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노래학교
봄날 유채꽃 축제를 한다는 창녕남지를 다녀왔다. 일제 때 건설 했다는 남지철교 밑 낙동강 모래사장에 30만 평도 넘는 터에 온통 유채꽃을 심어 축제가 한창이다 . 형편이 나아지니 승용차 행렬들은 꼬리를 물고 인파들은 향수를 일깨어 봄철 꽃구경에 나섰는가 보다. 유채꽃들 사이로 제 얼굴 담기에 혼이 빠졌다. 축제에 18번 장터국밥 집에서 요기를 하고 각서리 타령에 넋들을 놓았다. 남지철교 난간엔 창녕군에서 모은 듯 지난 시대의 흑백 사진으로 ‘자랑거리추억사진전’을 열고 있다. 흑백이지만 가난에서도 표정들만은 환하고 다정타.
철교 위 봄철 쑥떡장수는 그냥 먹어 보라는 인심에도 획하니 지나치고 만다. 철교 밑으로 유유자적한 낙동 강물, 3,40만평의 넓은 모래사장에 끝 간 데 없는 유채꽃밭, 낡은 철교 저 아래로 봄의 아늑함과 인간들의 근면함이 깃든 축제 한판이 벌어지고 있다.

행사장 가게의 한 캐리커처는 어느 아주머니가 스마트 폰에 담아 논, 자기 개를 캐리커처로 그려 달라고 만원을 내고 목 빠지도록 그림을 기다리고, 남의 팔자를 봐 준다는 도사들은 개점휴업이라 지나는 얼굴마다
길흉화복을 점치듯 쏘아본다. 유채꽃 밭에는 사진작가도 많고 모델도 많다. 어느 중늙은이는 유채꽃밭 위로 드론을 띄워 놓고 그 행방을 좇고 있다. 장비 값만 250만원, 조정 경력은 5년이라고 자랑을 더 붙인다.
오는 길에 ‘산토끼노래 학교’ 이방학교를 소개했다. 요즘이야 동요를 부르는 아이도 없고 가르치는 학교도 없겠지만 오늘 축제에 나선 어르신학생들은 국민학교 다닐 때 부른 ‘산토끼 노래’로 신이 난 모양이라 화려하게 단장한 교정에 노래비동산으로 안내했다.

산토끼노래동산
칠십 평생에 처음인 모양이다.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불렸던 ‘산토끼 노래’가 향수를 자극한 모양인지 부끄러움도 없이 70년도 더 사용한 쉰 목소리로 ‘산토끼’ 동요를 불어 댄다. 할배 학생들은 목소리만은 진지해 할배들의 童心이요 童顔이다.
‘산토끼’ 노래를 작사 작곡한 이일래 선생님(1903-1976)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 창녕 이방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일래 선생님은 창신보통학교에 계실 때 이원수선생 지은 '고향의 봄'에 작곡을 했고 이방학교에서 '산토끼'와 '단풍' 동요에 작사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동요들은 다 일제강점기 때 작곡한 셈이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밤 토실 주워서 올거야
묻고 답하는 한도막 형식의 동요라 외우기도 좋고 부르기도 쉽다. 이방초등학교는 산토끼노래로 시골학교 같지 않다. 한 때 봉직한 교사의 흔적을 기린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닐 텐데 참으로 갸륵한 역사(役事)다. 졸업생, 유지들, 선생의 후손들의 정성이 ‘산토끼노래학교’로 만들었나 보다. 교문에는 ‘대한민국산토끼노래학교’ 란 표지판이 이색적이다.
산토끼노래동산에는 선생의 흉상과 기념비, 산토끼 노래 외 작사 작곡한 20여곡의 악보가 10여 개의 까만 오석 위에다 새겨 놓았다. 이 노래비를 보면서 이원수선생이 쓴 ‘고향의 봄’은 홍남파 선생의 곡으로 알고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이일래 선생님이 작곡하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엔제적 이산가족 상봉 때 어느 노부가 ‘오빠생각’의 가사처럼 자기 딸들에게 약속한 비단신을 사가지고 온 영상이 다가왔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 노래 또한 1925년에 작곡된 한국의 대표 동요이자 최순애·박태준의 초창기 동요 작품’이라고 실려 있지만 선생이 출간한 ‘조선동요작곡집’에는 산토끼, 고향, 오빠생각 등 동요가 선생님이 작곡한 것이라 한다.

학교 뒤편, 빈 교실에는 이일래선생님의 입상은 오늘도 ‘산토끼 노래’를 지도하고 있다.
교정의 분위기가 온통 봄날의 꽃들처럼 화사하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남지에 그런곳도 있었네요 나는 낚시질 하러 서너번 간적이 있었는데
대구에서 일부러 낚시하러 서너번 갔다면 씨알이 굵은 붕어가 많이 잡히는
좋은 낚시터 였다는 얘기 이지요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의 철로만든 빔을 붉은
페인트로 도색이 되어 있어서 우리들은 赤橋라고 불럿었지요
언젠가 엣날 다리는 낡아서 새로 다리를 노았다던가... 그런 걸 본 것 같았는데...
이렇게 늙었어도 다 아는 童謠 이네요 사실 창녕, 합천, 밀양은 대구 生活圈 인데...
臥雲님 잘 계시죠
늘 글가운데 그 시대의 모습을 담아 주심으로 나도 유심으로 돌아갑답니다
그저 지명이 南旨라 뜻고 모르고 다녔음을 후회합니다
赤橋는 이제 옛날 중국우동집 색으로 변장했고 철교 옆으로 구마고속도로가 놓여 물산 통래에 한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유채꽃이 지면 땅콩을 심을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평강하소서