호한 어조로 책망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봉헌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이지 내면에 숨겨져 있는 혹은 더 무게감 있는 영적인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상숭배, 비양심, 이기주의, 내팽개쳐진 공동체의식 이런 것들이 더 심각하지 않을까요? 왜 말라기는 이런 이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봉헌 문제에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히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잖습니까? 그들은 당장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경치도 배고프면, 먹고 살만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섬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먹을 것이 없고, 없는 정도가 아니라 딱 죽게 생겼다면 일단 살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너무 야박하게 구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금강산 구경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봉헌은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의 문제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므로 내 삶에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전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21)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보물을 어디에 쌓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너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땅의 프레임에 갇혀서 보면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눈을 가지면 먹고사는 문제는 아주 작은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얼마 안되는 것을 기어이 받아내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에게 풍성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봉헌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얼마나 답답하면 시험해보라고 했겠습니까?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한 일이다. 나는 너희 눈앞에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을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위해 베풀고자 하는 나의 진심이다. 그러니 너희가 내 백성임을 증명해라.’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에게 진실된 봉헌을 요구하신 때는 백성들이 가장 가난할 때였다는 것에 저는 눈이 갑니다. 가장 넉넉하고 풍성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통곡을 할 때였습니다. 저는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 사람들이 볼 때 부러울 정도로 부요하게 살게 하시려고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로 살아갈 것을 콜링하셨습니다. 우리도 절박하기는 매 한가지죠. 바로 이때 하나님을 한 번 시험해보시는 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봉헌을 통해 이 땅에 메시야왕국의 도래, 하나님나라의 실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창세기 1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좋았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고,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모든 것은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아름다웠던 창조 당시로 회복하시려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봉헌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사는 땅이 아름다워집니다. 즉, 내가 복을 받습니다. 내 삶이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이방인에게 흘러가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니 메시야왕국은 실현되고,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늘 고백하듯이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게 되는줄 믿습니다.
그러면 왜 십일조인가, 왜 유독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강조하는가 이것에 관해 한국교회 역사를 간단히 나누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크리스천하면 어련히 술 마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크리스천 문화에 술을 금하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조선사람들에게 술을 금지한 미국 선교사들도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자기들은 다 하고 우리는 왜 못하게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가장 병폐로 꼽았던 것이 도박과 술이었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조선은 복음화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술 마시는 것이 문화이고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선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시지 말고 그들도 마시지 말게 하자.’ 그래서 한국교회는 술에 관해서는 아주 보수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술 마셔도 되겠네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술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선교사들이 한 가지 더 정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였습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세금 내는 것을 굉장히 아까워했습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이런 경향은 교회 안에 유입이 되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선교정책을 무너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운 선교정책은 ‘조선인들에 의한 교회’였습니다. 소위 삼자정책(three-self principles)이었습니다.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 자치(self-governing)’에 의해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인 신자들에게 가능하면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하면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가치만 심어주고, 믿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당시 조선 사람들 마음속에 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구약의 십일조 개념을 가져왔고,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 혹은 봉헌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교인들은 십일조를 성실히 했고, 국가에 바치는 세금까지 정확하게 납부했습니다. 교회의 결정이 한 국가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가져온 봉헌물로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당 건물을 짓고, 사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다음세대 지도자를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독교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적 부흥을 경험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결 론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는 바로 이 선교적 교회의 역사를 이어받은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십일조 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권면 드립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거리가 있습니까? 감사헌금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세대를 키우고 싶습니까? 장학헌금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까? 선교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재정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작은 헌신을 받으시므로 하나님은 이 땅을 아름답게 하시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복이 있다는 칭송을 듣게 하실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시는 귀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청지기 신앙과 하나님의 복
말 3:7-12 / 이기복 목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원리는 크게 네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주일 성수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주일은 일요일이라 해서 늦잠을 자든지 가족과 함께 주말에 야외에 나가든지 회식을 즐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을 하면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말씀을 소중히 여깁니다. 기독교의 경전(經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먼저 성경책을 준비하고 성경 말씀이 모든 삶의 지침이 됩니다. 또한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원하여 부흥회에 참석하거나 기도원을 찾기도 합니다.
셋째는 도덕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교회에 나오게 되면 이전에 즐기던 일들이 기독교인의 건덕에 어긋나거나 말씀에 위배가 되면 과감하게 정리를 합니다. 특히 눈에 뛰는 외적인 것으로는 술과 담배를 금하게 됩니다. 제사지내던 것을 추도식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성경에 금지한 것들이나 교리적으로 금하는 것들을 삼갑니다. 또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합니다. 즉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청지기 신앙이란 모든 것이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고 보존하고 잘 가꾸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같게 되면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고 맡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청지기를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집안일 전반을 돌아보며 다른 종들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 또는 “주인의 소유를 위임받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지기를 희랍어로는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관리한다” “다스린다”는 뜻의 “노모”의 합성어로 “주인의 집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Steward”(스튜어드)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양을 치는 “양치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객이나 여객선에서 제복을 입고 승객을 돌보아 주는 사람을 스튜어드라고 합니다. 남자는 “스튜어드” 여자는 “스튜어디스”(Stewardess)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청지기들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청지기 생활을 해야 할까요?
1.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청지기 사상은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생명 또는 목숨은 주인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창 2: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즉 사람이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말씀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생명을 해치는 죄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4대 악 추방운동을 하는데 그 것이 바로 생명을 해치는 것들입니다. 즉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추방운동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직접 간접으로 해치는 주범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언어의 폭력이 있습니다.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에서는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하고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2.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시간을 영어로 Hour(아워) 또는 Time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은 직선적 의미입니다. 즉 시간은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마지막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대로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희랍어의 알파벳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뜻합니다. 모든 날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만물의 기한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 1:7절에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 때와 시기를 희랍어로 보면 “때”를 “크로노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시기” 또는 “기한”은 희랍어 “카이로스”로 표기하였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시간 또는 지정된 시간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이 때와 시기를 “the times or the seasons” 또는 “the times or dates”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일반적인 시간과 특별한 시기나 날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3:1절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시간의 청지기 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였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때가 있으니 잘 선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일에는 시간을 남용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이 없다고 핑계해서는 안 됩니다. 벧전 4:14-16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핑계하면서 허탄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시간의 청지기 생활을 잘하여 후회하지 맙시다.
3. 재능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에 맞는 재능 즉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모든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소중히 여길 뿐 더러 존중해야 합니다. 남보다 음악을 잘 하여 찬양대를 하는 사람도 소중하지만 주일학교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교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차장에서 관리를, 주방에서 주방 일을, 재무부에서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 모두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각자의 달란트를 가지고 모든 분야에서 수고하는 사람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절대로 내가 하는 일만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일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재능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고 재능의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4. 재물의 청지기입니다.
