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126) - 오후 5시에 온 사람
깊어가는 가을, 아파트 경내의 단풍이 곱게 물들고 창밖의 들판에는 추수가 한창이다. 결실의 계절, 모두 아름다운 열매 가꾸시라.
어제는 1년 중 가장 크고 밝다는 수퍼문이 떠오르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살피니 육안으로는 평소의 보름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잠시 떠오르는 상념, 유한한 나그네의 숨결에 스치는 무한한 시공의 궤적이 현묘하구나.
지인이 보내온 가을 인사
지난주 영상예배로 접한 목사의 설교 중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는 예화가 마음에 닿는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인력시장의 막바지에 일감을 얻은 일용노동자를 일컬음, 이를 들으며 오래 전 이집트 카이로 여행 중 교외의 피라미드를 관광하고 돌아오는 길에 맞닥뜨린 길거리의 대기노동자들 모습이 떠올랐다. 가이드의 설명, 저 분들은 아침부터 일감을 찾기 위해 저렇게 서 있는데 아직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 때 다음의 성경구절을 의아하게 여겼던 의문이 풀리는 경험을 하였다. 아, 늦게 일자리를 얻은 이들도 일찍부터 나와 대기 중인 것을.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만 일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장 1~16절)
다음날 도서관에서 예화로 든 책,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는 책을 빌려와 내용을 살폈다. 저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선한청지기교회의 송병주 목사, 그 책의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때를 놓쳐 누구라도 절망하고 포기할 법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때는 차오르고 있다고 믿는 희망의 목자. 오후 5시의 인력시장처럼 날 저물고 더 이상 불러줄 곳 전혀 없는 막막한 상황 앞에서도 대안이 없어 그저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고 서 있는 이 시대 숱한 인생들의 심정을 그는 잘 안다. 지나온 가정의 환난과 고생 가운데 암으로 소천하신 부모님, 유학 중에 늦게 얻은 막내아들에게서 자폐증이 발견되는 마음의 고통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 급거 채용된 포도원 품꾼 같은 우리 ‘오후 5시에 온 사람’에 관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 분의 은혜로 쓰임 받으며 살게 된 사람들의 소망과 탈출구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이 책을 썼다.’
저자의 기술, ‘예전에 나는 하나님은 내 인생의 시간 관리를 잘 못하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가꾸시던 과수원을 세 배로 확장하는 과감한 투자를 감행한 해에 서리가 예년보다 3주나 빨리 내렸다. 그 해 농사는 엉망이 되었고 우리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간신히 그 해를 마무리하고 기대 속에 새해를 시작했지만, 생신선물로 해드린 건강검진에서 아버지는 간암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덩달아 IMF 사태가 터지며 모든 것이 무너졌고 아버지는 결국 떠나버리셨다. 아버지를 대신해 남은 빚을 억척같이 정리하신 어머니는 행복한 삶을 기대하였지만 뇌종양말기 진단으로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할 즈음, 늦게 얻은 막내아들이 자폐증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동안 인내하며 버텨왔던 삶의 무게가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나를 덮쳐오는 것 같았다. 이런 내가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는 책을 쓴다는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그 시간(크로노스)과 하나님의 그 시간(카이로스)은 항상 어긋났던 것 같다. 살아가다보면 머리는 끄덕여지지 않는데 가슴이 끄덕여지는 일이 있다. 절망을 통해 희망을 일구고, 분노를 통해 용서를 이루어가게 하셨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막판 뒤집기의 대박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과 절망 속에 던져진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미운 그 순간에도 왜 그 분이 소망인지를 나누고 싶었다. 원고를 마무리하고 나니 가장 먼저 가족이 생각났다. 늘 아픈 손가락 같은 우리 아이들의 갸륵한 껴안음과 어려운 순간을 함께 견뎌낸 아내의 기도가 고맙다.’
책의 초입에서 접한 모세의 사례도 인상적, 젊은 시절 작은 교회의 재직으로 봉사 중 이집트 시나이 산의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모세의 조우를 교우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는 요지의 메시지를 전한 기억이 가뭇한데 <지는 황혼에 만난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다룬 청년 시절의 화려한 성공 신화를 뒤로하고 실패와 좌절의 황혼에 만난 모세의 떨기나무(이집트 여행 중 두 번이나 그 곳을 찾기도) 사연이 반가워라. 어느덧 화려한 청장년 시절 뒤로하고 노쇠한 처지의 모세를 닮아가는 내 모습이 겹쳐져서일까.
아직은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다. 오후 5시에도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계시다. 오후 5시. 여전히 인력시장을 서성이는 품꾼 같은 인생에게 남겨진 일은 절망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찾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 책의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