재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말합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Wealth 또는 Mammon이라고 합니다. 재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잘 사용하여 복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을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재물의 청지기 사상은
첫째, 모든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이것을 인간에게 잘 관리하고 보존하도록 위임한 분도 하나님입니다. 내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남보다 더 잘살고 소유가 많다고 하여 교만하거나 자기 것으로 착각을 하고 함부로 하면 그것이 재앙이 되고 독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학개 2: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했고 역대상 29장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라.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다”고 하였으며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1-14). 그렇습니다. 천지만물과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딤전 6:7-8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도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지니라” 즉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땅과 건물이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다고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우리는 모든 소유를 주인의 뜻대로 써야 합니다.
돈이 있다고 죄지어도 안 되고 권력이 있다고 부정부패를 해도 안 됩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한다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모든 소유를 청지기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쓰라고 하시면 써야 합니다.
셋째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득 중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업을 할 때에도 동업을 하면 서로 수익분배를 정하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분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인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입니다. 둘째가 하나님의 법인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 3: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느니라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부담스럽고 듣기 싫어한다고 말씀대로 전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는 거짓 목사요 삯군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받을 사람입니다. 9절에 “너희 곧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음으로 나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끝으로 십일조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12절에 축복을 약속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성도에게는 다음과 같은 복을 주십니다.
①하늘문이 열리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하늘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②황충을 금해 주십니다. 이 말은 모든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웰 박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감사함으로 내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거나 아니면 강제로 거두어 가거나 둘 중의 하나로 십일조를 한다.”고 했습니다. ③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씨를 뿌려도 기한 전에 떨어지면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에게는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복을 주십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게 해 주십니다. ④토지의 소산을 많게 해 주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축복하시기 위해 정해 주신 것입니다.
⑤복되고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을 높여 주실 뿐 아니라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삼상 2: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긴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온전히 믿는 사람을 존중해 주십니다.
축복 받는 믿음, 축복 받는 원리
찬 송 : 300, 428, 429, 438.
말라기 3:7-12, 고후9:6-8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오늘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벌써 오늘이 넷째 주일입니다. 새로운 소망과 부푼 마음으로 출발한 발걸음이 어느새 20여일이나 지났습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새로운 설계를 하였겠지만 금년도 우리교회의 목표는
① 교회적으로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흥을 가져오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으며,
② 여러분들의 가정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복을 받아서 금년에는 반드시 가정의 복음화가 이루어야 하고 또 경제적으로도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③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는 데 초점을 맞추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래서 오늘은 우리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핵심적인 방법에 대하여 즉 ‘축복 받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금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축복의 비결’ 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엄격한 의미에서 ‘비결’ 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대로 순종하여 지키면 복을 주신다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축복만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물질적인 것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요한3서 2절 말씀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 중에
첫째는, 영혼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범사가 잘되는 축복으로써 생활의 축복입니다.
셋째는, 건강의 축복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 중에 물질적인 축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물질의 축복을 말하려면 십일조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기억하시라 생각이 됩니다만 매년 1월 달에는 반드시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마음속에서는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부글부글 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면 대개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①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고 나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입니다.
②전혀 무감각한 사람입니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로 일축하고 그냥 흘려버리고 마는 사람입니다. 마치 길바닥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③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헌금 강조를 한다고 비평이나 하고 불평하면서 스스로 시험의 구덩이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말씀은 나의 말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의 설교가 인간 박한응의 말이라고 생각이 되거들랑 금년에도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는 반드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갈6:7),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마16:27)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2-2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를 못하고 있습니까?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리와 유혹에 말씀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백배의 결실을 맺힌다고 하셨습니다.
년 초가 되면은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 이라는 것을 봅니다. (토정비결(土亭秘訣) 이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학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1587)의 도참서(圖讖書)로서 1년 열두 달의 신수를 판단하는 술서(術書)입니다.
그 내용이 자기에게 좋은 방면으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 말을 그대로 믿고 1년 내내 그 말에 매달려 삽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 놓은 아무런 신빙성도 없는 허무맹랑한 말에 현혹이 되어서 그 말을 그대로 믿는데 하물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7:12-13)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라”<아 멘!>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지켜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축복을 받을 것이요 만일 행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신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여러분을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요 여러분이 저주를 받으라고 저주하는 말은 더 더욱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 잘못되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없듯이 어떤 목사가 자기 교인 잘못되기를 좋아할 목사가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듣고, 깨닫고, 지켜, 행하므로 2016년도에는 반드시 물질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청지기들에게 맡겨서 그것을 관리하는 것을 보고 잘하는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라고 칭찬을 하셨고 잘못하는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또 신약 성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42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절반이 물질에 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또 말라기서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고 한 곳은 성경 66권 중에 이곳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그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실제로 체험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5가지의 축복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창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하면 ①생육하라 ②번성하라 ③땅에 충만하라 ④땅을 정복하라 ⑤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 66권 1,189장 31,173절의 말씀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잘못 살라고 하신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32,500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모두가 조건부입니다. 그대로 축복의 알맹이만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면…” 복을 주리라<아 멘!> 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면 나머지 아홉은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사람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으면서 낭비 없이 값있게 쓰이는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십일조는 머릿속의 생각만이 아니라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원리를 깨닫고 생활의 복을 받는 진리라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매닝거(Menninger, Karl 1893.7.22-1990.7.18) 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부자들 중에 의외로 노이로제 환자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 받는 원리에 대해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보지 못한 채 여전히 의심 가운데 있는 교인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의혹을 버리고 적극적인 신앙으로 물질의 축복을 한 번 시험해 보고 물질의 염려 없이 살아가는 승리하는 삶이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러면 온전한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십일조를 드릴 때는 오직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큰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루스 광야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때부터 십일조를 드릴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고 열심히 실행함으로 큰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을 가장 먼저 두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 첫째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을 때만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십일조를 드릴 때 아까운 생각이 들거나 다른 생각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믿음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롬1:28-32)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믿음과 확신의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 수단과 방법대로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내 명예나 건강과 가정에 큰 위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믿음으로 드릴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열쇠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2. 십일조를 드릴 때는 철저하게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축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적이 무엇인지 축복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써 가장 중요한 방법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건강, 가족, 자녀들, 그리고 기업과 온갖 좋은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보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보답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의리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지난 2015년 한 해 동안에도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이 4만5천명이 넘습니다. 부상을 당한 사람이 12만 명이고 그 중에는 불구가 되어서 평생 장애인이 된 사람도 3만 명이 넘습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관심거리가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이 환경 공해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밝은 태양 빛을 보고 건강하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도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하루에 3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쌀이 남아돌아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실컷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농사를 잘 지어서가 아닙니다. 정치를 잘해서는 더 더욱 아닙니다. 1년만 흉년이 들어서 농사를 피농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십일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축복의 문을 여시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멘>
3. 십일조를 드릴 때는 반드시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을 억지로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바른 신앙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인색한 마음을 가집니다. 억지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지 않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삶에 기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십일조를 기쁨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나머지 90%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물질 관리를 잘 해 주셔서, 황충이 먹지 않게 하시고,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4. 십일조를 드릴 때는 성실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본문 10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으니 반대로 말하면 온전하지 못한 십일조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심히는 하였지만 온전하게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에누리하지 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십일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 감하고, 깎고하여, 형식적인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 내 축복도 깎아주세요” 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셨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들의 가정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수입이 올라가고 해마다 씀씀이도 높아만 가는데 어째서 십일조나 감사헌금, 주일헌금은 3년 전이나 5년 전과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의례적으로 습관적으로 체면상으로 하는 십일조나 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렇다 치고 일 년에 십일조 10원도 하지 않으면서 집사요 권사요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불성실하고 가증된 믿음입니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을 가져오면 제사장이 그 양을 검사를 해서 합격이 되어야 만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 양이 흠이 있거나 상처가 있으면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우수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구별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지나가는 걸인에게 적선이나 하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에 자식들이 그것을 배웁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닮습니다. 부모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고, 주일성수 생활을 하면, 자식들은 그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보고 배워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 자식들이 부모가 심은 축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식들의 믿음 때문에 걱정되는 분이 있습니까? 신앙적인 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믿음의 본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어디를 가든지 믿음으로 바르게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녀가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오늘날 자녀들에게 물질 사용의 본을 보일 때에 자녀들이 물질 걱정 없이 남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으면서 축복의 열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5. 십일조를 드릴 때는 축복의 소망 가운데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말3:6 약1:17)
현세에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온전한 십일조를 통하여,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천국을 믿을 수가 있으며 영생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십일조도 못하면서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회심이 있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회심이요, 또 하나는 돈지갑의 회심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늘 풍요로운 의식 가운데 살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고통이 없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 치고 생활의 축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의 댈러스 제일 침례교회의 크리스웰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온전한 십일조를 아니하면 하나님이 마음에 고통을 주면서 다른 방법으로 거두어 가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해 전에 돌아가신 고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설교하시기를 사람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어떤 사람은 도둑놈에게 갖다 주고, 어떤 사람은 사기꾼에게 갖다 주고, 또 어떤 사람은 병원에 갖다 주고, 노름해서 없애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황충을 금하여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에게 수백 억대의 유산을 물려줍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자식이 타락하고, 인격이 분열되고,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파멸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남만큼 가진 것이 없어도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는 사람에게는 황충을 금하고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보장해 주시며 사는 땅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입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맡겨준 책임도 충실히 감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과 존귀를 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금년부터는 온전하고도 성실한 십일조 교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재물과 자식들까지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성경 말씀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번성하고 창대케 되는 축복의 열쇠를 가지고 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시험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합니다. 마4:7절 말씀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예외로서 십일조에 대한 것만은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라고 하셨고 또 엡5:10 말씀에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아끼는 마음으로,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십일조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절대로 교회의 재정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가정마다 물질의 풍요로운 축복을 받아야 하겠기에 나는 오늘 심각하고도 비장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부터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여러분의 창고가 차고 넘치는 축복된 삶이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이 시간 들은 말씀을 악한 사탄 마귀가 빼앗아 가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와 유혹에 가려서 결실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에 찍힐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여!!
금년 1년만 하나님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보십시오.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생활의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올해는 우리 모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은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리며 즐기며 베풀며 영광 돌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십일조 신앙
말 3:7-12, 마 23:23 / 지성래 목사(예수사랑교회)
십일조는 신정국가(神政國家)체제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규례이다. 신정국가란 하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를 세우셔서 친히 통치해 가시는 국가를 말한다. 가령 모세 때의 광야 백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는 예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에 의해서 형성된 단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받은 무리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를 이루시길 원하신 것이 교회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사람이 정한 제도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430년 동안 저들은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다. 노예 생활하던 저들은 십일조 규례 같은 것 모르고 살았다. 언약 백성이지만 세상 정부 즉 애굽의 바로 왕의 통치 아래 있던 노예였다. 노예였지만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살았다. 그러나 신분은 노예였다. 노예의 삶은 고달픈 나날의 일과였다. 그렇다고 저들이 굶어 죽은 것은 아니다. 고단하게 일하고 일정한 최소한의 처우를 받으며 먹고 살았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그렇게 사는 것은 살긴 사는데 사는게 아니다.
그런 저들을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신정통치의 구체적인 증거다. 모세 때에 홍해를 건너 광야로 이끌어 내셨다. 광야에서의 먹을거리는 만나였다. 하나님이 날마다 일정한 먹을거리를 하늘에서 내려 주셨다. 그래서 ‘하늘양식’이다. 고기 타령하면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주셨다. 메추라기는 비둘기 만한 철새다. 200여만 명이 광야에서 메추라기 공급을 받았다. 한 사람이 두세 마리 정도를 구워 먹었다면 최소한 한 번에 500만마리의 메추라기가 공급되어야 했을 것이다. 광야에서의 삶이란 식수 문제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 저들의 광야 40년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다. 물론 모세가 있었지만 모세가 동족들의 필요를 어떻게 해결할 능력이 있나. 여호수아가 젊고 유능했지만 여호수아가 동족들의 광야 생활에 그 무엇을 공급하고, 그 무엇을 해결할 수 있었나.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공급, 하나님의 이끄심,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야했다. 이런 삶의 모습을 ‘신정통치’(神政統治)라고 한다. 십일조 신앙은 나의 삶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헌금생활이다. 그렇지 않나. 세상 사람들이 십일조 드리는 것 보았나. 왜 않드리나. 왜 못드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유무상통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마라나타 신앙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연보 생활에 대하여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복음을 알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십의 하나가 문제가 아니다. 열을 다 드리고라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신비와 철저한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걸 실천하려던 사람이 바나바이고 그걸 시늉 내 보려다고 죽임 당한 부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닌가.
신정통치란 범사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모세 때의 광야 생활, 여호수아 때의 가나안 생활, 여러 사사가 통치하던 사사 시대의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대,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통치의 근본은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의 통치가 면면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눈으로 보면 창세기의 아담으로부터,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모든 삶의 배후에 하나님의 통치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말라기는 구약 시대 맨 마지막 선지자의 기록이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대는 느헤미야 시대 경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말라기란 ‘말라키야’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뜻이다. 모든 선지서의 기록이 다 그러하지만 말라기서의 내용은 말라기 자신의 사상이나 의견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로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해마다 1월 둘째 주일이 되면 청지기 주일로 지키며 십일조 신앙에 대하여 묵상하고는 한다. 말라기 3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지적하고 계신가.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보면 ‘나의 규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 규례라는 것이 8절 끝에 보면 ‘십일조와 봉헌물’에 관한 규례를 말씀한다.
질문해 보자. 규례는 반드시 지켜야 하나.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규례다. 여기서 말씀하는 십일조와 봉헌물에 관한 규례는 지켜야만 하는 규례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면 국가의 헌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 법을 어기면 세계적인 기업체의 회장이라도 감옥에 가는 걸 본다. 왜 그런가. 법은 왕부터 평민에 이르기 까지 누구나 지켜야 하는 평등 사상이다. 요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남의 나라 물건을 직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관세를 내지 않으면 그 나라의 물건을 내 손 안에 받아 들 수 없다. 이것이 규약이다. 하나님은 수입의 십일조, 수입 중의 봉헌물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례라고 하셨다. 그런데 말라기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민족적으로 이걸 어겼다. 그 때 하나님이 민족을 상대로 경고하시고 책망하신 구체적인 내용이 말라기서이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한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산물이지 신약 시대에는 필요 없는 말씀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눈여겨 보라. 교회는 이 땅의 소유가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조직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제도가 아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 생활은 구약 시대의 모세 때의 광야 생활 중에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모습을 대변한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광야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광야교회’(행7:38)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에 보면 37절에 모세를 ‘선지자’라고 했고, 38절에 ‘광야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스데반은 모세를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라고 설명해 주었다. 모세가 선지자란 말이다. 모세 때의 광야 생활하던 200여만 무리가 ‘광야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의 십일조와 봉헌물에 관한 규례를 명령 받았다. 그렇게 시작해서 여호수아 때에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시대가 열렸다.
그 십일조 신앙은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와 섭리를 깨닫고 조카 롯이 생포되었던 그돌라오멜 연합군의 소굴에서 되찾아 온 후에 그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 어려운 일을 겪고 보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돌보심과 공급하심이 더 실감나게 고백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스스로 자원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뒤 돌아 생각해 보고, 깨달아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살핌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인 것을 절절이 감사하며 멜기세덱 앞에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기도 받은 야곱이 형의 두려움을 피해 집을 떠났다. 루스 광야에서 돌을 베게 삼고 밤을 지새우다가 천사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밤에 야곱이 십일조 신앙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시켰나. 아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런 서원(誓願)을 한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십일조와 봉헌 신앙에 대하여 규례로 명령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르심을 받아 드리는 신정통치, 신정국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규례인 것이다. 주를 믿는 우리는 세상 나라로 하면 대한민국 백성이지만 신앙적으로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십일조와 봉헌물 신앙을 명령하신 바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일조와 봉헌물 신앙을 요구하신 바가 없으시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나. 절대 그런 경우란 없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 드리지 않아도 다 제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 그냥 나라에 세금 내는 것으로 족하다. 왜 그런가. 세상 나라의 백성이긴 하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천국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도 자식 낳아 가르치고 명문대도 보내고 사업도 성공하고 돈도 벌고 세상 낙을 누리며 배를 신처럼 섬기고 자기 배 자기가 두드리며 나름대로 세상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런 저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세상 나라의 백성들일 뿐이다.
레위기 27장, 민수기 18장 등을 찾아 읽어 보면 하나님은 십일조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12지파이다. 그 중에 레위 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아갔다.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처럼 자기 몫의 땅이 없다. 그러하다 보니 자기 소득, 자기 분깃도 없다. 곡물을 생산할 땅이나 양과 소를 키울 들판도 없다. 레위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막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의 진행을 돕고,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삶의 전부였다. 그런 저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11지파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규례가 십일조 규례이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가지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도록 명령하셨다. 이처럼 십일조 명령에는 선교와 구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가령 레위기 마지막 장인 27장 30절 이하에 보면 곡물과 과일과 양과 염소와 소와 같은 그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구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27:30)고 하셨다. 소나 양도 십일조를 구별 할 때에 우열을 가리지 말고 목자의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해서 그 열 번째 것을 하나님의 몫으로 구분하라고 명하셨다. 레위기 27장 30절과 32절에 보면 십일조는 곡물이든 과일이든 양이든 소이든 그 것은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하셨다.
민수기 18장 21절부터 32절까지에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이것은 ‘레위인에게 기업으로’주었다고 강조하였다. 레위인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구별해서 거제로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다. 그것은 제사장 아론의 몫이었다. 성막에서 섬기고 일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이렇게 구별된 십일조를 먹되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교회로 하면 나나, 이범진, 김준연 전도사는 여러분이 드리는 십일조에서 사례를 보수로 받으며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사람처럼, 제사장처럼 하나님의 일을 전담해서 섬기는 이들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교훈해 주셨다.
세세하게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는 것도 좋지만
정의/긍휼/믿음
이 세 가지를 버리면 안된다고 지적하셨다. 하나님 중심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신 말씀이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강조에 보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그 모두가 다 중요하다는 강조이다. 십일조 철저히 드리듯이 정의와 긍휼을 실천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시다.
이것이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의 십일조 신앙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연보 생활을 교훈할 때에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고도 교훈하였다. 그렇지 않나.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씨앗을 아까워하며 뿌리는 경우가 있나. 좋은 씨앗, 틈실한 씨앗을 구별해서 넓은 땅에 넉넉히 뿌릴때에 수확할 날이 오면 풍성하게 거두는 법칙이 농사의 법칙이 아닌가.
십일조 잘해야 복 받는다. 십일조 잘해야 자손이 잘된다. 십일조 잘해야 만사 형통해진다. 십일조 잘해야 무병 장수한다.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박수 무당에게 귀 기울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33살에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사명을 다하던 세례 요한은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임 당했다.
제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 바울은 목 베임을 당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 당했다. 맛디아로 보충된 열두 제자의 나중을 우리는 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겪었던 고난도 안다. 로마 시대 박해기를 거치던 신앙의 선조들이 당한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기억한다. 저들이 십일조 잘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배 두드리며 살다 죽었나.
그러면 십일조 신앙은 무엇인가. 십일조 잘 드려서 이 땅에서 복을 받고 번성하고 자식 잘되고 편안하게 평안하게 오래 오래 사는게 복인가. 물론 그런 복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십일조 신앙은 성령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제 제산을 팔아서 바나바처럼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고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유무상통하던 현장에 주목하여야 한다. 땅 끝까지 성령 받고 권능 받은 증인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그 바탕이 되어야 맞다. 십일조를 드리느냐 못드리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로마서 12장 1-2절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다 사도 바울처럼 열방을 향하여 나가는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런 선교 열정이 식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 선교 의지가 불붙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은평 뉴타운의 북한산 자락에 예배당 예쁘게 건축한 후에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자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지난날을 뒤로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거룩하고 역동적인 공동체로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각자 받은 유인물을 잠시 보자.
하나님은 십일조생활 봉헌물 생활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나.
1. 하늘 문을 여시고 복(福)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2. 죄(罪)를 멀리하게 해 주신다.(민18:32)
너희가 그 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이란 십일조를 말씀한다. 십일조 신앙이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한 몫이니 그것을 더럽히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거룩하고 아름답게 구별하고 하셨다.
3. 모든 가족(家族)이 즐거워하며 살게 해 주신다.(신12: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그 앞 부분에 보면 가나안 일곱 족속이 숭배하던 우상 숭배 현장을 철저하게 깨트려 그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하셨다. 신명기 12장 1-6절이다.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인쇄물로 드린 3번째의 성경 본문인 신명기 12장 7절이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4. 범사(凡事)에 복을 주신다.(신14:28-29)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렇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로 하여금 먹고 배부르도록 돌아 보고 섬기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다.
룻기의 보아스를 보라.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시어머니 공양하려고 남의 밭에 드나들며 밀 이삭, 보리 이삭을 줍던 모압 여인이 룻이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에 가서 살던 신랑을 맞아 가정을 이루었으나 남편이 죽었다. 연세 들어가는 시어머니 따라서 이스라엘 베들레헴 마을에 가서 하루 하루 이삭 주워 먹던 젊은 과부를 그 마을 대 지주 보아스는 측은히 여기며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넉넉하게 이삭을 남겨 두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룻이 보아스의 눈에 들게 하셨다. 룻은 보아스를 통해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이방 과부를 돌보아 준 보아스는 룻을 통해 다윗의 증조할아버지가 되고 룻을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누가 한 일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5.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시고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는 여호와의 성민(聖民)이 되게 해 주신다.(신26: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6. 만족(滿足)하게 먹고 남는 복을 주신다.(대하31:10)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미국의 저력은 이런 신앙과 섬김의 증거인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7.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해 주신다.(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8. 풍성(豊盛)하게 하시고 의(義)의 열매를 더하신다.(고후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모든 것의 공급자이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그 증거가 개인과 가정마다 넘치길 축원한다. 아멘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
말 3:7-12 / 최성규 목사
사람들은 교회에서 돈 이야기 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특히 설교자가 돈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설교의 3분의 2가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찰스 스펄전 목사는 “헌금을 가르치지 않는 목회자는 직무유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설교 중에 헌금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목회자가 헌금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고, 교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헌금 중에 헌금은 무엇일까요?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잘 하고 계십니까? 본문에는 십일조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말 3:10). 인생은 시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시험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감히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마 4:7). 하나님을 시험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고전 10:9).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시는 분도 아닙니다(약 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십일조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물질을 다스리는 인생, 하늘 창고의 복을 누리는 신앙이 됩시다.
첫째, 도적질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십일조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일조를 헌금의 차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냐의 차원입니다. “내가 일해서 내가 번 돈이다”라고 하면 내가 주인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돈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십일조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첫 번째 십일조에서 잘 드러납니다. 십일조를 최초로 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명령하시기 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나섰습니다. 포로로 잡힌 롯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롯도 구해냈습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타나,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합니다(창 14:19-20). 아브라함은 그 즉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창 14:20). 아브라함은 자신의 승리가 자기 힘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십일조는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요청하십니다.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 3:7).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복된 인생입니다. 혹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떠나있다고 생각된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다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하나님도 다시 돌아와 우리를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둘째,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
주인이 하나님이시면,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것을 잊습니다. 마치 자기 방을 처음 가진 청소년들 같습니다. 처음 방을 갖게 된 아이들은 방 앞에 ‘주인 외 출입금지’라고 써 붙입니다. 자기 방이니, 자기 허락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방이 진짜 자기 방입니까? 등본을 떼면, 부모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시간도, 내 물질도, 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은 다 달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열 중 하나만 달라고 하십니다. 첫 열매, 첫 새끼, 첫 소득, 첫 것만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만 하나님의 것으로 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표성입니다. 나머지 것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대표로 하나만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립시다.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경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 27:30)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립시다. 다윗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립시다(대상 29:14).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풍성하게 드립시다(고후 8:1-2). 바울처럼 즐겨 냅시다(고후 9:7).
셋째,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
왜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을 요구하실까요? 하나님께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마중물과 같습니다. 마중물을 부으면 생명수가 콸콸콸 쏟아집니다. 마중물도 붓지 않고 펌프질을 해보십시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헛수고입니다. 손만 부르트고 땀만 납니다. 학개 선지자 당시 그런 헛수고가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고 외쳤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 해도 가족이 아프고 사고가 나면 모두 새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우리 모두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 하나님을 시험하여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노리는 자들을 막아주십니다(말 3:11). 우리의 물질이 낭비되는 것을 막아주십니다(말 3:11). 우리의 물질과 인생을 풍요롭게 하십니다(말 3:12). 이삭처럼 마침내 거부가 되게 하십니다(창 26:12-13). 혹시라도 믿음이 작아서, 꿈이 작아서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분명히 이삭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온전한 십일조와 풍성한 헌금 생활을 합시다. 그리하면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차고 넘치게 누리게 됩니다.
넷째, 존경받는 부자가 된다
오늘날 부자는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부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존경받는 부자는 적습니다. 물질 때문에 넘어지는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질 때문에 손가락질 받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해보십시오. 십일조는 돈을 질서 있게 합니다. 근검절약을 생활화 하게 합니다. 낮은 곳으로 돈을 흘려보냅니다. 한 마디로 십일조는 우리의 지갑을 성화시킵니다.
이 시대는 지갑의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줍니다. 세계 금융 위기가 왜 닥쳤습니까? 탐욕으로 지갑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돈을 벌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전 세계인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갑을 점검합시다. 직장인은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십일조를 뗍시다. 개인 사업자는 매일 십일조를 뗍시다. 십의 일을 넘어 십의 이, 십의 삼을 목표로 삼읍시다. 지갑이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 3: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졸부가 되지 말고, 존경받는 부자가 됩시다. 존경받는 부자가 많은 나라가 부강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기 원하십니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내 전부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복 위에 복을 얹어 돌려주십니다. 우리의 후대까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십니다.
십일조를 드리자
말 3:7-12 / 임덕순 목사
금년도 우리교회 표어는 기초를 다시 세우자는 것인데, 그중에서 세 번째 구체적인 내용이 “온전한 십일조로 물질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날마다 만나는 대표적인 문제가 물질문제입니다. 돈이 없으면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고, 아이가 가진 재능을 살려줄 수도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돈이 없으면 자식들도 부모를 존경하려고 하지 않으며, 돈이 없으면 먹고 사는 것까지도 문제가 됩니다. 물질문제는 모든 인간관계에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돈 문제만 얽히면 깨어지고 말며, 아무리 공자 같은 사람도 돈이 얽히면 화를 내고 이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물질문제가 세상에서는 큰 문제입니다.
이 돈은 너무 많아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돈이 많으면 대부분 사람은 성실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턱없이 교만해져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도 신앙에 게을러집니다. 돈이 많으면서 자식을 바르게 기르는 것도 몇 배나 어려워집니다. 자기 아버지가 부자니까 자기는 노력하지 않아도 살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아굴이라는 사람은 “나로 가난케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 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라고 기도했습니다.
눅 12:13-32에 보면, 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자가 어느 해 대풍이 들어서 곡식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그리고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부자는 물질이 많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첫째는, 물건을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하지 않고 쌓아 두려고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지어 쌓아만 두는 것은 얼마나 낭비적인 투자입니까? 그 돈을 다른 보람 있고 생산적인데 투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물질을 쌓아 두는 데에만 신경 쓰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은행에 넣어 두고 편하게 먹고 살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사업에 투자하여 고용을 증대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어리석은 부자는 쌓아두려는 생각만 했으니 물질 주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잘못을 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혼자서만 오래오래 먹고 쓸 것만 생각합니다. 19절에 보면,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다”고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신 이유가 자기혼자서 오래오래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목사의 직분을 맡았든지, 의사의 직책을 맡았던지, 물질을 맡았던지, 하나님이 왜 이것을 주셨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하나님의 바른 청지기가 되는 것이며, 인생을 값지게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이 많으면 영혼도 안식을 누릴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우리의 육체보다 훨씬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학문을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명예가 높다 할지라도, 그에게 살아있는 영혼이 없다면 생명과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과 접촉할 수가 없고, 미래 세계와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다가 죽고 마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은 물질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지식인들이 왜 인생을 회의하고, 인기절정의 사람들이 왜 자살하는지 아십니까? 물질과 명예로 자기영혼이 행복할 줄로 착각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먹고 쓸 물질이 좀 많다고 영혼도 만족할 줄 알았으니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이 부족하여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자신감이 없고 염려와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람은 앉으나 서나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정 경제를 책임진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가정의 물질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이 좋은 일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물질을 얻게 되어 있고, 땀 흘려서 일 할 때 당당해지고, 몸 안에 독소가 빠져나가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고 쉽게 돈 많이 벌 곳을 찾는 사람은 그의 영혼뿐 아니라 생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노숙자들도 그런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서 물질을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시던 주님은 물질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염려 근심하지 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29).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미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대개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압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등록금 통지서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부모는 아이의 등록금을 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등록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이렇게 자기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합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려면,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24절부터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의 까마귀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며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이 먹여서 기르시지 않더냐? 들에 핀 꽃을 보아라, 그것이 옷을 만들어 입더냐? 하늘의 새도 먹이고 들의 풀들도 입히는 하나님이 하물며 너희를 책임지지 않으시겠느냐,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야, 아버지인 나는 너희에게 무엇이 언제 얼마나 필요한지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염려하고 불안해하느냐? 너희는 모든 참새보다 귀하고, 세상의 모든 꽃보다 훨씬 귀하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물질문제로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물질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위해 살라고 하십니다.(31)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기여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지, 물질 문제로 고민하면서 주신 세월을 다 보내서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질이 없다고 고민하거나, 물질이 많다고 교만하며 물질에 매여 살지 말고, 주신 은사나 물질이 있거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도울까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21절에서는 그 방법의 하나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는 부요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있는 체도 하고 내노라고 뽐내기도 합니다. 옷도 잘 입고, 집도 자랑할 만 한 비싼 집에서 살고, 아이들도 잘 가르치고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돈 한 푼도 없는 가난뱅이처럼 헌금할 줄도 모르고, 어려운 이웃이 곁에 있어도 구제할 줄도 모르고, 장학헌금 한번 낼 줄도 모릅니다. 이런 태도를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십니까? 선한 일에 부자가 되셨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이미 얻어놓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봅시다.
금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물질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던 시내 광야에서 여행하던 유대인 200만 명을 40년 동안 날마다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우리가 당한 경제위기는 별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경험하고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 관리의 원리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의 소유권이 만드신 당신에게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것을 나누어 맡겨 주시는데,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게 하시고 그 보상으로 물질을 주시면서, 자기가 수고하여 소득을 얻었을지라도 생명과 건강과 일터를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생명과 소득과 환경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먼저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만 하면, 내가 너희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물질을 부어 줄 것인데, 그렇게 하는지 안하는지 십일조를 해서 나를 한번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십일조를 바르게 드리는 것은 우리가 당한 물질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저는 이 명령이 얼마나 확실한지 알기 때문에 금년의 표어 속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물질문제를 해결하자”고 당당히 호소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고, 신약에는 십일조를 하라는 명령이 없으니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율법주의적 신앙이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십일조는 드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율법에 정한제도가 아니라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 우리 믿음의 조상되는 아브람이 자원해서 실천을 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포로 된 조카 롯을 구하고, 빼앗긴 물건들을 되찾아올 때 제사장 멜기세덱이 찾아와 축복해 주었는데, 그때 아브라함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마쳤습니다.
그후 율법에 십일조를 드리라고 규정했고,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23:23에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신앙과 감사의 고백이기 때문에 꼭 드리는 것이 도리요, 물질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바른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벌고 싶거나 번 돈을 잘 관리하고 싶다면, 창업 투자전문가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할 것입니다. 상담자 중에도 경험과 실력이 가장 나은 사람에게 묻고 지도를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자문을 받아도 실패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 사람도 장래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는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계적 경제위기도 소위 뉴욕 월스트리트의 투자 전문가들이 만든 실수입니다. 그들은 투자자를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의 자문을 받아야 할까요? 전지전능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재정 자문도 받지 못할 정도라면 신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말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아주 명확하고 강력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금을 주신 분께서 최고의 이자를 책임지겠다는 말씀인 셈입니다.
말 3:8-9에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라고 우리가 경제적으로 기를 펴지 못하는 이유가 십일조를 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도가 십일조를 바치고 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제사장이나 목사가 먹고 살아가도록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종들에게는 돈 버는 일은 못하게 하시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만 살게 하셨을까요? 양이 안전하게 먹고 자라려면 목자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의 생명도 없습니다. 전쟁은 사병이 앞장서 하지만 사병들을 훈련시키고 지휘하는 장교 없이는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고 인도해서 복된 생활을 하게 하려면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셨고, 이들에게는 개인의 일을 못하게 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데에만 전념하게 하시고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바친 십일조로 먹고 생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당연한 의무일 뿐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돌보는 주의 종을 위한 의무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이것을 잘 순종하면 너희에게 물질문제가 전혀 없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한번 순종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십일조는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청지지 자세를 유지하는 방편이고, 현실적으로는 내 영혼을 돌보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먹이기 위한 것입니다.
기업을 받은 열한 지파가 기업을 받지 않고 자기들을 돌보는 한 지파를 위해서 십일조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직장도 있고 사업도 있고 임대 수입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업체도 없고 농사도 하지 않고, 임대 수입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여러분을 가르치고 먹이는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터가 있고 수입이 있는 여러분이 낸 십일조로 생활비를 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엄목사님, 김목사님, 전도사님들도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십일조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구약에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민 18:21에는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 17:25-27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 세를 내신 기록이 있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타인에게 관세와 정세를 받고 아들은 면제하지 않더냐 그러나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않게 하고 본을 보이기 위해서 십일조를 합니다. 해도 정확히 합니다. 생활비, 활동비의 십일조는 매달 당연히 하고, 가끔 외부에서 설교하고 받는 교통비, 회의에 참석하고 받게 되는 경우가 있는 교통비, 어떤 성도가 혹 주는 책값을 수첩에 다 기록했다가 십일조를 드립니다.
나는 목사가 된 뒤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십일조를 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경제문제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십원까지 따져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이 나의 물질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33년 전, 당시에 내가 가진 전 재산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물질은 하나님께 위임하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나는 물질문제로 힘들어 본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인 목사님도 자기유익을 위해서 거짓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 가십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철철이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 오셨고 여러분 모두도 관리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부요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교단의 총회장님을 지낸 황승기 목사님은 제가 시무했던 강경제일교회의 전임자이신데, 그분께서 논산중앙교회를 시무하실 때 한 거지가 토요일마다 와서 십일조 드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거지를 붙잡아서 교회도 안 나오면서 어찌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가느냐고 물었더니, 누가 말하는데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해보니까 정말 구걸이 잘 되어서 매주 십일조를 한다고 하더랍니다. 거지도 십일조의 능력을 체험했답니다. / 저는 물질문제의 결정적인 해결책은 십일조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보다 더 분명한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고,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렸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십일조는 최소한의 기준일뿐이고 사실은 물질 전부를 하나님께 받았고, 전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겠다는 자세로 사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공개하는 말이지만 저는 십일조를 포함해서 십 분의 삼 이상은 드리며 삽니다. 십일조는 의무감으로 내고, 십 분의 구는 해방감으로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이 아닙니다. 재물이 누구의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 먹을 것만이 아니라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엡 4:28에 보면,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남 좋은일 하라는 권면입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자식이 능력이 있으면 아버지의 돈은 필요 없을 것이며, 능력이 없다면 아버지의 재산을 헛되게 탕진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전 재산 4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힌 홍콩배우 청룽(成龍)의 말입니다.
재산의 85%인 37조원을 빌 게이츠가 세운 ‘빌 게이츠 재단’에 기부한 워런버핏 회장은 “나는 매우 운이 좋아서 돈을 벌 수 있었고, 그래서 항상 재산을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며, “부자 부모를 만났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평생 공짜로 먹고 살게 하는 일은 반사회적일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지는 몰라도 어설프게 믿는 한국교회성도보다 훨씬 나은 재물 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입니다. 물질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사는 동안에 먹고 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좋은 일 하면서 살라고 나누어 맡겨주신 도구일 뿐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는 모두 다 놓고 갑니다. 그러니 열심히 벌어서 남 좋은 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남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았다는 감사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먼저 드리고, 남은 십분의 9를 가지고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드리기로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물질을 책임져 주십니다. 금년부터 하나님을 믿는 한가람 성도는 모두가 정확한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를 자기 이름으로 드립시다.
우리교회는 누가 무슨 헌금을 얼마 했다고 공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의 생활을 알고 기도하기 위해서 가끔 들여다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기명으로 하지 말고 기명으로 십일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무기명으로 하면 아무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하지 말까? 하면서 십일조 드릴 때마다 시험에 듭니다. 귀하신 명령에 순종하면서 시험 들 환경을 만들지 말고, 확실하게 십일조를 시작해서, 이번 경제위기가 여러분의 물질관을 바꾸어 놓는 기회가 되고, 십일조가 여러분의 물질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는 하늘문을 엽니다
말 3:7-12 / 이일기 목사
이 세상에는 많은 문들이 있습니다. 학업의 문, 취업의 문, 사업의 문, 결혼의 문, 행복의 문 등 많은 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들이 열리면 성공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나 만일 이 문들이 닫혀있어서 열리지 않으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은 어떠한 문이겠습니까? 바로 하늘 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이 다 열려있어도 하늘 문이 닫히면 열려진 그 모든 문은 헛것이 되고 말 것이며 반대로 하늘 문만 열려 있으면 이 세상에 모든 문이 다 닫힌다고 할지라도 살길이 열릴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우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십일조에 관한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 날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터치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처음으로 하는 설교인데 앞으로는 십일조에 관하여 설교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혹 오늘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 계신다면 믿음으로 받아 큰 복을 받으시고 시험에 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1. 십일조의 유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와 그 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 십일조는 율법시대의 것이므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다 끝났다고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정말 십일조가 다 끝났습니까? 만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이단에 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율법 이전부터 시행해 왔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아브라함(아브람)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소돔과의 전쟁에서 롯과 소돔 사람들을 구하고 돌아와서 승리의 감격을 십일조에 담아 드렸습니다.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②야곱의 십일조.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망하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장래의 약속을 받고 감격 속에 서원을 하였는데 그 서원 중의 하나가 십일조입니다.
창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들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감격 속에서 나온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믿음으로 드린 예물입니다.
승리를 맛본 후에 아브라함이 드린 것이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한 야곱이 벧엘에서 감격스럽게 서원한 이 십일조는 율법이 생기기 약 5백여 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의 첫 성경인 창세기에 십일조가 나오고 그리고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에 역시 십일조를 언급하는데 창세기에서의 십일조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의 표시로서 드려진 것입니다.
③예수님의 십일조.
예수님도 구약의 십일조를 인정하셨지 폐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일조에 대해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와 함께 정신적으로 더 높은 의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 십일조를 어떠한 방법과 자세로 드려야 합니까?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①십일조를 드리는 방법.
여러분! 십일조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레 27:30절에 보면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소유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을 우리가 좀 더 잘 이해하여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것 즉 우리의 모든 소유물들이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십분의 일은 나(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전고에 드릴 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나머지의 것 십분의 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시도록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욥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시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창고에 드려야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범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범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것이 되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이 우리도 우리의 풍요로운 삶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만큼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을 따라 드려야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안 되는 줄을 여러분들 말 안 해도 잘 아시지요.
성경은 만일 사람의 방법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도적질이 되는 것임을 엄중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혹 사람의 생각을 따라 사용하는 방법 중에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고 즉 교회에 드려야 할 것을 다른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정해 드리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다른 교회나 혹은 단체 혹은 개인 목회자 등입니다(우리교회는 큰 교회니까 괜찮겠지).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러한 곳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요. 예, 그러한 곳은 아직도 자신에게 십분의 구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하면 자신도 좋고 받는 당사자도 좋고 하나님도 좋습니다.
기타 헌금 즉 주일헌금, 선교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 건축헌금도 나머지로 해야만 하며 오직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달리 적용하거나 해석하여 어떠한 명분을 갖다 부쳐도 이는 도적질이 되는 것임을 아십시오.
0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②십일조를 드리는 우리의 자세.
십일조란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됨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헌금으로서 나의 모든 것 몸과 마음 물질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의 약식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 14:0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십일조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임을 고백하는 헌금이란 말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얻게 하신 결과 아닙니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을 바라보고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잘못 투자(?)한 것 인줄 아십시오.
십일조는 우리의 삶의 감격과 신앙고백으로서 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선순위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헌금인 것입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현재의 수입을 가지고는 십일조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저것 꼭 써야 할 것을 먼저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수입이 늘면 그 때 드릴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나 나중의 방법으로 가능할까요? 십일조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지 여유가 생기면 하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3. 십일조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십일조를 드림에는 놀라운 축복과 함께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방편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받아 누리는 그 축복이 무엇일까요?
①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주십니다.(10절)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의 말이 아닙니다. 목사의 말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한량없는 축복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축복들이 쏟아지게 되어 있다는 말씀은 바로 나를 위한 축복이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 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십일조를 통하여 하늘 문이 열리기만 하면 우리의 삶이 이렇게 풍요로워집니다. 나라의 경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세계의 경제가 어려워도 하늘 문만 열리면 우리의 삶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득의 십일조만 드리면 하늘 문이 열리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가장 많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늘 문이 열리거나 어느 일정한 수준 이상의 예물을 드려야만 하늘 문이 열리게 된다면 경제가 열악한 사람은 평생 하늘 문을 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소득이 많은 자나 적은 자나 그 소득의 십분의 일만 드리면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장치입니다.
신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②수고의 열매를 빼앗기지 않고 온전한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11절)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황충(蝗蟲. 먹는 자). 일종의 메뚜기와 같은 것으로서 이 황충은 ①논밭에 떼로 몰려다니면서 ②사정없이 먹어치웁니다.
그래서 이 황충은 먹는 자란 뜻이 부여된 것 같기도 한데 이 떼가 몰려오면 애써 가꿔 놓은 곡식을 다 갉아먹게 되어 완전 황폐화를 이루고 맙니다.
우리의 세상살이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이 황충의 떼가 몰려오는 것을 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땀 흘리고 힘써 벌어 놓으면 인간 황충이 떼로 몰려 와서 다 먹어 치워 버리는데 도무지 막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몰려오는 황충 떼를 막을 수 있습니까? 언제나 빈 털털이가 되게 하는 이 황충 떼를 막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우리의 수고의 열매를 빼앗기지 않게 해 주십니다.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우리가 수고하여 지은 농산물이 기한 전에 떨어지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기한 전에 떨어지면 가치가 없고 제 맛이 안날 뿐더러 제 값을 받지 못해 큰 손해를 당하게 됩니다.
인생살이도 조기 낙과를 하면 가치가 없어지고 인생의 제 맛이 나지 않지요. 가령 학업을 하다가 온전히 마치지 못하거나, 사업을 하다가 중간에 중단하거나, 직장에 다니다가 중간에 퇴직하는 것처럼 실컷 준비해 놓고 중간에 그만 스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효가 되잖아요?
③우리의 터전이 아름다워 집니다.(12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 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런데 이 말의 원 뜻은 우리가 아름다운 땅 즉 옥토(沃土)가 된다는 말씀입니다(You will be a land of delight).
옥토라는 게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심으면 잘 되는 땅 아니에요? 우리가 아름다운 땅 옥토가 된다는 이 말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잘 된다는 말입니다.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로서 십일조를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는 일들이 잘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4. 십일조를 드려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①즐거움과 감사로 하지 않고 세금 내는 듯한 부담감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금 내는 듯한 부담감의 십일조는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므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②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③십일조를 드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④십일조는 드리지만 다른 죄악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어느 교회에 아주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김 권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권사님은 재산은 많았지만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는 것이 아까워서 감사헌금만 조금씩 드렸습니다.
그런데 3대 독자인 아들이 장가를 갔는데 며느리가 임신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낙태를 하고 맙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세 번째 임신을 하자 권사님은 목사님을 찾아가서는 목사님, 뭐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함께 기도해 보십시다 하고 시간의 말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하시던 중에 하나님께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펼쳐 놓고는 권사님에게 말했습니다. 권사님,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렵겠지만 십일조를 드리셔야 되겠습니다.
이때부터 인색하기로 소문난 권사님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하고는 며느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며느리의 배가 점점 불러지더니 기한이 다 되어 순산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옥동자 같은 아주 귀여운 손자를 낳았습니다. 그때서야 권사님은 정신이 들어서 하는 말이 십일조가 과연 세긴 세구나 하면서 진작 십일조 드리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축복의 길은 십일조에서 나온다고 솔선해서 가르치고 전도했다고 합니다.
결론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떤 미국 잡지에 실린 유머 중에 어느 교회의 집사가 혼자 기도하면서 주님, 10불이 제 지갑 속에서는 그렇게 작게 보이는데 어찌하여 헌금함 앞에서는 그렇게 크게 보이나이까 라고 탄식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10불 즉 1만 1천원은 미국 교인들에게도 자기가 쓰려면 정말 별 것 아닌 액수인데 막상 헌금으로 드리려 하면 많은 액수처럼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농담인지는 몰라도 그저 농담으로 듣고 흘려버리기에는 상당히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고 있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중요한 열쇠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인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그 믿음이 열쇠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②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인 기도입니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키며 기도는 지금도 응답이 디고 있습니다.
마 07:0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③물질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인 십일조입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성도 여러분은 십일조의 생활을 하십니까? 소득의 십일조, 생활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말입니다.
하늘 문만 열리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전혀 없는 광야에서도 살 길이 열립니다만 반면 하늘 문이 닫히면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십일조는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고백이요 진실한 믿음의 시험이기에 만약에 십일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십일조라고 적당히 바치면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십일조 하시는 분들 중에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안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어떤 분은 일년 중 9개월 낸 사람, 6개월 낸 사람, 또 다른 사람이 하나 안하나 봐가면서 체면상 하다 보니 한 3개월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콜게이트 치약의 창설자인 콜게이트(영국)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중풍병자이고 어머니는 결핵환자였는데 그는 먹을 것이 없어 방황하던 중 미국으로 가던 상선을 몰래 타고 가다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끌려가서 매를 맞으며 문초를 당하는 중 가정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돈벌이를 하러 가기 위해 몰래 배를 탔다고 실토하고 난 이후 다행히도 그 선장의 양자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선장이 늙은 후 그 배를 팔아 치약회사를 설립하고 그 회사 이름을 콜게이트라고 하였는데 콜게이트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신자인 부모로부터 주일예배 생활과 십일조 훈련을 엄격히 받은 자였습니다.
항상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를, 왼쪽 주머니에는 수입금을 넣도록 훈련받으면서 자란 결과 훗날 치약 공장을 일으켜서는 십분의 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고 콜게이트 대학을 설립하여 하나님의 선교 사업에 위대하게 쓰임 받는 신앙의 사업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